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시는 매우 짧고 그리 어려워 보이지 않습니다. 1-2절을 보면 은혜, 복, 주님의 뜻, 구원이라는 단어가 나오는데요, 성경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익숙한 단어들입니다. 교회에서 귀가 따갑도록 들은 단어들입니다. 너무 많이 들어서 새로운 감흥이 일어나지 않는 진부한 말들입니다. 하지만 이 시를 쓴 시인은 지금 상투적으로 이런 말을 하고 있는 게 아닙니다. 시인은 매우 진지하게, 단어 하나하나 속에 풍부한 신앙적 진실을 담아서 함축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1절과 2절에서 시인은 하나님께 은혜를 베풀어달라고, 복을 내려달라고, 주님의 얼굴을 환하게 비추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은혜, 복, 환한 얼굴 빛, 다 같은 맥락입니다. 공동번역 성경은 ‘은혜’를 ‘우리를 어여삐 보아 달라’는 말로 풀어서 번역했는데 옳은 풀이입니다. '은혜'란 '어여삐' 보는 것입니다. 불쌍히 여기는 것입니다. 긍휼의 마음으로 대하는 것입니다. 시인의 표현에 따르면 ‘주님의 얼굴을 환하게 비추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하는 짓들이 비록 하나님의 눈에 차지 않을지라도, 하나님의 법도와 율례를 떠나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어지럽힌다 할지라도 행한 대로 보응하지 않고 웃는 얼굴로 대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시인은 시의 서두에서 대뜸 ‘은혜’를 구했습니다. 그리고 시의 서두에서 ‘은혜’를 구했다는 것은 시인의 인간 이해가 어떠한지를 확연하게 보여줍니다. 인간이라는 존재가 얼마나 형편없는 존재인지를 깊이 이해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인간이란 하나님이 어여삐 보아주지 않으면 어떤 소망도 어떤 미래도 기약할 수 없는 가련한 존재라는 것, 하나님 앞에 당당하게 설만한 자질이 전혀 없는 존재라는 것, 어여삐 보지 않으면 심판을 면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알고 있었음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시인은 인간의 어떠함을 깊이 알고 있었으면서도 그런 인간에게 절망하거나 분노하지 않았습니다. 판단의 돌을 던지지 않았습니다. 변화시켜 달라고 요청하지도 않았습니다. 단지 어여삐 보아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주님의 얼굴을 환하게 비추어달라고 중보했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2절에서는 온 세상이 주님의 뜻을 알고, 모든 민족이 주님의 구원을 알게 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시인이 온 세상을 위해 구한 것은 더 많은 돈이 아니었습니다. 더 많은 먹을거리가 아니었습니다. 더 발전된 기술이 아니었습니다. 더 훌륭한 정부가 아니었습니다. 새로운 인류의 출현도 아니었습니다. 온 세상이 주님의 뜻을 알고, 모든 민족이 주님의 구원을 아는 것이었습니다. 어떤 분들에게는 이런 기도가 매우 추상적으로 들릴지 모르겠습니다. 종교적인 언사 정도로 들릴지 모르겠습니다. 문제로 뒤덮인 현실에 실제적인 도움이 되지 않는 현실도피적 신앙 환원주의라고 힐난할지 모르겠습니다. 특히 실용주의에 오염되어 있는 신앙인들은 십중팔구 그런 생각을 할 것입니다. 본래 성경의 세계 - 하나님을 알고 그분께서 베푸신 은혜로운 구원을 아는 일은 실용의 잣대로 판단할 수 없는 세계입니다. 세계 내적인 실용의 눈으로는 포착할 수 없는 세계입니다. 물론 근원적 진실의 차원에서 말한다면, 성경은 세상을 위한 가장 실용적인 처방과 근원적인 해결책을 말하고 있는 책입니다. 온 인류와 온 세상 피조물에게 가장 긴급하면서도 절실하게 필요한 것을 제공하고 있는 책입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은 진리의 눈으로 보면 성경보다 더 실용적인 책은 없습니다. 진실로 성경은 지상 최고의 실용서입니다. 사실 문제가 있다면, 세계 내적인 실용의 눈으로는 성경이 말하는 근원적 실용을 보지 못한다는 게 문제이고, 또 사람들이 세계 내적인 차원 안에 닫혀 있는 미국식 실용주의의 늪에 빠져 있는 것이 문제이고, 많은 그리스도인들조차도 성경이 말하는 실용보다는 세상이 말하는 실용에 사로 잡혀 있는 것이 문제이지 성경이 실용적이지 않은 것이 문제는 아닙니다. 그렇습니다. 세계를 넘어서고 세계의 근원인 하나님의 구원 세계를 세계 내적인 실용의 눈으로 판단하는 것이 오늘 교회와 그리스도인의 심각한 문제입니다. 세계 내적인 실용의 눈으로 성경을 읽고 해석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하여, 성경을 읽어도 성경의 세계를 이해하지 못하는 고질적인 한계를 넘어서지 못하고 있는 것이 문제입니다.

