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누구나 고통은 최소화하고 즐거움은 최대화하기를 원합니다. 이 땅에서는 비록 그렇게 살 수 없다 해도 저 세상에서만큼은 괴로움과 슬픔이 없는 완전한 삶을 꿈꿉니다. 실제로도 인류는 그동안 과학, 의학, 심리학, 정신분석학, 종교, 기술, 복지 등 다양한 방법들을 총동원해가며 고통 없는 삶을 향해 달려왔습니다. 고통 없는 삶을 인류의 이상처럼 생각하며 고통과 두려움을 몰아내기 위한 지난한 싸움을 싸워왔습니다. 하여, 오늘에 이르러서는 상당한 성공을 일구어냈습니다. 적어도 의학적으로는 신체적인 고통을 몰아내는데 의미 있는 진전을 이루었습니다. 의학 기술의 발달로 인해 아무리 어렵고 큰 수술이라도 큰 고통 없이 수술하고 있고, 수술 이후에도 통증클리닉 덕분에 심각한 고통에 시달리는 일이 적어졌습니다. 정말 다행스럽고 감사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생각해볼 것이 있습니다. ‘고통 없는 삶이 과연 지고선일까?’ 하는 문제입니다. 일본의 모리오카 마사히로 교수는 현대 문명을 일컬어 [무통문명]이라고 명명했습니다만 고통 없는 문명이 정말 이상적인 문명일까요? 고통이 적어질수록 행복이 증가할까요? 고통 없는 삶이 사람에게 유익할까요? 아니, 고통 없는 삶이 가능한 걸까요? 아닙니다. 고통이 비록 죄악의 결과요, 누구도 원치 않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고통 없는 삶은 가능하지도 않거니와 유익하지도 않습니다.

 

고통의 신비

 

한 가지만 상상해봅시다. 우리 몸이 아픔을 느낄 수 없다면 어떻게 될까요? 겨울철이면 몸을 녹여주는 난로에 데는 아이들이 많아질 것입니다. 우리 몸이 통증을 느끼지 못한다면 수많은 위험에 노출되어 이내 곧 망가지고 말 것입니다. 인도의 선교사이자 의사로 일했던 폴 브랜드가 경험한 일입니다. 한 번은 창고의 문을 열려고 하는데 녹슨 자물쇠가 말을 듣지 않아 낑낑대고 있었답니다. 그때 영양실조에 걸려있는 10살짜리 아이가 웃으면서 ‘제가 해 볼게요. 의사 선생님’ 하면서 달려들더니 열쇠를 자물쇠에 집어넣고 손으로 홱 비틀어 열더랍니다. 브랜드 박사는 나약한 어린 아이가 어떻게 자기보다 더 큰 힘을 쓸 수 있었는지 의문이었지만, 땅바닥에 핏방울이 떨어져 있는 것과 소년의 손가락이 찢어져 피가 흐르는 것을 보고 그 힘의 비밀을 알았답니다. 그 소년은 손가락의 살갗은 물론이고 피하 지방과 관절까지 드러날 정도로 상처를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통증을 느끼지 못했던 것입니다. 선천성 무감각증을 앓고 있는 여자 아이의 이야기는 더 충격적입니다. 갓 돌을 지난 아이가 옆방에서 깔깔대며 좋아하는 소리를 듣고 재미있는 놀이라도 발견했나 싶어 가본 엄마는 소스라치듯 놀랐답니다. 아이가 자기 손가락을 물어뜯어서 흐르는 핏방울로 그림을 그리며 놀고 있더랍니다.

 

한센씨병은 손 ‧ 발 ‧ 코 ‧ 눈 ‧ 귀 등이 흉하게 일그러지고, 살이 썩고, 사지가 떨어져 나가는 것 때문에 천형(天刑)으로 취급받았던 질병입니다. 인도에서 한센씨병 환자들을 돌본 의사 폴 브랜드는 그 질병이 그처럼 무서운 신체적 손상을 가하는 것은 아픔을 느끼는 말단의 신경 세포들이 마비되기 때문임을 확인하고, 영국 정부로부터 고통을 느낄 수 있는 ‘인공 통각 시스템’을 고안해내는 과제를 위임받아 연구하면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육체적인 통증이야말로 하나님이 주신 은총입니다. 고통을 창조하신 하나님께 감사하십시오. 나는 하나님이 그보다 더 훌륭한 창조를 하실 수 있었다고는 생각지 않습니다.”(고통의 하나님, 필립 얀시). 그렇습니다. 몸이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것보다 더 위험하고 무서운 일은 없습니다.

