일곱 교회 중 마지막으로 등장하는 교회는 라오디게아교회입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주님께 한 마디의 칭찬도 듣지 못한 교회였습니다. 주님이 좋아할만한 구석이라고는 거의 없는 교회였습니다. 이 교회는 한 마디로 말해서 차지도 않고 뜨겁지도 않은 교회였습니다. 주님은 말씀했습니다. “나는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한다.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겠다.”(v.16). 이게 무슨 말씀입니까? 미지근한 너를 보면 속에서 구역질이 난다는 것입니다. 참을 수 없을 만큼 혐오스럽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분명하게 확인하고 넘어갈 것이 두 가지 있습니다. 첫째로 라오디게아교회를 말하면서 ‘미지근하다’, ‘차갑다’, ‘뜨겁다’라는 표현을 사용했는데, 이 표현은 사람의 내면의 상태나 영적인 상태뿐 아니라 삶을 대하는 자세나 태도, 그 사람이 삶과 어떤 관계성을 갖고 있는지를 설명하는 비유적 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둘째로 주님은 본래 차가운 것도 원치 않고 뜨거운 것도 원치 않는 분,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는 것을 원치 않는 분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차가운 것은 나쁘고 뜨거운 것은 좋은 것이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그렇지 않습니다. 본래 차가운 것도 문제가 있고, 뜨거운 것도 문제가 있습니다. 주님은 차가운 것도 원치 아니하시고 뜨거운 것도 원치 않으십니다. 그런데 주님이 뭐라 했습니까? 네가 차갑기라도 하고, 뜨겁기라도 하면 좋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차가운 것도 문제가 있고, 뜨거운 것도 문제가 있지만 미지근한 것보다는 차라리 그 쪽이 더 낫겠다고 말씀하신 겁니다.

그렇다면 생각해봅시다. 미지근한 것이 도대체 어떤 것이기에 주님이 그렇게 혐오하셨을까요? 우선 차가운 것과 뜨거운 것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내면이 차갑다 - 삶을 태하는 태도가 차갑다는 것은 자기에게 많은 것이 결핍되어 있고,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고는 있는데 알면서도 더 이상 어떤 것도 소망하지 않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다시 말하면 자신의 실패 속에 철저하게 갇혀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 있지요? “나 이대로 살다 죽을래. 나 절대 건드리지 마.”라고 선언하는 사람. 찬바람이 휙휙 붑니다. 이런 사람은 어떤 변화, 어떤 가능성에도 문을 열지 않습니다. 모든 가능성의 문을 아예 잠가 놓고 자신의 실패 속에 나뒹굽니다. 존재와 삶이 완전히 차단되어 있습니다. 존재와 삶이 소통하지 않습니다. 그 결과 존재가 굳어져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내면이 차가운 상태입니다.

 

반대로 내면이 뜨겁다 - 삶을 대하는 태도가 뜨겁다는 것은 모든 가능성의 문을 활짝 열어 놓은 상태를 가리킵니다. 다시 말하면 무한한 가능성을 믿고, 쉬지 않고 전진하며 행동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맡겨만 줘. 나 뭐든 할 수 있거든.” 이렇게 떠드는 사람. 세상만사가 자기 없으면 안 될 것처럼 모든 일에 나서는 사람. 이런 사람은 열망이 강합니다. 열정이 활화산처럼 치솟습니다. 존재가 삶을 향해 활짝 열려 있고, 의욕과 자신감이 넘칩니다. 할 수만 있으면 삶 전체에 자기 존재의 팔을 내뻗으려고 합니다. 행위가 존재를 앞지르는 거지요. 결국 행위가 존재를 소멸시킬 위험이 많습니다.

이처럼 내면이 차가운 사람은 존재와 삶이 지나치게 닫혀있어서 문제고, 내면이 뜨거운 사람은 존재와 삶이 지나치게 열려있어서 문제입니다.

