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고통이 한 덩어리가 된 것은 자유의지가 타락한 이후부터입니다. 의지의 타락이 고통의 실제적인 원인입니다.

그런데 만일 의지가 없었다면 인간의 운명이 어땠을까요? 인류의 문명이 여기까지 발전할 수 있었을까요? 아마 못했을 겁니다.

의지가 빠진 이성만으로는 과학이 발전하지 못했을 것이고, 지식이 발전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성에 의지가 가세했기 때문에, 지극한 불편과 위험과 역경을 뚫고 돌파해내는 불굴의 의지가 가세했기 때문에 사람이 지구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고 위대한 성취를 할 수 있었지 의지가 가세하지 않았더라면 인류는 멸종했을지도 모릅니다. 모든 행동은 의지로부터 나옵니다. 의지야말로 모든 행동의 원동력입니다. 의지 없이는 행동이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설사 행동하더라도 작은 난관 하나조차 뚫어낼 수 없습니다. 그런 면에서 의지는 인간의 생존과 문명의 발전에 매우 중대한 요인임에 틀림없습니다.

 

‘의지’를 다른 말로 표현하면 ‘욕망’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의지는 곧 욕망입니다.

제가 산책을 하는 아주 작은 일도 건강하게 살고 싶다는 의지가 있기 때문입니다. 책을 읽는 것도 진실을 알고 싶다는 의지가 작동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설교를 하고 글을 쓰는 것도 뭔가 필요한 사람이 되고자 하는 의지,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고자 하는 의지,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일에 참여하고자 하는 의지가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때로 아들에게 화를 내는 것도 하나하나 따져보면 그 녀석이 좀 더 균형잡힌 생활을 했으면 좋겠다는 열망, 즉 의지가 있기 때문입니다. 아들놈이 내 의지를 따르지 않기 때문에 화가 나는 것이고, 아들의 의지와 나의 의지가 충돌하기 때문에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또 이익을 얻고자 하는 욕망이 있기 때문에 거짓말도 하는 것이고, 나쁜 짓도 하는 것입니다. 모든 다툼과 충돌을 깊이 살펴보십시오. 모든 다툼과 충돌은 결국 의지의 충돌입니다. 사실입니다. 의지가 모든 행동의 원동력이지만 의지가 모든 사태를 왜곡하고 뒤트는 고통의 뿌리요 악의 뿌리이기도 합니다. 타락한 의지 때문에, 또 서로 다른 의지 때문에 모든 일들이 뒤엉키고 서로를 해치고 공격하고 짓밟는 것입니다. 의지는 정말 놀라운 선물이면서 동시에 재앙입니다.

 

인도의 부처 싯달타는 인간과 인생을 매우 정직하고 깊이 바라본 사람입니다. 그는 고통으로 가득한 인생의 현실을 보았습니다. 일체가 고통임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고통의 원인이 뭔지, 어떻게 하면 고통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는지를 깊이 묻고 살폈습니다. 끊임없이 묻고 살피는 가운데 모든 번뇌와 고통의 원인이 집착임을 발견했습니다. 물질에 대한 집착은 탐욕(貪慾)으로 나타나고, 마음에 대한 집착은 화(진에:嗔恚)로 나타나고, 정신에 대한 집착은 어리석음(우치-愚癡)로 나타난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불교에서는 이걸 줄여서 탐진치라고 합니다. 우리의 번뇌와 고통을 살펴보십시오. 다 어느 때 신음합니까? 간절히 바라던 꿈이 좌절됐을 때, 열심히 쌓은 재물이 날아가 버렸을 때, 인생을 바쳐 성취한 것들이 무너져 내릴 때, 원치 않는 일을 만났을 때, 자존심이 짓밟혔을 때, 심한 결핍을 느낄 때 백팔 번뇌로 잠을 이루지 못합니다. 그래요. 욕심 때문에 집착하는 것이고, 집착하기 때문에 번뇌하며 신음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싯달타는 집착을 버리라고 했습니다. 집착을 버려야 고통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으니 집착을 버리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집착을 버리기 위해서는 수행을 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바로 이것이 불교의 근간인 고집멸도(苦集滅道)의 사성제(四聖諦)입니다.

