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천년 전의 예루살렘은 두 세력이 지배하는 사회였습니다. 정치적으로는 로마가 지배하고 있었지만 종교적으로는 유대교가 지배하는 사회였습니다. 나사렛 촌놈 젊은 예수를 체포해 빌라도 총독에게 넘겨주고, 십자가에 못 박아 죽게 할 만큼 유대교 지도자들의 권세는 대단했습니다. 종교적으로뿐 아니라 사법적인 영향력도 행사하는 예루살렘의 실세였습니다. 21절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대제사장과 그의 동료들이 공회와 이스라엘 원로들을 다 모았다고 한 것을 보면 예루살렘은 제사장이 지배하는 종교적인 사회였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에도 두 세력이 간여했습니다. 예수의 처형을 집행한 것은 로마의 정치 세력이었지만, 하나님을 모독하는 자라는 혐의로 단죄하고 죽음으로 내 몬 것은 유대교 지도자들이었습니다.

 

전혀 상상하지 못한 사태가 벌어지다

 

이런 그들에게 예수는 골치 덩어리였습니다. 기존의 종교 질서를 어지럽히고 위협하는 위험인물이었습니다. 하여, 저들은 예수를 십자가에 죽였을 때 쾌재를 불렀을 것입니다. 앓던 이가 빠진 것처럼 시원했을 것입니다. ‘이제는 됐다’며 한 시름을 놓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건 잠시였습니다. 예수는 죽었지만 죽은 게 아니었거든요. 예수의 이름은 오히려 더 힘을 얻기 시작했습니다. 더 힘차고, 더 급속하게 예루살렘 전체로 퍼져 나갔습니다(v.28). 예수가 죽을 때까지만 해도 뿔뿔이 흩어졌던 제자들이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고도 믿지 못했던 제자들이었습니다. 정말 별 볼 일 없는 제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달라졌습니다. 죽기를 각오하고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제자들의 입과 몸을 통해서 예수가 살아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병자가 낫고 앉은뱅이가 걷는 이적이 일어났습니다. 예수를 죽이기 전에는 예수 혼자 북치고 장구를 쳤었는데, 이제는 예수 혼자가 아니었습니다. 열 두 제자들을 중심으로 수많은 제자들이 또 다른 예수가 되어서 예루살렘을 들쑤시고 있었습니다. 더욱이 베드로가 한 번 설교하면 삼천 명, 오천 명씩 회개하는 엄청난 일이 발생했습니다.

이런 일들은 눈곱만큼도 예상하지 못한 일들이었습니다. 정말 상상하지 못한 일들이었습니다. 그러니 예수를 죽인 자들의 마음이 어떠했겠습니까? 매우 당황스러웠을 겁니다. 이 사태를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 정말 난감했을 겁니다. 하여, 대제사장과 그의 동료들은 일단 사도들을 체포해서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그리고 곧바로 산헤드린 전체 회의를 소집했습니다. 당시에 산헤드린 전체가 모이는 것은 매우 드문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산헤드린 전체 회의를 소집한 것을 보면, 그들이 이 사태를 얼마나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더 기막힌 일이 벌어졌습니다. 사도들을 옥에 가두고 산헤드린 전체 회의를 소집한 그 날 밤에 사람의 힘으로는 어찌해볼 수 없는 사태가 발생했습니다. 하나님의 천사가 감옥 문을 열고 사도들을 이끌어 내는 기이한 일이 발생했습니다. 더욱이 천사는 사도들에게, 성전에 가서 이 생명의 말씀을 백성들에게 당당하게 말하라고 격려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니 제자들이 얼마나 용기 충천했겠습니까. 풀려난 사도들은 태양이 떠오르자 말자 성전으로 달려가서 이전보다 더 담대하게 예수님의 부활 생명을 선포하였습니다.

한 편 산헤드린 공회원들은 밤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도 모른 채 사도들을 감옥에서 불러내 심문하려고 모였습니다. 그런데 사도들이 끌려나오지는 않고 엉뚱한 보고가 올라왔습니다. 감옥 문은 철통같이 잠겨 있고, 문마다 간수들이 지키고 있었는데 신기하게도 안에는 한 사람도 없다는 보고가 올라왔습니다. 여러분, 이 소식을 들은 공회원들이 얼마나 어리둥절했을까요? 얼마나 어안이 벙벙했을까요? 정말 귀신이 곡할 노릇이라는 표정으로 서로의 얼굴만 빤히 쳐다보고 있었을 겁니다. 바로 그때 기막힌 보고가 또 올라왔습니다. 옥에 갇혀 있던 사도들이 지금 성전에서 사람들을 가르치고 있다는 거였습니다. 그야말로 두 손, 두 발 다 들어야 할 사태가 벌어졌습니다. 이 보고를 들은 경비대장은 사색이 되어 즉각 부하들을 데리고 사도들을 체포하러 성전으로 출동했습니다. 사도들은 체포되어 공회 앞에 섰습니다.

