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신앙의 중심은 성 삼위 하나님이 창조주이시며 구원자이시라는데 있다.

성경의 모든 이야기 또한 창조주 하나님이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행하신 일의 계시이다.

리고 이것은 매우 중요한 진실 하나를 암시한다.

우리가 경험하는 인간과 세상의 현실이 정상이 아니라는 것. 구원이 필요할 만큼 문제가 심각하다는 것. 그것도 도덕, 정치, 철학, 교육, 종교를 통해 극복할 수 있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창조주께서 나서지 않으면 결코 회생될 수 없을 만큼 깊은 수렁에 빠져 있다는 것.

 

그렇다. 세상의 근원적인 문제는 바로 구원이다.

사람들이 다들 풍부한 소비를 위한 생산 경쟁, 더 많은 부의 축적을 위한 경제 전쟁에 몰두하고 있지만 사실상 모든 시대의 중심 문제는 언제나 구원이었다.

아담 이래로 지금까지 온 세상은 단 한 번도 구원의 필요성으로부터 해방되었던 적이 없다.

물론 사람마다 인식의 차이가 없는 건 아니지만 인간과 모든 피조물에게 구원은 언제나 타는 목마름이었다.

세상의 창조자요 사랑이신 하나님께서는 구원을 부르짖는 세상의 곤경을 외면할 수 없으셨다.

세상의 신음소리에 귀를 막을 수 없으셨다.

하여, 하나님께서는 몸소 구원 외에는 희망이 없는 세상 속으로 들어오셨다.

아예 구원의 대상인 인간이 되셨고, 죽음이라는 인간의 운명에 함께 하셨다.

하지만 성부 하나님께서는 성자 예수님을 죽음에서 부활시킴으로써 생명의 주, 구원의 길이 되게 하셨다. 그렇다. 예수의 존재, 예수의 사건이 곧 구원이며, 우리는 믿음으로 예수 안에 있는 구원, 예수로 말미암은 구원에 참여하게 되었다.

 

옳다. 믿음은 구원으로 들어가는 문이다. 구원의 방편이다.

하지만 믿음이 구원의 방편이기만 해서는 안 된다.

구원을 얻는 방편으로만 작동하는 믿음은 타락한 욕망의 도구일 뿐이며, 그런 믿음으로는 예수님 안에 감추어진 구원을 결코 담보할 수 없으니까 말이다.

구원이 무엇인가? 죽어서 천국 가는 것이 구원인가? 그렇지 않다.

하나님과의 소통이 열리는 것, 단절된 생명의 그물망이 다시금 연결되는 것이 구원이다.

지금 여기서 하나님나라를 보고, 그 나라에 속한 삶을 연습하는 것이 구원이다.

물론 이 땅에서는 구원을 온전히 경험할 수 없지만 부분적으로나마 죄악의 권세로부터 해방되고, 하나님나라의 자유에 참여하는 구원의 맛보기는 할 수 있어야 한다.

다시 말해 구원은 오늘의 부분적 현실이어야 한다.

오늘의 현실이 아닌 내세의 구원, 천국행 티켓을 확보하는 정도의 구원은 예수님 안에 있는 구원이 아니다. 그런 구원은 죽음을 두려워하는 자들이 원하는 종교적인 상품(천국 보장보험)일 뿐이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의 실제적인 믿음생활을 들여다보면 진정한 구원에의 참여보다는 구원 상품을 구매하는 것으로 만족해하는 것 같다.

구원이 내세의 희망과 보장으로만 자리할 뿐 오늘의 삶을 일깨우는 하나님의 손길이 되지는 못하는 것 같다.

이런 믿음의 현실은, 믿음이 구원의 방편으로 전락했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렇다. 구원의 방편으로 전락한 믿음으로는 하나님의 구원으로까지 나아갈 수 없다.

우리의 믿음은 구원의 방편을 넘어 하나님과 소통하는 삶의 통로, 하나님나라의 참여로 나아가는 길이 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