결국 ‘집착을 버리라’는 것이 불교의 화두입니다. 그렇다면 집착은 뭘까요? 내 의지를 내려놓지 못하는 것이 바로 집착입니다. 내 의지를 관철시키기 위해 요지부동하는 것이 집착입니다. 그러니까 집착을 버린다는 것은 결국 내 의지를 내려놓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이제 골치 아픈 문제가 생깁니다. 고통으로부터 해방되기 위해서는 집착을 버려야 되고, 집착을 버리기 위해서는 의지를 내려놓아야 하는데, 과연 의지를 내려놓을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살기 위해서는 의지가 필요하고, 의지가 곧 삶의 행위인데, 과연 의지를 내려놓고 살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의지 없이 삶이 가능하겠습니까? 산다는 것은 단지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산다는 것은 곧 행동하는 것입니다. 특별히 인간은 감각적인 본능을 따라 행동하지 않습니다. 인간은 의지를 따라 행동하도록 창조되었습니다. 인간은 의지 없이 살 수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사람이 의지를 내려놓는다는 것은 이론적으로는 가능할지 몰라도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합니다.

 

사실입니다. 사람은 의지 없이 살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의지를 내려놓지 못하는 한 고통을 피할 수 없습니다. 바로 이것이 인간이 처한 근본적인 곤궁입니다. 의지를 가지고, 의지 때문에 고통하며 사는 것, 바로 이것이 모든 사람의 운명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이 고통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는 최선책은 없습니다. 우리가 찾을 수 있는 가장 현명한 길은 차선책을 찾는 것인데, 차선책이 무엇일까요? 의지는 내려놓지 않으면서도 집착은 버리는 것이 차선책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고통을 최소화할 수 있는 길이고, 고통으로부터 완전히 해방될 수는 없지만 어느 정도 해방될 수 있는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달리 말하면, 의지를 길들이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의지가 자기 고집을 부리지 않도록, 의지가 집착에 갇히지 않도록, 의지가 진리와 상관없이 날뛰지 않도록 의지를 길들이는 겁니다.

 

