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종교를 마음의 위안을 얻기 위한 하나의 방편 정도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하여, 특정 종교가 추구하는 궁극적 진실이 무엇이냐보다는

모든 것이 불확실한 인생살이에서 마음을 깊이 내려놓을 만한 의지처 하나쯤 있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소박한 생각으로 종교를 선택하는 경우가 많다.

물론 종교는 사람의 마음과 정신을 다독여주고 삶의 무게에 짓눌리지 않도록 북돋아주는 역할을 하는 게 사실이다.

그것이 종교의 전부일 수는 없지만 종교가 감당해야 할 중요한 역할 중의 하나임에는 틀림이 없다.

 

하지만 기독교는 그런 차원의 종교적 기능을 넘어서는 곳에 위치한다.

기독교는 심리적 위로나 마음의 안정을 제공하는 것을 목표로 하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현재의 존재와 삶을 위로하거나 안정시키는 것을 본질적으로 거부한다.

현재의 존재와 삶을 긍정하고 격려하기보다는 오히려 그 비참함과 절대 한계를 보게 하고,

문명으로 덧칠된 삶의 허연 속살을 보게 하는데 기독교의 다름이 있다.

피상적인 비교에서 오는 오만과 좌절의 실체를 까발리며

평안과 안정을 희구하는 삶을 오히려 뒤흔드는데 기독교의 역설이 있다.

그렇다.

지금 당장 구원의 손길을 붙잡지 않으면 안 된다는 영혼의 싸이렌을 울리는 것이 기독교다.

지금의 존재와 삶이 진리와 생명에서 멀다는 위험 신호를 보내는 것이 기독교다.

문명의 허울과 거짓으로 숨겨놓은 진실을 외면하던 어둠의 속성을 진리의 빛으로 폭로하는 것이 기독교다.

 

기독교의 구원은 위로와 격려에서 출발하지 않는다.

기독교의 구원은 현재의 존재와 삶 속에 깊이 뿌리내린 죄와 짙은 어둠을 인식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그 죄와 어둠을 회개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그리고 난 후에야 비로소 구원이 임하고, 구원 안에 깃든 평강이 뒤따른다.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하는 일이 바로 그 일이다.

그런데 지금의 교회는 너무 성급하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죽음과 어둠에 갇힌 존재와 삶의 비참함을 말하기도 전에 심리적인 위로와 평안을 제공하기에 바쁘다.

문명과 교양의 허울을 뒤집어쓴 존재와 삶의 수치를 대면하게 하기보다는 긍정의 힘과 더 많은 축복을 약속하기에 바쁘다.

물론 위로와 격려가 나쁘다고 말하는 게 아니다.

심리적인 위로와 종교적인 평안으로 하나님의 구원을 빼앗고 있는 것이 안타까워 하는 말이다.

그리고 말씀샘교회가 ‘심리적 위로를 넘어 말씀의 깊이’를 표명하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