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삶의 지평만큼 살 수 있습니다. 삶은 매우 정직해서 삶의 지평 이상을 살도록 허락하지 않습니다. 내가 이해하고 바라보는 삶의 지평만큼이 곧 내 삶이 됩니다. 때문에 삶의 지평을 넓히는데 삶을 투자하는 것은 매우 지혜로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또 삶의 지평을 넓히는데 삶을 투자하는 것이야말로 인간적인 삶에 가장 잘 어울리는 일이라고 생각됩니다. 스위스 출신의 영화 감독 잉그마르 베리만은 “나이가 든다는 것은 등산하는 것과 같다. 오르면 오를수록 숨이 차지만 시야는 점점 넓어진다.”고 말했습니다. 진실로 그렇습니다. 살아갈수록 삶의 시야가 점점 넓어지는 삶이야말로 정말 인간적인 삶, 삶다운 삶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삶의 지평이 좁으면

 

그렇다면 우리의 현실은 어떠한가요? 시야가 점점 넓어지는 삶을 살고 있을까요? 매우 안타깝지만 정반대라고 생각됩니다. 소시민의 삶을 사는 우리의 주된 관심사는 대부분 가족과 일, 그리고 돈 문제가 고작이라고 생각됩니다. 결코 짧지 않은 일생을 가족, 일, 돈 문제 주변을 맴돌다 가는 게 현실이라고 생각됩니다. 식견이 넓다는 학자들도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습니다. 학문 분야가 점점 세분화되어갈 뿐 아니라, 새로운 과학 논문 발표도 경쟁 팀과의 시간 싸움이 생명이기 때문에 폭넓게 연구할 여유가 없습니다. 세계적인 개미 연구자이며 사회생물학자인 에드워드 윌슨이 지식의 통일성을 주창하며 학문 영역간의 융합과 통섭을 주장했습니다만, 지식의 양이 폭발하면서 한 사람이 다양한 공부를 하는 것 자체가 매우 어려워지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집을 짓는 것도 예전에는 몇 사람이서 집 전체를 지었지만 지금은 설계하는 사람, 나무 자르는 사람, 기둥을 세우고 지붕을 얹는 사람, 보일러 놓는 사람, 타일 붙이는 사람, 도배하는 사람, 인테리어 하는 사람 등등 수십 명의 사람들이 나누어 짓습니다. 대학 교육도 취업에 필요한 정보와 기술을 습득하는 것에만 치중하고 있지 삶을 폭넓게 볼 수 있는 안목을 열어가는 것에는 도무지 관심이 없습니다. 인터넷도 일과 관련된 정보나 심심풀이 게임, 가벼운 기사와 스타들의 뒷이야기를 들여다볼 뿐 삶의 지평을 넓히는 것과는 거리가 있습니다. 앞장에서 말한 것처럼 생활의 지평과 정보의 지평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 세계를 이웃집 드나들듯 하고 있고, 안방에서 세계의 각종 정보를 실시간에 접할 정도로 넓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삶의 지평은 오히려 좁아지고 있습니다.

사실 삶의 지평이 좁은 것처럼 삶에 해로운 일은 없습니다. 그처럼 안타깝고 마음 아픈 일이 없습니다. 삶의 지평이 좁은 자들을 보십시오. 다들 자기 안에 굳게 갇혀 있습니다. 새로운 배움을 향해 눈을 열지 않기에 누에고치처럼 자기 안에 갇혀 있습니다. 자기 뜻대로 삶이 굴러가지 않는 것을 이해할 수 있는 눈이 부족하기에 쉽게 흥분하고, 쉽게 좌절합니다. 자기 확신이 강하고, 쉽게 극단으로 치닫습니다. 서로 가르치고 배우는 과정 속에서 누리는 소통의 기쁨과 변화(성숙)의 환희를 맛보지 못합니다. 특히 자신을 반추해볼 거울이 없기에 자신의 부족과 허물을 볼 줄 모릅니다. 우연히 벌어지는 크고 작은 일들에 자주 휘둘립니다. 영국의 철학자 러셀이 말했더군요. “인생의 폭이 협소할수록 우연한 사건이 우리 인생을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게 된다.”고 말입니다(행복의 정복).

