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부터 산다는 일에는 뭔가를 사고 파는 행위가 동반했었다. 생활에 필요한 것은 여러 가지인데 비해 자가생산 능력은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사람은 예부터 사고 파는 거래행위를 해왔다.

하지만 지금의 자본주의 사회에서처럼 판매와 구매만이 전부인 비인격적인 거래는 아니었다.

거래는 삶의 전부가 아닌 일부였으며, 삶과 문화를 교류하는 미덕이기도 했다.

 

그런데 지금은 다르다. 생활이 온통 거래다.

생필품뿐 아니라 지식과 예술도 거래의 대상이 되었고, 사람도 예외가 아니다.

능력에 따라 연봉에 차이가 나는 건 당연하고, 내 가치를 흥정하는 연봉 협상이 더 이상 낮선 풍경이 아니다. 우리의 생활도 그렇다. 아침에 일어나면 제각각 자기 능력을 판매하러 일터(직장)로 나가고, 저녁이 되면 생필품을 구매하거나 여가의 즐거움을 소비하는 것으로 하루를 마감한다.

진실로 그렇다. 지금 이 시대는 모든 것을 판매하고 구매하는 것을 넘어 모든 것을 판매해야만 살 수 있는 시대, 모든 것을 구매해야만 살 수 있는 시대다.

글을 써도 팔리지 않으면 의미가 없고, 그림을 그려도 팔리지 않으면 평가받지 못하는, 그야말로 모든 가치가 시장에 의해 결정되는 시장 중심의 질서가 지배하는 시대다.

우리는 지금 판매자이자 소비자로 살아간다. 판매와 구매는 거의 절대적인 생활양식이 되었다.

 

그리스도인의 신앙생활도 마찬가지다.

신앙생활이 하나님의 뜻을 묻고 찾는 구도의 과정, 구원에 걸맞은 삶을 연습하는 성화의 과정, 하나님나라의 지상 식민지인 교회 공동체의 지체가 되는 연합의 과정이기보다는 영적인 자기만족을 위한 일종의 영적인 구매 행위로 전화(轉化)되어 가고 있다.

그리스도인들이 대형 교회를 선호하는 것도 소비자들이 대형 마켓을 선호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대형 마켓의 소비자는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고 필요한 것을 구매할 수 있는 자유로움과 편안함만을 원한다. 가게 주인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을 필요도 없고, 가게 주인에게 신실할 필요도 없으며, 의무와 책임을 공유할 어떤 이유도 없다. 단지 편안하게 거래를 하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대형 교회의 신앙생활도 마찬가지다.

대형 교회에서는 익명성에 묻혀 영적인 쇼핑을 맘 편하게 할 수 있다.

누구의 간섭이나 제재도 받지 않고 맘 편하게, 그것도 대접을 받아가면서 신앙생활 할 수 있다.

소비자의 권리를 성실하게 누리기만 해도 환영받을 수 있도록 시스템이 완비되어 있기 때문에 내 영혼의 필요를 채우는 것 외에는 딱히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물론 대형 교회만의 문제는 아니다.

교회의 크기와 상관없이 그리스도인의 대다수는 영적인 소비자를 자처하고 있다.

정말 교회에도 소비자 주권시대가 교회에도 도래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은 교회의 소비자로 전락해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인은 교회의 지체로 존재해야 하며, 왕 같은 제사장으로 세상 앞에 서야 한다.

소비자의 편리함과 편안함, 간섭받지 않는 개인의 자유로움에 안주하는 것은 영적인 기생(寄生)이며, 구원의 은총을 배신하는 반역이다.

 

그리스도인은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신 것은 세상으로부터가 아니라 세상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일에 참여하게 하기 위함임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