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사람은 일을 한다. 세상에는 수많은 직업이 있고, 직업마다 제각각 담당해야 할 직무가 일정하게 정해져 있다. 한 나라를 통치하는 대통령이나 세계 문제에 개입하는 유엔 사무총장도 그 직무가 정해져 있고, 동물원의 동물 관리사도 그 직무가 정해져 있다. 직무뿐 아니다. 그 직무를 어떤 방법으로 수행하는 것이 좋은지에 대한 매뉴얼도 대부분 정해져 있다. 외과 의사는 외과 의사로서, 미용사는 미용사로서, 전기 기술자면 전기 기술자로서 직무와 관련된 매뉴얼이 정해져 있다.

 

그런데 목사의 직무 수행은 좀 다르다. 목사가 하는 일은 주로 예배드리고, 설교하고, 성경을 가르치고, 성도를 돌아보고, 교회 운영을 하고, 전도와 선교를 하는 것이지만 그 모든 일의 중심에는 언제나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신비의 존재인 사람이 있다. 목사의 직무는 단순히 설교하는 것이 아니다. 단순히 심방하는 것이 아니다. 단순히 교회 운영하는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하면 의사가 환자를 수술하듯, 대통령이 정책을 결정하듯 어떤 과업을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목사의 직무는 하나님과 사람의 다리를 놓는 것이고, 사람 자체와 관련되어 있다. 보험을 팔거나 인생을 코칭하는 것처럼 사람을 상대로 어떤 일을 하는 것과는 그 성격이 전혀 다르다. 사람의 존재와 삶 전체가 뒤섞여 있다.

 

때문에 직무 수행 매뉴얼을 만든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또 매뉴얼이 있다 해도, 모든 목사들이 하나의 매뉴얼로 직무 수행을 해낼 수는 없다. 텔레비전은 고장의 원인이 몇 가지로 정해져 있고, 몸의 질병도 대체적으로 그 원인이 의학 교과서에 나와 있지만 사람의 인격과 영혼은 다르다. 같은 문제라 해도 사람마다 문제의 배경이 다르고, 사람마다 처방에 대한 반응도 다르기 때문에 목사의 손에 있는 매뉴얼로는 직무를 충분히 수행할 수 없다. 사람의 영혼과 인격과 삶이 관련된 일을 텔레비전 수리하듯 할 수 없고, 육체의 질병을 치료하듯 할 수는 없다. 그렇게 하는 것은 영혼을 모독하고 짓밟는 것이지 영혼을 돌보는 것이 아니다. 진실로 그렇다. 영혼의 일을 직무 수행하듯 해서는 안 된다. 목사의 직무가 어려운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직무를 수행할 정답 매뉴얼이 없다는 것, 항상 새롭고 분명치 않은 일을 만나야 한다는 것, 아무리 일을 잘 해냈다고 해도 모호함을 떨칠 수 없다는 것, 직무 자체가 다른 모든 직무와는 성격이 다르다는 것, 세월이 가도 직무를 숙련할 수가 없다는 것 등등이 바로 목사 직무의 어려움이다.

 

그런데 현대인은 이런 어려움에 익숙지 않다. 모호함을 견디지 못하고, 매뉴얼이 없으면 아무 것도 하지 못한다. 목사도 예외가 아니다. 현대의 목사들은 대부분 목사 직무 매뉴얼, 교회 운영 매뉴얼에 관심이 많다. 목사의 직무 매뉴얼을 만드는 자들도 많다. 전도 매뉴얼, 제자 훈련 매뉴얼, 성경공부 매뉴얼, 교회 운영 매뉴얼, 당회 운영 매뉴얼, 심방 매뉴얼, 설교 매뉴얼, 내적 치유 매뉴얼, 상담 매뉴얼 등등 여러 가지 ‘목사 직무 매뉴얼’이 만들어지고 있고, 잘 만들어진 매뉴얼은 각종 세미나를 통해 유통되고 있다.