반면에 내면이 미지근하다 - 삶을 대하는 태도가 미지근하다는 것은 연 것도 아니고 닫은 것도 아닌 상태를 가리킵니다. 실패 안에 갇혀 있는 것도 아니지만 원하는 것도 없는 상태, 다시 말하면 생활의 결핍이나 존재의 결핍을 거의 느끼지 못하는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나 이대로 좋아. 내가 뭘 더 바라겠어? 더 바라면 욕심이지.” 이러는 사람. 자신에게 부족한 것이 무엇인지도 알지 못하고 갈망하거나 소망하는 것도 없는 애매한 상태, 자기 삶에 대해서 부족할 것도 없고 채울 것도 없는 모호한 상태, 현재 상태에 그리 만족하지도 않으면서 변화를 위한 노력도 기울이지 않는 상태, 뭐 이런 상태가 미지근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결국 미지근하다는 것은 죽었다고도 할 수 없지만 살았다고도 할 수 없는 상태, 죽은 것도 아니고 산 것도 아닌 아주 기이한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라오디게아교회가 바로 그런 상태에 빠져 있었습니다. 사데교회는 살았다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교회였고, 빌라델비아교회는 작은 능력을 가지고도 신앙을 지키고 승리하는 살아있는 교회였습니다. 하지만 라오디게아교회는 죽은 것도 아니고 살아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살았지만 살았다고 할 수 없고, 그렇다고 죽었다고도 할 수 없는 참으로 기이한 상태에 빠져 있었습니다. 마이클 윌코크는 요한계시록을 강해하면서 미지근한 것을 일컬어 이렇게 말했습니다. “교회가 빠질 수 있는 최악의 상태”라고. 주님이 라오디게아교회를 보면서 토해낼 것 같은 역겨움을 느낀 걸 보면 윌코크의 말이 크게 잘못된 말은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여러분, 교회가 무엇입니까? 교회는 주님의 몸입니다. 길이고 진리이실 뿐만 아니라 생명이신 분의 몸입니다. 그런데 부활 생명의 몸인 교회가 미지근함에 빠졌습니다. 죽은 것도 아니지만 살아있는 것도 아닌 상태에 빠져 있습니다. 교회가 빠질 수 있는 최악의 상태에 빠져 있습니다. 왜 일까요? 왜 생명의 공동체인 교회가 반생명적인 미지근함에 빠진 것일까요? 주님은 한 마디로 말씀합니다. 부유하기 때문이라고.

고고학적 발견에 의하면 라오디게아 도시는 매우 부유한 금융 도시였다고 합니다. 주후 40년에 이 도시가 지진으로 파괴된 적이 있었는데, 그때 도시 재건을 위해 로마가 제공하는 경제적인 지원을 거절했을 정도로 경제력이 탄탄한 도시였다고 합니다. 유명한 의사들도 많았고, 눈병을 치료하는 안약으로도 유명세를 날렸다고 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라오디게아교회 역시 매우 부유했으리라는 것은 충분히 짐작이 가는 일입니다. 라오디게아교회 스스로도 그걸 인정했습니다. 자기들은 부자라고,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고(V.17) 자화자찬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라오디게아교회가 부유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라오디게아교회는 그 부유함 때문에 교회가 빠질 수 있는 최악의 상태에 빠졌습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부요함이라는 걸림돌에 넘어졌습니다. 이것은 라오디게아교회뿐 아니라 모든 인간에게도 해당되는 진리입니다. 사람은 대부분 부유하기를 열망하고 꿈꾸며 부자를 부러워하고 존경하기까지 합니다만, 부유란 본디 유익보다는 해가 많은 물건입니다. 호박이 덩굴째 굴러들어오듯이 돈다발이 운 좋게 굴러들어온다 하더라도 내던져야 할 만큼 위험천만한 것이 돈다발입니다. 사실입니다. 돈다발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심각하고 치명적인 재앙을 만들어 냅니다. 부유는 삶을 흐느적거리게 합니다. 영혼을 어둠에 빠뜨립니다. 인간성을 파괴합니다. 지금 이 시간에 한 번 상상의 실험을 해보십시오. 여러분이 큰 부자가 되었다고 상상을 해보십시오. 그리고 여러분이 어떻게 되는지 살펴보십시오. 지금보다 삶이 흐느적거리고, 영혼이 어두워지고, 인간성이 괴팍스러워지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겁니다. 부자가 타락하지 않고 아름다운 인간성과 맑은 영혼을 유지할 가능성이란 그리 크지 않습니다. 부자가 신앙의 진정성을 잃지 않을 가능성이도 그리 크지 않습니다. 물론 약간의 부유까지도 다 해롭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만 지나친 부유는 반드시 삶과 생명을 집어 삼킵니다. 절대 권력만 절대 부패하는 게 아닙니다. 절대 부유도 절대 부패하게 되어 있습니다.

