객관적인 복음을 선포하는데 주력한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에 편지하면서 매우 놀라운 이야기를 했다. ‘항상 기뻐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고, 모든 일에 감사하라’고 말이다(살전5:16-18). 나는 바울의 이 권면을 들을 때마다 ‘아니, 사람이 어떻게 항상 기뻐하고 모든 일에 감사한단 말인가? 이건 너무 비현실적인 요구 아닌가? 꿈같은 이야기 아닌가?’하는 강한 의문을 갖곤 했다. 사람은 결코 그렇게 살 수 없다는 생각에 비현실적인 말로만 들렸다. 그런데 세월이 흐르면서 달라졌다. 바울의 권면이 비현실적인 이상이거나 희망사항이 아니라 실제적인 권면일 수 있겠다고. 병마의 고통과 악이 들끓고 배고픔과 전쟁의 포화가 그치지 않는 이 땅에서도 항상 기뻐할 수 있고, 또 모든 일에 감사할 수 있는 것이라고. 그것이 꼭 불가능한 일만은 아니라고. 사람들은 대부분 신앙의 초년병이나 젊을 때는 그렇게 낙관적인 생각을 하다가도 나이가 들면 세상이 그렇게 만만치 않은 거라며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데 나는 거꾸로다. 젊을 때는 꿈같은 일이라고 생각했다가 나이가 들면서, 꼭 불가능한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아파하면서도 기뻐할 수 있고, 절망에 통곡하면서도 감사할 수 있는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의 삶의 역설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 권면은 누구보다도 바울 자신에게 현실이었다. 그는 다른 편지에서 매우 진솔한 자기 고백을 털어놓는다. “어떤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빌4:11-12). 잘 아는 것처럼 바울의 삶은 결코 순탄하지 않았다. 평안이나 배부름과는 거리가 멀었다. 바울은 예수의 복음을 전하다가 매를 맞기도 했고, 옥에 갇히기도 했고, 몇 차례 죽을 고비를 겪기도 했다. 하지만 바울은 그런 상황 속에서도 항상 기뻐하고 모든 일에 감사할 수 있었다. 어떤 형편에서든지 자족할 수 있었다.

 

바울이 맛본 행복의 배경

 

그렇다면 바울이 그렇게 살 수 있었던 비밀은 무엇일까? 어떤 상황에서도 평강을 잃지 않을 수 있었던 능력의 근원은 어디에 있을까? 그만의 특별한 비결이 있는 것일까? 어떤 상황이든 긍정적으로 보는 낙천적인 성품을 타고나기라도 한 것일까? 아니다. 바울이 항상 기뻐하고, 모든 일에 감사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말한 대로 그리스도 안에서 배우고 몸으로 체득하였기 때문이다. 만물을 창조하신 분의 사랑을 알았고, 하나님나라 자체이신 그리스도를 알았기 때문이다(빌3:7-11). 그분과 함께 죽고, 그분과 함께 살았기 때문이다(롬6:5).

바울의 진솔한 고백을 들어보자. “나는 저들이 자랑스럽게 내세우는 조건들을, 내가 명예로이 여겼던 다른 모든 것과 함께 갈기갈기 찢어 쓰레기통에 내던졌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리스도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내가 전에 그토록 중요하게 여겼던 모든 것이 내 삶에서 사라져버렸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내 주님으로 직접 아는 고귀한 특권에 비하면, 내가 전에 보탬이 된다고 여겼던 모든 것이 하찮은 것, 곧 개똥이나 다름없습니다. 나는 그 모든 것을 쓰레기통에 버렸습니다. 그것은 내가 그리스도를 품고, 또한 그분 품에 안기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스도를 신뢰하는 데서 오는 강력한 힘, 곧 하나님의 의를 얻고 나서부터는 나열된 규칙이나 지키는 하찮고 시시한 의는 조금도 바라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를 직접 알고, 그분의 부활의 능력을 경험하고, 그분의 고난에 동참하면서 죽기까지 그분과 함께 하기 위해, 나는 그 모든 하찮은 것을 버렸습니다.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아나는 부활에 이르는 길이 있다면, 나는 그 길을 걷고 싶었습니다.”(빌3:7-11). 그렇다. 우리는 바울의 이 고백 속에서 바울이 기뻐하고 감사하며 어떤 형편에서든지 자족할 수 있었던 비밀의 원천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다.