시인은 달랐습니다. 시인은 온 세상을 위해 ‘주의 도를 땅위에 펼치시고, 주의 구원을 모든 나라에게 알리소서.’라고 기도했습니다. 비록 세계 내적인 실용의 눈으로 볼 때에는 별 영양가가 없는 것 같아 보일수도 있겠지만 시인의 눈으로 볼 때에는 그보다 더 영양가 있는 것이 없고, 그보다 더 하나님이 가장 바라시는 것이 없고, 그보다 더 인간을 비롯한 온 피조물이 학수고대하는 것이 없다고 이해했기 때문에 그렇게 기도한 것이었습니다. 옳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이 간절히 원하시는 것과 이 세상이 긴급하게 필요로 하는 것은 만백성이 하나님의 뜻을 알고, 하나님의 구원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시인의 기도야말로 추상적이고 종교적인 기도가 아니라 가장 본질적이면서도 현실적이고 실용적인 기도라 할 수 있습니다.

또 시인이 그 일을 기도한 것은 그 일이 인간의 지혜나 인간의 능동적인 행위로 성취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얼굴빛을 우리에게 비추어 주어야만 가능한 일이기 때문에, 은혜로만 가능한 일이기 때문에 기도한 것입니다. 현대인들은 대부분 도시에서 살고 있습니다. 도시는 농어촌과 다르게 사람들이 한 일들로 뒤덮여 있습니다. 아파트, 빌딩, 상점, 도로, 지하철, 간판은 말할 것도 없고, 호수조차도 사람이 만든 인공 호수이고, 공원도 사람이 만든 공원이 대부분입니다. 사람의 기술과 돈으로 도배를 한 곳이 도시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도시에 살다보면 착시 현상에 빠지게 됩니다. 인생이란 사람이 한 일들로 굴러간다는 착각. 자기들이 뭔가 대단한 업적을 이루었다는 착각. 하여, 자기가 없으면 지구가 멈추기라도 할 것처럼 호들갑을 떠는 덜된 인간들이 나타나기도 합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인생에서 여러분의 역량이 어느 정도나 차지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여러분의 오늘이 있기까지 여러분이 능동적으로 기여한 부분이 어느 정도나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인생은 대부분 우리가 하는 일이 아니라 우리에게 행해진 일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보십시오. 우리는 변화무쌍한 날씨에도 무척 영향을 받고 삽니다. 부모나 선생님이나 성장 환경은 다 우리에게 주어진 것들이지 우리가 만들거나 선택한 것들이 아닙니다. 얼굴과 신체 사이즈조차도 우리 맘대로 만들지 못합니다. 사람에게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유전자 배열을 우리 맘대로 조절하지 못합니다. 여러분, 바로 이것이 인생입니다. 온통 수동성의 세계로 둘러싸여 있는 것이 인생입니다. 우리가 한 일이란 우리에게 행해진 일들에 비하면 지극히 작은 것에 불과합니다. 유전자의 영향조차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 인간이고 인생입니다. 사람이 그동안 놀라운 발전을 이룩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생의 실상을 정직하게 들여다보면 미미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인생은 은혜라는 바다 위에 떠 있는 배와 같습니다. 은혜의 바다 없이 인생의 배는 항해할 수 없습니다.