 

진실을 은폐하는 가증한 무리들

 

대제사장은 사도들을 보더니만 매우 못마땅한 표정으로, 정말 골치 아프다는 듯이 소리쳤습니다. ‘내가 일전에 너희를 불러서 어떠한 경우에도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거나 가르치지 말라고 엄히 경고하지 않았더냐? 그런데 너희는 너희 가르침으로 예루살렘을 가득 채우고, 그 사람의 죽음을 우리 탓으로 돌리려고 하느냐?’ 여러분, 대제사장의 말을 잘 들어보십시오. 대제사장은 지금 예수의 죽음이 자기들 탓이 아니라고 발뺌하고 있습니다. 빌라도가 죽인 것이지 자기들이 죽인 것이 아니라고 항변하고 있습니다. 물론 외형적으로 보면 로마의 정치 세력이 예수님의 죽음을 집행한 건 사실입니다. 하지만 실제로 죽인 자들은 대제사장을 비롯한 유대교 당국자들이었습니다. 이것은 누구보다도 그들 자신이 더 잘 알고 있는 진실입니다. 그들의 양심이 알고 있는 진실입니다. 그런데 저들은 지금 발뺌을 하고 있습니다. 진실을 은폐하고 있습니다. 파죽지세로 번져가고 있는 예수의 부활 소식과 예수의 이름으로 많은 병자들이 고침 받는 이적을 보면서도, 속으로는 당황스럽고 시기심에 어찌할 줄을 모르면서도, 겉으로는 예수의 피에 대해 자기들의 손이 깨끗한 척 하고 있습니다. 사실 그들의 마음 깊은 곳에는 사도들까지도 처치해버려야겠다는 분노가 불타오르고 있었습니다. 33절을 보십시오. 저들이 베드로의 말을 듣고 격분하여 사도들을 당장 죽이려고 한 것을 보면, 저들의 마음속에 분노와 시기심이 가득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사도들에게 진실 아닌 것을 퍼뜨리고 다닌다고 추궁하고 있습니다. 자기들의 손은 깨끗한데 왜 살인 교사범으로 모느냐고 비난하고 있습니다.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는 않지만 저들은 아마도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까지 하면서 자기들의 손은 깨끗하다고 강변했을 것입니다. 여러분, 얼마나 가증스럽습니까? 얼마나 비겁하고 뻔뻔합니까? 본래 높은 자리에 앉아있게 되면 이처럼 가증스럽고 비겁하고 뻔뻔한 짓을 하게 됩니다. 우리가 낮은 자리에 있으니까 그렇지 높은 자리에 올라가 보십시오. 진실이 빤히 보이는데도 거짓말을 합니다. 우리가 보기에 가증스러운 짓을 뻔뻔하게 합니다. 가진 것이 많고, 지킬 것이 많으면 그렇게 됩니다.

 

진정으로 갇힌 자는 누구인가?

 

만일 산헤드린 공회원들이 하나님을 아는 자들이었다면, 진실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는 자들이었다면 어떻게 했을 것 같습니까? 무엇보다도 사태의 진실을 아는데 관심을 기울였을 것입니다. 별 볼 일 없던 제자들이 왜 갑자기 용기백배하여 예수의 부활을 전하는지, 예수의 이름으로 병자들이 낫는 사태의 진실이 뭔지를 알기 위해 관심을 기울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저들은 그런 것 따위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저들의 행태를 관찰해 보십시오. 예수를 죽이기 전이나 죽이고 난 후나 똑같습니다. 예수의 부활 소식을 듣고서도 아무런 변화가 없었고, 성령이 강림하여 제자들이 사도로 변화된 것을 보면서도 요지부동이었습니다. 저들의 행태는 정말 감동스러울 정도로 일관됩니다. 자기들의 체제와 전통과 가르침을 고집하고 기득권을 지키는 데만 관심이 있었지 메시아의 통치 현실에는 도무지 관심이 없었습니다. 오늘날 교회가 예수의 부활 생명에는 관심이 없고, 교회의 영역을 굳게 지키고 확장하는 일에만 정신이 빠져 있는 것처럼, 이천년 전의 유대교 당국자들도 기존 체제와 전통과 가르침 안에 갇혀서 꿈쩍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렇습니다. 감옥에 갇힌 것은 사도들이었지만 실제로 감옥에 갇힌 자들은 저들이었습니다. 고정관념의 감옥, 기존 체제의 감옥, 기득권의 감옥, 거짓의 감옥에 갇혀 있는 자들은 대제사장을 비롯한 산헤드린 공회원들이었습니다.