그런데 의지라고 하는 것은 의지를 관철하고 밀고 나가려는 속성이 있기 때문에 의지는 거의 언제나 집착으로 고착화되는 속성을 띱니다. 더욱이 우리의 의지는 타락한 의지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자칫 욕망의 종노릇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타락한 의지로 타락한 의지를 길들인다고 하는 것은 어쩌면 거의 불가능하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의지를 아예 사단의 하수인이라며 적대시하기도 하고, 애써 의지를 부정하면서 의지와 일전을 벌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지극히 비현실적이고 허망한 몸부림일 뿐이지 아무런 유익이 없습니다. 물론 우리의 의지가 타락했기 때문에 타락한 의지와 싸워야 할 부분이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만, 의지와 싸우는 것보다는 의지를 길들이는 것이 훨씬 지혜롭고 현실적인 처방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의지를 길들일 수 있을까요? 의지를 길들이는 방법을 찾기 위해서는 의지가 어느 때에 가장 포악해지는지를 알면 됩니다. 의지가 자기 맘대로 날뛰는 원인을 알면 의지를 길들일 수 있는 길도 찾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 어느 때 의지가 가장 강력하게 추동합디까? 어느 때 가장 포악해집디까? 욕심이 의지를 충동질 할 때 아니던가요? 돈을 벌어야겠다는 욕심이 생기거나 일등을 해야겠다는 욕심이 생기면 의지가 후끈 달아오르지 않던가요? 사실입니다. 사람을 보아도 대체적으로 욕망이 강한 사람이 의지도 강합니다. 의지와 욕망은 거의 정비례합니다. 그렇다면 이제 길이 보입니다. 의지를 길들일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이고 효과적인 길이 보입니다. 그게 뭘까요? 욕심, 욕망을 최대한 잠재우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바로 그 길을 말씀했습니다.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라고요. 여기서 예수님은 고통을 없애는 정도를 약속하지 않았습니다. 아예 하늘나라를 약속했습니다. 마음이 가난한 자는 하늘나라를 살 수 있다고 말씀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어떤 마음이 가난한 마음일까요? 아주 단순하게 말합시다. 욕심 없는 마음이 가난한 마음입니다. 예수님이 팔복을 말씀하시면서 제일 먼저 마음의 가난을 말씀하신 것은 우연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이 마음의 가난을 제일 먼저 말씀하신 것은 우리 마음속에 욕심이 가득한 것을 아셨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마음에 가득한 욕심이 우리의 의지를 충동질하기 때문에 의지가 포악해지고, 포악한 의지들이 활개를 치기 때문에 의지와 의지가 서로 충돌하고, 의지와 의지가 서로 충돌하기 때문에 평화와 기쁨이 깨지고, 그래서 하늘나라를 살지 못한다는 것을 예수님이 아셨기 때문에 마음의 가난을 제일 먼저 말씀하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또 욕심이 없어야 온유할 수 있고, 욕심이 없어야 의에 주릴 수 있고, 욕심이 없어야 자비를 베풀 수 있고, 욕심이 없어야 마음이 깨끗할 수 있고, 욕심이 없어야 평화의 사람이 될 수 있고, 욕심이 없어야 예수님 때문에 모욕을 당할 수 있습니다.

 

진실로 그렇습니다. 마음을 가난하게 하는 것이야말로 고통을 최소화하고 고통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는 최선의 길이고, 또 하늘나라를 살 수 있는 최선의 길입니다. 물론 모든 고통이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아닙니다. 자연의 재앙이라든지, 교통사고라든지, 사랑하는 사람과 사별하는 것이라든지, 경제적으로 고통을 겪는 것은 외적인 사태로 인해 겪는 고통입니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고통을 느끼는 것은 마음입니다. 외적인 사건으로 인해 당하는 고통이라 할지라도 고통의 진원지는 마음이고, 또 고통을 당하는 것도 마음입니다. 육체적인 고통마저도 감각의 고통보다는 마음의 고통이 더 힘든 법입니다. 그렇습니다. 모든 고통은 본질적으로 내적인 질병입니다. 마음과 정신과 영혼의 질병입니다. 만일 고통이 외적인 것이기만 하다면 고통이란 그렇게 무거운 짐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고통 때문에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자살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고통이 버겁고 힘든 것은 고통이 마음과 영혼의 질병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정말 중요한 진실은 이것입니다. 고통을 유발하는 외적인 사건은 우리의 노력이나 힘으로 통제할 수 없지만 내적인 고통은 어느 정도 통제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건강을 위해 나름대로 운동도 하고 음식도 절제하며 충실하게 생활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떻습니까? 암에 걸리는 것을 피할 수는 없습니다. 다리를 건너는데 다리가 무너지고, 백화점에 쇼핑하러 갔는데 백화점이 무너져 죽는 것도 피할 수가 없습니다. 욥도 강도들이 쳐들어와 가축들을 노략질해가고, 불과 바람이 양떼와 목동과 젊은 사람들을 휩쓸어가는 것을 막아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내적인 고통은 어떻습니까? 통제할 수 있습니다. 누구든지 노력하면 내적인 고통으로부터 상당 부분 해방될 수 있습니다. 마음의 욕심을 내려놓으면 의지가 순화되고, 의지가 순화되면 집착으로부터 해방되고, 집착으로부터 해방되면 고통으로부터도 해방됩니다. 더욱이 마음이 가난해지면 의지가 집착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마음이 가난해지면 의지가 공백 상태로 남는 게 아니라 의지의 지향점이 달라집니다. 세상의 욕심을 추구했던 것에서 하나님의 뜻에 순응하는 쪽으로 의지의 방향이 달라집니다. 물론 의지가 욕망의 종이 되는 것은 순간입니다. 심지어 내 의지가 하나님의 뜻을 지향하고 있다고 확신하는 그 순간에도 의지의 속내를 더 깊이 들여다보면 욕망이 똬리를 틀고 있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그마 만큼 의지는 타락했습니다. 정말 돌이키기가 어려울 정도로 타락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주님은 말씀했습니다. 깨어있으라고. 깨어있지 않으면 욕망의 종노릇을 하게 되어 있으니 항상 깨어있어 기도하라고.