시인의 기도를 자세히 살펴보면, 시인은 무척 예민한 감수성과 깊은 통찰력으로 삶과 세계를 바라보았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6절에서 땅이 그 소산물을 낸 것을 보며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주셨다고 노래한 것을 보면, 시인은 온 세계에 닿아있는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을 포착했을 것이라고 짐작됩니다. 시궁창 속에도 생명이 꿈틀거리고 잔혹함 속에서도 피어나는 꽃을 보면서 시인은 온 세상에 그분의 은혜가 미치지 않는 곳이 없고, 그분의 사랑이 머물지 않는 곳이 없다는 것을 알았을 것이라고 짐작됩니다. 그런데 시인은 마치 은혜가 종적을 감추기라도 한 것처럼, 복이 끊어지기라도 한 것처럼 기도했습니다. 은혜를 베풀어 달라고. 복을 내려 달라고.

 

여러분, 바로 여기에 기도의 역설이 있습니다. 기도는 하나님이 하지 않는 것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미 하고 계시는 일을 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 일을 하지 않기 때문에 그 일을 해달라고 조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미 그 일을 하고 계시기 때문에 그 일을 해달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것이 이 땅에 없기 때문에 구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풍성함에도 불구하고 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기도의 역설입니다. 일용할 양식만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일용할 양식을 주지 않아서 기도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쉬지 않고 일용할 양식을 공급해 주고 계십니다. 그 덕분에 일용할 양식을 먹고 있습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용할 양식을 구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기도란 없는 것을 있게 하는 것이거나, 불가능한 것을 가능케 하는 것이거나, 하나님이 하지 않는 것을 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미 하고 계시는 것을 구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이 기도의 전부는 아닙니다. 기도에는 우리의 필요를 구할 수 있는 여지가 없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때로 우리의 강청하는 기도를 들으십니다. 하지만 기도의 근본은 하나님이 이미 하고 계시는 것을 구하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기도는 인생이 수동성으로 둘러싸여있다는 진실을 아는 자만이 할 수 있는 매우 특별한 행위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무엇인가를 얻어내는 통로가 아니라 삶의 수동성에 대한 인식으로부터 터져 나오는 존재의 양식입니다.

 

3절과 5절을 보겠습니다. 여기서 시인은 ‘온 세상 만 백성이 하나님을 찬양하게 해 달라’는 놀라운 희망을 노래합니다. 똑같은 내용을 두 번이나 반복해서 노래합니다. 그리고 중간에 만 백성이 찬양하게 될 근거를 말합니다. 주님께서 민족들을 공평하게 심판하시며 땅 위의 나라들을 다스리실 것이기 때문에 온 백성이 기뻐하며 큰 소리로 노래하게 될 것이라고 말입니다. 사실 시인이 노래하는 이 희망은 종말론적 희망입니다. 시인이 살던 그 시대는 말할 것도 없고, 지금 이 시대도 온 백성이 주님을 찬송하기에는 어둠이 깊고 슬픔이 많습니다. 거짓과 사악함에 상처입지 않은 영혼들이 없을 정도인데 어떻게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겠습니까? 지진이나 홍수로 인한 자연 재해도 여전하고, 불의의 사고로 고생하는 이들도 많지 않습니까? 부모의 폭력으로 두려워하는 아이들도 많고, 세상의 정사와 권세는 여전히 사악하기 이를 데 없지 않습니까? 세상의 정사와 권세가 정의로웠던 적은 거의 없습니다. 그리고 온 백성이 하나님을 알고 찬양하기는커녕 하나님 경배하기를 거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대신 우상을 섬기고 있습니다. 삶은 욕망의 아수라장이 되어 중상모략이 판을 치고 있고, 시기와 무자비한 살인과 언쟁과 속임수가 가득합니다. 정신은 비열하고 우둔하며 감정은 잔인하고 냉혹합니다. 모든 사람이 모든 사람과 경쟁하며 싸우고 있고, 모든 사람이 모든 사람을 의심하며 살고 있습니다. 어디에다 하소연할 수도 없는 가슴 아픈 일들이 많고, 하나님께 저주받은 것 같은 끔찍한 일들도 많습니다. 소설보다 더 소설같은 기막힌 일들이 많습니다. 그렇습니다. 모든 민족이 하나님을 찬양하기에는 잔혹하고 비참한 일들이 너무 많습니다.

