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데교회는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교회입니다. 메시지 성경에서는 “원기 왕성한 것(being alive)으로 유명하다만, 그러나 실은 죽은 자다. 돌처럼 죽어 있다.”고 풀어 설명했습니다. 이 교회는 말 그대로 원기가 왕성하기로 유명한 교회였습니다. 무기력한 교회가 아니라 매우 활력있는 교회였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고, 다른 교회들도 아마 그 교회를 매우 활기 넘치는 교회로 인정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만은 그 교회가 살아있는 교회가 아니라 죽은 교회라고 말씀했습니다. 객관적으로 보면 매우 활력있고 역동적인 교회를 가리켜 죽은 교회라고 말씀하신다는 게 사실 이해가 잘 안 됩니다.

하지만 그 이유는 2절이 말해줍니다. 이것저것 하는 일은 많은데 하나님께 인정받을 만한 행위가 없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생각하는 기준에 미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기독교적인 삶은 넘치는데 그리스도 안에서 사는 삶이 없다는 것입니다. 사실 ‘기독교적인 삶’과 ‘그리스도 안의 삶’은 비슷해 보입니다. 인간의 눈으로 보면 구별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 둘은 명백히 다릅니다. ‘기독교적인 삶’이란 문화적인 기독교에 불과한 것으로서 그리스도의 부활 생명에 기초한 것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생명이 없는 종교적 행위(흉내내기)에 불과한 것입니다. 무늬는 기독교이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사는 삶은 없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7장 20-23절 말씀을 생각하면 왜 주께서 사데교회를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너희는 죽었다고, 생명이 없다고 말씀하셨는지가 충분히 이해됩니다.

 

예수님의 이런 진단은 좀 더 보편적인 삶의 지평으로 확대해도 틀리지 않습니다. 행위와 삶의 관계에 대입시켜 봅시다. 행위와 삶은 떨어질 수 없는 상관관계가 있습니다. 행위 없이 삶은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행위와 삶의 관계는 매우 역설적입니다. 행위는 넘치는데 삶은 죽을 수 있습니다. 쉬지 않고 매우 다이내믹하게 활동함에도 불구하고 삶은 생명의 근원에서 단절될 수 있습니다. 물론 행위가 곧 살아있음의 징표라고 생각하는 자들은 쉽게 동의하지 않을 것입니다. 동분서주하며 열심히 살고 있는데 죽었다는 게 말이 되느냐고 반문할 수도 있습니다. 성경도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주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라야 반석 위에 집을 짓는 것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사실입니다. 행위가 따르지 않는 말보다 더 기만적이고 허망한 일은 없습니다. 행위야말로 말의 진실성을 담보하는 첩경입니다. 그러나 삶이라는 게 꼭 그렇게 되지 않습니다. 정열은 뜨겁고, 에너지는 넘치고, 행위도 넘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상은 죽은 것일 수 있는 게 사람이요 삶입니다.

 

세계 3대 천재인 김웅용씨(49세) 이야기 - 여성동아 2011년 5월호

7살 때 IQ 210을 받은 그는 미국 NASA의 초청으로 미국으로 갑니다. 가서 일주일에 3일은 서부 콜로라도주립대 대학원에서 물리학 공부를 하고, 3일간은 동부 휴스턴 NASA 연구소에서 연구를 하며 생활했습니다. 그렇게 9년간을 아는 사람 하나 없는 미국 땅에서, 그것도 먼 거리를 오가면서 공부와 일을 병행하는 생활을 했습니다. 콜로라도대학에서 핵물리학과 열물리학을 공부한 그는 NASA의 연구소에서 이를 바탕으로 강력한 무기를 개발하는 데 투입돼 폐쇄된 연구소 생활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런 생활에 견딜 수가 없어서 18살 때 말도 하지 않고 한국에 왔다가 다시는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청주에서 대학 생활을 시작했는데, 그는 이 대학생활이 지친 인생의 빛이었다고 말합니다. 대학에서 처음으로 친구라는 존재를 알았고, 그것이 너무 행복했다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성취(업적)와 행위가 곧 삶으로 연결될 것 같지만 꼭 그런 건 아닙니다. 행위가 삶을 살아나게도 하지만 행위가 삶을 죽게도 합니다. 우리 한국사회를 보십시오. 우리는 지난 50년 동안 쉬지 않고 달려왔습니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밤을 낮처럼 살고 있습니다. 다들 근본은 성찰하지 않고 뛰기에 바쁩니다. 서로 비교하기에 정신이 없고, 남에게 뒤지지 않기 위해 행동하기에 급급합니다. 도무지 멈출 줄을 모릅니다. 그야말로 발바닥에 땀이 나도록 불철주야 뜁니다.

