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실이 좋지 않은 한 여인이 예수님에게 값진 향유를 부은 이야기는 네 복음서에 다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누가는 다른 세 기자들과 다른 관점에서 이야기를 전하고 있습니다. 누가를 뺀 나머지 기자들은 예수님의 죽음과 연결 짓고 있는데 비해, 누가는 죄 용서의 문제로 연결 짓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한 가지 의문을 가질 수 있습니다. ‘누가가 이 이야기를 잘못 전한 게 아닐까’ 하는 의문을 가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꼭 그렇게 의문을 가질 필요는 없습니다. 누가가 잘못 전했다기보다는 다른 관점에서, 그러니까 죽음의 맥락에서 해석하지 않고 죄용서의 맥락에서 해석한 것이라고 보면 별로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우리 안에는 ‘성경에 나오는 하나의 사건, 하나의 이야기 속에는 하나의 뜻만 들어있다’는 생각이 아주 강고하게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오병이어 이야기는 뭘 말하고 있고, 죽은 나사로를 살린 이야기는 뭘 말하고 있다’ 이렇게 하나의 관점으로 딱 부러지게 해석해야 직성이 풀리는 묘한 분위기가 교회 안에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사고는 매우 위험합니다. ‘이 해석 외에는 다 잘못된 해석이다’라고 해석의 다양성을 차단해버리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하나의 사건이나 이야기는 여러 맥락에서 해석할 수 있고, 여러 맥락과 연결 지을 수 있습니다. 물론 아전인수 격으로 자기 유리한대로 갖다 붙이는 것은 곤란합니다만, 진리는 기본적으로 닫혀 있지 않고 열려 있습니다. 진리는 수학공식이 아닙니다. 진리 안에는 많은 것이 함축되어 있습니다. 또 진리의 영은 자유의 영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진리는 해석의 길이 열려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바리새인의 집에 들어간 예수님

 

오늘 이야기로 들어가겠습니다. 바리새파 사람 가운데 시몬이라는 사람이 예수님을 식사에 초대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바리새파 사람들은 여러 가지 면에서 예수님과 달랐습니다. 율법에 대한 이해에서부터 일상의 크고 작은 행동양식까지 많은 것들이 달랐습니다. 그러니 바리새파 사람들이 예수님을 좋지 않게 바라보고, 예수님과 사사건건 충돌하고, 심리적인 바리케이드를 치는 것은 매우 당연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구조적으로 예수님에게 호감을 가질 수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처럼 근본이 다르고 구조적으로 다른 바리새파 사람이 예수님을 식사에 초대했다는 것은 꽤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더욱이 그 당시에는 선생(라삐)을 식사에 청하는 것을 굉장한 미덕으로 여겼다고 합니다. 특히 선생이 다른 성읍에서 왔거나 회당에서 가르친 직후에는 더욱 그랬다고 합니다. 그러니 그런 상황에서 바리새인이 예수님을 식사에 초대한다는 것은 정말 생각하기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다른 바리새인들이 매우 불쾌하게 생각할 수도 있고, 자칫하면 왕따를 당할 수도 있는 일이었습니다. 죽은 양반 들먹거리는 게 좀 그렇습니다만 한국적인 상황에 빗댄다면, 한나라당 국회의원이 노무현 전 대통령을 집으로 초대해서 극진하게 대접한 것과 비슷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어쨌든 바리새인인 시몬이 예수님을 식사에 청한 것을 보면, 예수님을 바라보는 시각이 다른 바리새인들과는 좀 다르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39절에서 그 일단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죄인 여자의 행동에 반응하는 예수님을 보고 시몬이 혼잣말을 합니다. “이 사람이 만일 내가 생각한 대로 예언자라면, 자기의 비위를 맞추는 이 여자가 어떤 부류인지 알았을 텐데.” 이걸 보면, 시몬이 예수님을 ‘예언자일지도 모르겠다’ 라고 생각한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만일 예언자라면, 그를 식사에 초대하는 것은 매우 영광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암튼, 예수님은 바리새인의 식사 초대를 받고 언제나처럼 기꺼이 응했습니다. 죄인이든, 세리이든, 로마의 백부장이든, 사마리아 사람이든 가리지 않고 함께 밥을 먹고, 그들의 질병을 치유해주고, 하나님나라의 복음을 전파하셨던 예수님이신지라 바리새인이라고 해서 거절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그날의 식사 자리는 상당히 컸던 것 같습니다. 죄인 여자가 그 집에 들어간 것을 보면 예수님만 초대한 게 아니라 꽤 많은 사람들이 모였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우리나라도 옛날에 부잣집 잔치가 벌어지면 마을의 가난한 사람들이 가서 일을 좀 거들어 주고 한 끼니를 때웠지 않습니까. 그 당시 유대 사회도 그랬던 것 같습니다. 마음씩 좋은 집에서 큰 잔치가 벌어지면 가난한 사람들도 들어올 수 있도록 문을 열어 놓았다고 합니다.

