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에서 죽음 현상에 몰두하는 삶의 어리석음과 모순을 이야기했습니다. 매우 매력적이고 도덕적인 ‘고지론’이나 ‘목적이 이끄는 삶’의 교훈까지도 사실은 삶을 소외시키고 죽음 현상으로 내모는 또 하나의 덫이 될 수 있음을 이야기했습니다. 우리가 돌이켜 삶을 통째로 보고 삶 자체에 집중하게 된다면, 삶의 작은 일부인 성취가 아니라 삶 자체에 충실하게 된다면 삶은 절로 행복의 노래, 감사의 노래가 되어 창조주와 구원의 주님을 찬미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옳습니다. 진리와 자유의 영이신 성령의 검으로 견고한 진이 되어버린 거짓 상식을 폭로하는 것 외에는 특별한 비책이 없습니다. 하지만 죽음 현상에 내몰리지 않을 수 있는 최고의 비밀이 아예 없는 건 아닙니다. 있습니다. 바로 ‘죽음’입니다.

 

죽음 앞에서 던진 질문

 

진정한 생명과 삶에의 첩경은 ‘죽는 것’입니다. 나는 2009년 5월 간 이식을 했습니다. 간염으로 10년, 간경화로 5년 넘게 투병하다가 결국 아들의 간을 이식받고서야 삶으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들의 간을 이식받기로 결정하고 난후 수술하기까지 많은 고민을 해야 했습니다. 수술이 잘 되게 해달라고 기도해도 부족한 판에 한 가지 질문과 씨름해야 했습니다. 왜 아들의 간을 이식까지 해가며 생명을 연장하려고 하는 가였습니다. 왜 더 살겠다고 몸부림치는 것인지, 사랑하는 아들의 간을 이식받으면서까지 살려고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아들의 몸에 칼을 대는 것뿐 아니라 자칫 잘못하면 생명에 위협을 가할 수도 있는데 그렇게 하면서까지 살아야 할 이유가 과연 있는 것인지 묻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의 사람 다윗이 "주님께서 나의 날을 한 뼘 길이만큼 되게 하시매 나의 일생이 주 앞에는 없는 것 같사오니, 사람은 그가 든든히 서 있는 때에도 진실로 모두가 허사뿐이니이다. 진실로 각 사람은 그림자 같이 다니고, 헛된 일로 소란하며, 재물을 쌓으나 누가 거둘는지 알지 못하나이다.”(시39:5-6)라고 고백했고, 모세도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시90:10)라고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인생이란 진실로 순간에 흩어지는 입김과 같고, 잠시 있다가 사라지는 아침 안개와 같습니다. 그런데 그처럼 가벼운 인생을 조금 더 살기 위해 아들의 생명을 담보할 필요가 있는 것인지, 정말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 것인지 묻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여러 생각들이 스쳤습니다. 생명이 소중해서일까, 삶에 미련이 있어서일까, 죽음이 두려워서일까, 본능적인 생에의 의지 때문일까, 도대체 삶이 무엇이고 생명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값비싼 대가를 지불하면서까지 살기 위해 발버둥을 치는 걸까, 생명의 주관자이신 하나님께 맡기고 편안하게 죽으면 되는 것을 왜 의연하게 받아들이지 못하고 구차하게 장기 이식까지 해가면서 살려고 하는가, 이건 현재의 육체적 생명에 전전긍긍하는 속물근성 아닌가, 허락되지 않은 생명을 살아보겠다는 헛된 욕망 아닌가, 등등 이런저런 생각들이 끝도 없이 출몰했습니다.

그렇게 한참을 씨름하다가 새롭게 물었습니다. 만일 오늘 당장 죽는다면 무엇이 가장 아쉬울까? 쓰고 싶은 글을 쓰지 못하는 것일까? 다시 한 번 펼쳐보고 싶은 목회의 꿈을 이루지 못하는 것일까? 이 세상 모든 것과 영원히 이별해야 하는 것일까? 당연히 아쉽지 않은 게 없었습니다. 모든 것이 가슴 한편에 시린 아픔과 달랠 수 없는 아쉬움으로 남을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가슴을 쥐어뜯게 할 만큼 커다란 아픔이나 미련으로 남을 것 같지는 않았습니다. 아쉽기는 하겠지만 얼마든지 깨끗하게 포기하고 접을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런 것 때문에 죽지 않겠다고 애걸복걸할 것 같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한 가지 사실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죽음의 손을 덥석 잡지 못하게 가로막는 걸림돌 하나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것은 매우 사적이고 작은 일이었습니다. 아내와 아들을 더 이상 보지 못한다는 것. 한 세상 살면서 가장 많이 보았던 얼굴, 때로 험악한 모습으로 잡아먹을 듯이 바라보았던 얼굴을 더 이상 보지 못한다는 것. 그랬습니다. 아내와 아들과 함께 아침 밥상을 마주할 수 없다는 것이, 아내와 함께 산책을 할 수 없다는 것이, 길가에 피어난 들풀을 보고 감탄하는 아내의 달뜬 소리를 들을 수 없다는 것이, 아들이 변해가는 모습을 볼 수 없다는 것이, 아들이 삶의 기로에서 방황하고 힘들어 할 때 조언해줄 수 없다는 것이, 오직 그것만이 죽음의 손을 덥석 잡지 못하게 하는 유일한 아쉬움이요 안타까움으로 다가왔습니다.