그런데 우리의 삶의 실상은 어떠합니까? 다들 열심히 뛰기는 하는데 다들 죽음 같은 고통에 시달리고 있지 않습니까? 생명의 뿌리에서 단절되어 부평초와 같이 흐느적거리고 있지 않습니까? 영혼의 신음을 하다가 자살하는 자들이 늘어나고 있지 않습니까? 나는 이런 한국사회를 행동 과잉 사회, 욕망 과잉 사회라고 정의하고 싶습니다. 한국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도 사회처럼 행동 과잉, 욕망 과잉입니다. 지나치게 프로그램이 많고, 집회가 많고, 모임이 많고, 활동이 많습니다. 목회자들은 새벽부터 밤까지 쉴 틈이 없습니다. 정말 분주하게 초인적인 활동을 합니다. 그렇게 열심히 뛰는 목회자들을 보면 입이 떡 벌어집니다. 경외감이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원기 왕성한 사데교회를 향해 주님이 뭐라 했습니까. 죽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그렇게 계속 행위에만 매달리면 살아날 수 없다고 경고하지 않았습니까. 사실입니다. 쉬지 않고 달리는 것보다 더 어리석고 멍청한 짓은 없습니다. 제가 3주 전부터 헬스를 시작했습니다. 처음 시작할 때 코치가 말하더군요. 같은 운동을 10회 정도 하고는 쉬어 주어야 한다는 겁니다. 잠시 2-3분 정도 쉬었다가 다시 해야 운동이 제대로 된다는 겁니다. 그래요 몸의 근육도 멈춤이 중요합니다. 멈추지 않으면 근육이 단련되기보다는 파열되어 버립니다. 무엇이든 마찬가지입니다. 쉬지 않고 공부하는 것 결코 좋지 않습니다. 쉬지 않고 감정을 쏟아내는 것 결코 좋지 않습니다. 일이든, 공부든, 감정이든 반드시 적절한 때에 멈추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창조행위의 마지막이 무엇이었습니까? 안식이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도 6일 동안의 창조 행위 다음에 안식하셨습니다. 우리도 주일에 멈추어야 합니다. 공부도 멈추고, 일도 멈추고, 운동도 멈추고, 감정도 멈추어야 합니다. 멈추어야 다시금 할 수 있습니다. 멈추어야 새롭게 나아갈 수 있습니다.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행동한다(달린다)는 것은 욕망에 사로잡혀 있다는 증거입니다. 욕망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멈추지 못하는 것입니다. 내가 멈추면 멈춘 그 시간만큼 다른 사람이 앞서 간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멈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실은 멈춤이야말로 삶을 잃지 않으면서도 전진할 수 있게 하는 참으로 지혜로운 길입니다.

 

멈춘다는 것은 근본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근본이신 하나님에게 내 삶의 뿌리, 내 생명의 뿌리를 내리는 것이 멈춤이고, 지나온 삶의 자태를 성찰하는 것이 멈춤입니다. 멈춤은 단지 정지하는 게 아닙니다. 멈춤의 시간은 생명과 삶이 농익는 숙성의 시간입니다. 인격이 다듬어지는 성화의 시간입니다. 그런데 사데교회는 이처럼 소중한 멈춤의 시간이 없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머무는 시간이 없었습니다. 자신의 원기 왕성함만을 믿고 행동하는 걸 멈추지 않았습니다. 아니, 멈출 줄을 몰랐습니다. 과잉 행동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근본이신 하나님에게 깊이 뿌리내리지 않은 채 기독교적인 생활에만 몰두했습니다. 그래서 원기 왕성하다는 명예는 얻었지만 실제적으로는 과잉 행동으로 인해 죽음의 나락에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이런 사데교회를 향해 주님은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네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고 지켜 회개하라.”(v.3).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라고 했습니다. 오래된 기억을 반추하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근본을 성찰하라는 것입니다. 근본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 삶은 근본적으로 받은 것에 근거해 있다는 것입니다. 내 앞에 주어진 모든 것, 내 삶의 모든 것, 다 받은 것들입니다. 은혜로 베풀어진 선물들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받지 않는 게 뭐가 있습니까? 거의 없습니다. 주님은 사데교회에게 바로 이 진실, 네가 어떻게 받았는지 그 근본을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둘째, 삶은 들음에서 나온다는 것입니다. 듣는 것이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지만 인간은 근본적으로 들어야 사는 존재입니다.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을 들어야 살 수 있는 존재입니다. 사실입니다. 인간은 행위하는 존재이기 이전에 들음의 존재입니다. 들음이 없는 행위는 삶으로 연결되지 못하고 죽음으로 흘러갑니다. 그러기 때문에 주님은 사데교회에게 네가 어떻게 받았는지, 어떻게 들었는지를 잠잠히 생각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덧붙였습니다. 그것(받은 것과 들은 것)을 붙잡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욕망을 붙잡지 말고, 하나님께 받은 것, 하나님께 들은 것을 붙잡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서라(회개)고 말씀하셨습니다. 만일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주께서 도적같이 들이닥칠 것이라고 경고하셨습니다.