죄인인 여자가 바리새인의 집에 들어갈 수 있었던 것도 아마 그래서였을 것입니다.

 

바리새인의 집에 들어 간 여인

 

‘죄인’이라고 지칭된 그 여자는 창녀였거나, 아니면 도덕적으로 방탕한 여자임을 의미했습니다. 그 여자는 동네 사람들이 다 아는 여자였습니다. 집 주인인 시몬도 그 여자가 죄인임을 알았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 여자가 바리새인의 집에 들어간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여자는 예수님이 바리새인의 집에서 식사를 하고 있다는 말을 듣고 집을 나섰습니다. 향유가 담긴 옥합을 가슴에 안고 바리새인의 집으로 달려갔습니다. 이 향유는 그 여자가 몸을 팔기 위해 몸치장을 할 때 사용하던 향유였습니다. 자신의 매력을 한껏 과시하기 위해 몸에 바르던 향유였습니다. 그런데 그 날은 달랐습니다. 향유를 몸에 바르고 나간 게 아니라, 향유가 담긴 옥합을 안고 바리새인의 집으로 향했습니다.

 

바리새인의 집에 들어간 여인은 많은 사람들 가운데에서 예수님을 찾기 위해 예의주시했을 것입니다. 어떤 분이 예수님인지를 확인하는데 얼마의 시간이 걸렸을지 모르겠습니다만, 누가 예수님인지를 알아냈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확인한 여인은 주저하지 않고 다가갔습니다. 말없이 다소곳하게 예수님을 향해 걸어갔습니다. 조용하지만 단호한 시선으로 예수님에게 다가갔습니다. 몇 걸음이나 갔을까요? 예수님 뒤쪽 발치에 멈추어 섰습니다. 그 여인의 눈에서는 이미 눈물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차마 소리를 내지는 못했지만 뜨거운 눈물이 두 볼을 타고 흘러내렸습니다. 땅 속 깊은 곳에서 뜨거운 용암이 솟구치듯이, 그녀의 가슴속 깊은 곳에 묻어두었던 온갖 사연들이 뜨거운 눈물로 솟구쳐 흘렀습니다. 그녀의 두 볼을 타고 흘러내린 눈물은 예수님의 발등에 뚝뚝 떨어졌습니다. 예수님은 미동도 하지 않았습니다. 발가락 하나도 움직이지 않은 채 그녀의 눈물을 발등으로 다 받아내고 있었습니다. 여인은 이내 곧 몸을 구푸리더니 머리카락을 풀어헤쳐 예수님의 발을 닦기 시작했습니다. 멈추지 않는 눈물과 풀어헤친 머리카락으로 예수님의 발을 닦은 여자는 마침내 그 발에 입을 맞추었습니다. 예수님의 차가운 발에 닿은 그녀의 입술은 떨어질 줄을 몰랐습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요? 잔치집의 시끌벅적한 분위기는 어느새 숨소리도 들리지 않는 정적으로 바뀌어 있었습니다. 집안에 있던 모든 사람들의 시선은 그 여인의 일거수일투족을 뒤따르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여인은 아랑곳하지 않았습니다. 여인은 흐느끼듯 예수님의 발에 입을 맞추었습니다. 그리고는 드디어 옥합을 열고, 예수님의 두 발에 값진 향유를 바르기 시작했습니다. 자기 몸에 바르던 향유를 예수님의 두 발에 정성껏 발랐습니다.

