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은 삶이 내지르는 신음이고 삶에 드리워진 어둠이다. 고통은 삶이 입은 상처다. 사람뿐 아니다. 모든 피조물들이 고통으로 신음하며 탄식하고 있다(롬8:22). 사실이다. 고통의 문제는 온 생명의 문제다. 그러기 때문에 고통의 문제를 이야기한다는 것은 결코 유쾌한 일일 수 없다. 고통의 문제를 이야기하는 것은 삶의 신음소리를 듣는 것이고, 또 아픈 상처를 건드리는 것이기 때문에 고통의 문제를 이야기한다는 것은 매우 잔인하고 고통스러운 일임이 분명하다.

 

고통의 문제를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고통의 문제를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삶과 고통은 분리할 수 없는 한 덩어리이고, 고통을 말하지 않고는 인생을 말할 수 없기 때문에 아무리 마음이 아프고 무겁다 하더라도 고통의 문제를 이야기하지 않으면 안 된다. 또 고통은 악의 문제와 연결되어 있다. 사실 악이란 특별한 무엇이 아니다. 한 생명이 다른 생명에게 고통을 가하는 모든 행위가 바로 악이다. 자국의 번영을 위해 타국의 자원을 탈취하는 것도 악이고, 내 배를 채우기 위해 타인의 것을 강탈하는 것도 악이고, 힘으로 타인의 권리를 짓밟는 것도 악이다. 내가 조금 편하자고 타인에게 무거운 짐을 떠넘기는 것도 악이다. 남편이 게을러서 아내가 경제의 짐을 지고 힘겨워한다면 그것도 악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다른 생명의 고통을 외면하는 것도 사실은 소극적인 의미에서 악이라고 할 수 있다. 도무지 상식이 통하지 않는 북한의 도발도 악이지만, 김정일 일족체제를 수호하는 도구로 전락한 북한 주민의 배고픔과 억압적인 인권 상황을 외면하는 것도 악이다. 영양실조와 질병으로 죽어가는 지구촌 아이들의 깡마른 얼굴을 외면하는 것도 악이고, 무차별적인 개발로 산과 들에서 쫓겨나고 있는 뭇 생명들의 신음소리를 외면하는 것도 악이다. 사실이다. 고통을 가하는 것, 고통을 외면하는 것, 이게 다 악이다. 그렇다. 모든 악은 고통을 유발한다. 고통을 유발하지 않는 악은 없다. 더욱이 사람은 창조주로부터 모든 생명을 돌보아야 할 아름다운 책임을 부여받았다. 그러기 때문에 사람은 마땅히 생명을 위협하고 신음하게 하는 악과 고통의 문제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뭇 생명의 신음소리에 귀 기울여야 한다. 이것은 자기 자신은 물론이고 동료 인간과 모든 생명에 대한 책임일 뿐만 아니라 예의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면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경외하는 가장 본질적인 신앙의 행위이다.

더욱이 고통의 문제 속에는 매우 심각하고 근본적인, 그러면서도 회피할 수 없는 의문들이 내재되어 있다. 고통은 단지 고통의 문제가 아니다. 고통의 문제 속에는 고통은 왜 있는가 하는 본질적인 의문으로부터 시작해서, 왜 의로운 자가 고통을 당하고 불의한 자는 형통하는가 하는 의문, 선하시고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왜 이토록 잔인하고 끔찍한 고통을 보고만 계시는가 하는 의문, 고통의 배후에는 정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뜻이 작용할까 하는 의문, 고통은 은총일까 저주일까 하는 의문 등 참 쉽지 않은 의문들이 내재되어 있다. 그러니 이런 진지한 의문들을 외면한 채 생명을 말할 수 있겠는가? 삶을 말하고, 구원을 말할 수 있겠는가? 그럴 수는 없다. 아무리 힘들고 유쾌하지 않더라도 고통의 문제는 반드시 이야기해야 한다.

 

고통 앞에서 울부짖는 이유

 

사람이 고통의 무게에 짓눌려 휘청거리다 보면 대뜸 이런 의문이 치솟는다. 왜 하필 나인가? 왜 하필 우리 가족인가? 도대체 내가 무슨 잘못을 했기에 이런 일을 당해야 하는가? 세상은 이렇게 멀쩡한데, 나보다 악하게 산 놈들도 저렇게 멀쩡하게들 살고 있는데 왜 나만 이런 고통을 당해야 하는가? 이런 의문이 치솟는다. 또 고통은 왜 있는 것인가 하는 근원적인 질문을 던지게 된다. 왜일까? 왜 사람은 고통 앞에서 이런 질문을 던지는 것일까? 왜 고통을 순순히 받아들이지 못하고 무엇 때문에 고통이 있는 거냐고, 왜 하필 나냐고 묻는 것일까?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은 선하시고 정의로우시고 전능하실 뿐만 아니라 우리를 지극히 사랑하시는 분’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선하시고 정의로우신 하나님께서 온 세상을 창조하셨을 뿐만 아니라 세상만사를 다스리신다고 믿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그런 분으로 이해하고 있기 때문에, 왜 고통 받는 이들의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는 거냐고 묻는 것이고, 불의한 일들이 왜 이리도 끊이지 않는 거냐고 묻는 것이다.

