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의 별똥별처럼 잠시 있다가 스러지는 교회가 허다한 시대, 교회 설립이 더 이상 환영받지 못하는 시대에 말씀샘교회가 또 하나의 변죽을 울리며 등장할 채비를 하고 있다. ‘수치와 비루함으로 세상의 웃음거리가 된 교회에 또 하나의 덧칠을 하는 건 아닐까?’라는 염려가 없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교회 설립이라는 길을 나섰다. 사실 교회 개척은 하고 싶지 않았다. 할 수 있으면 기존 교회를 건강하게 세우는 일을 하고 싶었다. 누군가와 함께 효과적인 분업을 하고 싶기도 했다. 그렇게 하는 것이 현재의 나에게 걸맞은 선택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함께 하기에는 너무도 옹졸하고 편협한 목회의 현실, 복음에 대한 이해의 간극, 협력자로 살기에는 이미 먹어버린 세월, 협력 사역의 한계 등등이 그 길을 가로막았다. 물론 흐르는 강물에 몸을 맡기지 못하는 나 자신도 한 몫을 했다. 암튼 나는 원하는바 협력 사역의 길을 가지 못하고 또다시 교회 개척이라는 힘든 길을 나섰다.

 

지난날 나의 열망은 오직 하나였다. 개인적으로는 사람이 되는 것이었고, 목회적으로는 교회다운 교회를 세우는 것이었다. 여러 가지 시도를 하면서 시행착오를 했지만 목표는 오직 하나, 교회가 되는 것이었다. 그런데 제2의 목회를 시작하는 지금도 그 목표를 바꿀 수 없다는 것이 너무 슬프다. 아니, 처음 목회를 시작했던 23년 전보다 더 절실하고 시급한 현실이 되었다는 게 슬프도록 부끄럽고 가슴시리다.

오늘의 한국교회는 ‘홍수에 마실 물이 없다’는 역설 그대로다. 교회는 넘치지만 교회를 찾기 어렵고, 설교는 쏟아지지만 들을 말씀을 찾기 어렵다. 말씀을 도구화하는 교회는 많지만 말씀의 도구가 되는 교회는 드물다. 다들 차분하게 앉아 말씀을 듣기보다는 말하기에 바쁘고, 말씀으로 말씀 아닌 것을 담대하게 말하는데 익숙해 있다. 목회자 자신의 승리와 영광을 하나님의 승리와 영광과 직결시키는 것은 물론이고, 성도들 개개인의 승리와 영광이 곧 하나님의 승리요 영광이라고 말하며 야망을 비전으로 옷 입히기에 정신이 없다. 주님은 하향성의 길을 갔는데 교회는 주님의 말씀으로 상향성의 길을 추동하고 있으며 승리주의를 퍼트리고 있다. 물론 말씀으로 포장되어 있기는 하다. 하지만 내용을 들여다보면 말씀 아닌 것들이 가득하다.

 

쉽게 말하자. 성경이 다른 책들과 다른 점은 딱 하나다. 그것은 처음부터 끝까지 세계를 바라보는 관점과 지향점이 다르다는 것이다. 만물과 만사를 이해하는 해석의 지평과 토대가 다르다는 것이다. 옳다. 성경은 만물과 만사를 눈에 보이는 현실 너머에서 보고, 세계와 역사를 창조하신 분과의 관계 속에서 보며, 죽음 너머의 세계까지를 포함해서 삶의 실존을 통전적으로 본다.

 

몇 가지만 꼽아보자. 세상은 인간의 가능성과 역사의 진보를 꿈꾸고 말하지만 성경은 인간의 불가능성과 비참함, 역사적 진보의 한계와 심판, 그리고 종말론적 희망을 증언한다. 세상은 인간의 의를 말하나 성경은 하나님의 의를 말한다. 세상은 인간의 도덕적 개선을 말하나 성경은 새로운 피조물 됨을 말한다. 세상은 유토피아를 꿈꾸나 성경은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기다린다. 세상은 소유와 영광과 지배를 욕망하나 성경은 존재와 고난과 섬김을 추구한다. 세상은 하늘과 땅을 이분법적으로 구분하나 성경은 하늘과 땅을 유기적인 하나로 본다. 이처럼 성경은 눈에 보이는 세계와 언어뿐 아니라 눈으로 볼 수 없는 세계, 언어 이전의 세계, 역사 너머의 세계, 하나님의 구원의 세계, 죽음을 뛰어넘는 부활의 세계를 이야기하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독특한 책이다. 그리고 교회는 이처럼 독특한 책을 열어서 말하도록 부름받았다. 다시 말하면 세상이 볼 수 없는 것을 보고, 세상이 말할 수 없는 것을 이야기하도록 부름받았다. 그러기 때문에 교회는 만물과 만사를 바라보는 관점이 세상과 달라야 한다. 추구하는 것이나 하는 이야기가 세상과 달라야 한다.

