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의지와 고통의 관계

 

우리가 고통의 원인을 추적하고 또 추적하다 보면 결국 자유의지의 문제에 닿게 된다. 하나님께 순종할 수도 있지만 순종하지 않을 수도 있는 자유의지 말이다. 세상의 모든 고통을 한 번 살펴보라. 고통을 가하는 주체는 거의 언제나 사람이다. 물론 사람을 넘어선 천재지변도 고통을 유발하긴 하지만 그 이외의 고통은 거의 다 사람 때문에 발생한다. 그렇다. 사람이 바로 고통의 진원지다. 그리고 사람이 고통의 진원지가 된 것은 순전히 자유의지 때문이다.

자유의 문제는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 아마도 가장 깊이 고민하신 문제였으리라고 생각된다. 성경이 직접 언급하지는 않기 때문에 확실하게 말할 수는 없지만 한 번 상상의 나래를 펼쳐보자. 하나님은 지혜로우실 뿐만 아니라 자유하신 분이시다. 하나님은 자유 자체이신 분이다. 그런데 자유이신 분께서 내재된 프로그램을 따라 움직이는 세상을 기획하셨을까? 원격 조정하는 대로 움직이는 세상, 어떤 일탈이나 선택도 불가능한 완벽한 기계로서의 세상을 원하셨을까? 하나님께서는 절대 그럴 수 없었을 것이다. 하나님은 자유로운 도전과 선택이 가능한 세상,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할 수도 있지만 불순종할 수도 있는 세상, 프로그램화된 복종보다는 자유로운 순종의 세상을 원하셨을 것이다. 자유 없는 완전한 세상보다는 자유 있는 불완전한 세상을 원하셨을 것이다. 정말이라고 생각된다. 어떤 문제도 없이 완벽하게 돌아가지만 자유 없는 세상을 상상해보라. 내재된 프로그램에 따라 기계처럼 움직이는 세계, 모든 것들이 명령에 따라 척척 움직이는 수동의 세계, 과연 그런 세계가 창조자에게 기쁨이 되겠는가? 당신 같으면 그런 세계에 만족하겠는가? 다시 말하지만 하나님은 본질적으로 자유이신 분이시다. 모험과 창조를 즐기시는 분이시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기계와 같이 자동화된 수동의 세계가 아니라 자유로운 능동의 세계를 보고 싶어 하셨을 것이다. 하여, 하나님께서는 결국 사람에게 당신의 말씀까지도 거역할 수 있는 자유의 권세를 허락하셨다. 하나님의 속성인 자유, 하나님에게나 가능한 자유, 즉 의지의 자유를 선물하셨다. 피조세계의 발랄함과 인격적인 소통, 그리고 자발적인 순종의 아름다움을 위해.

사실 ‘피조물’과 ‘자유의지’, 이 둘의 조합은 전혀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다. ‘피조물’이라는 것 안에는 기본적으로 독립적인 존재가 아니라는 뜻과 한계를 가진 존재라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 그에 비해 ‘자유의지’는 주권자만이 행사할 수 있는 특별한 속성이다. 그런데 주권자가 아닌 피조물이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할 수 있는 이성과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자유의지를 행사한다? 피조물인 주제에 창조자요 주권자인 하나님에게 버금가는 주체자로서의 지위를 누리다? 이것은 도무지 성립될 수 없는 일이다. 상상하기 어려운 파격이다. 뿐만 아니라 창조자의 뜻을 거슬러 불순종할 수도 있다는 면에서 매우 위험천만한 일이기까지 하다. 그런데 그런 일이 실제로 일어났다. 하나님에게나 어울리는 자유의 능력과 지위가 피조물에게 허락되는 이변이 일어났다. 그리고 바로 그 자유의지 때문에 인간은 결국 하나님을 거역하게 되었고, 창조질서가 어그러지게 되었고, 모든 사람의 자유의지가 서로 충돌하면서 서로가 서로에게 고통을 가하는 뒤틀린 삶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사실이다. 모든 고통의 진원지는 자유의지다. 인간이 누리고 있는 최고의 특권인 자유의지 때문에 온 세상이 고통으로 신음하고 있다. 하지만 모든 고난과 고통의 근본 원인이 죄임에도 불구하고 죄로는 도무지 설명되지 않는 재앙과 고통이 있는 것처럼 자유의지와 죄의 관계도 그렇다. 다시 말하지만 자유의지가 고통의 원인이라고 하는 것은 전적으로 옳다. 하지만 의지와 관계없이 일어나는 고통도 많다. 그러기 때문에 자유의지가 고통의 원인이라고 하는 것 또한 옳으면서도 틀렸다고 해야 한다. 죄와 고통의 관계처럼 자유의지와 고통의 관계 또한 한 방향으로 교통정리가 되는 건 아니다.

