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지금 충격적인 자살 소식이 꼬리에 꼬리를 무는 세상을 살고 있습니다. 온 국민을 경악케 했던 전직 대통령의 자살을 비롯해서 젊은 연예인들의 잇단 자살, 그리고 ‘행복전도사’를 자처했던 최윤희 씨의 자살까지, 그야말로 자살이 일상의 뉴스가 되어버린 참으로 우울한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지난 9월 통계청이 발표한 자료에 의하면 우리나라의 20대 사망자 4051명 가운데 44.6%인 1807명이 자살로 목숨을 잃은 것으로 집계되었습니다. 하루에 5명 정도가 스스로 목숨을 끊고 있는 겁니다. 10대의 경우는 전체 사망자 가운데 29.5%가 자살입니다. 인생의 아름다움을 채 피워보지도 못한 청소년들이, 세상과 인생의 어떠함을 아직은 충분히 경험하지 못한 젊은이들이 삶의 가벼움과 무거움의 신비를 채 알기도 전에 꽃보다 아름다운 인생과 목숨을 짓밟고 있습니다.

지난 10년간 한국인의 자살률도 꾸준히 증가했습니다. 1999년과 2009년을 비교해보면 그 변화를 뚜렷이 알 수 있는데요, 1999년에는 인구 10만 명당 자살률이 15.0%였는데 2009년에는 31.0%로 두 배가 늘었습니다. 특히 2009년의 자살률은 2008년보다 19.3%나 급증했습니다. 물론 자살하는 사람마다 왜 이유가 없겠습니까? 자살하지 않을 수 없는 절박한 상황이 다 있을 것입니다. 자살의 배경을 깊이 들여다보면 가슴 절절한 사연이 없는 자살은 없을 것입니다. 더 이상 삶의 무게를 버텨낼 밑천이 없어서 자살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한 사람만 자기를 알아주고 지지해주어도 용기를 잃지 않을 텐데 세상에 널브러진 자신이 너무 고독하고 외로워서 자살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고통을 이겨낼 자신이 없어서 죽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어떤 희망도 찾을 수 없어서 죽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기 위해 죽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련의 자살 현상에는 어떤 원인이 작용하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자살을 시도하는 원인과 계기야 개인마다 다르겠지만, 많은 사람들이 잇따라 자살하는 오늘의 현상 속에는 일련의 원인이 있다고 생각됩니다. 특히 ‘행복전도사’ 최윤희 씨의 죽음을 보면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자살하는 배경을 조금은 발견할 수 있다고 생각됩니다. 그게 뭘까요? 저는 고통에 대한 두려움과 거부심리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고통에 대한 인식의 변화, 이것이 자살이 급증하는 가장 중요하고 근본적인 배경이라고 생각합니다.

 

행복전도사 최윤희 씨는 평소의 모습답게 왜 남편과 동반자살을 택했는지를 꾸밈없이 유서에 밝혔습니다. 지난 2년 동안 자가면역질환인 루프스라는 질병으로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면서 많이 지쳤다는 이야기, 그래도 감사하고 희망을 붙잡으려 노력했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왜 안 그랬겠습니까. 그분도 얼마나 살고 싶었겠습니까? 당연히 한 가닥 희망을 붙잡으려고 노력했을 겁니다. 그런데 추석 전주에 폐에 물이 찼다는 의사의 선고를 받았고, 숨쉬기가 힘들어 응급실에 실려 가는 상황이 벌어졌고, 연이어 심장에도 이상이 생겼다는 겁니다. 그러자 그녀는 더 이상 희망을 붙들 수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녀는 죽음을 선택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더 이상 링거 주렁주렁 매달고 살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그동안 저를 신뢰해주고 사랑해주신 많은 분들께 죄송 또 죄송합니다. 그러나 700가지 통증에 시달려본 분이라면 저의 마음을 조금은 이해해주시라 생각합니다.”

저는 그분의 죽음을 충분히 이해합니다. 700가지 통증, 그래요, 오죽 두렵고 힘들었으면 죽음을 선택했겠습니까. 그러나 이해한다고 해서 그 죽음을 정당화할 수는 없습니다. 고통이 아무리 두렵고 무섭다 해도 고통 때문에 자살하는 것이 정당화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최윤희씨를 비롯해서 많은 사람들이 고통 때문에 자살을 선택하고 있습니다. 지난 8일 민주당 최영희 의원이 경찰청으로부터 제출받은 ‘원인별 자살현황’ 자료에 따르면 2005부터 2009년까지 5년간 우리나라 자살자 6만7378명 가운데 질병 때문에 자살한 사람이 1만4231명으로 21.9%에 달한다고 합니다. 이 통계가 말해주듯이 오늘날 사람들은 육체적인 질병의 고통과 마음의 고통 때문에 자살하고 있습니다. 고통에 시달리며 살기보다는 차라리 죽음을 선택하고 있습니다.