 

행동으로 고백한 여인

 

그 당시에 사람의 발을 닦는 일은 종들이 맡는 천한 일이었습니다. 더욱이 머리카락을 풀어 발을 닦았다는 것은 매우 파격적인 행위였습니다. 그 당시의 유대인 사회에서는 성인 여자가 공적인 자리에서 머리카락을 보이는 것은 금지되어 있었습니다. 여자가 공적인 자리에서 머리카락을 드러내는 것은 성적으로 문란한 여자로 여겨졌기 때문에 여자들은 언제나 수건을 써야 했습니다.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편지하면서, 남자가 머리에 무엇을 쓰고 기도나 예언을 하는 것은 남자의 머리를 욕되게 하는 것이고, 여자가 머리에 쓴 것을 벗고 기도나 예언을 하는 것은 여자의 머리를 욕되게 하는 것이라고 한 것도 다 이런 문화적 배경에서 한 이야기였습니다(고전11:4-5). 이 여인도 유대인으로서 이런 문화를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이런 금기 사항을 괘념하지 않고 머리카락을 풀어 발을 씻었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자기 슬픔을 주체할 수 없어서 한 행동이 아니었다고 생각됩니다. 지나친 겸손을 드러내는 것도 아니었다고 생각됩니다. 딱히 닦을 것이 없어서 엉겁결에 머리를 풀어헤친 것도 아니었다고 생각됩니다. 이것은 다분히 깊은 의미가 있는 행동이었다고 생각됩니다. 머리를 풀어헤쳐 예수님의 발을 닦은 것은 자기가 부정한 여자라는 것을 드러내는 행동이었다고 생각됩니다. 어떻게 하다 보니 머리로 발을 닦은 게 아니고, 일부러 그렇게 한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향유를 바른 걸 보면 더욱 확실하게 알 수 있습니다. 이미 말씀드린 것처럼 향유는 그 여인이 몸을 팔기 위해 치장을 할 때 쓰던 것이었습니다. 그 여인이 어떤 여자인지를 보여주는 가장 확실한 물증이 바로 향유였습니다. 그런데 그 물증을 예수님의 발에 발랐습니다. 이것은 자기가 몸 파는 여자라는 사실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향유는 본래 머리에 바르는 것이 상례입니다. 그런데 이 여인은 머리에 바르지 않고 발에 발랐습니다. 어떤 주석학자들은 머리에 바르지 않고 발에 바른 것을 겸손의 표현이라고 해석합니다마는, 그런 해석은 지극히 피상적인 해석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여인이 향유를 머리에 바르지 않고 발에 바른 것은, 다른 이유 때문이 아니라 바로 향유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여러분, 이 향유가 어떤 향유입니까? 몸을 팔기 위해 치장하던 향유였습니다. 이 향유는 부정한 여인의 상징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런 향유를 감히 예수님의 머리에 바를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해 보십시오. 제가 이마에 흐르는 땀을 손으로 닦아내는 걸 보고, 앞에 앉아계신 집사님이 안타까워 손수건을 건네려 하는데 마침 발 닦은 손수건 밖에 없다고 해봅시다. 그러면 발 닦은 손수건을 건넬 수 있겠습니까? 발을 닦지 않은 손수건이라면 건네겠지만 발 닦은 손수건인지라 차마 건네지 못할 것입니다. 그 여인도 그랬을 것입니다. 부정한 여인의 상징 같은 향유를 차마 머리에 바를 수 없어서 발에 발랐을 것입니다. 그리고 향유를 바르면서 여인은 속으로 탄식했을 것입니다. ‘주님, 이 향유의 주인은 부정한 여자랍니다. 이 향유의 주인은 부정한 여자입니다.’ 그렇게 마음으로 되뇌면서 향유를 발랐을 것입니다. 아니, 어쩌면 향유 옥합을 품고 집을 나설 때부터 자신의 부정함을 자백하려 했던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결국 여인이 행한 일련의 행동은 종교적인 헌신이나 겸손의 표현이라기보다는 자신의 부정함을 행동으로 고백한 것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해석하는 것 외에는 여인의 파격적인 행동을 이해할 길이 없습니다. 이 여인이 언제, 어떻게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만났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가 없지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만나지 않았다면 이런 행동을 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여인이 한 행동은 사람 앞에서 할 수 있는 행동이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 앞에서만 할 수 있는 행동입니다.