 

심히 광대한 세계

 

세상과 삶은 결코 단조롭거나 단순하지 않습니다. 단조로움을 죽기보다 싫어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을 변화의 운율과 다채로움이 가득한 세계로 창조하셨습니다. 생물 종의 정확한 숫자는 아무도 모를 지경이고, 지금까지 과학에 의해 확인된 종만 해도 약 200만 종에 이를 정도입니다. 미국국립과학재단은 대략 최소 500만에서 최대 1억 종 가량이 존재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고, 지난 2001년부터 3000여명의 생물학자들이 현존하는 모든 생물종 목록을 만들고 있는데 2009년 4월에 100만 종을 넘겼습니다. 또 여름밤 하늘을 빼곡히 채우고 있는 은하수는 그 은하수만큼의 은하계가 있다고 합니다. 여러분, 은하계가 은하수만큼 있다는 게 상상이 됩니까? 나는 아무리 상상해보아도 ‘정말 그럴까’하는 의문만 맴돌 뿐 도무지 믿어지지가 않습니다. 암튼, 하나님의 창조 세계는 온갖 상상력을 다 동원한다 해도 결코 그려낼 수 없을 만큼 기이하고 신묘합니다. 사람, 동물, 식물, 천체, 그 어느 것이든 실로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다양하고 다채롭습니다. 꽤 오래 전에 이집트의 사막을 버스로 횡단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 때 달리고 달려도 끝없이 계속되는 모래사막과 군데군데 피어난 가시 같은 잡초들, 거기서 살아가는 사람들과 양들을 보면서 표현할 수 없는 어떤 경이감에 사로잡혔던 기억이 있습니다. 또 내륙 지방에 태어난 나는 큰 강이나 바다를 보지 못하고 자랐습니다. 멀리 여행을 해본 적이 많지 않아서 대학 시절이 되어서야 처음으로 강릉의 동해 바다를 보았습니다. 하늘을 담고 있는 바다, 하얀 물거품을 품고 끝없이 밀려오는 바다, 바람과 함께 너울너울 춤을 추는 바다를 보는 순간 뭐라 형언할 수 없는 감동에 환호했던 적이 있습니다. 그뿐 아닙니다. 하나님이 창조한 세계를 바라볼 때마다, 특별히 형형색색의 기기묘묘한 생명체들의 모습과 활동을 바라볼 때마다 기이함과 경외감에 압도되어 숨이 멎을 정도입니다. 비록 창조 세계의 한쪽 구석도 제대로 보지 못했지만, 한 줌의 세계를 보는 것만으로도 벌어진 입을 다물 수 없을 정도입니다.

 

인간과 삶의 복잡계

 