이런 의문을 최초로 제기한 철학자는 그리스의 에피쿠로스다. 그는 신(神)이 악을 제거하기를 원하면서도 할 수 없다면 전능하지 않은 것이고, 악을 제거할 수 있으면서도 그렇기 하기를 원치 않는다면 선하지 않은 것이고, 악의 제거를 원하지도 않고 행할 수도 없다면 전능하지도 사랑하지도 않는 것이기 때문에 그런 신은 신이 될 수 없다고 말했다. 또 신이 악을 제거하기 원하고, 악을 제거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면 대체 악은 어디서 오는 것이며, 무엇 때문에 악을 없애지 않는 것이냐고 물었다. 그렇다. 만일 하나님이 선하신 분도 아니고 정의로우신 분도 아니라고 한다면, 세상만사를 다스리는 분이 아니라고 한다면, 왜 고통이 있는 거냐고, 왜 하필 나냐고 물을 필요가 없을 것이다. 고통이 있는 게 세상의 질서라고 생각하면 그만일 것이다. 그런데 성경은 하나님이 선하시고 정의로우시다고 말하니까, 선하신 하나님이 세상을 다스리신다고 말하니까, 세상을 다스리는 하나님이 전능하시다고 말하니까 세상이 왜 이리도 개떡 같은 거냐고, 왜 이리도 부조리한 거냐고 묻게 되는 거다. 왜 성경 말씀과 현실이 다른 거냐고 악다구니를 하게 되는 거다. 철학자 쇼펜하우어도 고통으로 가득한 세상의 현실을 목도하면서 이렇게 내뱉었다. “세상의 비참함이 내 가슴을 발기발기 찢고 있다. 하나님이 이 따위 세상을 창조하셨다면 나는 그런 하나님이 싫다.” 정말이다. 고통이 끊이지 않는 세상에 살면서 우리가 묻게 되는 근본적인 질문은 바로 이것이다. 하나님이 창조한 세상이고, 선하신 그분이 다스리는 세상인데 왜 이다지도 고통이 있는 것인가 하는 것이다.

 

죄와 고통의 관계

 

성경은 고통이 죄 때문에 주어진 것이라고 말한다. 고통은 죄에 대한 하나님의 저주라고 말한다. 아담이 선악과를 먹었을 때 아담은 이미 피조물의 자리를 떠난 것이기 때문에 피조물의 자리를 떠난 이후의 삶은 서로를 해치는 죽임으로서의 삶, 고통을 피할 수 없는 삶을 살게 된 것이라고 말한다(창3:14-24). 옳다. 고통은 죄악이 부른 재앙의 표상이다. 삶이 찢겨져 나갔다는 것을 알리는 예표이다. 하지만 고통의 현실을 보면 양상이 그리 간단치 않다. 죄 때문이라고 설명하기에는 너무도 어처구니없는 아픔들이 있다. 아이들 말이다. 가난한 나라에 태어났다는 이유 하나 때문에 질병과 배고픔으로 스러져가는 아이들, 유전자 이상을 갖고 태어난 아이들, 각종 소아암으로 신음하는 아이들, 사악한 전쟁과 죄악의 손길에 찢긴 아이들, 과연 이 아이들이 당하는 고통을 죄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비록 아이들의 죄가 아니라 인류 전체의 죄 때문이라고 하더라도, 또 죄가 세상 속에 이미 깊이 침투해 있기 때문에 개인의 죄악과 직접적인 관련 없이도 비참한 일을 당할 수 있는 것이라고 하더라도, 아이들이나 특정한 개인이 당하는 사적인 고통을 그런 방식으로 설명하는 것은 지나치게 사변적이고 무정하며 무책임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나는 고통이 근원적으로 죄악의 결과라는 걸 인정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인이 당하는 다양한 고통을 그 하나의 틀로 해석하는 것은 지나친 단순화의 전형적인 어리석음이라고 생각한다.