 

시인이라고 해서 이런 삶의 현실을 몰랐을까요? 생의 비참함과 잔혹함을 몰라서 ‘온 백성이 주님을 찬송하게 하시며 찬송하게 하소서’라고 노래했을까요? ‘주님께서 민족들을 공평하게 심판하시며 땅 위의 나라들을 다스리실 것이니 온 백성이 기뻐하며 큰 소리로 노래할 것’이라고 종교적인 수사를 늘어놓은 것일까요? 아닙니다. 시인은 아마 우리보다 더 예민한 촉수로 인생의 깊은 어둠과 비참함을 알알이 곱씹었을 것입니다. 우리보다 더 깊이 탄식하며 아파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시인은 인생의 깊은 어둠과 비참함, 소설보다 더 소설같은 기구함에도 불구하고, 아니 어쩌면 그랬기에 더더욱 종말론적 희망을 노래했을지도 모릅니다. 눈에 보이는 어떤 가능성 때문에가 아니라 처절한 절대 절망을 보았기 때문에 그 절대 절망 속에서 종말론적 희망을 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누가복음에 보면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 이야기가 나옵니다. 자신의 사악함을 보지 못한 바리새인은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기는커녕 자신의 의로움을 죽 늘어놓았습니다. 반면에 세리는 하늘을 우러러 볼 엄두도 내지 못한 채 가슴을 치며 하나님께 자비를 구했습니다.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달라고 기도했습니다(눅18:9-13). 역사를 보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과 인생의 절대 절망을 보지 못하는 자는 하나님의 종말론적 희망을 볼 수 없습니다. 오직 세상과 인생의 절대 절망을 본 자만이 종말론적인 구원의 희망을 볼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시인이 종말론적 희망을 노래하며 하나님을 찬양한 것은 이 세상의 깊은 어둠과 절대 절망을 보지 못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이 세상의 깊은 어둠과 절대 절망을 보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시인이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었던 또 하나의 진실이 있습니다. 인생이 비록 하나님을 찬양하기에는 너무 잔혹하고 비참한 일들이 많고, 어디에도 하소연할 수 없는 가슴 아픈 일들이 많고, 하나님께 저주받은 것 같은 끔찍한 일들이 많고, 소설보다 더 소설같은 일들이 많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변하지 않는 진실 하나가 있습니다. 이 세상이 홀로 어둠 속에 나뒹굴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어둡고 잔혹하고 비참한 이 세상 속에 하나님이 임재해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온 세상을 창조하신 분께서 오늘도 변함없이 은혜와 축복을 베풀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태초에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어둠이 깊음 위에 있을 때에 하나님의 영이 물 위에 움직이고 있었던 것처럼 말입니다(창1:2). 사실입니다. 오늘도 저 하늘에는 태양이 빛나고 있습니다. 때를 따라 비가 내리고 있습니다. 산마다 꽃이 피고 있습니다. 콩 한 알을 심고 몇 달이 지나면 600배의 결실을 맺습니다.