여기서 잠깐 살펴보고 넘어갈 게 있다. 자유의지를 주신 하나님에게 고통의 책임을 물을 수 있느냐 하는 것 말이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자유의지를 주셔서 죄와 고통이 시작되었으니 하나님에게 책임이 있는 것 아니냐고 주장하는 것은, 말이 안 되는 건 아니지만 지나친 단순화요 허황한 억지 논리에 불과하다는 게 내 생각이다. 이렇게 비유해보자. 내가 아들에게 차를 한 대 사주었다고 하자. 그런데 아들놈이 차를 몰다가 교통사고를 일으켜 반신불수가 되었다고 하자. 그렇다면 차를 사 준 나에게 책임이 있는 것일까? 차를 사 준 사람의 잘못이라고 몰아세우는 것이 과연 올바른 책임추궁일까? 아니다. 그건 억지요 허황한 책임몰이다. 고통에 대한 책임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은 단지 세상과 아름다운 소통을 하기 위해 자유의지를 허락하셨을 뿐이다. 세상의 발랄함을 위해, 생명이 진정한 생명됨을 누릴 수 있게 하기 위해, 인격적인 사랑의 소통을 위해 자유의지라고 하는 특별한 은총을 배려하신 것이지 세상을 죄와 고통으로 가득 채우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고통을 유발한 책임을 하나님에게 물을 수 없는 것은 두 말할 나위가 없다.

 

자유의지의 기본 속성

 

자유의지는 기본적으로 원인과 결과라는 틀을 거부한다. 백 사람에게 A라는 원인을 작용시킨다고 해서 백 사람에게 A'라는 결과가 나오지는 않는다. 아니, 그럴 수가 없다. 일찍 부모를 잃었다고 해서 모든 고아들이 문제아로 성장하는 것도 아니다. 사람마다 유전자가 다른 탓도 있지만 인간에게는 자유의지가 있기 때문에 대응하는 방식이 각각 다르고, 대응하는 방식에 따라 성장하는 모습도 제각각 다른 것이 정상이다. 또 자유의지라고 하는 속성 안에는 예측 불가능성이 내포되어 있다. 총을 가진 사람이 누구를 향해 총을 겨눌지는 아무도 모른다. 당연히 누가 총을 맞고 쓰러질지도 알 수가 없다. 하나님도 알 수가 없고, 조종할 수는 더더욱 없다. 만일 A라는 사람이 총에 맞고 쓰러졌다면 그건 순전히 총을 쏜 사람의 자유의지의 결과일 뿐이다. 그 사람이 죄가 많아서 총에 맞았다고 할 수도 없고, 하나님의 뜻이 있어서 총에 맞았다고 할 수도 없다. 운명이라고 해서도 안 된다. 그것은 순전히 ‘우연’일 뿐이다. 물론 사람의 행동은 어느 정도 예측 가능하다. 그 사람을 알면 그 사람이 어떤 행동을 할 것인지는 어느 정도 예측할 수 있다. 하지만 동시에 예측할 수 없는 것도 사실이다. 사람은 기계가 아니다. 사람은 기계가 아니기 때문에 한 사람의 행동이나 그에게 닥친 어떤 일을 특정한 원인에 의한 것이라고 단정해서는 안 된다. 그것이 설사 하나님의 뜻이라 하더라도. 사실이다. 하나님의 뜻마저도 사람에게 기계적으로 전달되는 건 아니다. 모든 규칙성은 자유의지 앞에서 멈추어야 한다. 자유의지는 모든 틀을 거부하고, 모든 예측 가능성을 비웃으니까 말이다.

