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홀로 살 수 없습니다. 서로 함께 서로를 바라보며 살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서로 함께 서로를 바라보며 살다보면 치명적인 일이 발생합니다. 바로 비교하는 일입니다. 어떤 사람이 산에 들어가 기도를 드렸답니다. 세상의 욕심을 버리게 해달라며 간절히 기도하고 있는데 마귀란 놈이 나타나서는 속삭이더랍니다. ‘지금 기도를 중단하고 내려가면 네 아들과 딸을 하버드 대학에 보내줄게. 그리고 강남의 최고급 아파트도 가질 수 있게 해 줄게.’라고 말이지요. 하지만 세상 욕심을 버리기 위해 기도하는 마당에 그깟 유혹에 넘어갈 수는 없었겠지요. 더욱 열심히 기도에 매진하고 있는데 또 다시 속삭이더랍니다. ‘너 지금 내려가지 않으면 너한테 준다는 것 말이야, 네 가장 친한 친구에게 줘도 되지?’ 그러자 그 사람은 황급히 기도를 중단하고 내려오더랍니다.

하버드대학에서 학생들을 상대로 재미있는 설문조사를 했습니다.

① 당신의 월급은 400만원, 다른 모든 사람의 월급은 800만원

② 당신의 월급은 200만원, 다른 모든 사람의 월급은 100만원

위 두 가지 조건을 제시하고는 둘 중 어느 쪽을 선택하겠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조사에 응한 학생의 70퍼센트 정도가 ②번을 택했습니다(우리는 행복한가. 이정전. 재인용). 상대적으로 적은 400만원보다는 상대적으로 많은 200만원을 택한 것입니다. 똑똑한 하버드대학 학생들이 반액밖에 안 됨에도 불구하고 비교 우위를 선택한 것입니다. 이걸 보면 사람이 얼마나 비교에 민감한지를 알 수 있습니다. 얼마나 비교 하위를 싫어하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정말입니다. 사람은 비교에 민감할 뿐만 아니라 비교하기를 좋아합니다. 사람이든 물건이든 비교를 해봐야만 직성이 풀립니다. 무엇이든 비교하지 않으면 재미가 없고, 비교하기 전까지는 호기심이 채워지지가 않습니다. 사람들이 모이면 이 사람 저 사람을 비교해가며 끝없이 입방아를 찧는 것도 그 때문입니다.

비교는 행복의 무덤

비교는 결코 비교로 끝나는 법이 없습니다. 비교는 언제나 사람의 영혼과 삶을 짓밟고 평화와 기쁨을 앗아갑니다. 나보다 잘 사는 집에 가면 괜히 마음이 우울해지고, 나보다 똑똑한 사람을 만나면 내 존재가 작아 보이고, 나보다 잘 생긴 사람을 보면 갑자기 부모가 원망스럽고, 입고 있는 옷이 마음에 들었다가도 더 멋진 옷을 보고 나면 순간에 입고 있는 옷이 추레해 보이는 것은 다 비교가 만들어낸 삶의 그늘이요 존재의 허물입니다. 비교는 진실로 기쁨의 죽음이며 행복의 무덤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오늘도 비교하는 일에 열심입니다. 옷 입는 것을 보면 다들 자기 몸에 맞는 옷을 골라 입더군요. 미스 코리아의 치수가 아름답다고 해서 미스코리아의 치수를 몸을 걸치는 사람은 없습디다. 그런데 옷보다 더 중요한 삶은 그렇게 살지 않습니다. 자기 존재에 맞는 삶을 살지 않고 사회에서 인정하는 성공이라는 의상에 자기 삶을 맞추려고 안간힘을 씁니다. 사회에서 규정해 놓은 성공의 틀에다가 자기 존재를 구겨 넣으려 합니다. 하여, 대부분 생기를 잃어버린 창백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무릇 생명은 자기를 살아야 활기차고 행복할 수 있는데 말입니다. 법정 스님은 말했습니다. “자신의 존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면 불행해진다. 남과 비교하지 말라. 꽃이나 새는 자기 자신을 남과 비교하지 않는다. 저마다 자기 특성을 마음껏 드러내면서 우주적인 조화를 이루고 있다. 남과 비교하지 않고 자기 자신의 삶에 충실할 때 그런 자기 자신과 함께 순수하게 존재할 수 있다. 진달래는 진달래답게 피면 되고, 민들레는 민들레답게 피면 된다. 이런 도리를 꽃에게서 배우라.”