 

사실입니다. 오늘날 자살이 급증하는 것은 경제적인 어려움이나 지나친 경쟁의 스트레스 때문이기도 하지만 가장 중대한 요인은 고통을 바라보는 눈이 지나치게 부정적이라는데 있다는 것이 저의 판단입니다. 물론 고통을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환영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사람은 누구나 고통을 피하고 싶어 하고, 고통을 최소화하고 싶어 합니다. 고통은 정말 누구에게나 끔찍한 것입니다. 그동안 인류의 문명이 고통을 최소화하는 쪽으로 발전해온 것을 보아도 그렇고, 사람들이 천국을 고통 없는 곳이라고 상상하는 것을 보아도 고통에 대한 인간의 두려움과 공포가 얼마나 심각한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도 인간은 그동안 과학, 의학, 심리학, 정신분석학, 종교, 기술, 복지 등 다양한 방법들을 통해 고통 없는 삶을 추구해왔습니다. 고통 없는 삶을 인류의 이상처럼 생각하며 고통과 두려움을 몰아내기 위해 지난한 싸움을 싸워왔습니다. 그 결과 오늘에 이르러서는 상당한 성과를 일구어냈습니다. 적어도 의학적으로는 신체적인 고통을 몰아내는데 의미 있는 진전을 이루었습니다. 지금은 의학 기술이 발달해서 아무리 어렵고 큰 수술이라도 큰 고통 없이 수술하고 있습니다. 수술 이후에도 통증클리닉 덕분에 심각한 고통에 시달리는 일이 적어졌습니다. 정말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지만 깊이 생각해봐야 할 문제가 있습니다. 고통을 최소화하는 것이 과연 최선일까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고통 없는 삶이 정말 이상적인 삶일까요? 고통이 적어지면 정말 행복할까요? 고통 없는 삶이 정말 우리에게 유익할까요? 물론 단순하게 생각하면, 당연히 고통 없는 삶이 최선이라고 생각됩니다. 고통이 없으면 고통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에서 해방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정말 맘껏 행복을 노래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하지만 삶이란 그렇게 단순하지 않습니다. 삶은 매우 복잡하고 신비합니다. 고통 없는 삶이 매우 유익할 것 같고, 행복할 것 같고, 이상적일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고통 없는 삶은 가능하지도 않거니와 유익하지도 않습니다.

만일 인생에 고통이나 고난이 없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육체적인 고통이건 정신적인 고통이건, 어떤 고통이나 고난도 없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세상만사가 원하는 대로 술술 풀리기만 한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인간과 삶이 어떻게 될 것이라고 생각되십니까? 더 이상 고통에 신음하지 않아도 될 테니까, 정말 인간답고 행복하게 살 것이라고 생각되시나요?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인간으로서의 품위를 지키며 살 것이라고 생각되시나요? 우리 자신을 한 번 들여다봅시다. 만일 나에게 아무런 고통이 없다면 나는 과연 어떤 사람이 될 것 같습니까? 어떤 삶을 살 것 같습니까? 다들 마음에 떠오르는 생각이 있으실 겁니다. 그리고 그 생각들이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시편 기자의 고백과 비슷할 거라고 생각됩니다.

시편 119편의 저자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고난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시119:67). 여기서 시인은 고난 없는 삶이 참 행복했었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때의 삶이 정말 아름다웠고, 반듯했었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고난당하기 전의 삶은 엉망이었다고 고백했습니다. 여러분께서도 아마 같은 생각을 하셨을 겁니다. 내 삶에 고난과 고통이 없다면 나라는 인간, 나의 생활 모두가 엉망일 거라고 생각하셨을 겁니다. 아닌가요? 사람이 어떤 존재입니까?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이 사람의 마음입니다(렘17:9). 사람은 조금만 잘 나가면 금방 교만해집니다. 조금만 숨 쉴 틈이 생겨도 하나님에게서 눈을 떼고, 하나님을 형식적으로 대합니다. 고통과 고난이 없어 보십시오. 사람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신(神)이 됩니다. 특히 현대인을 지배하는 최고의 우상은 ‘자아 우상’입니다. 사람들이 자기 자신에게 집중하고, 자기 욕심에 집착하는 것도 실은 ‘자아 우상’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도 같은 말을 합니다. 하나님이 고통의 매로 인간을 단련하지 않았더니 인간이 어떻게 되었는가 하면, 비열한 정신에, 독기에, 일구이언하고, 참을 수 없는 떠버리들이고, 자기 인생에 방해가 될 때는 부모조차도 버리는 참으로 우둔하고, 비열하고, 잔인하고, 냉혹한 자들이 되었다고 했습니다(롬1:30). 또 그런 인간들이 살아가는 삶에는 악이 들끓고, 욕망의 아수라장이 벌어지고, 악독한 중상모략이 판을 치고, 시기와 무자비한 살인과 언쟁과 속임수가 가득하다고 말했습니다(롬1:29). 사실입니다. 시편 기자가 고백한 것처럼 사람은 고통과 고난을 당하지 않으면 사람이 되기 어렵습니다. 아니요. 되기 어려운 정도가 아니라 아예 될 수 없습니다. 인간적으로 단순하게 생각하면 고통 없는 삶이 매우 바람직할 것 같고, 유익할 것 같고, 이상적일 것 같은데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인간에게 고통 없는 삶보다 더 해로운 것은 없습니다.