 

오늘날에도 그렇습니다. 많은 이들이 맘껏 자유를 구가하며 살고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사실은 갇혀 있는 자들이 더 많습니다. 아니, 어쩌면 우리 모두는 갇혀 있다고 생각됩니다. 매우 역설적인 이야기가 되겠습니다만, 갇혀 있다는 것을 인식하는 자만이 갇혀 있지 않은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 인간은 피조물입니다. 절대적 한계를 갖고 있습니다. 우리가 대단히 많은 것을 알고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백사장의 모래알 하나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어쩌면 그 하나마저도 온전치 못할 가능성이 많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일평생 경험하고 깨우쳐 알고 있는 것이 얼마나 될 것 같습니까? 정신적으로, 감성적으로, 감각적으로 경험하고 깨우친 것이 얼마나 될 것 같아요? 지극히 작은 일부분에 불과합니다. 그마저도 불완전하고 희미한 것에 불과합니다.

 

믿음의 세계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알고 있는 예수, 내가 배운 신학, 내가 경험한 하나님이 온전한 것일까요? 아닙니다. 지극히 작은 일부분에 불과합니다. 어떤 신학자나 영성가도 하나님의 세계와 성경의 세계를 다 알 수 없을 만큼 하나님의 세계, 성경의 세계는 무궁무진합니다. 사람이 지성과 영성으로 포착할 수 있을 만큼 만만한 세계가 아닙니다. 그런데 자기가 다 알고 있다고 생각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자기가 알고 있는 것만이 옳다고 주장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독선에 빠지게 되는 겁니다. 그래요. 자기 인식과 경험을 상대화할 줄 모르면 독선에 빠지게 되고, 편견과 고정관념과 상식의 감옥에 갇히게 됩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제사장이나 바리새인들이 따로 있는 게 아닙니다. 자기가 알고 있는 것만이 절대적인 진리라고 확신하고 그 안에 갇혀 있는 사람이 바로 바리새인입니다. 자기만 옳고 다른 사람은 다 틀렸다고 판단하는 사람이 바로 바리새인입니다. 결국 자기가 피조물이라는 진실을 망각하게 되면 언제든지 바리새인이 될 수밖에 없고, 자기 안에 갇힐 수밖에 없습니다.

 

사도가 된 제자들

 

하지만 사도들은 달랐습니다. 비록 예수님의 죽음을 외면하기는 했지만 성령으로 말미암아 깨우침을 얻고 나서부터는 달랐습니다. 이전의 제자들이 아니었습니다. 겁이 많고, 이해관계에 밝고, 자기중심적이고, 정치적인 욕망에 붙잡혀 있던 제자들이 이제는 모든 것을 걸고 예수의 부활 생명을 증언하고 가르치는데 몸과 영혼을 쏟는 사도로 변화되었습니다. 최고의 실력자들이 모인 산헤드린 공의회 앞에서 호된 추궁을 받으면서도 당당했습니다. 아주 담대하게 산헤드린 공회원들을 향해 말했습니다.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러분이 십자가에 매달아 죽인 그 예수를 우리 조상의 하나님께서 다시 살리셨다고. 우리 조상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변화된 삶과 죄 용서의 선물을 주시려고, 예수를 왕과 구주로 삼아 그분 오른 편 높은 곳에 두셨다고. 우리는 이 일의 증인이라고. 성령께서도 이 모든 일을 확증해 주고 계시다고. 그랬습니다. 사도들은 정말 조금도 흔들림 없이 당당하게 논리적으로 예수 사건의 진실을 설명했습니다.

