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말씀에서 바울은 자기가 예수의 사도가 된 내력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자기가 전하는 예수의 복음은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도 아니고, 사람에게 전수받은 것도 아니라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그러면서 자신의 과거를 이야기합니다(1:13-14). 빌립보서에서는 자신이 정통 유대인임을 강변하고 있습니다(빌3:4-6).

사실 정통 유대인의 인생 목표는 하나님을 알고, 그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에 맞춰져 있었습니다. 창조주요 이스라엘의 구원자이시며 온 우주의 주재이신 그분을 경외하면서(합당한 두려움을 품는 것) 그분과 친밀한 사귐을 갖는 것이 가장 소중한 일이었습니다. 사울도 그런 보편적인 유대인의 정서와 세계관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만이 만유를 지으신 창조주이시며 유일하신 하나님이시라고 알았고, 그 하나님의 율법대로 순종하며 사는 것이 존재의 이유요 의무라고 생각했습니다. 사울은 유대인의 쉐마, 즉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하나님이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신6:4-5)는 말씀을 따라 살았습니다.

그런 사울에게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가 주님이라는 것은 절대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것은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하신 하나님이시다’는 유대인의 쉐마에 어긋나는 일이요 신성모독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외에 또 다른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못 본 척 지나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을 핍박하고 잡아 가두는 일에 앞장서는 것이 마땅했습니다.

 

그런데 그 사울이 변했습니다. 변해도 조금 변한 게 아니라 완전히 변했습니다. 예수를 핍박하던 그가 예수 때문에 온갖 핍박을 받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스스로 예수의 종을 자처하면서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했습니다. 세계관과 종교관이 달라졌습니다. 존재와 삶이 변했습니다. 그야말로 코페르니쿠스적인 혁명이 일어났습니다.

 

무엇 때문일까요? 사울에게 어떤 일이 있었기에 그처럼 엄청난 변화가 일어난 것일까요? 탁월한 영적 스승을 만나서였을까요? 깊이 기도하는 중에 깨달음을 얻어서였을까요? 아닙니다. 그가 핍박하던 예수를 만났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가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영광의 본체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를 통해, 그리고 그 예수 안에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새롭게 보았기 때문입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신 인식이 달라졌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스라엘의 하나님과 다른 하나님을 만난 게 아닙니다. 지금까지 유대교의 전통 속에서 알았던 하나님, 율법을 통해서 알았던 하나님과 같은 하나님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하나님을 십자가에 못 박혔다가 부활하신 예수를 통해 새롭게 안 것입니다.

 

사울이 그전까지 알았던 하나님은 이스라엘만의 하나님이었습니다. 용서를 하기는 하지만 율법의 의를 요구하는 하나님이었습니다. 누구에게도 짓밟힐 수 없는 전능자요 절대자이셨습니다. 인간의 몸을 입을 수 없는 하나님이었습니다. 저주의 십자가에 죽어서는 안 되는 하나님이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십자가에 죽는다는 것은 절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계시된 하나님은 이전의 알던 그런 하나님이 아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계시된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실 뿐만 아니라 이방인의 하나님이기도 했습니다. 율법의 하나님이실 뿐만 아니라 용서의 하나님이기도 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실 뿐만 아니라 연약한 하나님이기도 했습니다. 세상을 이기는 하나님이실 뿐만 아니라 세상에게 짓밟히는 하나님이기도 했습니다. 영원히 죽지 않는 참 생명이시지만 죽을 수도 있는 분이셨습니다. 하지만 그분의 죽음은 죽음을 삼킨 죽음이었습니다. 죽음을 삼키고 부활하신 죽음이었습니다. 사울은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까지 그런 하나님에 대해 알지 못했습니다. 아니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 사울을 부활하신 예수님이 불렀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핍박하느냐?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다. 바로 그 예수를 통해서 사울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새롭게 보았습니다. 율법의 하나님을 새롭게 알았습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한다면, 사울은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 부활하신 예수에게서 진정한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사실 십자가는 미련한 것이고 연약한 것입니다. 지혜를 추구하는 헬라인에게는 미련하기 그지없는 것이고, 능력을 추구하는 유대인에게는 연약하기 짝이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십자가는 하나님과 어울릴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사울은 놀랍게도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가 3일 만에 부활하신 분을 통해서 하나님의 지혜와 사랑과 능력의 실체를 보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새롭게 알게 된 이 체험은 사울에게 엄청난 지각변동을 가져다주었습니다. 영적인 지각변동, 신 인식의 지각변동, 세계관의 지각변동, 가치관의 지각변동, 존재의 지각변동, 삶의 지각변동을 가져다주었습니다. 이런 변화는 정말 한 번도 생각한 적이 없는, 한 번도 꿈꾸어 본 적이 없는, 그야말로 벼락처럼 닥친 변화였습니다.

