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행복하기 위해서는 건강한 자존감이 있어야 하고, 건강한 자존감을 위해서는 크든 작든 뭔가를 성취해 본 경험이 있어야 합니다. 사랑을 듬뿍 받는 것도 자존감의 든든한 토대이지만 사랑받음의 경험만으로는 충분치 않습니다. 뭔가를 성취해 본 경험도 필요합니다. 성취감에는 삶의 에너지를 증폭시키는 놀라운 에너지와 존재에 대한 긍정의 힘이 내재되어 있습니다. 아마 성취를 통해 얻는 에너지보다 더 강한 에너지는 없을 것입니다. 성취를 통해 맛보는 희열보다 더 짜릿한 희열은 없을 것입니다. 정말 성취의 순간은 존재의 영광이 가장 빛나는 최고의 순간입니다.

 

성취가 부르는 치명적인 위험

 

그런데 잊지 말아야 할 진실이 있습니다. 삶의 에너지를 증폭시키고 존재의 영광을 밝히 드러내는 성취감이 매력적인 만큼 유혹적이기도 하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앞에서도 말씀드렸다시피 사람이 성취를 위해 에너지를 쏟는 것이나 성취를 통해 자기존재감을 확인하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인류 역사의 비약적인 발전도 진공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성취를 향한 인간의 노력이 오늘의 문명을 일구어낸 원동력입니다. 오늘 우리가 구가하는 모든 문명의 혜택은 실로 위대한 성취의 열매들입니다. 한 사람의 성취는 단지 한 사람의 성취로 끝나지 않습니다. 한 사람의 성취가 또 다른 성취의 발판이 되기도 하고, 누군가의 생명을 구하기도 하고, 누군가의 삶을 풍성케 하는 혜택의 단비가 되기도 합니다. 내가 지금 이렇게 글을 쓰고 있는 것도 사실은 수많은 이들의 성취 덕분입니다. 내가 간경화로 죽음 앞에까지 갔었지만 아들의 간을 이식받아 생명을 연장할 수 있게 된 것은 전적으로 가족의 사랑과 의학기술의 놀라운 발달 덕분입니다. 이 글을 많은 이들과 나눌 수 있게 된 것도 인터넷이라는 정보의 통로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실로 헤아릴 수 없는 성취들이 쌓이고 쌓였기에 오늘의 삶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인류의 역사와 문명은 앞으로도 쉬지 않고 발전할 것입니다. 인간에게는 위대한 창조성과 끝없는 상상력, 그리고 성취에의 열정이 불타오르고 있기 때문에 변화와 발전은 끝없이 계속될 것입니다. 인간이 존재하는 한 성취의 역사도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성취는 진실로 함께 참여하고 경축해야 할 놀라운 축복임에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과도한 집착은 매우 위험합니다. 성취의 경험이 아무리 자긍심의 에너지원이고 경축해야 할 축복이라 할지라도 과도한 집착은 오히려 삶을 파괴하는 폭력이 될 가능성이 많습니다. 삶을 풍성하게 세우기는커녕 오히려 갉아먹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성취뿐 아닙니다. 무엇이든 과도하게 되면 본말이 전도되는 왜곡을 피하기 어렵습니다. 빛도 과하면 눈을 멀게 하고, 매혹도 지나치면 치명적인 유혹과 중독을 부르지 않습니까.

 

삶의 풍성함이란?

 

사실 삶이란 성취가 아닙니다. 뭔가를 성취해가는 과정이 곧 삶이고, 그 과정 속에서 보고 경험하는 것들이 삶이지 성취가 삶일 수는 없습니다. 행복도 마찬가지입니다. 행복도 성취의 과정에서 맛보는 순간의 은총인 것이지 성취의 결과물 속에 담보되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진실은 언제나 변치 않습니다. 삶과 행복은 쌓아놓을 수 있는 그 무엇이었던 적이 없습니다. 삶이란 단지 보고 경험하는 것일 뿐입니다. 삶은 호수보다는 강에 가깝습니다. 물을 저장하는 호수보다는 끝없이 흘러가는 강이 삶의 본질에 훨씬 가깝습니다. 얼핏 생각하면, 보고 경험한 것은 아무 것도 손에 잡히는 게 없는 것 같아 보입니다. 마치 바람이 스쳐 지나가면 아무 것도 남아 있는 게 없는 것처럼. 하지만 조금만 깊이 생각해보면, 보고 경험하는 것이야말로 삶을 풍성하게 하는 진정한 자산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돈 천억을 모았다고 해서 삶이 풍성해집니까? 땅을 많이 갖고 있다고 해서 삶이 살아납니까? 아파트 평수가 넓다고 해서 삶이 아름답게 꽃핍니까? 생활과 소비는 풍부해질 수 있겠지만 삶은 풍성해지지 않습니다. 삶이란 그렇게 일차원적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시시한 삶을 우리에게 주신 적이 없습니다. 삶은 황혼의 아름다움에 넋을 잃고, 모차르트의 음악에 몸이 젖을 때 피어납니다. 풀잎을 스쳐온 바람이 콧등을 간질일 때 삶은 바람처럼 다가옵니다. 생명의 신비가 눈에 들어올 때 삶이 반짝입니다. 오랜 친구가 멀리서 안부를 전해올 때 삶은 행복에 휘감깁니다.