비교의 무덤에 묻히지 않기 위하여

하지만 어쩌겠습니까? 사람은 여전히 비교하는 재미에 푹 빠져 살고 있는 것을. 다들 비교의 칼에 베인 상처로 아파하면서도 여전히 비교의 칼을 꼭 쥔 채 살고 있는 것을. 사람이란 어쩌면 비교하지 않고 산다는 것이 불가능한지도 모르겠습니다. 판단력이 마비되지 않는 한 - 뇌에 이상이 생기거나 정지하지 않는 한 - 비교하지 않고 산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생각됩니다. 비교는 정말 인간의 치명적인 약점이고 함정이라고 생각됩니다. 때문에 비교하지 말라고 하는 것은 비현실적인 요구라고 생각됩니다. 현실적인 요청은 이런 정도가 아닐까요? 비교하지 않을 수는 없겠지만 비교하는데서 오는 낭패감과 열등감만은 극복할 수 있었으면 하는 정도. 비교의 칼에 베일지라도 삶을 휘청거리게 할 정도로 많은 피를 흘리지는 않는 정도. 이 정도의 지혜를 배우는 것이 가장 현실적인 방책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럼 어떻게 하면 비교하는데서 오는 낭패감과 열등감을 극복할 수 있을까요? 비교의 칼에 베여 선혈이 낭자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매우 상식적인 이야기입니다만 자기 존재의 고유함에 눈을 떠야 합니다. 사람은 제각각 고유한 존재라는 것, 잘났든 못났든 나 외에는 내가 있을 수 없다는 것, 어느 누구도 나를 대신할 수 없다는 것, 이런 지극히 상식적인 진실에 눈을 떠야 합니다. 더욱이 모든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형상이 새겨져 있습니다. 하나님과 소통할 수 있는 숭고함이 깃들어 있습니다. 모든 피조세계를 지도하고 돌볼 수 있는 능력이 숨어 있습니다. 거기다가 기막힌 하나님의 사랑까지 듬뿍 받고 있습니다. 눈곱만큼도 사랑받을 자격이 없는 주제에 지극한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물론 사람마다 능력과 기질은 다릅니다. 어떤 사람은 돈이 두둑해야 즐겁지만 돈이 많으면 불편해하는 사람도 있고,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 에너지가 충전되는 사람도 있지만 혼자 있을 때 에너지가 충전되는 사람도 있고, 책읽기를 좋아하는 사람도 있지만 싫어하는 사람도 있고, 수학은 잘 하지만 다른 공부는 못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사람은 예외 없이 창조주의 은총과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자, 이 정도면 충분하지 않습니까? 비록 사람마다 능력과 외모와 기질에 차이가 있지만 그게 뭐 대수입니까? 최고 통치자의 사랑과 인정을 받고 있는데요. 그분의 과분한 사랑을 받고 있고, 넘치는 존재의 영광을 덧입고 있는데요. 실로 과분한 능력과 자질과 사랑을 덧입고 있는데요.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에게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는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가 사랑을 받고 있고, 고유한 존재이고, 소중한 존재라는 것을 몰라서가 아닙니다. 그 모든 진실을 다 앎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리 안에는 지울 수 없는 상처가 있습니다. 나도 소중한 존재이고 너도 소중한 존재인 건 맞는데, 그런데 왜 너는 나보다 더 똑똑하고 잘났느냐는 겁니다. 왜 너는 나보다 더 좋은 조건을 타고났느냐는 겁니다. 비록 상대적인 차이라 하더라도 살다보면 작은 차이가 태산처럼 커 보이기도 하고, 그 작은 차이가 만들어내는 사회적인 격차가 너무 큰 데서 오는 상처가 있는데 그걸 어떻게 하냐는 겁니다.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 필자도 자괴감에 휩싸여 우울할 때가 있었는데, 필자보다 더 열악한 환경에 있는 사람들이야 어떠하겠습니까? 작은 차이의 벽 앞에서 좌절하다가 종국에는 하나님께 불평하고 세상을 원망하면서 낭패감과 열등감에 휘둘리지 않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원하든 원치 않던, 작은 차이가 빚어내는 벽과 사회적인 격차를 날마다 경험하며 살아야 하는 것이 우리 모두의 현실입니다. 비교의 칼에 베이는 것은 순간이고, 자칫 방심했다가는 아물지 않는 상처를 입기도 하는 것이 우리네 삶의 현실입니다.

이런 현실에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비교의 칼에 베이는 횟수를 최대한 줄이고, 베이더라도 깊게 상처입지 않을 수 있을까요? 세 가지 정도의 길이 있다고 생각됩니다.