 

조금만 생각해보면 이 모든 일들이 우스꽝스럽기 짝이 없는 일인데도 불구하고 목사 직무 매뉴얼이 활발하게 유통되고 있다. 심지어 설교 예화와 각종 설교문을 공급하는 업체까지 등장했다. 이것은 뭘 말해주는가? 오늘의 목회가 방법론으로 떨어졌다는 것을 말해준다. 목회가 일종의 종교적인 직무, 교회 운영의 직무로 인식되고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목사 자신도 스스로를 교회 성장의 책임을 지고 있는 자(교회 성장의 엔진을 가동시키는 자)로 인식하고 있고, 성도들도 목사를 청빙할 때 인격이나 영적인 깊이를 보지 않고 교회를 효과적으로 성장시킬 수 있는 능력을 최우선으로 꼽는다. 기업의 최고 경영 책임자(CEO)를 뽑는 것과 별반 다를 게 없다.

 

교회란 본래 하나님나라의 지상 식민지로서 가시적인 결과물로는 평가할 수 없는 기관이다. 세상에 속해 있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말씀에 묶여 있는 곳, 세상이 추구하는 것과는 다른 차원을 추구하고 세상이 운영되는 방식과는 다른 방식으로 존재해야 하는 곳, 모든 것이 사람의 손에 좌우되지 않는 곳, 그래서 세상에서는 그 유(類)를 찾을 수 없는 독특한 기관이다. 그런데 지금은 종교적인 업무를 처리하는 사회적 기관으로 전락해버렸다. 목회는 직무 매뉴얼을 따라 하는 업무, 결과를 통계로 수치화하고 평가하는 업무가 되어버렸다. 유진 피터슨은 교회가 목사의 손에 들어와 버린 현실을 경기장에 비유하였다. “교회는 우리의 일이 되고, 우리가 하는 일이 된다. 예수님을 통해서 이미 자신을 내어 주신 하나님은 이제 경기장 밖으로 물러나시고, 우리가 전면에 나선다. 간혹 우리는 하나님과 상의하기 위해 작전 타임을 요청한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우리가 나서서 한다.”(유진 피터슨. 188쪽). 그렇다. 교회는 이제 목사의 일터가 되어버렸다.

사태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오늘날 목사는 단지 일을 하기만 해서는 안 된다. 끊임없이 새로운 일을 만들어 내야 한다. 쉬지 않고 공장을 가동시켜야만 이득을 낼 수 있고, 새로운 상품을 개발해야만 경쟁에서 뒤처지지 않을 수 있는 기업의 오너처럼 목사도 교회를 성장시키기 위해서는 성도들을 최대한 자원화 해야 하고, 성도들을 자원화 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일과 프로그램을 쉼 없이 공급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교회의 역동성을 유지하기가 어렵고, 이내 곧 성장의 한계에 직면할 것이기 때문에 목사는 좌우간 새로운 일을 만들어내고, 새로운 프로그램을 개발하지 않으면 안 되는 코너에 몰리고 말았다. 이것은 오늘날 교회와 목사가 피하고 싶어도 피할 수 없는 운명 같은 것이 되어버렸다.

 

물론 새로운 일과 프로그램 경쟁에서 승리한 몇몇 교회들은 성장이라는 짜릿한 결실을 풍성하게 거두고 있다. 하지만 사람이 많을수록 진실은 줄어들고, 일과 프로그램이 많을수록 인격은 사라진다는 것은 영원히 변할 수 없는 진실이다. 일과 프로그램이 많아지면 교회의 에너지가 극대화되기는 하겠지만, 성도는 교회의 자원으로 동원되는 운명을 피하기 어렵고, 목사는 매뉴얼적인 업무 추진자로 전락하게 되고, 교회는 종교 기업으로 퇴락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교회의 비극이다. 교회의 승리를 위해 교회의 본질을 팔아먹는 타락이요 죄악이다. 교회를 사회적인 기관으로 전락시킨 죄악, 목회를 세속의 업무로 탈바꿈시킨 죄악이다. 유진 피터슨은 이런 교회의 현실을 보면서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신 영혼들을 숫자나 프로젝트나 자원으로 대하는 것은 내게 성령을 거역하는 죄처럼 여겨졌다.”고 일갈했다.

