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시록은 일반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책이라고 이해되고 있습니다. 인류의 미래를 예언한 책일 뿐만 아니라 알 수 없는 암호로 가득한 책이라고 인식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일반 성도들은 읽어도 무슨 이야기인지 알 수 없는 책, 하나님께 직통 계시라도 받아야 이해할 수 있는 책이라고 막연히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계시록에는 낯선 상징과 이미지들이 가득하고, 천사와 괴기스런 동물들이 등장하고, 무시무시한 심판과 전쟁이야기가 많고, 뜻 모를 숫자가 등장하긴 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런 것들에게 기죽을 필요는 전혀 없습니다. 그런 것들은 해독해야 할 신비한 암호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계시록에 나오는 많은 이미지와 상징은 이미 구약에 나와 있는 것들이 대부분이고, 사도 요한 당시의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짐작할 수 있는 것들이었지 영성이 깊은 사람만 해독할 수 있는 X파일이 아닙니다. 계시록을 미래 역사의 X파일로 이해하는 것은 요한계시록을 가장 크게 오해하는 것입니다. 모든 성경이 그렇듯이 요한계시록 또한 사도 요한이 서두에서 밝힌 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입니다.

 

성경은 기본적으로 예언이고 계시입니다. 성경이 예언이고 계시라는 것은 인간이 수천 년 동안 쌓아올린 지혜의 금자탑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인간이 찾고 발견한 것들을 쌓아놓은 지혜의 금자탑이 아니라 하나님이 열어서 보여주신 비밀이라는 뜻입니다. 요한계시록도 마찬가지입니다. 요한이 쓴 계시록은 예수를 통해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예수를 통해서만 볼 수 있는 비밀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알게 하신 것이지 요한이 연구하고 기도해서 알아낸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계시입니다.

모든 사람은 세상의 눈으로 세상을 봅니다. 인간의 눈으로 인생을 봅니다. 오늘의 눈으로 내일을 봅니다. 과학도 그렇고, 의학도 그렇고, 법학도 그렇고, 철학도 그렇고, 수학도 그렇고, 역사도 그렇습니다. 심리학이나 경영학이나 경제학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상식과 교양도 예외가 아닙니다. 다 세상의 눈으로 세상을 본 것이고, 인간의 눈으로 인생을 본 것이고, 오늘의 눈으로 내일을 본 것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하늘을 통해 땅을 본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심지어 대부분의 종교조차도 하늘을 통해 땅을 보기보다는 땅을 통해 하늘을 보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다릅니다. 모든 성경은 하늘을 통해 땅을 이야기한 것들입니다. 하나님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이야기한 것이 바로 성경입니다. 계시록은 더더욱 그렇습니다. 계시록은 다른 어떤 성경보다 더 직접적인 계시를 담고 있습니다. 요한은 하늘의 관점에서 세상을 보기 위해 하늘로 끌어올려졌습니다. 물론 몸이 하늘로 올라간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요한은 환상 중에 열린 하늘을 보았습니다. 하늘에서 하나님의 직접적인 신탁을 들었고, 하나님의 눈으로 역사의 종말을 보았습니다. 종말론적인 미래의 눈으로 지금의 현실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보고 들은 것을 기록했습니다. 물론 보고 들은 것을 어떤 형식도 없이 낱낱이 기록한 것이 아니라 신학적이고도 문학적인 형식을 갖춘 정교한 구조물로 완성을 했습니다. 바로 이것이 요한계시록의 독특함입니다. 우리는 흔히 몇 년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몇 년에 어떤 재앙이 닥치고, 몇 년에 어떤 나라가 멸망하고, 몇 년에 예수님이 재림하고 천년 왕국이 시작된다고 말하는 것을 예언이라고 생각하는데 성경은 한 번도 그런 이야기를 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오직 하늘을 통해서 땅을 이야기하고, 종말론적 관점에서 오늘을 이야기할 뿐입니다.