 

물론 고통은 결코 선일 수 없습니다. 성경도 고통을 선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고통은 엄연히 죄악의 결과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고통이 꼭 나쁜 것이기만 할까요? 반드시 제거해야 할 혐오스러운 것이고, 불필요한 것이고, 비인간적인 것이기만 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고통이 선일 수는 없지만 고통은 악이지도 않습니다. 아니요. 악이 아닌 정도가 아니라 사실은 유익합니다. 시편 119편의 저자는 말했습니다. “고난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시119:67). 여러분, 이 말이 비록 짧고 간단합니다마는, 이 말 한 마디는 사실 인생의 많은 우여곡절이 담겨 있는 말입니다. 고난이라는 용광로에 몇 번씩 들랑날랑 한 자만이 뱉어낼 수 있는 말입니다. 시인은 자신의 삶이 고난을 통해 조금씩 변화되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고난을 겪을 때에는 뱉어내고 싶을 만큼 쓰고 고통스러웠지만 고난을 겪고 나면, 신기하게도 내면이 성숙해지고 영혼이 맑아지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그러면서 시인은 결국 이해하기 어려운 이 한 마디를 하게 됩니다.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시119:71). 그렇습니다.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역설입니다만, 고난당한 자의 마지막 말은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었다’였습니다. 성경은 심지어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까지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웠다고 했습니다(히5:8). 옳습니다. 고난이 유익하다는 것은 예수님에게도 해당되는 삶의 진실입니다.

 

C.S 루이스는 고통의 문제를 깊이 성찰한 사람입니다. 그런 그가 고통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고통은 귀먹은 세상을 불러 깨우는 하나님의 메가폰”이라고(고통의 문제, 141쪽). 또 이렇게도 말했습니다. “고통은 반항하는 영혼의 요새 안에 진실의 깃발을 꽂는 것”이라고”(144쪽). 정말 정곡을 찌르는 말이라고 생각됩니다. 물론 고통은 분명히 죄의 결과입니다. 고통은 가장 끔찍한 것이고, 불쾌하기 이를 데 없는 것입니다. 할 수만 있으면 영원히 경험하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그런데 죄의 결과인 고통이 죄 때문에 신음하는 세상을 치유하는 치료제 역할을 합니다. 가장 끔찍하고 불쾌한 고통이 죄에 갇힌 인간의 영혼을 깨우는 메가폰 역할을 합니다. 예부터 내려오는 말도 있습니다. 독은 독으로만 풀 수 있다고. 맞습니다. 인간의 죄악으로 인해 주어진 고통도 고통으로만 치유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자연의 섭리요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인간적인 논리로는 이해가 잘 안 되지만 인간의 경험은 그 진실을 말해줍니다. ‘아픈 만큼 성숙한다’는 것은 성경이 말하는 진실일 뿐만 아니라 모든 인간의 경험이 인정하는 진실입니다.

