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계시록은 일차적으로 요한이 목회한 아시아의 일곱 교회에 보낸 편지입니다. 교회가 예배를 드릴 때에 읽고 들으라고 보낸 편지입니다. 그런데 요한은 이 편지를 쓰면서 서두에서 아주 진지하게 이야기합니다. 이 편지는 사사로운 편지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고, 그리고 내가 편지에서 말하는 모든 내용은 ‘반드시 속히 될 일’이라고 말입니다. 3절에서는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다, 때가 가깝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무슨 이야기입니까? 이 편지에는 반드시 속히 될 일이 담겨 있으니 귀담아 듣고 힘써 지켜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다시 말하면 말씀이 실현된다는, 계시가 현실이다, 지금 눈앞의 현실은 아니지만 분명한 현실이다는 것을 강조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편지 서두에서 계시의 현실성을 그처럼 강조하는 것일까요? 사람들이 현실성 없는 허황한 이야기라고, 종교적인 환상에 불과한 것이라고 치부할까봐서였을까요? 아마 그래서였을 겁니다. 사실 요한묵시록에는 공상과학 영화 같은 허무맹랑해 보이는 이야기들이 많이 나오거든요. 종교적인 상상력은 대단할지 모르지만 현실성은 찾아보기가 어렵거든요. 그러기 때문에 요한은 자기가 본 계시가 막연한 환상도 아니고, 허무맹랑한 종교적 이상도 아니고, 상상의 나래를 펼쳐본 공상도 아니라고 정색을 합니다. 이 모든 이야기는 반드시 속히 될 일이라고 확실하게 못을 박습니다. 물론 눈앞의 현실은 아니지만 실현될 날이 그리 멀지 않은 사실이라고 못을 박습니다.

 

여기서 놀라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요한이 자기가 본 환상과 계시를 ‘반드시 속히 될 일’로 보았다는 사실입니다. 단지 환상과 계시로 본 것이 아니라 환상과 계시 속에 현실이 담보되어 있다고 보았다는 것입니다. 계시의 실현성, 계시의 현실성을 굳게 믿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도대체 계시의 현실성을 믿는 배경이 뭔지, 아무리 생각해봐도 계시의 현실성이 의심되는데 그런 계시를 ‘반드시 속히 될 일’이라고 믿는 배경이 뭔지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여러분, 무엇 때문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계시의 내용에 신빙성이 있어서일까요? 그 내용이 충분히 검증된 것이라는 판단이 섰기 때문일까요? 아니면 순전히 요한의 확신에 근거한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요한이 계시의 현실성을 굳게 믿은 것은 요한의 영적 경험이나 판단력에 근거한 것이 아닙니다. 요한이 계시의 현실성을 굳게 믿은 것은 계시의 주체가 하나님이라는 사실 때문이었습니다. 요한은 1절에서 분명하게 말합니다. 이 계시는 하나님이 예수에게 준 것이며, 그의 천사를 요한에게 보내어 알게 하신 것이라고. 그렇습니다. 요한에게 임한 계시가 하나님의 말씀이고, 하나님이 열어서 보여주신 것이라는 사실 때문에 요한은 계시의 모든 내용이 반드시 속히 될 일이라고 굳게 믿었습니다.

 

물론 이것은 증명이 불가능합니다. 하나님이라는 존재 자체를 증명할 수가 없는데, 그분이 계시를 주셨다는 것을 무슨 수로 증명하겠습니까? 본래 하나님 경험은 객관적인 물증이 없습니다. 그것이 하나님 경험의 특징입니다. 10절을 볼까요? 여기서 요한은 분명히 나팔 소리 같은 큰 음성을 들었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그 소리는 녹음할 수 있는 소리가 아니었습니다. 12절에 보면 요한이 음성의 주인을 알아보려고 몸을 돌이켰는데, 그때에 일곱 금 촛대를 보았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촛대 사이에 인자 같은 이가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 머리와 털은 희기가 양털 같고, 눈은 불꽃같고, 얼굴은 해가 힘있게 비치는 것 같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그 모습은 사진으로 찍어놓을 수 있는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요한이 보고 들었다는 것들은 물증을 내놓을 수 없는 것들이었습니다. 아니, 물증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한 것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요한은 객관적인 물증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자기가 듣고 본 것을 하나님의 계시라고 믿었고, 그 계시 속에 담보되어 있는 현실성을 굳게 믿었습니다. 반드시 속히 될 일이라고 확신했습니다.