인간의 삶은 어떻습니까? 천태만상의 물질세계보다 훨씬 복잡하고 미묘한 것이 인간의 삶입니다. 삶이란 몸의 생물학적인 상태와 뇌의 인지과정, 그리고 심리 상태와 세계를 바라보는 이해의 눈(세계관), 대인관계, 환경과의 관계, 정치적인 상황, 시대적인 문화, 영혼의 상태와 최고의 통치자이신 하나님과의 관계, 하늘의 섭리와 우연 등이 복잡하게 얽히고설켜 있습니다. 실로 수백, 수천, 수만, 수억 가지 것들이 우리의 존재와 삶에 영향을 미칩니다. 앨런 와츠가 이에 대해 잘 말했습니다. “인간은 흙 속에 뿌리내리지 않고 두 다리로 자유롭게 걸어 다닌다. 하지만 인간은 결코 자급자족하면서 스스로 움직이고, 스스로 방향을 결정하는 존재가 아니다. 인간은 나무와 벌레, 파리와 마찬가지로 동일한 요소들, 자연이나 생명, 신 따위의 보편적인 힘에 의존하고 있다. …… 인간은 우주의 곳곳에서 비롯되는 힘들의 상호작용이 일어나는 만남의 광장이다.”(당신은 지금 행복하십니까, 크리스토퍼 쉐어 재인용). 그렇습니다. 삶의 모든 일과 사건에는 한 가지가 아닌, 수없이 많은 것들이 상호작용을 하고 있습니다. 또 모든 일에는 한 가지 면만 있는 게 아닙니다. 동전에 양면이 있듯이 삶의 모든 일에는 또 다른 이면(裏面)이 있습니다. 라마교의 14대 달라이 라마 텐진 갸초(Tenzin Gyatso)는 고국 티벳을 중국에 빼앗기고 망명객이 되어 세계를 유랑했습니다. 그것은 실로 비극적인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는 망명객으로 산 경험이 매우 유익했다고 말합니다. 망명객으로 살았기 때문에 모든 걸 절박하게 볼 수 있었고, 티벳에 있었다면 만나지 못했을 다른 종교와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기회를 많이 갖게 되었다고요.

새옹지마[塞翁之馬]에 얽힌 일화는 유명합니다. 옛날 중국 북방의 요새 근처에 새옹이라는 노인이 살았습니다. 하루는 노인이 기르던 말이 국경을 넘어 오랑캐 땅으로 달아났습니다. 마을 사람들이 이를 위로하자, 노인은 조금도 애석한 기색 없이 말했습니다. “누가 아오? 이 일이 복이 될는지.” 몇 달이 지난 어느 날, 달아났던 말이 오랑캐의 준마를 데리고 돌아왔습니다. 마을 사람들이 이를 축하하자, 노인은 조금도 기쁜 기색 없이 말했습니다. “누가 아오? 이 일이 화가 될는지.” 그런데 어느 날, 말타기를 좋아하는 노인의 아들이 그 준마를 타다가 떨어져 다리가 부러졌습니다. 마을 사람들이 이를 위로하자, 노인은 슬픈 기색 없이 말했습니다. “누가 아오? 이 일이 복이 될는지.” 그로부터 1년이 지난 어느 날 북쪽 오랑캐가 침략해오자 마을의 건장한 젊은이들은 이를 맞서 싸우다가 모두 전사했습니다. 그러나 노인의 아들만은 절름발이였기 때문에 무사했습니다. 다리가 부러진 것이 오히려 행운이 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삶의 모든 것들은 항상 수많은 요인의 영향력에 노출되어 있고, 어디로 어떻게 흘러갈지 알 수 없는 미완의 과정일 뿐이지 결코 완전한 결정체(結晶體)일 수는 없습니다. 하여, 무엇을 알았어도 알았다고 할 수 없고, 무엇을 붙잡았어도 붙잡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과학의 발견과 삶의 지평의 변화

 

16세기에 발표된 지동설은 인류 역사상 가장 큰 세계관의 대변혁을 가져왔습니다.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라고 믿었던 사람들에게 지동설은 엄청난 충격이었습니다. 지동설은 단순히 하나의 천체 이론이 아니었습니다.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은 이전까지의 우주관뿐 아니라 세계관과 신관까지도 뒤흔들어버렸습니다. 즉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고, 인간은 그 위에 사는 존엄한 존재이며, 달 위의 천상계는 영원한 신의 영역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한 순간에 와르르 무너져 내렸습니다. 물론 우리는 지금도 초속 약 460m의 속도로 자전하면서, 초속 약 30㎞의 속도로 공전하는 지구의 자전과 공전을 지각하지 못하지만, 지동설이라는 객관적 사실에 의해 삶의 지평이 혁명적으로 바뀌게 된 것이 사실입니다. 인간의 지각이라는 게 얼마나 보잘 것 없는 것인지도 덤으로 확인하게 되었지요.