여러분, 별 볼 일 없던 제자들이 어떻게 이처럼 당당하고 지혜롭고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사람들로 달라진 것일까요? 예수님의 부활을 보고 흥분해서일까요? 예수의 부활 생명을 경험한 것이 너무 놀라워서 앞뒤 보이는 게 없어서일까요? 성령에 정신을 빼앗겨서일까요? 아닙니다. 베드로의 설교나 공의회 앞에서 하는 말을 들어보십시오. 사도들이 체포당하거나 감옥에 갇힐 때 거칠게 저항하지 않은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사도들은 감정적으로 들떠 있지도 않았고, 정치적인 야욕을 가지고 세력화를 꾀하지도 않았습니다. 사도들은 오직 비폭력 무저항으로 일관했습니다. 매우 침착하고 이성적이었습니다. 더욱이 성령은 정신을 빼앗는 영이 아닙니다. 성령은 정신을 들게 하는 영이요 진리의 영이기 때문에 사도들은 절대로 넋 나간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부활 생명의 능력

 

그렇다면 무엇 때문일까요? 부활이라고 하는 기이한 현상 때문에가 아니라 부활 생명 때문입니다. 부활 생명과 부활의 세계 앞에서 세상 모든 것들이 작아보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나라를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하나님나라 비유에 보면, 하나님나라는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다는 말씀이 나옵니다(마13:44). 어떤 사람이 밭에 숨겨 놓은 보화를 발견하면 몰래 숨겨 두고, 기뻐서 어찌할 줄을 모르다가 집에 돌아가서는, 가진 것을 다 팔아 그 밭을 사는 것처럼, 사도들도 예수의 부활 생명이라는 보화, 하나님나라라는 보화를 발견하고 나서는 기뻐서 어찌할 줄을 모르며 부활 생명을 전하는데 올인한 것입니다. 세상 모든 것들이 가짜이거나 가치 없어서가 아닙니다. 우리의 생명과 삶이 저주받은 것이거나 죄악된 것이어서가 아닙니다. 부활 생명과 부활의 세계가 너무 영광스러운 보화였기에 현재의 생명과 삶이 하찮게 보인 것이지, 이 땅의 생명과 삶이 하찮아서가 아닙니다. 이 땅의 생명과 삶은 하나님이 주신 고귀한 선물입니다. 여전히 아름답고 소중한 값진 선물입니다. 한없이 감사해도 부족할 만큼 풍요롭고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의 부활 생명과 부활의 세계에 비하면 이 세상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바울의 고백을 들어봅시다. 빌립보서 3장 7절부터 11절까지입니다. 유진 피터슨은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나는 저들이 자랑스럽게 내세우는 조건들을, 내가 명예로이 여겼던 다른 모든 것과 함께 갈기갈기 찢어 쓰레기통에 내던졌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리스도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내가 전에 그토록 중요하게 여겼던 모든 것이 내 삶에서 사라져버렸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내 주님으로 직접 아는 고귀한 특권에 비하면, 내가 전에 보탬이 된다고 여겼던 모든 것이 하찮은 것, 곧 개똥이나 다름없습니다. 나는 그 모든 것을 쓰레기통에 버렸습니다. 그것은 내가 그리스도를 품고, 또한 그분 품에 안기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스도를 신뢰하는 데서 오는 강력한 힘, 곧 하나님의 의를 얻고 나서부터는 나열된 규칙이나 지키는 하찮고 시시한 의는 조금도 바라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를 직접 알고, 그분의 부활의 능력을 경험하고, 그분의 고난에 동참하면서 죽기까지 그분과 함께 하기 위해, 나는 그 모든 하찮은 것을 버렸습니다.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아나는 부활에 이르는 길이 있다면, 나는 그 길을 걷고 싶었습니다.”

 

예수 안에 있는 것

 

여러분, 이것이 바울만의 경험이겠습니까? 아닙니다. 모든 사도들이 바울과 같은 경험을 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사도들은 어떤 것도 두려워하지 않고 부활 생명을 전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의 부활 생명에 모든 것을 걸 수 있었습니다. 부활 생명에 참여하는 것 외에는 그 무엇에도 마음을 빼앗기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도 예수의 부활 생명, 하나님나라의 보화를 발견하게 되면 그 외의 것들은 몽땅 시시하게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부활 생명에 참여하는 것 외에는 그 무엇에도 마음을 빼앗길 수 없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생명, 정의와 평화가 입 맞추는 하나님나라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 비밀스럽게 숨어 있습니다.

여러분께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뭘 보십니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평안과 승리와 건강과 부와 성공을 보십니까? 아니면 부활 생명과 하나님나라를 보십니까?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평안과 승리와 건강과 부와 성공을 보고, 그걸 얻기 위해 매달리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 안에는 본래 평안과 승리와 건강과 부와 성공 같은 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것들을 주려고 예수를 십자가에 죽인 게 아닙니다.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우리에게 주고 싶어 하신 것은 오직 부활 생명입니다. 하나님나라입니다. 사도들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본 것도 평안과 승리와 건강과 부와 성공이 아니었습니다. 부활 생명이었습니다. 하나님나라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