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사랑채에 올라온 “오산에서 대안적 교회로 예배를 드린다”(6월19일자)는 기사를 읽었다. ‘sinsa’라는 닉네임으로 기사를 올린 분은 친가와 외가 모두 3대째 예수를 믿는 믿음의 가문 출신이었고, 5년 정도의 담임목회 경험도 있는 40대 중반의 목회자였다. 태어나면서부터 교회와의 관계를 끊을 수 없는 환경에서 자란 그는 한 번의 외도도 없이 신앙 안에서 성장해 목사가 되었다고 한다. 적어도 30대 중반까지는 교회가 그의 삶의 전부였다고 한다. 그런 그가 교회를 사임하고, 1년 정도의 휴지기를 지내다가 50대 중반의 목사님 가정, 미국에서 40년간 목회하고 은퇴하여 한국에 오신 목사님, 몇 분의 성도님들과 함께 오산의 모 카페에서 예배를 드리게 된 배경은 이랬다. 교회 개척을 하여 안정이 되어가는 5년 차에 접어들자 목회가 점점 기존 교회의 틀 안에 안주해 들어갔고, 그런 상황에서 아무리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고 외쳐 보아도 속이 시원치 않았다고 한다. 결국 그런 방식으로는 목회를 계속 할 수 없다고 판단해 교회를 사임했고, 1년이 지난 지금(2011년 6월 19일) 다시 카페에서 예배를 시작했다고 한다. 예배를 시작한 그와 그들이 바라는 것은 오직 하나였다. 사기 치지 않고 바르게 예배드리고 살아보는 것.

 

나는 이 기사를 읽고 마음이 가시에 찔린 듯 아팠다. 바르게 예배하며 살기 위해 교회를 사임해야 하는 현실이 너무 마음 아팠다. 그리스도인이 어떤 사람인가? 교회의 지체가 되는 것과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을 어떤 이유나 명분으로도 부정할 수 없는 자가 바로 그리스도인 아닌가? 교회의 지체됨과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야말로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을 구분하는 가장 현실적이면서도 근본적인 잣대가 아닌가? 그렇다. 하나님을 예배하지 않는 그리스도인이란 상상할 수 없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순교를 당한 것도 교회의 지체가 되는 것과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을 절대 포기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국교회는 지금 이 둘 모두 위기에 처해 있다. 오늘날 교회의 예배는 조롱과 멸시의 대상이 되어버렸다. 피조물의 굴복이 없는 예배, 세상의 가치관을 주님의 이름으로 공인해주는 예배, 종교적 욕망을 소비하는 상품이 되어버린 예배, 눈에 보이는 것에 지배당한 예배, 견뎌내야 하는 인내의 훈련장이 되어버린 예배에 그리스도인들마저 등을 돌리고 있다. 사실이다. 그리스도인으로서 마땅히 예배해야 하기에 예배를 드리기는 하지만 예배를 드리면 드릴수록 고통만 가중되는 신앙생활을 반복하는 자들이 적지 않다. 하나님의 말씀을 정직하게 선포하는 예배 공동체를 찾아 떠도는 순례자들, 예수는 믿지만 교회는 등지는 자들이 적지 않다. 물론 아직은 소수에 불과하다. 예배를 찾는 자들보다는 예배를 때우는 자들 · 예배를 감상하는 자들 · 예배 참여에 의미를 부여하는 자들이 훨씬 많고, 예배를 위해 목숨을 거는 자는 자칫 바보 취급을 받거나 박물관 대접을 받기 일쑤일 만큼 예배가 상대화되어버린 것이 사실이다. 예배를 위해 목숨을 건다는 건 순진했던 시절의 옛이야기로만 회자되고 있다. 하지만 예배에서 예배를 찾지 못하는 자들이 적지 않은 것 또한 부정할 수 없는 교회의 현실이다.

이처럼 부끄럽고 슬픈 교회의 현실 속에서 목사가 예배드리며 살기 위해 교회를 사임했다는 것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예배를 찾아 교회를 떠나야 하는 기막힌 역설이 마음 아프기도 했지만, 참 예배에 굶주린 영혼의 표상을 보는 것 같아 반갑기도 했다. 동시에 두렵고 떨리기도 했다. 나는 진정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인지, 온전한 예배를 위해 담임목사를 사임할 수 있는지, 예배를 드리기 위해 카페를 찾는 몸부림을 할 수 있는지, 말씀샘교회의 예배는 과연 어떠한지 심히 두렵고 떨렸다. 하지만 그 두려움과 떨림 속에서 또다시 희망을 붙든다. 예배를 찾아 나서는 자들이 많아지기를. 예배에 목숨 거는 자들이 많아지기를. 예배를 위해 교회를 떠나고, 예배를 위해 교회를 세우는 자들이 많아지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