 

진실로 그렇습니다. 삶을 풍성하게 하고 아름답게 하는 길은 눈에 보이는 성취의 결과물을 축적하는데 있지 않습니다. 삶의 속살을 보고 삶의 다양한 은총을 경험하는데 있습니다. 삶이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넓고, 깊고, 높습니다. 하나님의 존재만큼이나 심오하고, 하나님의 창조만큼이나 광대하고 다채롭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레이더망에 포착되지 않는 영원한 타자요 영원한 신비입니다. 그분은 스스로를 계시하시지만 동시에 은폐하십니다. 그분은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있는 분으로 존재하십니다. 삶 또한 그렇습니다. 우리는 결코 하나님의 지혜에서 흘러나오는 삶을 포착할 수 없습니다. 단지 삶을 살 뿐이고, 삶의 진실을 조금씩 발견해나갈 뿐이지 그 이상 어찌해볼 수가 없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의 의지대로 삶을 조종할 수 있습니까? 삶이 여러분의 뜻에 복종하던가요? 여러분이 만든 창고에 삶이 저장되던가요? 우리의 선택과 의지와 행위가 삶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의 선택과 의지와 행위가 삶의 흐름을 바꾸기도 하고, 삶의 내용을 만들기도 한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한 번의 선택이 평생을 좌우하기도 합니다. 오늘 우리가 구가하는 과학기술 집약적인 삶 또한 그동안의 성취들이 쌓인 열매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은 궁극적으로 우리의 선택을 따르지 않습니다. 우리의 지배를 받지도 않습니다. 우리가 행한 대로 결과가 주어지지도 않습니다. 삶은 생각만큼 쉽게 손아귀에 잡히지 않습니다. 당연히 저장해놓을 수도 없습니다. 우리가 숨을 쉬고 살지만 공기를 손에 쥘 수도, 저장해놓을 수도 없는 것처럼 말입니다.

 

삶은 책이다

 