 

사람이 죄를 범하거나 수치스러운 행동을 하게 되면, 제일 먼저 하는 행동이 무엇일 것 같습니까? 아마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것일 겁니다. ‘누구 본 사람 없나’ 하고 주변을 두리번거리겠지요. 그리고는 이내 곧, 사람들이 알지 못하게 최대한 증거를 감출 것입니다. 사람이 이렇습니다. 사람은 절대로 사람에게 자기 죄를 까발리지 않습니다. 최후의 순간까지 죄를 감추고 변명하지, 묻지도 않은 죄를 자백하는 법은 없습니다. 그 사람이 아무리 존경하고 흠모하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눈물을 흘리며 머리를 풀어 발을 닦고, 향유를 발에 바를 수는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께만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성경을 보십시오. 누구든지 하나님을 만나면 절로 죄인임을 자백했습니다. 모세도 그랬고, 이사야도 그랬고, 베드로도 그랬고, 바울도 그랬고, 사도 요한도 그랬습니다. 어거스틴도 그랬고, 나도 그랬고, 여러분도 그랬습니다. 누가 강요하지 않았지만, 누가 묻지 않았지만, 하나님의 얼굴을 보게 된 순간 죄인임을 자백했지 않습니까? 그분 앞에 무릎을 꿇었지 않습니까? 그분 앞에 나아오지 않았습니까?

 

달려 나가는 두려움

 

참 묘합니다. 사람 앞에서는 죄가 드러날까 봐 겁내고 할 수만 있으면 감추려고 하는데 비해, 하나님 앞에서는 묻지 않아도 죄인임을 자백하고 무릎을 꿇습니다. 사람 앞에서는 도덕의 차원에서 죄를 보는데 비해, 하나님 앞에서는 존재의 차원에서 죄를 봅니다. 이건 누가 가르치거나 시켜서 그러는 게 아닙니다. 절로 그렇게 됩니다. 누구도 사람 앞에서 자기 죄를 존재의 차원에서 보는 사람은 없습니다. 사람 앞에서는 존재로서의 죄가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앞에 서면 도덕적인 차원에서가 아니라 존재의 차원에서 죄가 절로 보입니다. 자기 존재 전체가 온통 죄덩어리인 것을 보게 되는 겁니다.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온통 죄악 덩어리인 것을 인식하면서 그냥 무릎 꿇게 되는 겁니다. 도덕적인 차원에서 죄를 바라볼 때는 죄를 감추고 변명하려 하는데, 존재의 차원에서 죄를 보게 되면 더 이상 죄를 감추려 하거나 합리화하려 들지 않습니다. “하나님,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이렇게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만난 자들의 특징입니다.

이 여자도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의 신성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신성을 보는 순간 자기 존재가 곧 죄임을 보았습니다. 그분의 긍휼 외에는 소망이 없는 죄악덩어리를 보았습니다. 감춘다고 해서 감추어지는 게 아닌 죄성을 보았습니다. 여인은 달리 선택할 길이 없었습니다. 예수님께 나아가는 것 외에는, 죄인으로 그분 앞에 서는 것 외에는 달리 길이 없었습니다. 물론 죄에 대한 아픔과 두려움이 왜 없었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의 신성 앞에서 느끼는 아픔과 두려움은 감추고 숨는 두려움이 아닙니다. 공포에 떠는 두려움이 아닙니다. 용서의 은총을 붙잡게 하는 두려움입니다. 거룩한 존재의 빛으로 나아가게 하는 두려움입니다. 참으로 묘합니다. 하나님의 신성을 보면 자신의 부정함을 감추기 위해서 등지거나 숨는 게 아니라 오히려 그분에게 나아갑니다. 인간적인, 사회적인 모든 두려움을 물리치고 거룩하신 분 앞에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나아갑니다. 성경은 그런 두려움을 가리켜 ‘경외’(yare, 야레)라고 합니다. 인간적이고 사회적인 차원의 두려움을 넘어선 두려움, 그것이 ‘경외’입니다. 그렇습니다. 여인은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의 신성을 본 겁니다. 그리고 그 신성에 이끌려 지금까지 억눌려왔던 인간적이고 사회적인 모든 두려움을 물리치고 하나님이신 예수님 앞에 나아온 겁니다. 그리고 감히 머리를 풀어 예수님의 발을 닦고, 향유를 바른 겁니다.