 

물론 모든 자들이 그런 건 아니었습니다. 사데교회에는 믿음을 더럽히지 않은 자 몇이 있었습니다. 신앙의 중심에 들어간 자, 신앙의 순전함을 잃지 않은 자가 소수지만 있었습니다. 주님은 그들에게 약속했습니다. 흰 옷을 입고 주님과 함께 다닐 것이라고. 그 이름이 생명책에서 지워지지 않을 것이라고. 그래요. 주님은 그들에게 이 땅에서의 승리나 부유를 약속하지 않으셨습니다. 권세를 약속하지 않으셨습니다. 건강이나 영광을 약속하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이 약속하신 것은 의의 옷과 생명이었습니다. 주님의 의로움에 참여하는 영광, 죽음을 이긴 부활 생명에 참여하는 영광이었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별 것 아니라고 생각되시나요? 현실 생활에 별 도움이 안 되는 것이라고 생각되시나요? 그렇지 않습니다. 의로움과 생명은 가장 소중하고 가장 위대한 보물 중의 보물입니다. 모든 피조물들이 갈망하며 고대하는 것도 사실은 다른 게 아닙니다. 바로 의로움과 생명입니다. 의로움과 생명이 없기 때문에 온 세상이 지금과 같은 요지경 세상이 된 것이고, 고통하며 신음하는 것입니다. 의로움과 생명은 세상 어디에도 없습니다. 온 세상을 다 얻어도 그 안에 의로움과 생명은 없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도덕적으로 깨끗하게 살고, 종교적으로 거룩하게 산다 해도 그 안에 의로움과 생명이 있지는 않습니다. 의로움과 생명은 오직 주님 안에 있습니다. 주님만이 의로움이고, 주님만이 생명입니다.

 

주님은 사데교회를 통해서 교회 자체의 원기 왕성함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고 말씀하십니다. 교회 자체의 열심이나 기독교적인 행위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정말 교회를 살리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를 생각하고 그것을 붙잡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씀하십니다. 받은 것과 들은 것이 중요하다고 말씀하십니다. 받은 것과 들은 것을 붙잡고 지키는 자가 의로움과 생명을 얻는다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의 말씀을 들은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행위는 매우 중요한 삶의 일부분입니다. 하지만 행위에 삶이 달려 있는 건 아닙니다. 물론 행위가 우리 자신을 감동시킬 수는 있습니다. 우리 자신을 설득시킬 수는 있습니다. 나는 지금 괜찮게 살고 있다고, 나는 지금 잘 살고 있는 것이라고 우리 자신을 설득할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행위만 가지고 주님을 설득할 수는 없습니다. 주님 안에 뿌리내리지 않은 모든 행위는 죽음의 빌미만 될 뿐이지 거기에서 의로움과 생명이 나오지는 않기 때문에 주님은 우리의 행위에 설득되지 않으십니다. 우리의 행위에 감동받지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최선을 다하며 열심히 살되, 열심히 사는 것으로 여러분 자신을 설득하려 하지 마십시오. 열심히 사는 것으로 여러분 자신을 위로하려 하지 마십시오. 열심히 신앙생활 하는 것 가지고 주님을 설득하려 하지 마십시오. 사데교회가 원기 왕성하기로 유명한 교회였지만 실상은 죽은 교회였음을 잊지 말고 신앙의 중심인 예수 그리스도를 붙잡으십시오. 여러분의 의로움과 생명은 여러분의 행위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여러분의 의로움과 생명은 주님으로부터 나오고, 주님 안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