물질에 대한 인식도 마찬가지입니다. 미국의 정신의학과 교수인 숀 크리스토퍼 셰어는 [당신은 지금 행복한가]라는 책에서 ‘행복의 세계는 여러 가지 과정들과 상호침투, 그리고 소용돌이치는 양자 패턴의 세계’임을 말하면서 물질의 가장 작은 덩어리인 원자 내부의 세계를 재미있게 전하고 있습니다. 원자는 핵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핵 속에는 양성자와 중성자라는 더 작은 알갱이가 들어 있습니다. 그리고 핵 주위에는 수많은 전자들이 빙글빙글 돌면서 원자의 외피를 형성하고 있습니다. 물리학자 프리초프 카프라는 원자의 세계를 로마의 산피에트로 대성당에 비유했습니다. 길이가 211.5m에 높이는 45m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산피에트로 대성당이 하나의 원자라면 원자 속의 핵은 소금 한 알갱이 정도라고 말입니다. 뭘 말하는 것이냐 하면, 원자의 핵과 그 주위를 도는 전자들 사이에 엄청나게 큰 공간이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모든 사물을 구성하고 있는 조그맣고 단단한 원자는 알갱이가 아니라 사실은 속이 텅 빈 공간이라는 이야기입니다. 더욱이 핵 주위를 돌고 있는 전자는 1초에 약 10억 킬로미터의 속도로 움직인다 하고, 핵 내부에 존재하는 전자의 속도는 그보다 더 빠르고, 또 핵 속에 있는 양성자와 중성자도 1초에 6만 4천 킬로미터의 속도로 움직이고 있다 하니, 원자 내부의 세계는 모든 것이 소용돌이치는 운동과 흐름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모든 물체는 눈에 보이는 고체덩어리가 아니라 무지하게 빠른 운동들의 장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렇습니다. 물리학자 베르너 하이젠베르크가 ‘원자는 사물이 아니다’고 말한 것처럼, 원자의 집합체인 물체 또한 엄격한 의미에서 사물이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원자라는 알갱이를 통해 세계를 보면 사물의 세계가 보이지만, 양전자의 세계를 통해 보면 모든 것이 흐름이고, 모든 것이 서로 연결되어 있고, 모든 것이 다른 모든 것의 영향을 받는 소용돌이의 세계가 보입니다. 세상의 모든 것들이 우리의 뜻대로 통제되는 게 아니라는 충격적인 진실과도 만나게 됩니다. 결국 양자 세계의 발견은 원자 세계와는 전혀 다른 세계관과 삶의 지평을 열었습니다. 지동설에 버금가는 철학적 사고의 대변혁을 불러왔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영국의 물리학자 아더 에딩턴은 “과학의 임무는 사물들이 겉보기와 아주 다르다는 것을 발견하는데 있다.”고 했고, 닐스 보어는 “나는 물리학이야말로 진짜 철학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습니다.

한 가지만 더 생각해 보겠습니다. 삶을 개인의 차원에서 생각하는 것과 장구한 역사의 차원에서 생각하는 것에도 큰 차이가 있습니다. 개인의 차원에서 생각하면, 자기 꿈을 성취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고 급한 일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태초부터 종말의 때까지 장구한 역사의 차원에서 생각하면, 자기 꿈을 성취하는 것이 그렇게 대단한 일이 아니라는 것, 수많은 성취들의 지극한 일부분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하여, 꿈을 성취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면서도 결과에 초조해하거나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게 됩니다. 수억 년의 세월 앞에서 80년은 눈 깜짝할 사이에 불과한 것임을 알기에, 자기 삶의 성공과 실패에 크게 휘둘리지 않을 수 있게 됩니다. 어떤 운명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을 수 있게 됩니다. 나이를 먹을수록 행복지수가 높아지는 것도 아마 그런 이유 때문일 겁니다.