 

고통과 삶

 

정신과 의사인 스콧 팩은 안락사에 관한 책 [영혼의 부정]에서 심리적 고통의 대부분은 질병이 아니라 인간의 조건에서 비롯되는 고유한 현상이라고 말하면서 인간의 조건을 매우 정확하게 이야기했습니다. “인간은 자신의 의지를 갖고 있는 의식적 존재로서 이 세상을 살아가지만 이 세상은 우리가 바라는 대로 전개되지 않는다. 바로 그런 세상을 살아야 하는 것이 인간의 조건이다.” 그는 우리의 의지가 외부 세상의 현실과 충돌할 때마다 겪을 수밖에 없는 고통을 ‘생존적 고통’이라고 명명했습니다. C. S. 루이스는 “자연 질서 및 자유의지와 맞물려 있는 고통을 배제한다는 것은 삶 그 자체를 배제하는 것과 같다.”(고통의 문제)고 했습니다. 진실로 그렇습니다.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생존적 고통’을 피할 수 없습니다.

 

시인 신달자는 몇 년 전 [나는 마흔에 생의 걸음마를 배웠다]는 자전적인 에세이를 펴냈습니다. 그 책에는 그녀의 나이 35살에 남편이 고혈압으로 쓰러져 23일 동안 혼수상태로 사경을 헤매다가 기적적으로 깨어난 일, 그 후로도 24년 동안 병든 남편의 뒷바라지를 해야 했던 일, 또 그런 와중에 80살 된 홀시어머니가 쓰러져 9년 동안 병수발을 해야 했던 일 등등 처절하고도 고단했던 삶의 이야기가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시인은 자기의 삶을 통해 삶을 이야기하면서 희수라는 제자에게 속삭이듯 토해냅니다. “부부가 같이 사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아는 나이가 되었다. 그리고 살아야 하는 이유가 얼마나 많은지, 살지 못하는 이유가 얼마나 많은지 아는 나이가 되었다.” “결혼은 아무 것도 모르고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너 말고도 많은 사람들이 그것이 뭔지 모르고 하고, 나중에 알고 나서는 ‘으악!’ 하는 것이 결혼인지도 모르지.” 비록 뒤늦은 발견이었지만 시인에게 삶이란 그런 것이었습니다. 알고 보니 ‘으악’ 할 수밖에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모진 삶의 격랑을 온 몸으로 치르고 난 후 시인은 달관한 듯 말합니다. “고통을 껴안고 살아라. 고통과 사랑을 하라. 고통을 잘라서 버릴 수 없다. 고통을 버리면 나도 버리는 것이다. 고통과 내 삶은 함께 버물러진 것이다.”

 

러시아의 시인 알렉산드르 푸쉬낀은 삶의 실상을 이렇게 외쳤습니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노하거나 서러워하지 마라!

절망의 나날 참고 견디면

기쁨의 날 반드시 찾아오리라.

 

가슴은 미래에 살고

현재는 언제나 슬픈 법

모든 것은 한 순간 사라지지만

가버린 것은 마음에 소중하리라.

 

 