삶은 단지 사는 것입니다. 하지만 삶은 단지 사는 것이 아닙니다. 삶은 읽는 것입니다. 창조주 하나님과 인간과 온 세상을 찬찬히 읽어가는 것, 그것이 삶입니다. 아니, 삶을 읽다니, 그게 무슨 말인가 싶은가요? 예, 삶을 읽는다는 게 쉽게 다가오지 않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조금만 생각해보십시오. 이 세상과 삶은 단순한 물질덩어리이거나 물리적인 활동이 아니지 않습니까. 이 세상과 삶은 온통 뜻덩어리입니다. 진리가 살아있는 로고스의 세계입니다. 이 세상과 삶이야말로 진짜 책입니다. 깊이 응시하고 찬찬히 읽어가지 않으면 그 속살을 볼 수 없는 진정한 책입니다. 삶보다 더 깊고 오묘하며 위대한 책은 없습니다. 삶이야말로 최고의 책입니다. 때문에 산다는 것은 책읽기이어야 합니다. 찬찬히 깊게 읽어가는 것, 그것이 삶이고, 삶이어야 합니다. 읽지 않는 것은 삶이 아닙니다. 읽지 않고 사는 것은 삶 아닌 삶, 삶을 떠난 삶, 죽음을 사는 것일 뿐 삶은 아닙니다. 삶은 로고스를 통해서만 그 속살을 드러냅니다. 삶은 로고스이고, 로고스를 읽어가는 것이 삶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삶은 어떠한가요? 과연 로고스를 읽어가며 살고 있나요? 세계와 삶을 읽어가며 살고 있나요? 아마도 대부분 그러지 못할 것입니다. 눈앞의 성취에 붙잡혀 사느라 삶이라는 위대한 책을 읽지 못할 것입니다. 1등이 아니면 살아남기 힘든 세상, 거대 자본의 힘에 밀려 먹고 살기도 힘든 세상을 살아가느라 삶이라는 오묘의 로고스까지 읽을 여유가 없을 것입니다. 또 ‘삶을 읽는다고 밥이 나오느냐’는 현실적 인식에 갇혀 있기도 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삶을 읽는다고 밥이 나오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밥으로만 사는 것은 아니라고.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로고스)으로 살아야 한다고(마4:4). 다시 말하면 밥만이 삶의 힘은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읽음이야말로 삶의 힘이라는 겁니다. 세상과 삶의 속살을 읽어야 생활의 장막에 갇히지 않을 수 있고, 생활이 삶을 삼키는 비참한 일이 벌어지지 않을 수 있다는 겁니다. 사실입니다. 삶을 읽는다고 해서 밥이 나오는 것은 아니지만, 세계와 삶을 깊이 읽으면 밥 이상의 에너지가 나옵니다. 삶의 속살을 볼 수 있게 됩니다. 하늘과 바람을 인해 감사할 수 있는 진정한 삶의 세계가 열립니다. 바람처럼 스쳐 지나가는 것이긴 하나 삶의 실체를 맛보는 은총이 임합니다. 그러니 여러분, 삶을 읽는 것이 어찌 헛된 일이겠습니까? 삶을 읽는 것이 어찌 밥 이후의 문제이겠습니까? 삶을 읽는 것이 어찌 생존만큼이나 급박하고 중차대한 생명의 과제가 아닐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왜 삶을 읽지 않는 것일까요? 생존을 위해서는 치열하게 투쟁하는데 삶을 읽는 일에 있어서는 왜 한없이 게으른 것일까요? 아마 눈앞의 성취와 재물을 쌓는 재미에 빠져 있기 때문일 겁니다. 시시각각 변하는 생활과 정보를 좇아가느라 허덕여서일 겁니다. 아니면 아예 관심이 없어서 삶을 읽는 일에는 눈길조차 주지 않아서일 겁니다. 아니면, 모든 눈이 영상의 지배를 받고 있는 시대라서 온통 눈에 보이는 것만 좇아갈 뿐 눈에 보이지 않는 것에는 관심이 없어서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지금 생활과 경쟁에 갇혀서 삶의 지평을 열어볼 기회조차 갖지 못한 채 위대한 삶을 소진하고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을 제대로 보려면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보아야 하는데, 눈에 보이는 것만 좇아가고 있습니다. 물론 눈에 보이는 것을 성취하기는 했습니다. 어느 정도 재물을 쌓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삶의 지평이 넓어지거나 깊어지지는 않았습니다. 오늘날 생활의 지평과 정보의 지평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 세계를 이웃집 드나들듯 하고, 안방에서 세계의 각종 정보를 실시간에 접할 정도로 - 넓어졌지만 삶의 지평은 그다지 넓어지지 않았습니다. 아니, 어쩌면 과거보다 더 좁아졌는지도 모릅니다.

 

삶의 절대 진실은 이것입니다. 삶은 소유할 수 있는 그 무엇이 아니라는 겁니다. 쌓을 수 있는 그 무엇이 아니라는 겁니다. 삶은 성취, 그 이상입니다. 삶은 로고스덩어리입니다. 삶은 깊이 읽어야 할 최고의 책입니다. 하여, 삶은 ‘사는 것’이라기보다는 ‘읽는 것’이라고 하는 편이 옳습니다.

삶을 제대로 읽기 위해서는 몇 가지가 요구됩니다. 삶을 읽기 위해서는 맑고 투명한 눈, 호기심 가득한 눈이 필요합니다. 자세히 들여다볼 수 있는 현미경과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망원경이 필요합니다. 깊이를 들여다보기 위해서는 머묾이, 높이를 품기 위해서는 고요한 영성이 필요합니다. 그 무엇에도 삶을 빼앗기지 않겠다는 결기를 곧추세우는 깨어있음이 필요합니다. 진실로 삶은 읽어가는 길입니다. 삶은 ‘읽음’ 그 자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