누가복음에는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예루살렘에 매우 흉흉한 사건이 벌어졌다. 익명의 갈릴리 사람들이 제사를 드리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올라왔는데 빌라도 총독이 그들 중 어떤 사람들을 죽이고, 그 피를 제물에 섞는 가공할 악행을 저질렀다. 그러자 사람들은 이 가공할 죄악에 희생당한 사람들을 보면서 이들의 죄악이 다른 사람들보다 더 크게 때문에 그들이 희생당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또 예루살렘 남동부에는 실로암이라는 연못이 있는데, 거기에 있던 망대가 무너져 18명이 깔려 죽는 사고가 일어났다. 사람들은 그 일을 보면서도 망대에 치여 죽은 사람들이 다른 예루살렘 사람들보다 더 악하기 때문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아주 단호하게 그렇지 않다고 말씀했다. 황당한 죽음을 당한 자들이 다른 사람들보다 더 악해서 그런 게 아니라고, 그들의 비참한 죽음을 그들의 죄와 연결 짓지 말라고 말씀했다(눅13:1-5). 요한복음에는 날 때부터 눈을 보지 못하는 사람의 이야기가 나온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그 맹인을 보고는 예수님께 물었다. 이 사람이 맹인으로 태어난 것이 누구의 죄 때문이냐고. 본인의 죄 때문이냐고, 그의 부모의 죄 때문이냐고. 그러자 예수님은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고 말씀했다(요9:1-3). 또 욥이 모든 것을 잃는 대재앙 가운데 있을 때에도 친구들은 하나 같이 죄 때문이라고 판단했다. 죄 때문에 이런 가공할 재난을 당한 것이니 빨리 회개하라고 윽박질렀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욥의 친구들이 어리석은 판단을 했다며 분노하셨다(욥42:7-8). 이처럼 세상에는 묻고 또 물어도 고통의 이유를 찾을 수 없는 일들이 정말 많다. 죄 때문에 고통을 당하는 것이라는 틀로는 도무지 설명되지 않는 재앙과 고통이 많이 있다. 사실이다. 고난과 고통의 원인이 죄라고 하는 것은 성경적으로 옳다. 하지만 성경적으로 옳지 않다.

 

징벌이냐 은총이냐

 

한편 성경은 하나님이 자기 자녀들을 징계하시는 분이라고 말한다. 무릇 징계는 모든 자녀들이 받는 것이라고, 징계를 받지 않는 것은 사생자이지 참 자녀가 아니라고, 우리의 유익을 위해 징계하시는 것이니 달게 받으라고, 힘들고 고통스럽다 하더라도 참아내라고 말한다(히12:5-11). 다시 말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해 고난과 고통을 주시는 분이라는 것이다. 하여, 많은 교회 강단에서도 고통은 축복의 통로요 은총의 수단이라고 회자되고 있다. 사실이다. 고통은 우리에게 많은 유익을 건넨다. 고통의 자양분을 먹고 영혼의 키가 자라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다. 하지만 고통은 생명을 찢고 삶을 짓이기는 사단의 손이다. 언젠가는 내쫓겨야 할 불의한 침입자다. 하나님은 당신의 피조물들이 고통으로 신음하는 것을 원치 않으신다. 예수님께서 고통으로 신음하는 자들의 손을 잡아주고 해방시켜준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그렇다. 고통은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은총의 도구이기도 하지만 본질적으로는 반드시 걷어내야 할 어둠의 장막이다. 세상에서 고통만큼 인간의 내면과 영혼에 유익한 것도 없지만 고통만큼 인간의 내면과 영혼에 치명적인 것도 없다. 고통은 결코 선(善)일 수 없다. 고통이 아무리 인간의 내면과 영혼에 유익을 준다 해도, 고통의 나무에 선한 열매가 맺힌다 해도 고통이 선이 될 수는 없다. 고통은 영원히 악이라는 어미의 아들일 뿐이다. 이것은 어떤 경우에도 변할 수 없는 진실이다.

그런데 고통의 현실은 좀 더 복잡하다. 고통의 현실을 보라. 고통은 징벌의 도구만도 아니고, 은총의 도구만도 아니다. 고통은 징벌의 도구이기도 하고, 은총의 도구이기도 하다. 심지어는 하나의 고통 속에 은총과 징벌이 교묘하게 뒤섞여 있을 때도 많다. 하기야 징벌과 은총이라는 건 본시 분리되어 작동하는 게 아니다. 징벌이 따로 있고 은총이 따로 있는 게 아니다. 징벌 속에도 은총이 깃들어 있고, 은총 속에도 징벌이 깃들어 있는 법이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그 정황을 정확하게 판단할 능력이 없다. 그것을 판단하는 것은 우리의 능력을 넘어서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