하긴 우리가 양자역학의 세계를 알지 못해도, 생명의 신비를 알지 못해도, 영적 세계를 알지 못해도, 눈 깜짝할 사이에 만 가지가 변하는 순식만변(瞬息萬變)의 세계를 알지 못해도 살아가는데 별 어려움이 없습니다. 승진도 할 수 있고, 장사도 할 수 있고, 취직도 할 수 있고, 결혼도 할 수 있고, 연애도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걸 아는 것과 모르는 것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삶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는 세계관과 삶의 지평에 있어서 건널 수 없는 차이가 있습니다. 원자의 눈으로는 결코 양전자의 세계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갈매기의 꿈

 

세상과 삶은 단조롭지도, 단순하지도 않습니다. 세상은 눈에 보이는 것과 눈에 보이지 않는 다차원의 세계가 신묘하게 통합되어 있습니다. 물리적인 물질의 차원에서부터 물리적인 생명의 차원, 감정과 정신의 차원, 영적인 차원 등이 나누일 수 없을 만큼 깊이 연루되어 있습니다. 또 수백, 수천, 수만, 수억 가지 것들이 우리의 존재와 삶에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처럼 광대하고 복잡하고 다차원이 얽혀있는 삶을 폭넓게 보지 못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눈앞의 일들마다 일희일비하며 요동하지 않겠습니까? 도무지 통제되지 않는 삶에 분노하지 않겠습니까? 길들여지지 않는 삶에 농락당하지 않겠습니까?

삶의 지평은 무릇 알아야 넓어질 수 있습니다. 또 삶의 지평이 넓어져야 내가 보고 아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고, 인간과 삶이란 참으로 불가사의한 복잡계라는 것을 발견할 수 있고, 인간의 지각이란 지극히 부분적일뿐 아니라 오류투성이라는 것도 자각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것들을 발견하고 자각해야만 자기 지각에 속지 않을 수 있고, 자기를 상대화할 수 있고, 우연한 일들에 휘둘리지 않을 수 있습니다. 알지 못하면, 삶의 지평이 넓지 못하면 절대로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친구처럼 가까이 하고 싶은 책이 있습니다. 리처드 바크의 [갈매기의 꿈]입니다. 갈매기 조나단은 다른 갈매기와 달리 좀 더 높이, 좀 더 멀리, 좀 더 자유롭게 비행하기를 꿈꾸며 쉬지 않고 비행 연습을 합니다. 그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얼마든지 먹을 것을 얻을 수 있는데 말입니다. 모든 갈매기들이 조나단의 별난 행동을 이해하지 못하고 야유와 조롱을 보낼 때에도 조나단은 “우리는 수천 년 동안 물고기 대가리를 찾아 휘젓고 다녔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제 살기 위한 이유를 갖게 되었습니다. 배우고, 발견하고, 자유롭게 되는 것 말입니다.”라고 항변하며 진리의 세계를 향해 끝없이 정진합니다. 리처드 바크는 갈매기 조나단을 통해 우리에게 말을 겁니다. 자유로운 비행을 위해, 존재의 비밀을 배우기 위해 끝없이 정진했던 조나단처럼 삶의 지평을 넓히고, 삶의 품격을 높이는데 삶의 의욕을 불태우라고.

그렇습니다. 상품에 명품(名品)이 있듯이 삶에도 품격(品格)이 있습니다. 그런데 고품격(高品格) 삶을 빚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삶을 이해하는 지평이 넓어야 합니다. 삶의 지평이 넓고 깊어야 삶이 극단으로 치닫지 않을 수 있습니다. 다차원의 세계가 조화와 균형을 이룰 수 있습니다. 우연의 장난에 휘둘리지 않을 수 있습니다. 삶의 중심을 지키며, 호연지기(浩然之氣)를 잃지 않을 수 있습니다. 삶을 읽는데 집중할 수 있습니다. 재물이나 명예보다 더 위대한 삶을 꽃피울 수 있습니다. 여러분, 행복이 무엇입니까? 고품격 삶 아닐까요? 삶을 잃지만 않는다면, 삶이 곧 행복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