 

요한계시록이 쓰인 시기는 대략 주후 90년대 도미티안이 로마의 황제로 있을 때일 것이라는데 대체적으로 동의하고 있습니다. 도미티안 황제는 아버지와 형을 뒤이어 주후 81년에 황제가 되었습니다. 그는 황제로 등극하기까지 30년을 기다렸고, 오랜 시간을 기다려왔던 만큼 즉시 절대 권력을 향한 야욕을 불태웠습니다. 그는 살아있을 때 자신을 예배할 것을 요구했는데, 모든 공식 문서에 “우리의 주, 그리고 우리의 신이 명령하신다...”라는 말로 시작하게 했습니다. 그리고 각 달에 자신들이 이름을 붙였던 율리우스 케자르(7월-Juli)나 아우구스투스(8월-August)에게 뒤지지 않기 위해 10월을 자신의 이름을 따서 “도미티아누스”(Domitianus)라고 부르게 할 정도였고, 절대 권력을 휘두르기 위해 원로원 회원들과 공개적으로 투쟁해서 유배시키고, 어떤 것이든 꼬투리를 잡아서 처형하곤 했습니다. 귀족뿐 아닙니다. 자신에게 적대적이라고 생각되는 점성가들은 로마 밖으로 추방했고, 철학과 종교를 박해했습니다. 특히 로마를 비난하는 선지자들의 종교에 대해서는 예외 없이 박해를 가했습니다. 로마 제국 동부에 있는 황제의 신전에 황제의 형상을 세워놓고 숭배하기를 강요했고, 황제를 숭배하지 않는 것은 곧 국가에 충성하지 않는 것으로 간주했습니다. 그러니 황제 숭배를 거부하는 기독교도들은 로마의 밥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유대 역사가 유세비우스는 도미티안 황제를 가리켜 기독교도들을 박해한 네로의 후계자라고 말했습니다. “도미티안은 로마에서 상당히 많은 귀족들과 저명인사들을 부당하게 살해했고, 마침내 그는 하나님을 미워하고 적대하는 일에 있어 네로의 후계자가 되었다” 초대교회의 교부였던 터툴리안도 도미티안을 네로의 후계자라고 지목했습니다.

 

바로 이런 상황 속에서 사도 요한은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계시록을 썼습니다. 그때 아시아의 교회들은 주요 도시에서 상당히 정착을 했지만 네로 황제 때부터 시작된 박해에 계속 시달려야 했습니다. 요한 자신도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것 때문에 붙잡혀 밧모라는 작은 섬에 갇혀 있는 신세였습니다. 그는 자기 자신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나 요한은 너희 형제요, 예수의 환란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를 증언하였으므로 말미암아 밧모라 하는 섬에 있었더니.”(1:9). 그렇습니다. 요한 뿐 아니라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이 당한 환란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비록 예수의 복음이 증거하는 하나님나라에 참여하고는 있었지만, 그 때문에 당하는 환난을 참고 인내해야 했습니다.

 

그때 그리스도인들에게 가장 큰 영적 도전이 무엇이었을까요? 로마 치하의 그리스도인에게 가장 큰 시험이 무엇이었을까요? 그건 ‘누가 세상의 진정한 주인인가?’하는 문제였을 겁니다.

여러분, 그리스도인이 어떤 사람입니까?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만을 유일한 주님으로 고백하는 자들입니다. 하나님만이 세상의 진정한 통치자이자 주인이라고 믿는 자들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도 인간입니다. 아무리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고백하며 예배한다 할지라도 여전히 눈에 보이는 것으로 판단하고, 세상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인간의 눈으로 인생을 보고, 오늘의 눈으로 내일을 보는 인간입니다. 당시의 사람들을 지배하고 있는 이데올로기와 관점으로부터 자유하기가 어려운 인간입니다. 더욱이 그 당시는 로마 황제의 권력과 제국주의적 이데올로기가 세계를 지배하고 있던 때였습니다. 로마 황제가 세상의 주인으로 호령하던 때였습니다. 로마 권력에 빌붙어야 승리할 수 있고, 로마 권력에 굴복해야 살아남을 수 있는 시대였습니다. 진실로 그랬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의 주인이요 통치자라는 흔적은 어디에서도 발견하기가 어려웠습니다. 눈에 보이는 현실은 온통 로마의 영향력뿐이었지 예수 그리스도의 영향력은 없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권은 신앙고백으로만 존재할 뿐 그 어디에서도 물증을 찾기가 어려웠습니다.