 

그런데 교회가 삶을 바라보는 관점이나 지향점이 세상과 다르지 않다면 그것이 어떻게 교회일 수 있겠는가? 아무리 종교적 위용이 대단하고, 거룩하고, 대단한 일을 성취하고, 기적을 행하고, 사회적으로 훌륭한 평판을 얻었고, 성경 이야기가 넘친다 할지라도 세상과 다르게 볼 줄을 모르고 세상과 다르게 말할 줄을 모른다면, 그것이 어떻게 주님의 교회일 수 있겠는가? 예수를 잘 믿으면 더 많은 소유와 더 큰 영광과 더 강한 힘과 지배력을 얻는다고 말한다면, 대통령 선거후보자들이 그럴듯한 거짓 약속(空約)을 남발하듯이 예수님이 약속하지 않은 것들을 예수의 이름으로 약속한다면, 세상이 하는 이야기를 예수 이름으로 반복한다면, 그것이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을 말하는 교회일 수 있겠는가?

 

교회의 주인이요 머리이신 예수님은 경쟁에서 승리하는 법이나 삶의 안전을 보장하는 지혜를 말하지 않았다. 그분은 오직 하나님나라의 복음을 전했다. 생명과 죽음이라는 삶의 궁극적 질문에 대해, 죄의 종노릇하는 것으로부터의 해방에 대해, 역사를 넘어서는 종말론적 희망에 대해 말했다. 영광이 아니라 섬김을 말했고, 나를 믿고 따르는 것은 쉽지 않다고 말했다. 세상의 그 어떤 것도 보장해 줄 수 없다고 말했다. 아니, 세상에서는 주님 때문에 오히려 많은 것을 잃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오늘의 교회도 예수님처럼 세상이 들을 수 없는 것을 듣고, 세상이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해야 한다. 하여, 교회는 무조건 말씀의 세계로 들어가야 한다. 말씀의 세계로 깊이 침잠해 들어가서 그분의 말씀을 먹고 마셔야 한다. 말씀에 정직해야 한다. 그래서 세상이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고, 세상이 줄 수 없는 것을 줄 수 있어야 한다. 그럴 때 교회는 거짓 희망에 속고 있는 자들에게 참된 희망이 될 수 있다. 물질적인 부요 속에서 영적인 기갈로 신음하는 자들을 회생시키는 구원의 방주가 될 수 있다.

 

오늘 이 땅에 교회가 넘친다는 건 삼척동자도 다 아는 사실이다. 하지만 말씀에 충실한 교회의 출현이 시급하다는 것 또한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내가 제2의 목회를 시작하면서 교회 이름을 ‘말씀샘교회’라고 명명한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말씀에 충실한 교회, 말씀에 정직한 교회, 말씀의 물줄기를 여는 교회가 서야 한다는 생각. 물론 자신이 있어서가 아니다. 두렵고 떨리며 자신이 없다. 하지만 그것만이 교회 본래의 길이요, 오늘 이 시대의 교회에 요청되는 회개의 본질이라고 생각하기에 감히 ‘말씀샘’을 자처했다. 또 목회의 현실에서 말씀을 도구화하게 되는 유혹을 차단하기 위한 자기 선언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런 이야기가 여전히 구차한 변명처럼 들릴 수 있다. 누구나 시작할 때에는 이런저런 근사한 뜻을 표명하니까. 나도 말에 그칠 수 있으니까. 사실이다. 나 역시도 말에 그칠 수 있다. 나도 죄악 덩어리이기 때문에 말씀으로 말씀 아닌 길을 갈 수 있다. 또 교회됨의 길을 간다는 것은 정말 만만한 길이 아니기 때문에 결과를 얻지 못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목회를 기대하며 가볼 참이다. 말씀이 자유의 길을 여는 진정한 능력임을 믿고 말씀의 샘을 깊이 파볼 생각이다. 말씀의 현실을 생생하게 맛보고 싶은 희망 하나 붙잡고 말씀에 순명하는 길을 가볼 생각이다.

 

주여! 자비를 베푸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