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은 단지 돈이 아니다.

산업자본주의가 발아하기도 전인 17세기에 극작가 세익스피어가 한 말을 들어보자.

“금? 귀중하고 번쩍거리는 순금? 아니, 신들이여!

헛되이 내가 그것을 기원하는 것은 아니라네.

이만큼만 있으면 검은 것을 희게, 추한 것을 아름답게 만든다네.

나쁜 것을 좋게, 늙은 것을 젊게, 비천한 것을 고귀한 것으로 만든다네.

이것은 사제를 사제단으로부터 유혹한다네. 풀기도 하고 매기도 한다네.

저주받은 자에게 축복을 내리고,

문둥병을 사랑스러워보이게 하고, 도둑을 영광스런 자리에 앉힌다네.”(아테네의 티몬, 제4막3장).

그렇다. 돈은 과거에도 신적인 권능을 행사하는 최고의 우상이었다.

 

소비가 곧 생활이 되어버린 오늘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자본이 왕 노릇하는 이 시대는 소비 능력이 곧 인간의 능력으로 통하는 시대이고,

소비를 통해 존재를 구별짓는 시대이기 때문에 돈은 생활의 알파와 오메가를 넘어 존재의 집이 되었고,

미래를 손아귀에 쥐는 희망의 안전판이 되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돈은 영혼의 양식으로까지 등극했다.

지갑이 빵빵하면 자기도 모르게 마음이 든든하고 유쾌해지는데 비해

지갑이 홀쭉하면 자기도 모르게 어깨가 처지고 우울해지는 것만 봐도 알 수 있고,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전능한 힘을 빌어 거대한 부의 축적을 꿈꾸고 희망하는 것을 보면

더더욱 의심의 여지가 없어 보인다. 사실이다.

오늘날 사람들은 돈의 힘에 깊이 길들여져 있다.

나이 · 교양 · 빈부와 상관이 없다. 다들 부의 축적을 인생의 제일 목적으로 삼는 것을 아주 당연하게 생각한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소유의 넉넉함에 생명이 있지 않다고 했다.

많은 것을 소유하는 것이 오히려 생명 참여에 장애가 된다고 했다.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심히 어렵다고 했다. 이유는 간단하다.

생명은 본래 소통과 엮임을 통해서만 가능한데 소유의 축적은 필연적으로 단절과 해체를 낳기 때문이다.

물론 모든 생명은 물적 토대 없이 존재할 수 없다.

모든 피조물의 도움 없이 생명을 호흡할 수 없다.

그런데 쌓음은 본질적으로 나의 미래적 생명을 위해 다른 생명의 물적 토대를 허무는 것이다.

하여, 소유의 부요를 추구하는 것으로는 절대로 삶을 꽃피울 수 없다.

삶은 오직 나눔과 소통으로만 가능하다.

증여와 나눔만이 자본주의의 축적 문화를 비웃는 가장 통쾌한 승리일뿐 아니라 가장 풍성한 생명 참여의 길이다.

자고로 삶(살림)은 소유와 소비의 권능을 의심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하는 법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