 

그런데 요즘 사람들은 고통은 불필요한 것이고, 원시적인 것이고, 비인간적인 것이라고만 생각합니다. 고통을 당해야 할 이유 같은 건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할 수만 있으면 고통을 제거하려 하고, 무조건 고통을 회피하려고 합니다. 물론 고통을 피하고 싶지 않은 사람은 없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고통을 면제받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하지만 요즘 사람들은 그 정도가 좀 지나칩니다. 고통을 당하며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낫다는 생각이 저변에 확산되어 있습니다. 고통을 끌어안고 사는 것보다 더 어리석은 일은 없다는 생각이 널리 퍼져 있습니다. 그래서 고통스러운 상황을 만나게 되면 ‘차라리 죽어버릴까?’ 하는 생각을 쉽게 합니다. 고통이 견디기 어렵고 두려워서 죽음을 선택하기도 하지만, 고통스러운 삶을 이어가는 것이 별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죽음을 선택하는 경우도 많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경제적인 고통이건 정신적인 고통이건 육체적인 고통이건, 고통의 의미를 발견하지 못하는 생각의 가벼움이 자살을 부추기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고통의 의미라고 하는 것은 가만히 앉아서 발견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고통의 의미는 고통을 겪어내지 않고서는 발견할 수 없습니다. 고통의 의미는 온 몸으로 고통을 겪어낸 자에게만 보이는 매우 특별한 선물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사람들은 고통을 쉽게 제거하는 무통문명에 길들여져 있어서 고통을 직면할 용기도 부족하고, 고통의 의미가 보일 때까지 견뎌내는 지구력도 부족합니다. 그러다보니 많은 사람들이 고통의 의미를 발견하기도 전에 죽음을 선택해버리는 것이 아닌가 하는 안타까운 생각이 듭니다.

 

 

오늘날 자살이 급증하는 또 하나의 요인은 ‘신이 된 자아’ 때문이라고 생각됩니다. 앞에서도 말씀했습니다만, 현대인을 지배하는 최고의 우상은 ‘자아 우상’입니다. ‘신이 된 자아’를 다른 말로 바꾸면 ‘자아 우상’이 되는데, 말이 거창하게 들려서 나는 ‘자아 우상’을 섬기지 않는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만, ‘자아 우상’이라고 하는 건 다른 게 아닙니다. 나 외에는 나를 지배할 어떤 권위나 힘도 인정하지 않는 것이 ‘자아 우상’입니다. 나 외에는 그 무엇도 나의 선택을 강제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 ‘자아 우상’입니다. 그리고 이런 자아 우상에 빠지게 되면, 결국 삶과 죽음까지도 내 선택 사항이라는 생각을 자연스럽게 하게 됩니다. 내가 살기 싫어서 죽겠다는데 무엇이 문제냐 하는 생각을 자연스럽게 하게 됩니다. 그러니 ‘자아 우상’의 시대에 자살이 증가하는 건 매우 당연한 결과라 하겠습니다. 그렇습니다. 자아가 신이 되면 신이 된 자아가 자아를 살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죽게 합니다.

 

그런데 ‘자아 우상’을 깨뜨릴 수 있는 유일한 무기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고통과 고난입니다. 인생의 승리와 성공, 만사형통의 축복과 행복으로는 절대로 자아 우상을 깨뜨릴 수 없습니다. 철학자 쇼펜하우어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만약 대기의 압력이 없다면 우리의 몸이 파열하는 것처럼, 인생에 빈곤과 가혹한 노동, 그 밖의 여러 가지 불행한 운명이 찾아드는 일이 없다면, 사람들의 오만은 계속 기승을 부리다가 비록 파열하는 위험에까지 이르지는 않더라도 급기야 비할 데 없는 어리석음과 광기의 사태에 이르게 될 것이다.”(톨스토이, 인생이란 무엇인가). 옳습니다. 고통과 고난이 없이는 사람의 오만이 꺾이지 않습니다. 하여, 하나님께서는 어쩔 수 없이 인생에 고통을 허락하셔야만 했습니다. 죄로 물든 인간을 위해 인간이 가장 무서워하고 불쾌해하는 고통을 사용하셔야만 했습니다. 하나님이 전능하실지라도 고통 외에는 인간을 위할 수 있는 다른 방법이 없기 때문에 고통을 사용하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삶에는 두 가지 피할 수 없는 진실이 있습니다. 하나는 사람이 가장 피하고 싶은 것이 고통이라는 것이고, 또 하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통 없는 삶은 사람에게 유익하지 않을 뿐 아니라 해롭기까지 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잔인한 진실이지만 피할 수 없는 진실입니다. 우리가 험한 인생길을 가다 보면 때로 자살이라는 치명적인 위험에 빠질 때가 있습니다. 비록 순간일지라도 그런 유혹에 빠질 때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조차도 고통을 허용하고 사용하는 것 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었다는 이 진실을. 그리고 하나님은 절대로 고통을 고통으로 끝내시는 분이 아니심을. 그리고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었다는 시인의 체험적 고백을 기억하고 고통을 견뎌내시기를 바랍니다. 고통을 겪어내면 고통이 은총의 잔으로 변화될 것이라는 믿음을 포기하지 마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