그런데 우리는 원인과 결과라고 하는 물리적인 질서의 틀 속에서 살고 있다. 아궁이에 불을 지피지 않으면 굴뚝에 연기가 날 수 없는 세상을 살고 있다. 더욱이 사람은 사태의 원인을 정확하게 규명하지 않으면 견디지 못하는 이성적 존재다. 그러기 때문에 사람은 기본적으로 모든 일의 합당한 원인을 찾으려고 덤빈다. 하나의 끄나풀이라도 찾으려고 발버둥을 친다. 뜻하지 않은 재난이나 우연한 사고를 당했을 때에도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를 먼저 묻는 것이 사람이다. 욥의 친구들도 그랬다. 아니 땐 굴뚝에 연기가 날 수 없듯이 죄 없이는 고난과 고통이 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물론 원인과 결과라는 해석의 틀이 전적으로 틀린 것은 아니다. 생활습관이 잘못되어서 질병에 걸리는 것도 사실이고, 탐욕을 절제하지 못해서 큰 낭패를 보는 것도 사실이다. 마음에 악을 품고 있기 때문에 마음이 어두워지는 것도 사실이다. 중력이라는 원인이 작용하기 때문에 사과나무에서 사과가 떨어지는 것처럼, 우리가 경험하는 대부분의 일들도 어떤 원인이 작용했기 때문에 발생하는 게 사실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이란 원인과 결과라고 하는 틀로 다 해석되지는 않는다. 우리 삶에는 인과관계의 틀을 뛰어넘는 일들이 참으로 많다. 고통도 예외가 아니다. 우리가 아무리 묻고 또 물어도 고통의 이유를 알기는 어렵다.

 

영원한 침묵

 

나는 지금까지 결코 선일 수 없는 고통이 왜 이리도 끈질기게 삶에 끼어드는 것인지를 물었다. 하지만 속 시원한 답을 찾지는 못했다. 욥이 고통의 한 가운데에 있을 때에 가장 힘들어 했던 것도 다른 것이 아니었다. 왜 자기가 이런 고난을 당해야 하는지, 도대체 무엇 때문에 엄청난 재앙이 한꺼번에 쏟아진 것인지 그 이유를 알 수 없는 것 때문이었다. 욥은 하나님께 탄원했다. “내 영혼이 살기에 곤비하니 내 불평을 토로하고, 내 마음이 괴로운 대로 말하리라. 내가 하나님께 아뢰리니 나를 정죄하지 마옵시고, 무슨 까닭으로 나와 더불어 변론하시는지 내게 알게 하옵소서.”(욥10:1-2). 욥은 정말 알고 싶었다. 왜 이런 일이 자기에게 닥친 것인지 하나님께 듣고 싶었다. 하지만 욥은 끝내 알 수 없었다. 욥이 하나님과 대화하는 과정 에서 고통의 문제를 돌파하기는 했지만 고통의 원인을 알아내지는 못했다. 고통의 원인을 알아내지 못한 채로 고통의 문제를 넘었다.

작가 박완서 씨도 수물 다섯 밖에 안 된 너무나도 준수한 외아들이 죽었을 때 “나는 내 아들이 이 세상에 없다는 무서운 사실을 견디기 위해서 왜 그런 벌을 받아야 하는지 영문을 알아야만 했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걸 알기 위해 하나님께 애걸했다. 한 말씀만 해달라고. 주님이 계시다면 내 아들이 왜 죽어야 했는지, 내가 이렇게까지 고통받아야 하는 건 도대체 무슨 영문인지,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 말씀만 해달라고 사생결단의 마음으로 매달렸다. 그러나 결국 세미한 음성 하나도 듣지 못했다. 작가는 그 밤을 ‘처절한 밤’이었다고 말했다(한 말씀만 하소서. 66쪽).