사울은 더 이상 이전처럼 살 수 없었습니다. 이방인을 냉대할 수도 없었고, 할례를 고집할 수도 없었습니다. 율법의 의를 자랑할 수도 없었습니다. 유대인의 적자임을 내세울 수도 없었습니다. 높은 학벌과 지식을 자랑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 모든 것이 지금까지는 자존심의 근거였지만 이제는 그 모든 것이 똥에 불과했습니다. 아무 것도 아닌 거품에 불과했습니다. 그랬습니다. 신 인식이 달라지자 사울의 모든 것이 달라졌습니다. 삶의 목표, 삶의 방향, 삶의 내용이 전부 달라졌습니다.

 

사실입니다. 하나님 인식은 하나님 인식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하나님 인식은 인생살이 구석구석에 가장 강력하고 근본적인 영향을 미칩니다. 신 인식이 영향을 미치지 않는 영역은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인식하는 것이 그리 중대한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신을 인식하는 것과 인식하지 않는 것이 인생살이에 큰 차이를 가져다준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고작해야 신앙의 문제 정도로 생각합니다. 교회생활을 하느냐 안 하느냐, 예배를 드리느냐 안 드리느냐, 기도를 하느냐 안 하느냐 정도의 차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인식하며 사느냐 인식하지 않고 사느냐 하는 것은 단지 신앙의 문제가 아닙니다. 교회 나가느냐 안 나가느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이것은 우리의 존재와 삶 전체가 걸린 매우 심각한 문제입니다. 오늘 내 모든 행동과 생각과 관점과 삶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가장 현실적인 문제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똑같이 하나님을 믿어도 하나님을 어떤 하나님으로 인식하느냐에 따라 엄청난 차이가 생깁니다. 제 경험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제가 예수 믿고 처음 10여 년 동안은 다른 그리스도인들과 소통하는데 별 문제가 없었습니다. 동료 그리스도인들과 나 사이에 차이를 발견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성경을 알아가면 알아갈수록, 하나님을 알아가면 알아갈수록 이상하게도 그리스도인들과 점점 틈이 벌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선후배 목사님들과도 틈이 벌어지기 시작했습니다. 만나서 대화를 해보면 관점도 다르고, 생각하는 것도 다르고, 목회하는 방식도 다르고, 모든 게 달랐습니다. 왜 이렇게 된 것일까요? 성향이 다르고 기질이 달라서일까요? 제가 삐딱해서일까요? 아닙니다. 저는 삐딱한 사람이 아닙니다. 빼어나게 독특한 사람도 아닙니다. 지극히 평범한 보통사람에 불과합니다. 그런 제가 일반 그리스도인이나 목회자들과 소통이 잘 안 되는 이유는 다른데 있지 않습니다. 그들과 저 사이에 하나님 인식의 차이가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을 보십시오.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까지 그는 유대인들과 소통하는데 아무런 어려움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만나고 나서는 달라졌습니다. 더 이상 유대인들과 소통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과 함께 공유할 수 있는 것이 거의 없었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 달라졌기 때문입니다.

물론 사울 시절에 믿었던 하나님이나 바울이 된 이후에 믿는 하나님이나 같은 하나님인 건 분명합니다. 사울이 유대교에서 믿었던 창조주 하나님을 지금도 믿고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을 똑같이 믿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같은 하나님임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그때까지 알았던 하나님을 넘어섰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 확장되고 깊어졌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 부활하신 예수를 통해 이전에 알지 못했던 하나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유대교의 하나님에 머물러 있었던 반면, 바울이나 다른 사도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 인식이 확장되고 깊어졌습니다. 바로 이 차이가 정통 유대교와 초기 기독교의 차이였습니다. 사울과 바울의 차이였습니다. 한 마디로 신 인식의 차이였습니다.

 

그렇다면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를 통해 바울의 하나님 인식이 어떻게 달라졌을까요?

첫째, 바울은 십자가를 통해서 종 되신 하나님, 스스로를 낮추시는 겸손하신 하나님을 보았습니다(빌2:5-8). 전능한 힘으로 세상을 정복하고 굴복시키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세상에게 굴복당하고 짓밟히는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그 결과 바울은 지금까지 자랑으로 여겼던 모든 것을 쓰레기로 여기고 약한 것을 오히려 자랑하게 되었습니다. 약한 것들 외에는 자랑하지 않았습니다(고후12:5). 약한 것이 곧 강함이라는 역설을 깨달았습니다. 승리를 통해서가 아니라 옥에 갇히고 매를 맞고 핍박당하는 것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파되는 것을 기뻐했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바울이 예수를 통해 보았던 그 하나님을 알고 있을까요? 승리의 하나님, 전능하신 하나님 말고 무기력한 하나님을 알고 있을까요? 세상의 어둠에게 왕창 깨지는 하나님, 죄악에게 능욕당하는 찌질이 하나님을 알고 있을까요? 제가 볼 때는 모르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찌질이 하나님을 모르고 승리의 하나님, 전능하신 하나님만 알고 있기 때문에 우리의 신앙 양식이 공격적이고 승리주의에 사로잡힌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불교 사찰에 들어가서 땅밟기 하고, 단군상의 목을 꺾어 넘어뜨리고, 일본의 대지진과 쓰나미를 우상 숭배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말하는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면 반드시 성공한다고 믿는 것도 찌질이 하나님을 모르기 때문이라고 생각됩니다.