주님이 부유한 라오디게아교회를 향해서 뭐라 말씀했습니까? 너희는 곤고하고 가련하고 가난하고 눈멀고 벌거벗었다고 말씀했습니다. 이 말씀을 뒤집어서 생각하면 이렇게 됩니다. 너희가 곤고하고 가련하고 가난하고 눈멀고 벌거벗게 된 것은 부유하기 때문이다. 옳습니다. 매우 놀라운 역설이지만 그게 사실입니다. 부유하기 때문에 인간성이 가난해지는 것입니다. 부유하기 때문에 삶이 가련한 신세로 전락하는 것입니다. 부유하기 때문에 무거운 짐에 시달리는 것이고, 부유하기 때문에 눈이 어두워지는 것입니다. 부유하기 때문에 삶이 벌거숭이가 되는 것입니다. 옳습니다.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렵다,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쉽다(마19:23-4)고 말씀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결코 빈말이 아닙니다.

라오디게아교회는 부유함 때문에 생명력을 잃었습니다. 부유함 때문에 간절함을 잃었습니다. 부유함 때문에 미래를 잃었습니다. 부유함 때문에 소망을 잃었습니다. 부유함 때문에 영혼과 마음과 삶이 미지근해졌습니다. 부유함 때문에 진리와 정의에 대해 둔감해졌습니다. 사실입니다. 이미 배가 불렀는데 어떻게 진리를 추구할 수 있겠습니까. 이미 배가 불렀는데 어떻게 의를 추구할 수 있겠습니까. 이미 배가 불렀는데 어떻게 하나님나라를 사모하며 십자가의 길을 갈 수 있겠습니까. 이미 배가 불렀는데 어떻게 미지근해지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바울이 말했습니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라고(딤전6:10). 옳습니다. 돈을 사랑하는 것에서 만 가지 악이 발생합니다. 세상에서 벌어지는 모든 악들을 살펴보십시오. 다 돈을 사랑하는 것 때문에 벌어지는 일들입니다.

그런데 오늘 그리스도인들과 교회는 성경 말씀을 너무 가볍게 취급합니다. 예수님과 바울이 심각하게 경고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목회자와 그리스도인들은 요동하지 않습니다. 다들 부유하기를 꿈꾸며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도 많이 부유해졌습니다. 오늘 한국교회는 라오디게아교회와 같습니다. 작은 교회들은 대형교회들을 바라보면서 상대적인 박탈감에 어찌할 줄을 모르고, 대형교회들은 넘치도록 부유해서 어찌할 줄을 모릅니다. 부족한 것이 없다고 좋아하며 하나님의 축복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실상은 어떻습니까? 부자 교회와 부자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노래하고는 있지만 실상은 곤고하고 가련하고 눈멀고 벌거벗었습니다. 수치로 가득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은 넘치는데 하나님나라의 것은 빈약하기 이를 데 없고, 힘은 넘치는데 약함의 능력은 없습니다. 교회 안에 세상적인 것, 심리적인 것, 종교적인 것은 넘치는데 하나님의 말씀은 기갈이 심합니다. 오늘 한국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가난해서 문제가 아닙니다. 너무 부유해서 문제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지금 가난한 것이 문제라고 생각하십니까? 물론 가난도 커다란 재앙입니다. 삶의 위협하는 심각한 문제입니다. 그러나 가난보다는 부유가 더 위험합니다. 가난도 생활과 생명까지도 위협하지만 부유는 마음과 생각과 영혼과 근원적 생명까지도 위협하기 때문입니다.