 

바울도 같은 경험을 했습니다. 고린도후서 12장에 보면 바울이 경험한 주의 환상과 계시가 나옵니다(고후12:1-4). 여기서 바울은 환상과 계시를 볼 때에 객관적인 물증은 고사하고 자기 자신마저도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모른다고 말합니다. 인간의 말로는 가히 표현할 수 없는 말을 들었다고 고백합니다. 하지만 바울은 자기가 본 환상과 계시가 ‘주의 환상’이요 ‘주의 계시’라고 말합니다. 객관적인 물증도 없고, 본인마저도 그 상황을 충분히 파악하고 있지 못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주의 환상’이요 ‘주의 계시’라고 담대히 말합니다. 그뿐 아닙니다. 바울이나 요한은 그들이 보고 들은 예언과 계시를 위해 목숨을 걸었습니다. 온갖 핍박을 당하면서도 예언과 계시를 끝까지 증언했습니다.

 

그러고 보면 믿음이란 참 신비입니다. 어리석음입니다. 과학의 눈, 이성의 눈으로 보면 아무리 들여다봐도 물증이 없고, 현실성도 없는데 그것을 위해 목숨을 거니까 말입니다. 그래서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이성을 고집하는 사람들은 아브라함, 모세, 다윗, 이사야를 비롯한 선지자들, 베드로, 바울, 요한이 본 환상이나 계시를 심리적인 자기 투영이라고 평가절하합니다. 간절히 생각하면 꿈에 나타나는 것처럼 마음의 깊은 욕망이 어느 순간 착시현상으로 나타날 수 있는데 사람들이 그것을 신의 계시라고 착각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근거없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인간은 매우 오묘하고 복잡한 존재이기 때문에 마음과 육체와 정신 사이에 신비스런 일들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환청을 들을 수도 있고, 상상속의 세계와 현실 사이의 경계가 모호한 상태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현상을 경험하고 나서, 그걸 신의 계시라고 착각할 수도 있습니다. 사실입니다.

 

하지만 아브라함, 모세, 다윗, 선지자, 요한, 바울이 경험한 것은 정신착란이 아니었습니다. 저들의 말과 행동을 잘 살펴보십시오. 아무리 냉정하게 흠집을 찾아보려 해도 그들에게서 심리적인 자기 투영이라든지, 정신착란 같은 증상을 발견할 수가 없습니다. 저들은 현실과 비현실을 구분하지 못할 만큼 정신적으로 혼미하지도 않았고, 비현실을 현실로 착각하지도 않았습니다. 눈앞의 현실이 고통스러워 비현실의 세계로 도피하지도 않았습니다. 저들은 하나님의 계시를 경험하고 나서 눈앞의 현실을 재해석했습니다. 눈에 보이는 현실이 전부가 아님을 깨달았습니다. 현실의 무상함과 참담함을 깊이 꿰뚫어보았습니다. 그뿐 아닙니다. 현실의 무상함과 참담함에도 불구하고 그 현실을 하나님의 선물로 받고 뜨겁게 끌어안았습니다.

그래요. 믿음은 허구를 보는 것이 아닙니다. 환상을 사실로 착각하는 것도 아닙니다. 희망을 미래로 투사하는 것도 아닙니다. 믿음은 눈에 보이지 않는 현실을 보는 겁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고 보여주신 계시를 통해 현실을 새롭게 보는 겁니다. 그 현실이 비록 감각으로는 지각되지 않지만 그 현실을 비현실로 내던지지 않고 그 현실을 향해 발을 내딛는 겁니다. 믿음은 허구가 아니라 논리를 넘어선 논리이고, 과학을 넘어선 과학이고, 역사를 넘어선 역사이고, 현실을 넘어선 현실입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의 감각으로 판단하면 하나님의 계시가 비현실적으로 보이지만 계시 안에는 현실성이 담보되어 있습니다. 반드시 속히 될 일이 담보되어 있습니다. 요한은 하나님의 계시 속에서 바로 그 현실을 보았습니다. 현실을 넘어선 현실, 눈앞의 현실보다 더 생생한 현실, 때가 되면 반드시 성취될 종말론적 현실을 보았습니다.

