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가모교회는 여러 가지 면에서 오늘 한국교회에 반면교사가 되는 교회입니다. 버가모는 매우 이교적인 도시였습니다. 도시 전체를 내려다보는 성채 위에 가로가 약 37미터, 세로가 약 34미터나 되는 거대한 제우스 신전이 세워져 있을 만큼 여러 신을 숭배하는 도시였습니다. 오늘 말씀에 보면 ‘사탄의 위’가 있는 곳이라고 했는데, 제우스 신전이 바로 ‘사탄의 위’를 의미한다고 주장하는 자들도 있습니다. 암튼 이 도시는 경제적으로 번창하는 도시이면서 황제 숭배의 중심지였습니다. 아시아에서 최초로 로마 황제에게 바치는 성전을 건축한 황제 숭배의 중심지였습니다. 당연히 모든 시민은 황제 숭배에 참여해야 했습니다. 여러 신전의 제사에 참여하지 않는 것은 반사회적인 행동으로 지목을 받을 만큼 도시 전체가 이교적이고 황제 숭배적인 분위기에 휩싸여 있었습니다.

 

하지만 버가모교회의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은 도시민의 전체적인 분위기에도 아랑곳하지 않았습니다. 전혀 흔들림 없이 예수의 길을 따랐습니다. 황제를 기념하는 축일에 참여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거기에서 나누어주는 고기도 먹지 않았습니다. 아주 확실하게 선을 그은 것이지요. 그랬으니 그리스도인들이 얼마나 많은 고초를 겪었겠습니까. 얼마나 많은 수모를 당했겠습니까. 아주 신실한 그리스도인 안디바가 순교를 당한 걸 보면 다른 사람들도 그 못지않게 심한 고통을 겪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버가모 교회 성도들은 신앙의 정절을 꺾지 않았습니다. 죽음 앞에서도 예수가 왕이시라는 믿음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사람이 어떤 존재입니까? 몇몇 친구들에게 왕따만 당해도 정신적으로 큰 상처를 입는 것이 사람입니다. 사람들이 다들 유행을 쫒아가는 것도 외톨이 되는 게 두려워서입니다. 또 사회적으로 진출할 수 있는 길이 막히면 좌절하고 낙망하는 것이 사람입니다. 조그만 불이익을 당해도 억울해하는 것이 사람입니다.

지금은 비민주적인 악법으로 폐지되었습니다마는 예전에는 우리나라에 연좌제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할아버지나 아버지나 가까운 친척 중에 공산당에 협력했거나 공산당원으로 활동한 자가 있는 경우, 그 자녀들은 연좌제에 묶여 국가공무원이나 공적인 자리에 오를 수가 없었습니다. 군부 독재 시절에는 반정부 활동을 하지 못하게 하려고 시위 경력이 있는 사람은 대학을 졸업해도 취업을 할 수 없도록 정부가 길을 막았습니다. 이처럼 정치적인 이유 때문에 불이익을 당하는 일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버가모교회 성도들은 신앙 때문에 그런 불이익을 당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가는 길을 가지 않는 것 때문에 왕따를 당하기도 했고, 출세 길이 막히는 불이익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심지어는 죽음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들은 주님을 믿는 믿음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바보처럼 굳굳하게, 현실을 초월한 것처럼 의연하게 좁고 협착한 믿음의 길을 갔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요? 바울이 그 배경을 잘 설명해 줍니다. 고린도후서 4장7-9절을 봅시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박해를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로마서 8장에서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그분이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어떤 어려움이라도 넉넉히 이긴다(롬8:37). 그렇습니다. 주님께 받은 사랑이 너무 크기 때문에, 주님이 보배중의 보배이기 때문에,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최고의 보배이기 때문에,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에 도시민 모두로부터 따돌림을 당하고, 출세 길이 막히고, 박해를 받고, 생명의 위협을 당해도 주님을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예수 때문에 손해 보는 것을 감수할 수 있었습니다.