라오디게아교회는 부유함 때문에 곤고하고 가련하고 가난하고 눈멀고 벌거벗은 교회였습니다. 하나님의 옷을 입지 않은 교회, 하나님의 눈을 뜨지 못한 교회였습니다. 주님이 토해내고 싶을 만큼 혐오스럽고 역겨운 교회였습니다. 하지만 라오디게아교회는 정작 그 실상을 알지 못했습니다. 부유함에 취한 채 자기들이 가난하고 가련하고 곤고하고 벌거벗었다는 것을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부족한 것이 없다고 긍정적으로만 생각했습니다. 긍정의 눈으로만 보았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부유함이 낳는 가장 큰 재앙입니다. 모든 것을 경제로만 보는 경제 외눈박이, 경제 외적인 요소는 도무지 볼 줄 모르는 경제 외눈박이, 그래서 경제가 좋으면 다 좋다고 외치는 것이야말로 부유한 사회와 부유한 사람들이 빠지는 가장 큰 오류이고 재앙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몸담고 있는 자본주의 사회가 바로 경제 외눈박이 사회입니다. 경제 외에는 다른 눈이 없는 사회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지금 매우 위험한 사회에 살고 있습니다.

그런 라오디게아교회를 향해 주님은 말씀했습니다. “내가 너를 권한다. 너는 내게서 금을 사서 진정한 부자가 되어라. 내게서 흰 옷을 사서 벌거벗은 수치를 가려라. 내게서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진정 보아야 할 것을 보라.”(V.18). 무슨 말씀입니까? 경제적인 부유함에 갇혀 있지 말라는 것입니다. 경제 외눈박이에서 빠져 나오라는 것입니다. 경제 외눈박이를 벗어버리고 하나님나라의 눈을 뜨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자본주의 사회의 눈을 벗어야 합니다. 자본주의 사회의 눈을 벗어야 하나님나라의 눈으로 온 세상과 삶을 볼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놀라운 사실 하나가 있습니다. 주님은 라오디게아교회 문 밖에 서서 두드리고 계십니다. 주님의 음성을 듣고 문을 열라고 문 밖에 서서 두드리고 계십니다. 교회의 머리이신 그분이 교회 밖에 서 계십니다. 교회 안에 계시지 않고 교회 밖에 서 계세요. 라오디게아교회는 주님 머물 곳이 없는 교회였습니다. 주님 없는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사실은 주님께서 그런 교회를 내치지 않으셨다는 사실입니다. 주님은 여전히 그 교회를 바라보시며 문 밖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문을 열라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을 것이라고(V.20). 이처럼 주님은 주님 없는 교회까지라도 사랑하셨습니다. 한 편으로는 너를 토해 내겠다고 말씀하시면서도 동시에 포기하지 않으시고 계속 문을 두드렸습니다. 그들 속으로 들어가 함께 하기를 원하셨습니다. 사랑의 소통을 하기를 원하셨습니다. 일곱 교회 중 가장 비참한 교회에게 문을 열라고, 함께 먹자고 구걸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문밖에 서서 문 열어 주기를 기다리는 거지, 그 거지가 바로 교회의 머리이신 우리 주님이십니다.

주님은 오늘도 우리를 그처럼 사랑하십니다. 주님 뜻대로 살지 못하고, 손 안에 쥔 작은 성취에 안주하며 그분을 내쫒고 있는 우리를 포기하지 아니하시고 문 밖에 서서 두드리고 계십니다. 제발 문을 열라고. 함께 먹고 마시자고. 사랑의 소통을 하자고. 나와의 소통이 막히면 너는 소망이 없으니 더 이상 너 자신 안에 갇혀 있지 말라고. 그래요. 교회 자체로는 소망이 없습니다. 그리스도인 자체로는 소망이 없습니다. 하지만 주님이 문을 두드리고 계시기 때문에 교회는 회복될 수 있고, 우리의 내일도 달라질 수 있습니다. 주님이 포기하지 않으시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여전히 회개의 가능성, 변화의 가능성이 열려 있습니다. 진실로 그렇습니다. 주님만이 우리의 가능성입니다. 주님만이 교회의 가능성입니다. 오직 주님만이 세상의 희망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