그렇습니다. 삶이란 그런 것입니다. 분노하거나 서러할 수밖에 없는 것이면서도 분노하거나 서러워해서는 안 되는 것이 바로 삶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대부분 이 진실을 충분히 인식하지 않은 채 인생이라는 거친 항해에 나서는 것 같습니다. 아니 어쩌면 비현실적인 환상과 낭만적인 희망을 품을 수 있기에 인생이라는 거친 항해를 나서는지도 모릅니다. 삶의 실상을 충분히 알지 못하는 철없음과 무지가 오히려 출항에의 용기가 되는지도 모릅니다. 적어도 나를 보면 그렇습니다. 내가 감히 한 여인과 가정을 꾸리고, 맨 땅에서 개척 목회를 시작할 수 있었던 것은 철없음과 무지에서 비롯된 지나친 낙관 때문이었습니다. 남녀가 함께 산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사람도 없고 돈도 없이 목회를 시작한다는 것이 얼마나 무모한 일인지를 몰랐기에 감히 도전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비현실적인 환상과 낭만적인 희망으로 고통이라는 삶의 현실을 외면하거나 도피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비현실적인 환상과 낭만적인 장밋빛 희망에서 나오는 에너지만으로는 인생이라는 항해를 계속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인생이라는 항해를 계속하기 위해서는 진실이라는 에너지가 꼭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삶의 진실은 이것입니다. 삶은 고통과 함께 버물려져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생존적 고통’을 피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평생을 은둔자로 살았던 중세의 신비주의자 줄리언이 “우리의 인생에는 행복과 불행이 멋지게 어우러져 있다.”고 말한 대로 사람에게는 행복과 고통 두 가지가 모두 필요합니다. 행복으로만 가득한 인생이 참 멋질 것 같아 보이지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행복으로만 점철된 인생처럼 가벼운 것이 없고, 무미건조한 것이 없습니다. 그녀는 또 이렇게 말했습니다. “신이 우리에게 고통을 준 것은 그것이 우리가 즐거움을 느낄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기 때문이다. 신은 우리가 고통을 느끼는 것을 원치 않지만, 불행을 알아야만 행복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신은 우리에게 즐거움을 주기 위해서 고통을 허용해야만 했다. 명심하라. 신(神)에게는 다른 방법이 없다.”(당신은 지금 행복한가. 숀 크리스토퍼 쉐어). 그렇습니다. 이것은 피할 수 없는 인생의 오류이며 운명입니다. 우리의 삶은 두 가지 피할 수 없는 진실의 압력을 받고 있습니다. 가장 피하고 싶은 것이 고통이라는 진실과 고통 없는 삶은 인간에게 유익하지 않을 뿐 아니라 해롭기까지 하다는 진실입니다. 우리의 몸이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것보다 더 위험하고 무서운 일이 없듯이 우리의 삶 또한 고통이 없는 삶보다 더 해롭고 치명적인 일이 없습니다. 이것은 매우 잔인한 진실이지만 피할 수 없는 진실입니다. 하여, 하나님조차도 고통을 허용하는 것 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얼마 전에 우리 곁을 떠난 [토지]의 작가 박경리 선생님은 말했습니다. 자기가 만일 행복했다면 소설을 쓰지 않았을 것이라고. 고생과 고난이 ‘토지’라는 거대한 작품을 쓸 수 있는 에너지를 불태우는데 도움이 되었다고. 물론 고생과 고난 자체가 어찌 행복일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고난과 고통이 토지라는 작품을 낳게 한 자산이 되었다는 작가의 고백은 진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작곡가 리하르트 바그너도 “진실로 행복한 인간이 어떻게 예술을 할 생각을 가질 수 있는 지 의문이다.”고 했고, 어니스트 헤밍웨이 또한 “한 작가의 가장 중요한 자산은 불행한 유년시절이다.”고 했습니다. [채근담]에도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괴로움과 즐거움을 함께 연마하여, 연마한 끝에 얻은 행복, 그 행복은 비로소 오래 간다. 의문과 믿음을 서로 참작하여, 참작한 끝에 이룬 지식, 그 지식이라야 비로소 참된 것이다.” 참 옳은 말입니다.

 

삶은 정말 오류와 역리가 뒤섞인 오묘의 세계입니다. 합리를 뛰어넘는 신묘의 세계입니다. 쾌락은 고통의 일시적인 유예에 불과할 뿐 허무의 수렁에 빠져들게 하는 경우가 많고, 고통은 오히려 창조의 에너지와 자산이 되는 경우가 많으니까요. 만족은 이내 곧 교만과 권태를 부르는데 비해 패배의 쓴 잔은 열등감이라는 동굴 속으로 몰아가기도 하지만 겸허함의 자리로 돌아가게도 하니까요. 배고플수록 음식 맛이 좋고, 사막에서 마시는 물 한 컵과 집에서 마시는 물맛은 비교도 할 수 없으니까요.