 

여러분은 하나님 앞에 이런 죄인의 모습으로 나가본 적이 있으십니까? 도덕의 차원에서가 아니라 존재의 차원에서 죄를 본 적이 있으십니까? 머리카락을 풀어헤치고 눈물로 그분의 발을 닦지 않으면 안 될 만큼 절절하게 죄를 본 적이 있으십니까? 중고등학교 시절에 분위기에 이끌려 눈물 흘린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연민이나 수치스러운 감상에 젖어 눈물 흘린 것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내 존재 전체가 너무 수치스럽고 더러워서, 더 이상 어찌해볼 수 없는 비참한 자신의 몰골을 보면서 그분에게 달려 나간 적이 있으시냐 하는 겁니다. 우리에게 이 경험이 필요합니다. 이 경험이 있어야 하나님을 이용하려는 허망한 종교적 놀음을 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 경험이 있어야 하나님께 잘 보이고자 하는 허망한 종교적 몸짓을 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 경험이 있어야 하나님과 시시껄렁한 거래행위를 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 경험이 있어야 종교의 멍에를 벗어던지고 진정한 예수의 세계, 구원의 세계, 하나님의 통치 안에서 누리는 자유의 세계로 비상할 수 있습니다.

 

그분 앞에 나가면

 

그 여인은 경외감에 이끌리듯 예수님께 나아갔습니다. 그리고 전존재를 폭로하듯 투신했습니다. 여인의 몸짓 하나하나는 어떤 말보다 호소력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여인의 행동에서 여인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여인을 향하여 돌이키신 예수님은 깊고 따뜻한 목소리로 말씀했습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했으니 평안히 가라’ 용서와 해방을 선포했습니다. 사람에게 죄를 고백하면 손가락질 받고, 교류가 단절되고, 동네방네 소문이 퍼져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없을 정도로 상처를 받지만 예수님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죄를 알지 못하는 자의 죄에 대해서는 서슴없이 비판하지만, 죄를 알고 자백하는 자의 죄에 대해서는 긍휼을 베푸시고 용서와 해방을 선포하십니다. 애비가 집 나간 둘째 아들을 와락 끌어안듯이, 그 따뜻한 품에 와락 끌어안아 주십니다. 그리고 비단옷을 입혀 주시고 파티를 열어 환영해줍니다. 바로 이것이 그분의 은총이요 그분의 사랑입니다. 바로 이것이 사람과 예수님의 차이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 차이 때문에 수많은 죄인들이 예수님에게 달려 나갔고, 지금도 발길이 끊이지 않는 것입니다.

 

이 여인은 죄를 봄으로써 구원받았습니다. 죄를 봄으로써 감사와 사랑의 극치를 경험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죄를 보는 것이야말로 진정 은혜입니다. 진정 축복입니다. 예수로 말미암아 무병장수와 부귀영화를 누리는 것이 축복이 아니라, 죄를 보는 것이야말로 진짜 축복입니다. 사람 앞에서 죄를 보면 죄의식에 옥죄이지만, 하나님 앞에서 죄를 보면 날마다 구원을 경험하게 됩니다. 용서와 해방의 은총을 경험하게 됩니다. 신앙이 무엇입니까? 하나님 앞에서 죄를 대면하고, 죄와 싸우고, 죄를 자백하고, 용서와 해방의 은총을 경험하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사람 앞에서 죄를 보고 싸우는 것이 도덕이라면, 하나님 앞에서 죄를 보고 싸우는 것,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용서와 해방의 자유에까지 나아가는 것, 그것이 신앙입니다. 죄를 보고 싸우기만 하는 것은 예수의 세계가 아닙니다. 용서와 해방으로까지 나아가야 예수의 세계입니다. 물론 지나치게 죄에 민감하거나 예민할 필요는 없습니다. 과도하게 죄에 집중하는 것 또한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죄와의 한판 승부가 삶의 전부여서는 안 됩니다. 하지만 죄와의 대면과 싸움은 피할 수는 없는 그리스도인의 책무입니다. 아니, 그리스도인뿐 아니라 본성적으로 죄인인 모든 인간의 책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책무에만 집착하는 것은 언제나 위험합니다. 우리에게는 매우 자존심 상하는 일이지만 용서와 해방의 은총으로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예수님 두 발에 향유를 바른 여인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