그리고 그 진실은 곧바로 내가 살아야 할 이유에 대한 답으로 돌아왔습니다. ‘많은 사람에게 영향력을 미치지 못하더라도 좋다. 가슴 속에 알알이 박혀 있는 목회의 꿈을 펼치지 못하더라도 좋다. 아내 홀로 창밖의 빗소리를 듣지 않을 수 있다면, 맛있는 음식을 앞에 놓고 울음을 삼키지 않을 수 있다면, 아들이 중대한 선택의 기로에서 고민하고 있을 때 한 마디 조언해 줄 수 있고 처진 어깨를 감싸 안아줄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나는 더 살아도 좋을 충분한 이유가 된다.’고 생각되었습니다. 나는 생각이 사라지기 전에 메모 수첩에 썼습니다. “살고 싶다. 1년이라도 더. 아니 10년, 20년을 더 살고 싶다. 비록 죄악과 어둠과 비탄이 가득한 세상일지라도 나는 다른 세상이 아니라 죄악과 어둠이 가득한 바로 이 세상을 좀 더 경험하고 싶다. 온 몸과 온 맘으로 더 깊이 겪어내고 싶다. 그것이 하나님나라를 사모하는 마음이 약한 증표라 해도 좋다. 믿음으로 이 세상을 상대화하는 것이 아니라고 힐난해도 좋다. 지금보다 더 아름답고 고상한 세계, 창조질서에 부합하는 진정한 세계가 기다리고 있을지라도 나는 지금 이 세상에서의 삶과 경험의 기회를 더 많이 누리고 싶다. 더 깊이 맛보고 음미하고 싶다. 사랑하는 가족과 얼굴을 마주하며 가볍게 웃음 짓고 어깨를 다독여줄 수 있으면 그것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된다. 간 이식의 대가를 지불해도 괜찮다고 생각된다. 아내와 다운이의 변해가는 삶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놀라운 기쁨이요 행복이겠는가!”

그랬습니다. 죽음 앞에 서보니 세상 모든 것이 먼지 같았습니다. 그 무엇도 눈에 들어오는 게 없었습니다. 성공도 돈도 큰 집도 명예도 권세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눈에 들어오는 건 오직 가족과 함께 하는 지극히 작은 삶이었습니다. 그저 바라볼 수만 있어도 충분한 소자의 삶이었습니다. 사실 이전에는 그런 삶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었습니다. 그런데 눈에 들어오지 않던 그 작은 삶이 죽음의 손을 덥석 잡지 못하게 한 가장 큰 걸림돌이었고, 아들의 중요한 장기를 도려내는 희생을 감행하게 할 만큼 위대한 것이었습니다.

 

죽음을 보고 나서

 

그 후 편안한 마음으로 수술에 임했습니다. 10시간의 깊은 잠에서 깨어나는 순간, 모든 것이 희미했음에도 불구하고 수술실에 들어갔다는 사실이 어렴풋이 기억났습니다. 곧이어 수술이 끝난 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또 수술 중에 죽은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내의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눈을 뜨고 볼 수는 없었지만 분명하게 들을 수 있었습니다. 수술이 잘 됐다고. 아들도 수술이 잘 되어 병실로 들어왔다고. 아, 감사했습니다. 한없이 감사했습니다. 눈에는 절로 눈물이 맺혔습니다. 마음은 소리 없이 외쳤습니다. ‘아! 살았구나! 살았구나! 하나님, 감사합니다!’ 비록 인식은 희미했고 ‘살아있음’에 대한 의식도 실낱같았지만 살아있다는 사실이 기적처럼 반가웠습니다. 몸에는 수십 개의 주사액이 흘러들어가고 있고, 목에는 인공호흡을 위해 굵은 관이 들어 있고, 코에도 호스가 연결되어 있고, 몸은 철근 콘크리트처럼 무겁고, 몸을 움직일 수도 없었지만 ‘살아있다’는 사실 앞에선 그 어떤 것도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단지 살아있다는 것 자체로 환희였습니다. 살아있음의 환희를 억누를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오직 살아있다는 사실과 ‘살아있음’에 대한 환희만이 내 의식과 감각을 지배하고 있는 전부였습니다.