 

여러분, 신앙생활이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를 믿고, 이신칭의의 도리를 믿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하지만 믿는 것이 신앙생활의 전부이어서는 안 됩니다. 그리스도의 대속을 믿는 것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리의 의지가 욕심의 종이 되지 않도록 끊임없이 자신의 의지를 성찰하고 반성하면서 내 의지를 하나님의 뜻에 순응하는 쪽으로 길들여야 합니다. 믿음 안에서 믿음으로 타락한 의지를 길들이는 작업을 해야 합니다. 내 의지를 하나님의 뜻에 순응하는 쪽으로 길을 들여야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 수 있기 때문에 의지를 길들이는 것이 신앙생활의 주요한 싸움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잘 아는 것처럼 우리의 의지만으로는 의지를 길들이기가 어렵습니다. 우리의 의지만으로는 욕심을 내려놓기가 어렵습니다. 아무리 기도하며 깨어있다 해도 타락한 의지의 기운을 꺾는다는 것은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닙니다. 부처인 싯달타도 집착을 내려놓는다는 것이 정말 어려운 일이라는 걸 알았습니다. 그래서 쉼 없이 수행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수행정진이 없이는 집착을 내려놓기가 어렵다고 말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기도 진하게 하고 은혜 받으면 욕심과 집착이 사라질 거라고 쉽게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아무리 대단한 은혜를 받아도 돌아서면 욕심이 튀어나오는 게 사람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이건 아니건 모든 사람은 수행을 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수행을 불교적인 것, 이교적인 것이라고 생각하고 아예 외면해버리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수행은 불교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수행을 불교의 전유물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엄청난 착각입니다.

기독교 안에도 수행에 대한 말씀과 전통이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거룩하신 것처럼 너희도 거룩하라고 했습니다(레11:44). 세상의 어떠함을 깊이 살펴 세상을 따르지 않도록 조심하고,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도록 항상 깨어있으라고 했습니다(롬12:2,골4:2). 옛사람을 그 행실과 함께 벗어버리고,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따라 끊임없이 새로워져야 한다고 했습니다(골3:9-10). 그렇습니다. 이 말씀들을 내면화하는 과정이 곧 수행입니다. 우리가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서는 성경이 말하는 이런 수행을 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닮고 따르기 위해서는 우리의 내면과 습관을 변화시키는 수행을 해야 합니다. 물론 기독교는 수행의 불가능성을 강조합니다. 하나님께서 믿음이라는 구원의 길을 내신 것도 수행으로는 구원에 이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실입니다. 수행으로는 하나님 앞에 설 수 없습니다. 하지만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구원의 도리가 수행을 거부하는 빌미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수행으로 의로워질 수 없다고 해서 수행할 필요도 없고, 수행을 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는 것은 믿음을 왜곡하고 것이고, 믿음을 도구화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의 믿음이 천박하고, 사유의 깊이가 없고, 인격으로 내면화 되어 있지 않고, 생활에 젖어들지 않는 것도 사실은 신앙생활에 수행이 증발해버렸기 때문입니다. 믿기만 하면 된다는 믿음 지상주의가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을 휩쓸고 있기 때문에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천박한 자본주의의 종노릇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수행이 뭡니까? 코람 데오, 하나님 앞에 서는 것이 바로 수행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내 마음과 행동 속에 숨어 있는 악한 의지와 어둠을 살피는 것이 수행입니다. 그리고 이 수행이 빠진 믿음으로는 참 믿음에 이를 수 없습니다. 수행을 하는 자만이 수행의 한계를 깨달을 수 있고, 수행의 한계를 깨달은 자만이 이신칭의의 도리가 얼마나 엄청난 은총인지를 감사하게 되고, 그래서 참 믿음에 이르게 됩니다. 수행이 빠진 믿음 지상주의는 참 믿음으로 나아가기 어렵습니다. 오해는 마십시오. 저는 지금 이신칭의의 도리가 잘못됐다고 말하는 게 아닙니다. 이신칭의의 도리가 도구화되어버린 것이 문제라고 말하는 겁니다. 믿음에는 반드시 수행이 동반되어야 하는데 믿음이 도구화되어 수행을 거세해버렸다는 뼈아픈 진실을 말하는 겁니다.