 

저는 때로 60억이나 되는 사람들이 하루에 먹는 것이 얼마나 될지 곰곰이 생각해보곤 합니다. 쌀은 얼마나 될지, 마시는 물의 양은 얼마나 될지, 소는 몇 마리나 먹을지, 과일은 얼마나 먹을지, 등등 사람이 먹는 걸 상상해 보면 지구의 엄청난 생산력에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지구촌에 사람만 삽니까? 헤아릴 수 없는 생명들이 살고 있습니다. 그 모든 생명들이 다 무엇인가를 먹고 삽니다. 그러니 지구촌에 생명이 꿈틀거리고 있다는 건 정말 기적입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돌봄이요 축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여, 시인은 온 땅에 가득한 오곡백과를 보면서 하나님이 허락하신 복을 노래했습니다. 현재의 복을 통해 미래의 복을 신뢰하면서 만백성은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노래했습니다.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죽음보다 더 강한 사랑으로 이 세상을 붙들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세상의 그 무엇으로도 끊을 수 없는 사랑입니다. 바울은 이 사랑에 대하여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삶도, 천사들도 권세자들도, 현재 일도 장래 일도, 높음도 깊음도, 세상의 어떤 피조물도 우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습니다.”(롬8:38-9). 그렇습니다. 이 사랑을 아는 자는 그분을 찬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지금의 삶이 비록 힘들고 비참하고 힘겹다 할지라도, 죽음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과 은총을 아는 자, 웃는 얼굴로 환하게 바라보시는 그분의 얼굴빛을 보는 자는 그분을 찬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분 안에 감추어진 종말론적 희망을 노래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시의 분위기를 전체적으로 살펴보면 매우 낙관적입니다. 시 어디에도 삶의 어둠과 황폐함이 그려져 있지 않습니다. 인생의 비참함과 슬픔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없습니다. 그래서 이 시를 읽으면 시인은 마치 삶의 무게에 한 번도 휘청거려본 적이 없는 사람 같아 보입니다. 하지만 여러분, 세상의 어떤 사람도 삶의 무게에 짓눌려 휘청거리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시인 도종환은 꽃을 통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아름다운 꽃들도

다 흔들리면서 피었나니

흔들리면서 줄기를 곧게 세웠나니

흔들리지 않고 가는 사람이 어디 있으랴.

 

젖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빛나는 꽃들도

다 젖으며 젖으며 피었나니

바람과 비에 젖으며 꽃잎 따뜻하게 피었나니

젖지 않고 가는 삶이 어디 있으랴.

 

 

그래요. 흔들리지 않고 가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젖지 않고 가는 삶이 어디 있겠습니까. 시편 67편의 시인도 그랬을 겁니다. 때로 흔들렸을 것이고, 때로 바람과 비에 흠뻑 젖기도 했을 겁니다. 하지만 시인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로 낙관적이었습니다. 시종일관 낙관적인 태도로 하나님을 찬양하는데 집중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찾기 어려운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깊이 신뢰했습니다. 창조자의 임재를 찾기 어려운 세상 속에서 시인은 창조자의 임재와 축복을 보았습니다. 그렇습니다. 바로 이것이 신앙입니다. 세상이 아무리 캄캄해도 그 캄캄함 속에서 하나님의 빛을 보는 것이 신앙이고, 세상이 아무리 암담해도 그 암담함 속에서 하나님의 구원을 보는 것이 신앙입니다. 인간이 성취한 휘황찬란한 업적에서 오늘과 미래의 희망을 보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하나님의 약속에서 오늘과 미래의 희망을 보는 것이 신앙입니다. 시인은 이런 신앙의 눈이 있었기 때문에 세상의 깊은 어둠과 잔혹함 속에서도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었고, 인간의 불가능에도 불구하고 절망하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만백성은 찬양하라고 감히 노래할 수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