 

물론 앞에서도 말씀했지만 요한이 자기가 경험한 예언과 계시를 어떻게 하나님이 주신 것이라고 믿을 수 있었는지, 어떻게 반드시 속히 될 일이라고 확신할 수 있었는지에 대해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사실 성경 저자 가운데 어느 누구도 그걸 증명하려 들거나 설명하려 들지 않았습니다. 모세를 보십시오. 모세가 하나님의 부름을 들었을 때 제일 먼저 걱정한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하나님이 자기에게 나타나셨다는 것을 사람들이 믿지 않을 것이라는 거였습니다(출4:1). 달리 말하면 자기가 지금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이 경험을 무슨 수로 설명하겠느냐는 겁니다. 어떤 물증도 없는데 사람들이 어떻게 믿겠느냐는 겁니다. 그래서 결국은 물증을 확보하고서야 동족들에게 갈 수 있었습니다(출4:1-9). 하지만 모세 자신은 그런 의문이 없었습니다. 자기를 부르는 음성이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임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요한도 그가 본 계시가 주님의 계시임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그렇습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만나면 아무런 물증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 하나님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요한은 성삼위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요한은 하나님을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게셨고, 장차 오실 이시라고 말했습니다(1:4). 이것은 요한의 설명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스스로 밝히신 것입니다. “주 하나님이 이르시되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 하시더라.”(1:8). 성령은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는 일곱 영이라고 말했고, 예수님은 하나님의 충성된 증인이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시고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분이시라고 말했습니다(1:5). 그리고 구름을 타고 다시 오실 것이라고 말했습니다(1:7).

여러분, 이게 무슨 말입니까? 계시의 주체이신 하나님과 예수님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주인이시라는 말입니다. 과거와 현재뿐 아니라 미래까지도 하나님 안에 있다는 말입니다. 그분만이 모든 시간을 다스리는 진정한 통치자이시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런 분께서 - 미래의 주인이신 분께서 미래를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역사를 다스리시는 분께서 역사의 종말을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 계시의 현실성을 어떻게 의심할 수 있겠습니까.

 

만일 요한의 경험이 단지 사람의 경험이라면, 종교적이고 신비스러운 영적 경험에 불과하다면 당연히 그 내용을 의심해야 하겠지요. 사람은 내일을 모르니까, 눈앞의 현실을 넘어설 수 없는 세계 내 존재이니까, 역사를 넘어설 수 없는 역사 내 존재이니까 당연히 종말론적 환상이나 계시를 의심해야 할 겁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 분이십니다. 영원부터 영원까지 존재하는 분이십니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존재하는 분이십니다. 더욱이 그분은 온 세계를 창조하신 분이십니다. 눈에 보이는 세계와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 모두를 다스리는 전능자이십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분은 어제뿐 아니라 내일도 아십니다. 눈에 보이는 세계뿐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도 아십니다. 그러니 그런 분의 말씀을 어떻게 신뢰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런 분의 말씀을 신뢰할 수 없다면 도대체 누구의 말을 신뢰한단 말입니까? 아니 그렇습니까? 요한이 계시의 현실성을 믿은 것은 계시가 믿을만 해서가 아닙니다. 요한이 계시의 현실성을 믿은 것은 계시의 주체이신 하나님을 신뢰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제가 예수님을 만나게 된 것은 형의 전도 때문이었습니다. 형이 먼저 예수를 믿었는데, 주말만 되면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하나님이 천지만물을 창조했고, 사람도 만들었고, 하나님은 지금도 살아계시고, 세상을 다스리신다고. 물론 처음에는 완강하게 거부했습니다. 형과 싸우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때인가부터 이런 생각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형이 동생한테 거짓말을 하지는 않을 것이다. 형이 하는 말이 다 거짓말은 아닐 것이다. 그러면서 형이 한 말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형의 말이 사실이라면 -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셨고 나도 만든 것이 사실이라면 적어도 나를 만드신 분은 알고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나를 만드신 분조차 알지 못하고 사는 것은 말이 안 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결국 스무살 때 창조주 하나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제가 하나님을 만나게 된 것은 형을 신뢰했기 때문입니다. 형이 하는 말은 믿을 수 없었지만 형은 믿을 수 있었기 때문에 형이 한 말을 곱씹어 본 것이고, 형이 한 말에 근거해서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알고 싶다는 기도를 하게 된 것입니다. 만일 형을 신뢰하지 않았다면 그렇게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사람은 참 의심이 많은 동물입니다. 끝없이 묻는 존재가 사람입니다. 그래요. 이것이 사람의 특징이고 장점입니다. 사람은 모든 일에 마땅히 의문을 갖고 질문을 해야 합니다. 의문을 갖는 것은 대단히 필요한 일입니다. 그런데 도무지 믿지 않는 것은 무서운 질병입니다. 하나님이 아담에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고 했는데 사람은 정녕 죽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하와가 대답한 것을 잘 보십시오. ‘죽을까 하노라’라고 대답했습니다(창3:3). 아브라함의 조카 롯이 살던 소돔성이 타락의 극치에 이르자 하나님께서 소돔성을 멸하시기로 작정하시고 롯에게 알려주시면서 네게 속한 자들을 성 밖으로 피신시키라고 말해주었습니다. 그때 결혼할 사위들이 그 말을 듣고 어떻게 했습니까? 농담으로 여기고 떠나지 않았습니다(창19:14). 부자가 거지 나사로 이야기는 더 놀랍습니다. 부자가 죽고 나서 아브라함에게 부탁합니다. 제발 나사로를 보내어 자기 형제들에게 증언하게 해달라고. 죽은 자가 살아나서 눈에 보이지 않는 이 현실을 이야기하면 회개할테니 제발 나사로를 지상에 있는 형제들에게 보내달라고. 그러자 아브라함은 말했습니다. “모세와 선지자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눅16:31).