 

어린 아이 같지 아니하면?

 

어린 아이는 흔히 순진무구의 대명사로 불립니다. 또 행복한 자의 표상으로도 오르내립니다. 물론 아이라고 해서 마냥 행복한 것만은 아니겠지만 근심 ‧ 걱정 ‧ 공포 ‧ 연민 ‧ 미움 ‧ 질투 같은 게 거의 없다는 면에서, 또 철저하게 현재를 살고 있다는 면에서 아이는 어른보다 즐겁고 행복한 것이 사실입니다. 예수님께서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18:3)고 말씀하신 것처럼 대부분의 성인은 어린 아이처럼 행복하기가 어렵습니다. 내일에 대한 염려와 근심 없이 오늘을 살기도 어렵습니다. 하지만 어린 아이의 행복이 사람이 추구해야 할 행복의 참 모습일 수는 없습니다. 어린 아이의 행복은 즉흥적이고 감각적입니다. 그런데 성인이 만일 어린 아이와 같은 행복을 고집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인간이란 고난을 겪는 존재이고 산다는 것은 곧 수난을 해쳐나가는 것인데 어떻게 어린 아이와 같은 행복을 평생 누릴 수 있겠습니까? 혹 본인은 어린 아이처럼 행복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누군가의 가슴에는 분명히 못이 박힐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평생 어린 아이와 같은 행복을 구가한다는 것은 가능하지도 않거니와 바람직하지도 않습니다.

 

우리는 어른이 되어야 합니다. 즉흥적이고 감각적인 행복을 넘어 삶의 신비와 은총의 깊이에서 우러나오는 행복의 세계로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의 내면과 삶의 지평이 넓어지고 깊어져야 합니다. 예수님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자라야 합니다(엡4:13). 그런데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생존의 고통과 직면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얽히고설킨 삶의 그물망 속으로 들어가지 않으면 안 됩니다. 문제라고 하는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거친 길을 걸어가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래야만 삶의 지평이 넓어질 수 있고 깊어질 수 있으니까요. 삶의 태도 또한 다듬어질 수 있으니까요. 생존의 고통과 삶의 문제를 직면하고 조율하고 해결해가는 과정을 통해서만 삶의 신비가 열리고, 삶속에 알알이 박힌 창조주의 사랑과 은총이 계시되니까요. 행복이라는 삶의 에너지는 고통이라는 연료를 태움으로써만 발생하니까요. 성경의 시인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시119:67, 71). 예수님은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했습니다(마5:4). 성경은 심지어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까지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웠다고 했습니다(히5:8). 옳습니다. 고난의 필요성은 예수님에게도 해당되는 삶의 진실입니다.

 

석가 싯다르타가 말한 것처럼 인생은 고통의 바다입니다. 행복은 고통의 땅에서 눈물을 머금고 피어나는 한 떨기 꽃입니다. 고통의 땅에서 눈물을 머금어보지 않은 삶의 꽃은 향기 없고 생명 없는 조화(造花)일뿐 꽃일 수 없습니다. 하여, 감히 말합니다. 당신은 행복을 위해 얼마나 깊이 고통의 땅에 뿌리를 내리고 있습니까? 눈물의 단비를 얼마나 뿌려주고 있습니까? 제 말이 너무 잔인하게 들리나요? 너무 무정하게 들리나요? 하지만 어쩌겠어요? 그것이 눈앞의 진실인데요. 진실을 외면하고서는 삶에 뿌리를 내릴 수도 없고, 행복의 꽃을 피울 수도 없는데요. 더욱이 사람은 결핍에서 기인하는 고통과 만족에서 수반되는 권태 사이에서 쉼 없이 흔들리는 시계추와 같은데요. 고난과 고통이 없이는 영혼과 삶의 주요한 부분이 무너지게 되어 있는데요. 그래요. 고난과 고통은 매우 독특한 창조성을 통해 영혼과 삶을 영글게 합니다. 필립 얀시는 고통 없는 세계를 ‘지옥’이라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