수술 후 회복의 과정에서 아들은 극심한 고통을 겪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큰 어려움을 겪지 않았습니다. 아니요. 사실을 정직하게 말한다면, 극한 어려움을 어려움으로 느끼지 않았다고 해야 맞습니다. 하나님과 아들의 지극한 사랑으로 살아난 마당에, 가족들과 많은 이들의 뜨거운 중보기도와 사랑을 덧입고 살아난 마당에 무엇이 힘들고 어렵겠습니까. 어떻게 힘들다고 짜증부릴 수 있겠습니까. 8일 동안 중환자실에서 나무토막처럼 침대에 붙박여 지냈지만 한 순간도 짜증을 내거나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감사의 눈물만 하염없이 흐를 뿐이었습니다. 날마다 한 주먹씩 약을 먹고, 몸은 굶주린 나라의 아이처럼 뼈만 앙상하게 남고, 한 걸음을 떼는 것부터 다시 시작해야 했지만 하루하루가 기적이고 감사였습니다.

이 글을 쓰는 지금 수술한지 꼭 1년이 됐습니다. 지금에 와서 돌아보니 참으로 지난한 시간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지난한 시간들 속에서 가장 충만한 기쁨을 맛보았고, 가장 충만한 삶을 살았습니다. 내가 살아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기적 같은지 내 몸을 스스로 만져보며 살아있음을 확인하기도 했고, 홀로 창밖을 바라보다가 흐르는 눈물을 닦은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물론 언젠가 늙고 병들어 죽을 것입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죽음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생명의 세계에 참여하고 있다는 것이 그렇게 황홀할 수가 없습니다. 건강하게 생명을 향유하고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물론 예전에도 감사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금 맛보는 기쁨이나 감사와는 비교할 수가 없습니다. 예전에는 감사 속에도 비교에서 오는 불만족이 있었고, 원함과 현실의 간극에서 오는 좌절도 있었고, 살아있다는 사실만으로 기뻐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살아있음이 최고의 기쁨이요 감사입니다. 예전에는 생명이나 삶보다 작은 것들이 눈에 많이 들어왔는데, 지금은 그런 것들이 자주 어른거리지 않습니다. 순간 어른거렸다가도 이내 곧 사라집니다. 때로 화가 치밀어 오르기도 하고, 내일에 대한 염려가 엄습하기도 하지만 아주 짧은 순간일 뿐 마음속에 자리를 잡지는 않습니다. 근심과 염려도 현저하게 줄었습니다.

 

죽음, 생명의 창

 

물론 나는 죽음을 경험하지 않았습니다. 죽음의 턱밑까지 갔다 왔을 뿐 죽음을 경험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단지 죽음을 가장 또렷하게 보았을 뿐입니다. 난생 처음으로. 그런데 죽음을 또렷하게 보자 말자 죽음보다 더 또렷한 것이 있었습니다. 생명과 삶이었습니다. 생명이 그처럼 위대하고 찬란할 수가 없었고, 삶의 축복과 은총이 그처럼 풍성하고 다채로울 수가 없었습니다. 그랬습니다. 턱밑에 와있는 죽음을 보고서야 그때까지 보지 못했던 생명과 삶의 맨 얼굴을 보았습니다. 세상에서 생명과 삶보다 더 위대하고 값진 것이 없다는 진실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알았습니다. 죽음이 생명의 창임을. 죽음의 창을 통하지 않고서는 생명과 삶을 볼 수 없음을.

예수님은 아주 오래 전에 이 진실을 말씀했습니다. 어느 날 유대 지도자인 니고데모에게 말씀했지요. “사람이 다시 태어나지 아니하면 하나님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요3:3). 여기서 ‘다시 태어나야 한다’는 말씀은 죽음의 과정을 통과해야 한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옳습니다. 예수님은 이미 알고 계셨습니다. 사람이 다시 태어나기 위해서는 죽어야 한다는 것을. 새로운 차원의 삶을 살기 위해서는 예전의 내가 죽어야 한다는 것을. 현재의 내가 죽어야 죽음을 사는 현재의 삶이 아니라 생명을 사는 하나님나라 양식의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 진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은 우리를 죽이기 위해, 우리의 죽음을 대신 십자가에서 죽으신 거였습니다.

예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의 해석자인 바울도 같은 이야기를 했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인을 가리켜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 생명에 참여한 자’(롬6:3)라고 설명했습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살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지 않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살 수 없습니다. 이것은 영원히 지울 수 없는 하나님의 구원 방식입니다.

세 문장만 덧붙이겠습니다. 우리의 삶이 죽음 현상에 내몰리지 않기 위한 최고의 비밀은 ‘죽음’입니다. 죽음을 보지 않는 자는 죽음 현상으로 내달리고, 죽음을 보는 자는 생명 현상을 좇습니다. 이것이 죽음과 삶의 역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