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복잡계다. 얽히고설킨 실타래와 같아서 풀어가는 게 쉽지 않을 뿐 아니라 읽는 것조차도 용이하지가 않다. 사실 삶을 읽기 위해서는 깊이 있는 관찰과 진득한 성찰이 요구된다. 관찰과 성찰이 없으면 관습과 소문과 편견이 일상을 지배하게 되고, 그렇게 되면 물이 손가락 사이를 빠져나가는 것처럼 삶도 일상의 틈을 빠져나가게 된다. 하여, 생각이 있는 이들은 삶을 붙잡기 위해 삶읽기를 해왔다. 그것이 바로 인문학이다. 사실 인문학은 복잡계인 삶을 읽기 위해 오랜 세월동안 수행해 온 가장 인간적인 학문이라 할 수 있다. 철학자 서동욱은 인문학의 중심인 철학의 미덕을 일컬어 “철학은 한 번도 삶을 배신한 적이 없다. 그것은 생명을 죽음으로 이끌지 않으며 죄의식 같은 마음의 감옥을 짓지도 않는다. 우리를 비루한 존재로 비추어주는 무서운 단죄의 거울도 아니다. 한 마디로 철학은 천진한 학문으로서, 그저 삶을 온전히 살도록 만든다.”(철학 연습. 8쪽)고 말했다. 옳다. 인문학은 삶을 정직하게 바라보고 온전하게 살아내고자 하는 인간적인 욕망의 아름다운 표출일 뿐 아니라 삶을 배반하고 거역하며 해체하는 온갖 허위와 싸우는 삶을 향한 날선 비평이다.

 

하지만 인문학에는 삶을 정직하게 들여다보고 비평하며 북돋는 미덕에도 불구하고 넘어설 수 없는 한계가 있다. 인문학은 본디 역사적 인식과 과학적 인식의 틀 안에 머물기 때문에 인문학만으로는 삶을 온전하게 읽어낼 수도, 살게 할 수도 없다. 삶이 무엇인가? 삶은 본디 생명의 들숨과 날숨이다. 하나님의 생기를 호흡하는 것이 생명이라면, 그 생명이 자기의 숨을 쉬는 것이 곧 삶이다. 그 무엇에도 휘둘리지 않고 자기로서 존재하는 것이 곧 삶이다. 이 생명과 삶은 사람이 계획하거나 관리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생명과 삶은 사람의 손이 닿지 않는 곳에서 피어나는 은총이요 포착되지 않는 신비이다. 하나님은 지금도 생명나무를 인간의 손이 닿을 수 없도록 지키고 계신다. 때문에 인문학은 가장 우호적인 삶의 친구임에도 불구하고 삶을 온전히 살도록 만들기에는, 삶의 신비를 포착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게 사실이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 가운데에는 인문학을 섭취하는 것이 마치 신앙의 우매함을 극복하는 면류관인양 생각하며 인문학적 지성으로 신비와 은총의 영역인 신앙의 세계, 생명과 삶의 세계를 판단하는 자들이 있다. 물론 신앙의 이름으로 인문학을 거부하자거나 매도하자는 게 아니다. 신앙과 신학은 언제든 인문학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인문학을 거부하는 신앙은 왜곡되거나 일탈하기 쉽고 인식의 지평도 좁아질 수밖에 없기 때문에 신학은 언제나 자연과학과 인문학에 귀 기울여야 한다. 신앙의 신비 속에만 갇혀 있는 신앙은 삶을 살리기보다는 죽이는 독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많다. 사실이다. 세상에서 독단적인 것처럼 위험한 것은 없다. 하지만 인문학의 잣대로 신앙이나 신학을 판단하는 것도 매우 위험한 일이다. 믿음의 인식은 역사적 앎과 과학적 앎을 포함하면서도 초월하는 것이기 때문에 인문학적인 눈으로 신앙적 인식을 판단하는 건 무리다. 아주 엄밀하게 말하자면, 인문학적 교양과 문화의 세례를 받은 기독교는 주님의 생명에 참여할 수 없는 기독교라고 해야 옳다. 일면 세련되어 보이고, 교양 있어 보이고, 합리적인 측면이 매력적으로 다가올 수도 있지만 본질의 차원에서 보면 무늬만의 기독교일 뿐 예수의 몸이라 할 수는 없다.

 

나는 인문학에 열린 신앙과 신학은 환영한다. 하지만 인문학에 종속된 신앙과 신학은 강력히 거부한다. 신앙과 신학은 인문학적 교양, 즉 역사적 인식과 과학적 인식을 초월하는 믿음의 인식론으로만 들어갈 수 있는 새로운 앎의 세계이니까. 또한 마땅히 인문학적 교양을 넘어 생명의 깊이로 나아가야 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