어디 바울뿐이겠는가. 이런 증인들은 적지 않다. 어려서부터 뇌성마비로 인해 인간 아닌 삶을 살다가 예수님을 만나 빛 가운데 나온 후부터 아름다운 시편을 통해 새로운 차원의 삶을 살고 있는 송명희의 고백을 들어보자.

 

 

나는 세상을 부러워하지 않습니다.

나는 세상의 부귀와 영화를 보고 잠시

부러워할 때가 있습니다.

나는 어리석은 부자처럼

나는 사람들을 잠간 부러워할 때도 있습니다.

나는 세상을 부러워할 때도 있으나

세상의 무엇으로도 비할 수 없는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보고 그 사랑에 잠기게 되면

나는 세상을 부러워하지 않습니다.

세상이 아무리 좋아도

나는 세상을 부러워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소망과

세상보다 더 좋은

천국을 바라봄으로

나는 세상을 부러워하지 않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부자유한 몸으로 살아가는 시인 송명희가 세상을 부러워하다가도 세상을 부러워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특별한 비결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 하나님이 주신 소망, 종말론적으로 완성될 하나님나라에 눈을 떴기 때문이었다. 바울이나 송명희가 어떤 형편에서든지 자족할 줄 알게 된 것은 순전히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눈을 떴다는 그 사실 하나 때문이었다.

 

행복은 마음을 잊은 상태

 

신발이 발에 꼭 맞으면 신발을 신었는지 안 신었는지 의식하지 못한다. 하지만 발에 맞지 않으면 계속해서 신발에 신경이 쓰인다. 안경이 눈에 잘 맞으면 안경을 쓰고 있다는 사실조차 잊고 살 때가 많다. 어떤 때는 안경을 쓰고서도 안경을 찾느라 부산을 떨 정도로 안경을 잊고 산다. 허리띠도 허리에 꼭 맞으면 허리를 잊는다. 등에 업은 애기가 계속 보채면 달래고 어르고 흔들어 주느라 잊을 수가 없다가도, 애기가 등에 딱 업혀 있으면 애기가 업혀 있는지도 모른다. “업은 애기 3년을 찾는다.”는 말이 나온 것도 그래서일 것이다. 사람의 마음도 그렇다. 우리가 시시비비를 잊고 번민과 갈등이 없으면 마음을 잊는다. 내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과 꼭 맞으면 마음을 잊는다. 그런데 내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과 공명을 이루지 못하면 마음에 신경이 쓰인다. 수없이 이해관계를 따지게 되고, 괜스레 미워지고, 질투심이 솟구치고, 남이 가진 떡이 더 커 보인다. 마음을 어디에 묶어 두어야 할지 모를 정도로 마음이 부산하다.

 

사실 행복이란 다른 게 아니다. 마음을 잊은 상태가 곧 행복이다. 내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과 꼭 맞을 때 느끼는 편안함, 그것이 바로 행복이다. 행복한 삶의 최고 모델은 단연 예수님이다. 예수님의 삶을 보라. 그분은 하나님나라 외에는 그 무엇에도 마음을 빼앗기지 않았다. 하나님나라가 그분의 모든 것이었다. 언제나 하나님 아버지와 교통하기를 즐거워했다. 예수님의 마음은 하나님의 마음으로 가득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하나였다. 그랬기에 그분은 온갖 병든 자들을 껴안을 수 있었고, 굶주린 자들의 배를 채워 줄 수 있었다. 사단의 올무에 묶여 종살이하는 자들을 자유케 해줄 수 있었고, 사람들의 생각과 익숙해진 전통에 매이지 않을 수 있었다. 누가 크냐는 싸움을 경계하시며 섬기는 자로 살 수 있었다. 죄인들을 위해 자기 목숨까지 내어놓을 수 있었다. 또 그랬기에 그분은 참으로 행복할 수 있었다. 온갖 죽임의 위협과 배신의 상처에도 불구하고 자기 정체성을 잃지 않고 자기 존재와 삶에 충실할 수 있었다.

 

20세기 최고의 영성가였던 토마스 머튼은 “인간의 행복은 하나님의 행복과 그분의 무한한 자유와 그분의 완벽한 사랑에 참여하는데 있다.”고 말했다. 헨리 나웬은 “수많은 두려움, 이 세계가 보내는 경고 앞에서 종종 굴복하기도 하지만 나는 여전히 우리의 짧은 생애가 출생과 죽음이라는 경계 너머로 이어지는 훨씬 장구한 사건의 일부라는 사실을 철저하게 믿는다. 나는 나를 이 세상에 보내신 분, 다시 집으로 돌아와 배운 것들을 이야기하기를 기다리시는 분 때문에 나의 짧은 생애가 매우 신나고 즐거운 사명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어거스틴은 “당신은 우리를 당신을 향해서 살도록 창조하셨으므로 우리 마음이 당신 안에서 쉴 때까지는 편안하지 않습니다.”라고 고백했다.