저들은 예수로 충분했습니다. 예수 때문에 현실적으로 이익 되는 게 아무 것도 없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와 바꿀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저들은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습니다. 예수 안에서 종말론적인 구원의 풍성함을 보았습니다. 예수 안에서 존재의 의미를 발견했습니다. 예수 안에서 권력의 허망함과 세상의 작음을 보았습니다. 예수 안에서 진정으로 두려워할 것이 무엇인지를 알았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저들은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한없이 약함에도 불구하고 한없이 강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의 신앙을 돌아봅시다. 오늘 우리의 신앙은 어떻습니까? 만일 우리가 버가모교회와 같은 상황에 처한다면 어떻게 처신할 것 같습니까? 예수를 따르는 것 때문에 주위 사람들로부터 왕따를 당하고, 친구들이 멀어지고, 직장을 구하기가 어렵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주일 예배를 드리는 것 때문에 직장에서 승진을 못하고 직장을 잃게 된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예수로 인해 복을 받기는커녕 불이익을 당한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예수 때문에 핍박을 당하고 소중한 것을 잃는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래도 예수를 따르겠습니까? 예수 안에 있는 것들을 붙잡겠습니까?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나라를 바라보며 믿음의 길을 신실하게 가겠습니까?

물론 지금 우리사회는 예수를 따르는 것 때문에 손해 볼 일이 거의 없는 사회입니다. 손해 보는 것보다는 덕 볼 일이 많은 사회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대통령도 하고, 장관도 하고, 국회의원도 하고, 높은 자리를 많이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연줄을 만들기 위해서라도 교회를 찾는 자들이 있을 정도입니다. 성공한 자들 중에도 예수 믿는 자들이 참 많습니다. 그래서인지는 모르겠으나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잘 믿으면 성공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믿고 성공과 축복을 쫒아 예수를 믿는 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실 성공이나 축복과는 관계가 없는 분이십니다. 그분은 세상적인 성공이나 축복을 베풀기 위해서 오신 분이 아닙니다. 성공이나 축복을 위해 일하시는 분도 아닙니다. 그분이 진정으로 관심 갖는 것은 오직 우리 자신입니다. 하나님나라입니다. 우리를 하나님나라 백성으로 세우는데 관심이 있지 세상에서 성공시키는데 관심이 있지 않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를 하나님나라 백성으로 세우기 위해 때로는 축복도 사용하시지만 때로는 고난도 사용하시고 아픔도 사용하십니다. 성공도 사용하시지만 실패도 사용하십니다. 사실 성공과 실패 그 자체가 그렇게 중요한 건 아닙니다. 정말 중요한 건 우리 자신입니다. 예수 안에서 드러난 인간됨을 우리 안에 얼마나 담느냐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그런 면에서 보면 버가모교회 성도들은 질그릇같은 그들의 존재 속에 보배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담고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들 안에 보배이신 예수가 숨 쉬고 있었기 때문에 죽음의 위협 앞에서도 예수를 저버리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성도들이 다 그랬던 건 아닙니다. 버가모교회 안에도 발람의 죄를 짓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발람의 죄가 무엇인지를 살펴보려면 상당히 복잡한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발람은 본래 브올의 아들로서 메소포타미아 지방에서 상당히 인정받는 선지자였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집트를 떠나 가나안으로 들어갈 때 아모리 사람들을 쳐서 정복했다는 소식이 주변 족속들에게 전해지자 이스라엘과 맞닥뜨린 모압 왕 발락은 바짝 긴장을 했습니다. 자기들도 이스라엘에게 먹힐까봐 심히 번민했습니다. 그러는 중에 소문난 선지자 발람을 초청했습니다. 민수기 22장에서 25장을 보면 그 이야기가 복잡하게 전개되는데, 발락 왕이 발람을 청하기 위해 복채를 푸짐하게 주었습니다. 부와 명예까지도 약속했습니다. 그야말로 당근을 주면서 삼고초려를 했습니다. 목적은 딱 하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저주하라는 것이었습니다. 당신이 복을 비는 자는 복을 받고, 당신이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줄을 내가 아노니 이스라엘을 저주하라는 것이었습니다(22:6).

 