사울이 예수 믿는 자들을 잡아 가두고 핍박하는 일에 앞장섰던 것은 그의 하나님 인식이 그러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오늘날 한국교회가 욕먹는 짓을 많이 하는 것도 하나님 인식이 그러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아직도 배불리 먹여주시는 하나님, 승리와 영광의 면류관을 씌워주시는 하나님으로만 알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 인식이 유치하기 때문에 유치한 말과 행동을 하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보기에 오늘 한국교회의 일반적인 하나님 인식은 유대교 수준(사울 수준)의 하나님 인식에 머물러 있다고 생각됩니다. 다들 예수님의 십자가를 말하고 부활을 말하기는 하지만 하나님 인식은 그렇지 못하다고 생각됩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 부활하신 예수를 통해 계시된 하나님을 제대로 알지 못한다고 생각됩니다. 사울이 바울이 되어야 진정한 기독교의 세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드러난 하나님나라의 복음의 세계를 알고, 그 세계에 걸맞게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할 터인데, 한국교회는 일반적으로 바울의 단계에 오지 못했다고 생각됩니다. 바울이 십자가를 통해 본 그 하나님을 얼핏 보기는 했지만 깊이, 제대로 보지는 못했다고 생각됩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가 생각하는 승리자, 우리가 생각하는 전능자가 아닙니다. 그분은 무기력한 전능자이시고, 굴욕당하는 승리자이십니다. 지진과 쓰나미로 심판하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지나친 욕망이 부른 재앙으로 쓰러진 자들과 함께 아파하시고 슬퍼하시며 위로하시는 분이십니다. 사울은 십자가의 예수를 통해서 바로 이런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여러분께서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런 하나님을 만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 인식이 확장되고 깊어지기를 바랍니다.

 

둘째, 바울은 십자가의 예수를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보았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신다는 위대한 진실을 보았습니다. 저주의 십자가가 사실은 하나님의 사랑의 절정이고, 세상을 구원하는 위대한 능력임을 보았습니다. 바울이 십자가에서 결코 흔들리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을 보았기에 이렇게 말할 수 있었습니다(롬8:31-39).

 

여러분에게 묻겠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사랑을 믿으십니까? 믿는다면 과연 어디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확인하시나요? 건강의 축복, 물질의 축복, 만사형통의 축복에서 확인하시나요? 가문의 성공에서 확인하시나요? 기도 응답에서 확인하시나요? 그런 것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확인하는 것은 매우 위태로운 방식입니다. 지혜롭지 않은 방식입니다. 그런 방식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확인하게 되면 하나님의 사랑이 언제 어디서 무너질지 모릅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언제 어떻게 원망하게 될지 모릅니다. 바울은 그런 것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확인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십자가에서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여러분, 바로 이것이 기독교의 근본입니다. 십자가에서 계시된 하나님의 사랑, 이것이 기독교의 뿌리이고 기독교의 본질입니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본 자라야 바울처럼 어떤 고난에도 무릎 꿇지 않을 수 있습니다. 잠시 흔들렸다가도 다시 일어설 수 있습니다. 그래요. 하나님의 사랑은 떡을 주는 것으로 나타나지 않습니다. 금덩이를 내려주는 것으로 나타나지 않습니다. 승리와 영광의 면류관을 씌워주는 것으로 나타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놀랍게도 십자가에서 나타났습니다. 달리 말하면 우리가 승리할 때가 아니라 패할 때, 우리가 강할 때가 아니라 약할 때, 우리가 부유할 때가 아니라 가난할 때 오히려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난다 그 말입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역설이고 하나님 사랑의 역설입니다.

여러분, 십자가로 표현되는 이 하나님의 사랑의 역설에 눈을 뜨시기 바랍니다. 바로 이 사랑의 역설에 눈을 뜰 때 우리는 세상의 그 무엇도 무너뜨릴 수 없는 진실로 강한 자들이 됩니다. 어떤 시험과 어려움이라도 돌파해내는 자들이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죽음보다 강합니다. 독생자를 아끼지 아니하시고 내어주신 사랑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 사랑에 붙들린 자는 결코 무너지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 사랑에 붙들린 자들입니다. 십자가의 사랑에 붙들린 참으로 복된 자들입니다. 비록 지금은 우리가 그 사랑을 희미하게 알고 있지만 종말의 때가 되면 우리가 얼마나 놀라운 사랑에 붙들려 있었는지를 알게 될 것입니다. 그때까지 이 사랑을 의심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지금 하나님의 불같은 사랑 안에 살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