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년 전 오늘, 그러니까 2009년 5월 12일은 아들과 나에게 매우 특별한 날이다.

그 날 아들은 죽어가는 애비를 살리겠다며 건강한 간의 일부를 떼어내기 위해,

나는 굳어진 간을 떼어내고 아들의 간 일부를 이식받기 위해 아침 일찍이 2시간의 시간차를 두고 차례로 수술대에 올랐다.

그리고 아들은 8시간, 나는 11시간을 수술대 위에 널브러져 있었다.

그 날 수술실은 분명히 태양 같이 밝은 조명이 밝혀있었을 것이다.

여러 의사와 간호사들은 긴장의 끈을 놓지 못한 채 분주했을 것이다.

건강한 생명은 지켜내야 하고,

위태롭게 꺼져가는 생명의 촛불은 되살려내야 하는 수술인 만큼 수술팀 전체가 빈틈없이 매달렸을 것이다.

또 수술실 밖에서는 홀로 남은 아내, 그리고 형제들과 여러 지인들이 초조한 마음으로 기도하며 결과를 기다리고 있었을 것이다. 정녕 그랬을 것이다.

우리 부자를 둘러싼 환경과 주변의 사람들은 온통 살아있음의 촉각 한 가운데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아들과 나는 주변과는 전혀 다른 상황에 놓여있었다.

아들과 나는 죽음의 시간이라고 밖에는 표현할 길이 없는 무의식 무감각 무의지 상태,

아주 작은 기억 조각 하나도 찾을 수 없는 완전한 어둠의 상태,

모든 의식과 감각이 닫혀버린 기이한 단절의 상태에 빠져있었다.

물론 아들과 나는 분명 살아있었다. 하지만 살아있는 게 아니었다.

죽음 같은 잠이라고 밖에는 표현할 수 없는 의식의 깊은 어둠에 빠져있었다.

의식뿐 아니라 감각과 의지까지도 잃어버린, 그야말로 몸 덩어리일 뿐인 그런 상태에 놓여있었다.

아니다. 사실은 살리고 살기 위해 죽음 같은 단절의 어둠에 빠져야만 했다.

칼을 든 의사에게 모든 것을 맡기는 순한 양이 되어야만 했다. 당신들 맘껏 하시라고 생명을 송두리째 맡겨야만 했다.

만일 무의식, 무감각 무의지의 상태에 묶여 있지 않으면 비명을 지르며 온 몸을 뒤틀어 수술 과정을 방해할 테니까 말이다.

 

그랬다. 그날 아들과 나는 살기 위해 죽음 같은 자리에 있었다.

그런데 오늘은 잘 죽기 위해 열심히 살고 있다.

그날에는 살아있음을 전혀 자각할 수 없었다.

그런데 오늘은 온 몸과 마음과 영혼으로 살아있음을 지각하며 순간의 삶을 만끽하고 있다.

그날에는 수술대에 위에 널브러져 있었는데 오늘은 거리를 활보하고 있다.

그날에는 죽음이 한 뼘이었는데 오늘은 죽음이 저만치에 있다.

그날에는 목회가 희망이었는데 오늘은 나의 현실이 되었다.

그날에는 전혀 상상하지 못했던 분들이었는데 오늘은 교회의 지체로 만나 삶을 소통하고 있다.

그날에는 몸은 부자유했지만 영혼은 자유로웠는데 오늘은 몸은 자유롭지만 영혼은 목회 현실에 묶여 있다.

그날에는 살고 싶다는 오직 한 가지 희망을 바라보며 가난한 마음이었는데 오늘은 여러 희망을 바라보며 마음이 부유해짐으로써 오히려 상대적 가난에 허덕이고 있다.

2년 전 그날과 오늘이 이처럼 다르다. 위대한 반전이다. 그저 한없이 감사할 뿐이다.

 

<2011년 5월 12일 아침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