 

21세기를 살아가는 오늘 우리의 상황은 어떻습니까? 오늘 우리의 삶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과연 무엇입니까?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가 왕이라는 사실을 고백하고 있기는 하지만 실제로 그리스도의 통치권을 실감하며 살고 있습니까? 그리스도가 세상의 주인이라는 사실을 증명할 무엇이 있습니까? 여러분, 증명할 무엇이 있다면 한 번 말씀해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를 믿었더니 병이 나았다고요? 마음에 평안이 왔다고요? 하는 일마다 잘 된다고요? 깨질 위기에 있던 가정이 회복되었다고요? 그러니 예수님이 왕이시라고요? 물론 그것도 진실은 진실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진실의 일부에 불과합니다. 조금만 정직하게 눈을 뜨고 현실을 폭넓게 살펴보십시오. 깨질 위기에 처한 가정이 회복된 것도 사실이지만 여전히 깨질 위기가 상존하는 것도 사실입니다. 병이 나은 것도 사실이지만 여전히 어떤 질병에 무너질지 모르는 잠재적 위기 속에서 살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마음에 평안이 온 것도 사실이지만 수시로 밀려드는 염려와 불안을 떨칠 수 없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하는 일마다 잘 되기도 하지만 하는 일이 실패할 가능성이 항상 열려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여러분, 그렇지 않습니까? 이것이 그리스도인이 살아가는 현실 아닙니까?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 나를 지켜주신다고 믿고 찬양함에도 불구하고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돌봄을 받는 내가 승리하지 못할 때가 많은 것이 사실 아닙니까? 하나님이 나를 지켜주신다는 보장을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는 것이 사실 아닙니까? 지진과 쓰나미로 수천 명의 목숨이 희생을 당해도 전능하신 분께서 방패막이가 되어주지 못하는 것이 사실 아닙니까? 솔직히 그렇습니다. 예수가 왕이라는 우리의 고백은 사실 너무나도 비현실적인 이야기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이 세상을 다스리는 최고의 통치자라고 말하면, 예전에는 사람들이 조금 귀를 기울였는데 지금은 다 비웃습니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라고 비웃습니다.

 

아주 정직하게 말해봅시다. 돈은 한 끼 밥을 해결해 줍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한 끼 밥을 해결해 주지 않습니다. 돈은 나에게 실제적인 권력을 제공합니다. 돈이 있으면 사람을 부릴 수도 있고요, 사람이 따르기도 합니다. 돈이 있으면 국회의원직도 살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나에게 어떤 힘도 제공하지 않습니다. 어떤 자리 하나도 만들어주지 못합니다. 지금 이 세상은 돈과 브랜드와 인맥이 힘을 발휘하는 세상이지 예수님이 힘을 발휘하는 세상이 아닙니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고백하는 신앙인들조차도 입으로는 그렇게 고백하지만 실제로는 돈을 좇고 있는 겁니다. 옷 하나를 살 때도 브랜드를 보고 사는 겁니다. 심지어 교회를 선택할 때도 교회 브랜드를 보지 않습니까. 사실입니다. 돈, 브랜드, 인맥의 힘은 현실이지만 예수의 힘은 비현실입니다. 현실 앞에서 예수님은 무기력하기가 짝이 없습니다. 예수가 왕이라는 것은 세상의 눈, 현실의 눈, 상식의 눈으로 보면 말이 안 되는 비현실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1세기 그리스도인도 그렇고, 21세기 그리스도인도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수는 주’라는 신앙고백을 조금이라도 진지하게 고민하는 사람이라면 ‘누가 과연 이 세상의 주인’인지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더욱이 요한과 동시대를 살았던 1세기 그리스도인들에게 이 문제는 정말 생명이 걸린 절박한 문제였습니다. 예수를 왕이라고 고백하면 죽을 수도 있는 현실 앞에서 그들은 정말 깊이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속으로 묻고 또 물었을 것입니다. 예수여, 우리의 믿음대로 당신은 진정 왕이십니까? 당신은 진정 세상의 통치자이십니까? 묻고 또 물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물음 앞에서 믿음이 흔들리는 자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왕이라는 사실을 더 이상 신뢰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회의에 빠진 자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사실 ‘누가 이 세상을 다스리는 진정한 왕이냐?’하는 물음은 1세기 그리스도인뿐 아니라 모든 시대의 그리스도인에게 피할 수 없는 물음입니다. 1세기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냐 로마냐’를 물어야 했다면, 21세기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냐 돈이냐’를 물어야 합니다. 이 물음은 모든 그리스도인이 물어야 할 가장 근본적인 물음이고 가장 현실적인 물음입니다. 그리고 요한계시록은 바로 이 물음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책입니다. 이 물음에 대해 가장 효과적인 해답을 제시하고 있는 책입니다.