 

이미 살펴본 대로 바울, 예수님, 송명희, 토마스 머튼, 헨리 나웬, 어거스틴, 그외에도 수많은 하나님의 사람들은 하나같이 행복의 노래를 불렀다. 그렇다면 여기서 한 가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이들이 부른 행복의 노래가 심리적인 테크닉으로 가능할까, 심리적인 자기 훈련, 생각을 전환하는 기술, 긍정적인 생각으로 가능할까 하는 물음을. 아니다. 그건 절대 불가능하다. 심리적인 자기 훈련이나 생각을 긍정적으로 전환하는 기술이 잠깐의 행복에는 도움이 될지 몰라도 근원적인 행복, 항상 기뻐하고 모든 일에 감사할 수 있는 차원으로까지 이끌어줄 수는 없다. 진정한 행복, 어떤 형편에서든지 흔들리지 않는 기쁨은 오직 하나님을 아는 지식, 그분의 사랑에 대한 신뢰, 그분의 약속을 향한 희망으로만 가능하다. 용암처럼 끓어오르는 인간의 원초적 욕망을 창조적인 에너지로 전환시키고 컨트롤할 수 있는 능력은 오직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그분의 통치를 기쁘게 받아들이는 것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예수님께서 너희가 진리를 알면 진리가 자유케 할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처럼(요8:32), 우리가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으로부터 자유할 수 있는 길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인 진리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높은 산에 올라보면 커보였던 빌딩들이 마치 성냥갑처럼 작아 보인다. 우주를 비행한 자들의 전언에 따르면 우주에서 본 지구는 작은 공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다. 하물며 온 우주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광대하심에 올라보면 어떨까? 온 세상이 정말 한없이 작아 보일 것이다. 나는 하나님을 예기치 않게 만났는데, 하나님의 세계에 눈을 뜨고 나서 두 가지 현상을 발견했다. 하나는 세상과 인생이 한없이 작다는 것이었고, 또 하나는 세상과 인생이 너무나도 소중하다는 것이었다. 죽음 앞에서도 같은 사실을 경험했다. 세상과 인생이 작아지면서 동시에 한없이 소중해지는, 어떻게 보면 모순 같지만 사실은 역설적인 진실을 경험했다.

 

세상과 인생이 작아지면서 예전에는 커 보였던 것들이 작아 보였고, 세상과 인생이 소중해보이면서 예전에는 작게 보였던 것들이 커 보였다. 참 놀라운 사실이었다. 세상이 작아지고 소중해지는 이중적인 현상을 경험하고 나서부터는, 세상에 걸려 넘어져도 별로 신음하지 않게 되었다. 예전에는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작은 일에 기뻐하게 되고, 감사하게 되었다. 하루가 얼마나 대단한 선물인지가 보였다. 살아있음이 얼마나 엄청난 은총인지가 보였다. 정말 그랬다. 하나님의 세계의 광대함과 약속의 신실함을 알게 되면 삶이 작아지면서 동시에 소중해지는 이중적인 현상이 나타나는데, 삶이 작아지면서 삶을 넘어설 수 있게 되었고, 삶이 소중해지면서 삶을 사랑하며 감사할 수 있게 되었다. 물론 아직도 작은 일에 마음 상해하고 넘어진다. 하지만 넘어지더라도 쉽게 회복하는 건 사실이다.

 

물론 신앙에도 위험성은 있다. 신앙은 자칫 신앙 지상주의로 환원될 위험성, 신앙과 생활이 이원화될 위험성을 안고 있다. 그리스도인들의 현실을 성찰하면 그런 징후들이 많은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그런 위험성을 경계하기만 한다면,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하나님의 나라를 향한 신앙은 행복의 굳건한 토대임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행위 속에만 참된 행복이 있으니까. 그리고 신앙은 하나님의 하신 일을 보고 신뢰하는 것이니까.

아름다운 영혼의 소유자 카릴 지브란은 행복이 사람들에게 하는 말을 이렇게 전하고 있다. “인간은 나를 사랑합니다. 그는 자신의 행위 속에서 나를 발견하려 듭니다. 그러나 그는 신의 행위 안에서가 아니라면 나를 찾지 못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