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다보면 난데없이 엉뚱한 상상이나 질문에 붙잡힐 때가 있다. 오늘 점심을 먹고 난 후에도 그랬다. 점심을 먹고 후식으로 때 이른 수박 맛을 음미하고 있는데 느닷없이 생각지 않은 질문이 찾아왔다. ‘만일 우리 기도가 모두 응답받는다면 어떻게 되지?’ 이 질문이 뇌와 접속하자말자 뇌는 시키지도 않았는데 저 혼자 바쁘게 작동하더니, 기도하는 것마다 응답을 받을 때 벌어질 수 있는 일들이 스냅 사진처럼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눈에 들어온 현실은 놀랍게도 너무 끔찍했다.

 

아니 그게 무슨 소리냐고 의아해할지 모르겠다. 기도하는 것마다 응답받는 현실이 왜 끔찍하냐고 묻고 싶을지 모르겠다. 기도하는 것마다 응답받는 것이야말로 모든 그리스도인의 간절한 소망이 아니냐고 항변하고 싶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성급함을 누르고 잠시 생각해보자. 만일 우리가 기도하는 것마다 기도한대로 이루어진다면 어떻게 될까? 기도하기만 하면 시험마다 백점을 맞고, 먹고 싶은 것이 주어진다면 도대체 어떤 일들이 벌어질까? 학생들은 당장 공부하지 않을 것이고, 농부들은 결코 씨를 뿌리러 나가지 않을 것이다. 기도만 하면 백점을 맞는데 어떤 바보가 밤새워 공부하겠으며, 기도만 하면 먹을 것이 쏟아지는데 누가 뙤약볕에 나가 씨를 뿌리겠는가? 기도만 하면 날씬한 각선미에 건강하고 윤택한 피부 미인이 되는데 누가 달콤한 아이스크림과 매혹적인 빵맛을 멀리 하겠는가? 기도만 하면 요정처럼 예쁜 아이를 얻을 수 있는데 누가 열 달씩이나 고생해가며 해산의 고통을 겪으려 하겠는가? 아무리 공부하고 씨를 뿌리는 것이 기도하는 것보다 더 훌륭한 태도라 할지라도 기도를 통해 같은 결과를 얻을 수 있는데 누가 굳이 공부하려 하겠으며, 누가 굳이 뙤약볕에 나가 씨를 뿌리려 하겠는가? 성실하게 노력하던 자들이라도 조금씩 마음이 무너질 것이고, 노력의 의미와 필요에 회의를 느끼면서 결국에는 기도라는 쉬운 길로 돌아서지 않겠는가? 사람마다 온통 하늘만 바라보지 않겠는가? 세계의 현실성은 사라지고 마술만 요동치는 이상한 세계가 되지 않겠는가? 또 저 나쁜 놈을 죽여 달라는 기도가 하늘을 찌르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세상은 순식간에 죽음의 계곡으로 뒤덮이지 않겠는가? 어디 그뿐인가? 세상의 창조자요 구원자이신 삼위 하나님, 경배 받아야 마땅한 하나님은 어쩔 수 없이 ‘금 나와라 뚝딱’하는 요술지팡이로 전락하게 될 것이다. 기도하는 것마다 응답하시는 하나님으로 경배를 받기보다는 사람들의 끝없는 욕심에 휘둘리는 종의 신세를 면치 못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인격적인 소통 같은 건 없는 세계, 사람들이 맘대로 신(神)을 부리는 무엄(無嚴)한 세계가 될 것이다. 세상 모든 것은 정녕 뒤죽박죽일 것이고, 하나님의 영광은 무참하게 짓밟히고 말 것이다. 기독교의 몰골 또한 형체를 알 수 없게 변해버리고 말 것이다. 현재의 추악함보다 훨씬 더한 무법천지가 될 것이다.

 

기도가 무익하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기도가 필요 없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기도는 하나님께 올라가는 향기이며 하나님의 면전에 서는 것이다. 기도는 신령한 들음이며 정직한 고백이다. 뿐만 아니라 기도는 사랑의 통로이기도 하다. 중보 기도는 진실로 물질적인 나눔 이상의 나눔이요 서로를 묶는 사랑의 끈이다. 더욱이 기도는 가장 피조물다운 존재의 양식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도하는대로 응답받는 것은 결코 축복일 수 없다. 그것은 축복이 아니라 재앙이며, 재앙 중에서도 가장 끔찍한 대재앙이다. 세상이 끔찍한 재앙에 파묻히지 아니하고 이만큼이라도 남아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외면하셨기 때문이다. 자기중심적이고, 피상적이고, 근시안적이고, 감정적이고, 어리석은 우리의 기도대로 응답하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하여, 나는 우리의 기도대로 행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지혜를 찬양하지 않을 수가 없다. 우리의 기도대로 응답하지 않는 하나님의 지극한 은총에 감사하지 않을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