그러나 발람은 ‘그들과 함께 가지도 말고, 이스라엘 백성을 저주하지도 말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가지 않습니다(22:12). 그러자 발락이 두 번째로 사람을 보내 더 큰 대가를 지불하겠다면서 초대했습니다. 하지만 발람은 여전히 거부했습니다. 발락 왕이 그 집에 가득한 은금을 줄지라도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어겨 덜하거나 더하지 못하겠다며 거부 의사를 표했습니다(22:18). 그러나 여지를 남겨 둡니다. 하나님이 무슨 말씀을 더하실지 알아보자면서 하룻밤을 지내는데, 그 날 밤에 하나님이 발람에게 가라고 허락을 했습니다. 단, 하나님이 이르는 말만 준행하라는 조건을 달았습니다. 결국 발람은 모압 왕에게로 갔습니다. 하지만 가서도 이스라엘을 저주하지 않았습니다. 저주하기는커녕 도리어 축복을 했습니다. 이처럼 형식적으로만 보면 발람이 뭘 잘못했는지가 잘 안 보입니다. 발람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내용적으로 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발람은 바로 이어서 나오는 25장의 사건과 연관이 있는 게 분명합니다. 민수기 25장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압 여자들과 음행하기 시작했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모압 여자들이 바알 신들에게 제사할 때에 이스라엘의 남자들을 청하여 바알 신에게 절하게 하고, 먹고 마시게 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본래 바알 제사는 여사제들과 제사에 참여한 남자들이 성관계를 하는 것으로 피날레를 장식하는 것이 관례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바알 제사에 초청받아 간 이스라엘 남자들이 모압 여자들과 행음을 한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었을 겁니다. 그리고 그 일 때문에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진노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루에 2만 4천명이 염병으로 죽는 대재앙이 발생했습니다.

 

물론 민수기 자체만 보면 이 사건이 발람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다고 단정하기는 어렵습니다. 하지만 다른 말씀을 참고해 보면 민수기 25장의 사건과 발람이 연관되어 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우선 민수기 31장에 가면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스라엘의 원수를 미디안에게 갚으라는 말씀을 하시는데(1절), 그때에 브올의 아들 발람도 죽입니다(8절). 또 미가 선지자는 민수기 22장에서 25장의 사건을 한 묶음으로 묶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모압 왕 발락이 꾀한 것과 브올의 아들 발람이 그에게 대답한 것을 기억하며 싯딤에서부터 길갈까지의 일을 기억하라”(6:5).

신약에서도 그렇습니다. 베드로후서 2장 1-3절, 15-16절을 보십시오. 여기서 베드로는 발람이 불의의 삯을 사랑했다고 말하고, 하나님이 나귀를 통해 그의 미친 짓을 금지했다고 말합니다. 사도 요한은 발림의 죄를 구체적으로 진술하고 있습니다. “발람이 발락을 가르쳐 이스라엘 자손 앞에 걸림돌을 놓아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였고, 또 행음하게 하였느니라”(2:14). 유진 피터슨은 “그가 발락을 부추겨 사악한 잔치를 열고, 이스라엘의 거룩한 순례길을 방해했던 자”라고 표현했습니다. 이처럼 요한은 발람과 민수기 25장의 사건이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렇습니다. 발람은 영리하게도 이스라엘을 무너뜨릴 수 있는 비책을 알았습니다. 죄를 짓게 하는 것이야말로 이스라엘을 무너뜨릴 수 있는 최상의 길임을 알았습니다. 발락이 사람을 뽑기는 제대로 뽑은 거지요. 많은 대가를 지불했지만 헛되지 않았습니다. 베드로가 말한 것처럼 발람은 불의의 삯을 사랑했습니다. 그래서 결국에는 발락에게 이스라엘을 무너뜨릴 수 있는 비밀을 가르쳐 주었고, 발락은 발람의 가르침대로 이스라엘 남자들을 바알 제사에 청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도 요한의 해석이 옳습니다. 발람은 이스라엘 자손 앞에 걸림돌을 놓은 자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넘어뜨린 자였습니다. 하나님이 두려워 형식적으로는 이스라엘을 저주하지 않고 축복했지만 내용적으로는 자기의 이익을 위해 모압 왕 발락과 내통한 자였습니다. 자기 이익을 위해 진리를 판 자였습니다.

 

바로 이것이 거짓 선지자들의 특징입니다. 여러분, 거짓 선지자라고 해서 빤한 거짓말을 일삼지는 않습니다. 거짓 선지자들도 형식적으로는 진리를 말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말합니다. 하지만 내용적으로 보면 사탄과 내통합니다. 형식적으로는 진리를 말하는 것 같지만 속에는 이익을 탐하는 욕망이 작동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의 유익을 위해 진리를 말하는 게 아니라 자신의 이익을 위해 말합니다. 진리를 가지고 자기 이익을 추구하고, 자기 이익을 위해 진리를 팝니다. 거짓 선지자들에게 진리는 순명해야 할 삶의 길이 아닙니다. 자기 이익을 위한 도구일 뿐입니다. 물론 거짓을 말하는 자들도 거짓 선지자입니다. 진리를 비틀고 왜곡하는 자들도 거짓 선지자입니다. 그러나 한 차원 높은 거짓 선지자는 진리를 도구화하는 자입니다. 진리를 이용해서 자기 이익을 도모하는 자야말로 정말 영리한 거짓 선지자입니다. 발람이 바로 그런 자였습니다.