교회는 내다버린 수행의 전통을 다시 되찾아야 합니다. 수행을 되찾아야만 우리의 신앙이 영성의 깊이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물질적인 축복과 종교적인 자기만족을 추구하는 얄팍한 신앙생활을 넘어설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이 자발적인 수행을 하기에는 이미 자본주의의 욕망에 길들여져 있고, 비전이라는 이름으로 욕망이 부풀려져 있습니다. 그래서 수행으로 나아가기가 참 어렵습니다. 하지만 수행으로 이끄는 길이 하나 있습니다. 고통입니다. 고통이 인생에게 가져다주는 하나의 미덕이 있는데, 그 미덕이 뭔가 하면 우리를 수행으로 이끄는 단초가 된다는 것입니다. 사람에게는 참 어리석은 습성이 있습니다. 사람은 대부분 고통의 와중에 있을 때라야 비로소 자신을 돌아봅니다. 고통의 와중에서라야 비로소 자신의 실체를 똑바로 인식합니다. 평소에는 보지 않았던 내면의 깊은 곳을 들여다봅니다. 고통의 와중에서라야 비로소 인생이 자기 손 안에 있지 않다는 엄연한 진실이 눈에 들어옵니다. 고통의 와중에 있을 때라야 비로소 욕망이 헛되다는 것을 알게 되고, 자신이 그동안 헛된 욕망에 끌려 다녔다는 뼈아픈 진실을 보게 됩니다. 이것이 모든 인간의 한결같은 어리석음입니다. 사람이 고통 없이도 욕심과 집착을 내려놓는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하늘이 두 쪽이 나도 안 됩니다. 여러분, 한 번 찾아보십시오. 사람의 마음을 가난하게 하는 최대의 묘약이 무엇일지 한 번 찾아보십시오. 세상에 고통만한 묘약이 없습니다. 고통이야말로 우리를 수행으로 나아가게 하는 첩경이고, 고통을 해체시키는 최고의 묘약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말씀했습니다.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애통하는 자가 하나님의 위로를 받는다고.

 

참 가슴 아픈 역설입니다. 우리는 주님께 고통을 면하게 해달라고 기도하는데 주님은 고통이 우리를 복되게 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고통이 고통으로부터의 해방을 도와줄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우리에게 말씀합니다. 마음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으니 집착을 내려놓는 수행을 하라고. 욕심에 불붙은 난폭한 의지를 길들이라고. 이 땅에서 승부 보겠다는 성급함을 내려놓고 종말론적 소망을 잠잠히 기다리라고. 그렇습니다. 이 말씀이 말하는 바를 이해하고 믿음으로 수행정진을 할 때 고통의 소용돌이는 잠잠해질 수 있습니다. 고통을 버텨내면서 고통과 함께 자랄 수 있습니다. 고통을 삶의 에너지로 활용할 줄 아는 사람이야말로 정말 지혜로운 사람이고, 참으로 복 있는 사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