첫째, 상대적인 차이를 보면서도 이미 허락된 은총과 부요함에 더 집중하는 길입니다. 실로 과분한 능력과 자질과 사랑을 덧입고 있는 존재의 풍성함과 우주에 펼쳐있는 하나님의 풍성한 선물들에서 눈을 떼지 않는 것입니다. 상대적인 차이가 있는 것이 사실이고, 그 작은 차이가 커다란 벽을 만드는 것도 사실이지만 하나님이 베푸신 은총과 부요함은 상대적인 차이보다 더 크고 더 깊다는 진실을 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나라를 발견하고 그 나라의 보화로 배부르면 됩니다. 아들 녀석은 위장이 작습니다. 배가 부르면 옆에서 아무리 권해도 더 이상 먹지 않습니다. 아무리 맛있는 것을 앞에 갖다 놓아도 요지부동입니다. 사람의 마음과 영혼도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나라의 보화를 발견하고 그 기쁨으로 배부른 사람은 다른 욕망에 눈짓하지 않습니다. 상대적인 것들이 부족하다 할지라도 비교 하위라는 열등감에 빠지지 않습니다. 이미 값진 것에 배가 불렀는데 별것 아닌 것들이 좀 부족한들 무슨 문제가 되겠습니까. 필자가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나서도 그랬습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친히 창조한 세계와 구원의 은총에 눈뜨고 나니 세상에 부러운 것이 없었습니다. 가진 것도 없고 든든한 배경도 없었지만 어떤 고관대작이나 부자도 부럽지 않았습니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이 온통 선물이었고, 단지 충분한 정도가 아니라 넘치고 넘쳤습니다. 지금에 와서 돌아보니, 그분에게 받은 은총과 사랑과 선물들을 생각하며 바라보고 있노라면 어느 새인지 모르게 잡고 있던 비교의 칼이 없어져 있었습니다. 그랬습니다. 오직 그때에만 - 그분에게 받은 은총과 사랑과 선물들을 바라보고 있을 때에만 제 손에 비교의 칼이 없었습니다. 진실로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나라의 보화로 배부르기 전까지는 비교하는데서 오는 상처와 좌절, 아픔과 열등감에 휘둘리지 않을 재간이 없습니다. 비교의 칼에 베이지 않을 재간이 없습니다. 아무리 절세의 미인이요 시대의 영웅이라 해도.

셋째, 사람은 다 죄로 더럽혀진 존재이며 결코 완전하지 않다는 진실을 되씹는 것입니다. 사람은 대단한 존재이긴 하나 완전하진 않습니다. 어쩔 수 없는 죄인입니다. 수많은 약점과 허물로 오염되어 있는 연약한 존재입니다. 한없이 어리석은 존재요 죄악을 좋아하는 존재입니다. 파스칼은 “참된 종교는 인간이 위대하다는 사실과 함께 인간이 비참하다는 사실을 가르쳐주어야 한다.”고 말하면서 “만일 자신이 얼마나 오만하고 야심과 욕심에 차 있고 결함투성이며 비참하고 불의한가를 깨닫지 못한다면 그는 눈먼 사람이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이 사실이 비교의 칼에 베이지 않는 것과 별 상관이 없어 보이나요? 아닙니다. 매우 깊은 관계가 있습니다. 한 가지 물어보겠습니다. 우리가 비교의 칼에 베여 깊은 상처를 받는 것이 대부분 무엇 때문이라고 보십니까? 사회적인 벽과 차이 때문이라고 생각하시나요? 물론 그것도 사실입니다만 그보다는 작은 차이를 지나치게 크게 보는 것과 잘못된 환상이 더 큰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우리보다 훨씬 멋지고 행복하게 살 것이라는 환상, 욕망을 마음껏 채우면서 자유스럽게 살 것이라는 환상, 우리와는 다른 차원이 삶을 살 것이라는 환상 말입니다. 사실은 그들도 우리만큼이나 고민이 많고, 열등감과 수치스러운 것이 많고, 화려한 겉치레 속에 부끄럽고 사악한 것이 많고, 커다란 웃음 뒤에 깊은 한숨이 있으며, 또 그런 것들이 그들의 진정한 삶의 실체인데 화려한 외양과 그럴듯한 교양을 실체라고 착각하는 환상 말입니다. 만일 그들도 우리만큼이나 추악하고 더러운 죄인이며 유약한 인간일 뿐이라는 진실을 되씹는다면 그들의 사회적인 위상이나 화려하고 품격 있어 보이는 겉치레에 속지는 않을 것입니다. 비교의 칼에 깊은 상처를 입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진실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비교의 칼에 상처를 입는 겁니다.

사실 각 사람의 차이라고 하는 것은 지극히 작은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허락된 은총과 선물이 태평양의 물이라면 사람의 능력과 소유와 지위의 차이는 고작해야 물 한 방울에 불과합니다. 말이 안 된다고 생각되시나요? 조금만 상상력을 발휘해보세요. 조금만 멀리 눈길을 돌려보세요. 당신은 틀림없이 당신에게 허락된 것이 너무 많다는 사실로 인해 기절하게 될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