그렇다. 고통은 그 무엇으로도 충분히 설명되지 않는다. 고통의 문제는 설명하려 들면 들수록 설명되지 않는 부분만 드러날 뿐임을 발견하게 된다. 그런데 우리는 쉽게 죄 때문이라고, 하나님의 뜻이 있어서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징벌이라고, 축복의 통로라고 말한다. 매우 섣부른 판단이요 언사가 아닐 수 없다. 사실 고통의 원인은 신비이다. 고통의 원인은 알 수 없는 것도 아니지만 알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고통의 원인은 앎과 모름의 경계에 있다. 사람들은 이런 어정쩡함을 싫어한다. 정직한 어정쩡함보다는 확실한 독단과 편견을 더 선호한다. 정직한 의문이나 무지보다는 무지한 확신을 더 선호한다. 그것이 비록 설익은 것이라 할지라도 선명한 답을 제시해야 마음 편해한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고통의 원인에 대한 문제는 신비로 남겨 두어야 한다. 물론 고통의 원인을 분별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모든 촉수를 동원해 최대한 깊이 응시하고 성찰해야 한다. 묻고 또 물어야 한다. 대답을 찾기 어렵다고 해서 묻기를 그만 두어서는 안 된다. 심지어 대답이 없다 할지라도 묻는 걸 중단해서는 안 된다. 사람이 질문을 하는 것은 해답을 찾기 위함이기도 하지만 해답을 찾지 못한다 하더라도 묻는 과정 속에서 지혜의 눈을 뜨는 법이니까. 동시에 앎과 모름의 경계 또한 견뎌내야 한다. 그리고 침묵해야 할 때에는 침묵할 줄도 알아야 한다.

욥의 마지막 이야기를 생각해보자. 자기가 태어난 날까지도 저주하면서 무엇 때문에 이런 고난을 당하게 하는 거냐며 거칠게 항변하던 욥에게 하나님은 어떤 설명도 하지 않았다. 오직 묻기만 했다. 하늘과 땅을 두루 살피며 그 진상을 설명해보라고 묻기만 했다. 폭포처럼 쏟아 붓는 하나님의 물음 앞에서 욥은 한 마디 대답도 할 수가 없었다. 그랬다. 욥은 한 마디의 설명도 듣지 못했고, 한 마디의 대답도 하지 못했다. 하지만 욥은 놀랍게도 회개의 고백을 했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감히 주님의 뜻을 흐려놓았다고. 깨닫지도 못하면서 함부로 말을 했다고. 자기가 알기에는 너무나 신기한 일들이었다고. 이제는 자기의 주장을 거두어들이겠노라고(욥42:3). 그렇다면 욥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왜 욥은 티끌과 잿더미 위에 앉아서 회개했을까? 요하네스 브란첸 신부는 욥이 하나님의 물음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을 것이라고 상상하면서 이렇게 멋지게 표현했다. “욥아, 네게 애걸하는 이 마음을 모르겠느냐? 나를 믿거라. 아직 날이 저물지 않았다. 어떻게 네가 나의 세계와 가능성을 다 안다고 할 수 있느냐? 나는 네가 모르는 카드놀이를 하고 있다.”(고통이라는 걸림돌. 28쪽). 그렇다. 하나님이 욥에게 “네가 누구이기에 무지하고 헛된 말로 내 지혜를 의심하느냐?”(욥38:2)고 질책하신 것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하나님은 자유이신 분이시다. 자유이신 하나님은 그 어떤 논리, 그 어떤 틀에도 갇힐 수 없다. 때문에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들 또한 어떤 논리나 어떤 틀로도 충분히 해석될 수 없다. 고통은 더더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