 

발람 같은 자들은 언제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이용해서 자기 이익을 추구하는 자들, 양을 탈을 쓴 이리는 언제나 있습니다. 오늘 한국교회 안에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성도들의 욕망을 부채질하는 자들, 긍정의 힘을 역설하며 축복을 남발하는 자들, 이런 자들을 조심해야 합니다. 그런데 성도들은 대부분 양과 같이 순진하기 때문에 거짓 선지자들을 잘 분별하지 못합니다. 영적으로 성숙한 자가 아니면 거짓 선지자들의 가르침을 분별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거짓 선지자들의 가르침을 옳은 줄 알고 따르는 자들이 있습니다. 거짓 선지자에게 이용당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버가모교회에도 그런 자들이 있었고, 지금 한국교회에도 그런 자들이 있습니다.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뿐 아닙니다. 버가모교회에는 우상 숭배를 일삼는 니골라 당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도 있었습니다. 앞서 말한 것처럼 그 당시 버가모는 우상 숭배와 황제 숭배의 중심지였기 때문에 우상숭배는 반사회적인 행동이 전혀 아니었습니다. 시민 누구나 참여하는 지극히 일상적인 행위였습니다. 지극히 현실적인 행위였습니다. 오늘날 티브이를 보고 자동차를 타는 것이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처럼 그 당시의 버가모에서는 우상을 숭배하는 것이 지극히 자연스런 일이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에게 우상 숭배를 권고하는 것이 도덕적으로나 종교적으로 그렇게 악한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또 그렇게 주장하는 자들을 따라서 ‘그리스도인도 사회적인 존재이지 않느냐? 사회적인 존재로서 사회적인 행위를 하는 게 뭐가 문제냐?’라고 생각하는 자들이 있었을 가능성도 매우 많습니다. 실제로도 버가모교회 안에는 홀로 왕이신 하나님을 예배하면서도 눈앞의 현실과 대세를 따라 우상을 숭배하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결국 니골라 당의 교훈을 지켰다는 것은 사회적인 현실과 대세를 받아들인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대세를 따르는 것을 크게 문제시 하지 않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볼 때 오늘 한국교회 안에도 니골라 당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많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입니다. 세상의 현실과 대세를 크게 문제 삼지 않고 따라가는 자들이 많습니다. 교회가 세속화되었다고 말하는 게 다 그런 겁니다.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의 현실과 대세를 따라가는 것, 그게 바로 세속화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한국교회 안에는 발람과 같은 거짓 선지자들이 활보하고 있습니다. 또 니골라 당과 같이 눈앞의 현실과 대세를 그대로 따라가는 세속주의자들도 많습니다. 신앙의 순전함을 꼴통 보수와 동일시하면서 주님께 매이지 않는 자들이 많습니다. 예배를 상대화하는 자들도 있고, 교회를 거부하고 능멸하는 자들도 있습니다. 물론 일차적인 책임은 목회자에게 있습니다만, 오늘 우리의 신앙이 순전함을 잃은 것은 분명해보입니다. 마음 깊이 회개해야 할 것입니다.

 

버가모교회는 순교적인 신앙을 가진 자들이 있는 교회였습니다. 믿음의 절개를 지키는 순전한 자들이 있는 교회였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발람의 교훈과 니골라당이 교훈을 지키는 자들도 있는 교회였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중요한 진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같은 신앙을 고백해도 예수가 보배라는 것을 진정으로 아는 신앙과 형식적으로만 아는 신앙은 이처럼 결과가 다르다는 사실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의 사랑에 토대를 둔 신앙과 예수를 믿으면 복 받는다고 하니 믿는 신앙은 같은 신앙이 아닙니다. 예수에게 생명을 거는 신앙과 예수를 복의 통로로 생각하는 신앙은 결코 같은 신앙일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처럼 다른 신앙이 버가모교회 안에 공존하고 있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현실적인 교회의 모습입니다. 참된 신앙을 가진 자들로만 똘똘 뭉친 교회는 지상에 없습니다. 교회 안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뒤섞여 있습니다. 밀과 가라지, 양과 이리, 진짜와 가짜가 뒤섞여 있습니다. 뒤섞여 있는 것이 교회입니다. 그리고 뒤섞임을 통해서 진짜를 연단하는 것, 가짜를 통해서 진짜를 세워가는 것이 하나님의 지혜요 섭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