 

그렇다면 묻자. 왜 이 지경이 되었을까? 왜 교회와 목사의 직무가 인격적인 관계성에서 멀어지고 기능적으로 탈바꿈한 것일까? 왜 목회가 방법론이 되어버린 것일까? 그 근본 원인은 의외로 단순한 데 있다. 모든 일에는 매뉴얼이 필요하다는 단순한 생각, 또 매뉴얼이 없으면 아무 것도 하지 못하는 습성에 길들여졌기 때문이다.

교회와 목회는 본래 일정한 직무 매뉴얼이 작동할 수 없는 신비와 은총의 영역이다. A를 투입하면 항상 B가 나오는 물리의 세계하고는 다르다. 똑같은 A를 투입했는데도 B가 아니라 C가 나올 때도 있고, D가 나올 때도 있고, E가 나올 때도 있다. 어떤 원리도 무용지물인 세계가 바로 교회와 목회의 세계다. 인간의 세계라는 게 본래 그렇다. 그런데 직무의 모호성을 견디지 못하는 자들이 정답 매뉴얼을 찾아 나섰고, 자본주의적 육감을 가진 자들이 재빨리 필요를 간파하고 매뉴얼을 만들어 유통시키는 민첩함을 보였으며 목회 매뉴얼 시장은 엄청나게 커졌다. 목사들은 점차 매뉴얼에 익숙해졌고, 매뉴얼에 익숙해진 목사들은 교회와 목회의 본질인 신비와 은총에서 방법론으로 완전히 눈을 돌리고 말았다. 바로 이것이 교회와 목회를 신비와 은총의 본령에서 방법론으로 내몰게 한 가장 큰 원인이다.

 

오늘의 목회를 가만히 들여다보라. 다들 방법론에 목을 매달고 있다. 대부분의 목사들이 방법론 배우기에 정신이 없다. 성도들을 자원화하고 동원하는데 정신이 없다. 설교도 하나님의 말씀을 정직하게 선포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성도들을 움직이는 일종의 심리 전술이 되어버렸다. 이렇게 목회는 방법론이 되었고, 목사는 업무 수행자가 되었다. 그리고 목회가 방법론으로 떨어지면서부터 목사는 바쁜 사람이 되었다.

 

목사가 바쁜 것은 죄다. 신비와 은총의 영역에 발을 들여놓고 있는 목사는 일을 처리하는 자가 아니라 삶을 관찰하는 자로 살아야 한다. 성도 개개인을 깊이 바라보아야 하고, 엉망진창인 사건과 상황을 세밀하게 관찰해야 하고, 명확하지 않은 하나님의 손길을 읽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잠잠해야 한다. 조용히 하나님 앞에 머물러야 한다. 삶의 깊이를 응시하고, 카이로스의 순간을 포착해야 한다. 그럴 때 목사는 하나님의 말씀을 증언하는 역할, 하늘의 눈으로 삶을 이야기하는 역할을 제대로 해낼 수 있다.

 

성도는 바쁜 목사를 경계하는 게 좋다. 더 솔직하게 말하면, 바쁜 목사를 떠나는 것이 영적으로 유익하다. 바쁜 목사는 목사가 아니다. 업무를 수행하는 자는 목사가 아니다. 그런 자는 교회를 운영하는 자일뿐 진정한 의미의 목사는 아니다. 목사가 교회를 운영하는 자로 사는 것은 목사가 피해야 할 죄악 중에 가장 무서운 죄악이다. 목사는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신비의 존재인 사람 사이를 조율하고(물론 목사의 능력으로 조율하는 것은 아님), 사람의 영혼과 인격과 세상의 어둠이 복잡하게 얽혀 있는 삶을 열어 보여주는 자로 소박하게 존재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