그렇습니다. 믿지 않으려 들면 죽은 자가 돌아와서 얘기해도 믿지 않습니다. 오늘도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합니다. 말씀의 현실성을 무시합니다. 그것은 종교적인 차원에 불과하다고 평가절하 합니다. 그리고는 눈에 보이는 현실에 목숨 걸고 삽니다. 한 줌 밖에 안 되는 현실, 하루살이에도 미치지 못하는 허망한 현실에 평생을 코 박고 삽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여러분, 모든 것의 궁극적 현실은 하나님에게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만이 궁극적 현실입니다. 그리고 그 궁극적 현실을 보아야 눈에 보이는 현실과 눈에 보이지 않는 현실을 총체적으로 볼 수 있습니다. 요한이 그랬습니다. 요한은 하나님의 계시를 통해 말씀의 궁극적 현실을 보았습니다. 눈에 보이는 현실과 눈에 보이지 않는 현실, 역사의 현실과 역사 너머의 현실을 총체적으로 보았습니다. 오늘에 갇히지 않고 반드시 속히 될 일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눈에 보이지 않는 그 현실, 역사 너머의 그 현실로 도피한게 아니라 눈에 보이는 이 땅의 현실, 로마의 힘에 짓밟힘을 당하고 있는 고통스러운 역사의 현실을 재해석하며 그 현실을 살아냈습니다. 핍박 가운데에서도 평화를 잃지 않고 말씀의 현실, 계시의 현실을 증언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눈에 보이는 현실과 눈에 보이지 않는 현실을 총체적으로 보는 사람은 균형감각을 잃지 않습니다. 생활의 중심을 잃지 않습니다. 눈앞의 현실에 휘둘리지 않습니다. 부에도 처할 줄 알고, 가난에도 처할 줄 압니다. 눈앞의 현실에 좌절하지도 않고 우쭐하지도 않습니다. 비굴하지도 않고 거만하지도 않습니다. 겸손하면서도 당당하게 자기 인생을 삽니다.

 

지금 눈에 보이는 모든 현실은 결코 궁극적이지 않습니다. 눈앞의 현실이 아무리 대단해 보이고, 영원할 것처럼 생각될지라도 사실은 아침 안개와 같습니다. 지극히 순간적이며 이내 곧 썩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궁극적 현실입니다. 영원히 썩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안에는 현실성이 담보되어 있습니다. 반드시 속히 될 일이 잉태되어 있습니다. 새로운 현실이 잉태되어 있습니다. 비록 지금은 희미하게 보이고 부분적으로 보일지라도 종말론적 그 날이 오면 온전한 현실로 맞닥뜨리게 될 미래가 잉태되어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요한은 담대히 말했습니다.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다.”(1:3).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기 위해 지불하는 우리의 모든 수고는 결코 헛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눈앞의 승리를 위해 여러분의 인생을 경주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이 담보하고 있는 궁극적 진실, 하나님이 계시하신 궁극적 현실을 위해 여러분의 인생을 경주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