 

계시록이 제시하는 해법은 바울처럼 논리적이거나 교리적이지 않습니다. 요한은 청중을 논리적으로 설득하지 않습니다. 논리를 뛰어넘는 직관과 상상력을 동원하는 방식으로 해법을 제시합니다. 다시 말하면 이 땅의 현실에서 하늘로 공간 이동을 하게 합니다. 눈앞의 현재에서 종말론적 미래로 시간 이동을 하게 합니다. 이렇게 공간 이동과 시간 이동을 해서 하늘에서 눈앞의 현실을 보게 하고, 종말론적 미래에서 오늘을 보게 합니다. 하나님이 욥을 데리고 우주적인 창조의 신비를 보게 한 것처럼, 하나님은 요한에게 하늘에서 땅을 보게 했고, 역사의 종말을 보게 했습니다. 그리고 본 것을 증언하게 했습니다. 그게 전부입니다. 논쟁하거나 설득하지 않고 본 것을 말하게 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세상 안에서, 역사 안에서 아무리 논쟁을 해봐도 누가 이 세상을 다스리는 진정한 주인인지를 판단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하루살이들끼리 모여서 봄, 여름, 가을, 겨울을 논해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기껏해야 2주일 정도를 사는 게 전부인데, 그 하루살이들이 무슨 수로 사계절을 알 수 있겠습니까? 절대 알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세상과 역사의 눈으로는, 누가 세상의 진정한 통치자인지 알 수 없습니다. 종말까지 가봐야 판가름 나는 일을 무슨 수로 알 수 있겠습니까?

앞에서도 말했지만 모든 사람은 이미 세상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데 길들여져 있습니다. 인간의 눈으로 인생을 보고, 오늘의 눈으로 내일을 보는데 길들여져 있습니다. 과학 · 의학 · 법학 · 철학 · 수학 · 역사 · 심리학 · 심리학 · 경영학 · 경제학 · 도덕 · 전통 · 상식을 통해서 매우 뿌리 깊게 길들여져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아무리 성경을 읽고 예배를 드리고 기도를 해도 하늘을 통해 땅을 보고, 종말론적 시각으로 현재를 본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사실은 설교조차도 하늘을 통해 땅을 보고, 하늘의 눈으로 땅을 이야기하는 경우가 드뭅니다. 사실입니다. 하늘을 통해 땅을 보고, 하늘의 눈으로 땅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아니, 어쩌면 거의 불가능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계시하신 겁니다. 하나님이 열어서 보여주신 겁니다. 요한은 하나님의 계시를 힘입어서 하늘에서 땅을 보았습니다. 종말론적 관점에서 역사를 보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요한은 더 이상 세상을 통해서 세상을 말하지 않습니다. 역사의 눈으로 역사를 말하지 않습니다. 요한은 1세기 그리스도인들을 매우 낯선 곳으로 초대합니다. 눈에 보이는 현실 너머로, 인간과 세상 나라들의 역사 너머로 초대합니다. 그리고 거기서 눈앞의 현실을 보게 합니다. 로마의 통치권이 지배하는 눈앞의 현실을 보게 합니다. 머지않아 그들의 통치권이 무너지는 것을 보게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궁극적인 승리를 보게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로마의 통치자가 진정한 통치자가 아님을 증거합니다. 예수가 진정한 승리자이심을 증거합니다. 그러면서 마지막 승리의 날까지 흔들리지 말고 믿음으로 견디라고 말합니다. 현재의 약함에 넘어지지 말라고 말합니다. 바로 이것이 요한계시록이 말하고 있는 핵심 주제입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은 신념이 아닙니다. 신념은 자기 확신의 강화일 뿐이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현실을 보는 눈, 하늘을 통해 땅을 보는 눈은 없습니다. 그런데 믿음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현실을 보는 눈, 하늘을 통해 땅을 보는 눈, 종말론적 시각으로 현재를 보는 눈이 있습니다. 사실입니다. 믿음과 신념의 차이는 눈이 있음과 없음의 차이입니다. 그리고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현실 때문에 눈앞의 현실을 넘어서는 것, 눈앞의 현실을 참아내는 것이 바로 믿음의 능력입니다. 눈앞의 현실에 휘둘리지 않고 하나님 앞에서 현실을 살아내는 것이 믿음의 능력입니다. 우리 모두 요한계시록을 통해서 그런 믿음의 능력을 얻게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