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신앙이 행복에의 길이라고,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이 하지 않는 사람보다 훨씬 행복하다고 말한다. 과히 틀린 말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사람 바울을 보자. 그는 어떤 형편에서든지 자족할 수 있는 능력을 체득했노라고 말했다. 배부르든지 배고프든지, 풍부하든지 궁핍하든지 요동하지 않을 수 있는 능력, 즉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고 말했다(빌4:11-12). 참 대단하다. 어떤 형편에서든지 자족할 수 있다니! 눈곱만한 손해를 입어도 밤잠을 설치고, 남보다 조금만 부족해도 상대적인 박탈감에 어금니를 깨무는 것이 우리의 성정인데 비천과 풍부를 다 품을 수 있다니! 그의 고백과 삶을 들여다보면 온갖 비바람과 눈보라에도 끄떡하지 않는 큰 산 같다는 느낌이 든다. 바울은 본래 많은 걸 가진 자였다. 지적으로, 사회적으로, 종교적으로 남부러울 것이 없는 엘리트였다. 하지만 어떤 상황 앞에서도 끄떡하지 않는 자족의 사람은 아니었다. 그런데 이제는 그런 사람이 되었다고 고백한다. 무엇 때문일까? 무엇이 바울을 그런 사람으로 변화시켰을까? 바울의 말을 직접 들어보자. “나는 저들이 자랑스럽게 내세우는 조건들을, 내가 명예로이 여겼던 다른 모든 것과 함께 갈기갈기 찢어 쓰레기통에 내던졌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리스도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내가 전에 그토록 중요하게 여겼던 모든 것이 내 삶에서 사라져버렸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내 주님으로 직접 아는 고귀한 특권에 비하면, 내가 전에 보탬이 된다고 여겼던 모든 것이 하찮은 것, 곧 개똥이나 다름없습니다. 나는 그 모든 것을 쓰레기통에 버렸습니다. 그것은 내가 그리스도를 품고, 또한 그분 품에 안기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스도를 신뢰하는 데서 오는 강력한 힘, 곧 하나님의 의를 얻고 나서부터는 나열된 규칙이나 지키는 하찮고 시시한 의는 조금도 바라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를 직접 알고, 그분의 부활의 능력을 경험하고, 그분의 고난에 동참하면서 죽기까지 그분과 함께 하기 위해, 나는 그 모든 하찮은 것을 버렸습니다.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아나는 부활에 이르는 길이 있다면, 나는 그 길을 걷고 싶었습니다.”(빌3:7-11, 유진 피터슨의 메시지). 그랬다. 그는 그리스도를 신뢰하는데서 오는 강력한 힘, 곧 하나님의 의를 얻고 나서부터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할 수 있었다.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해 부활의 능력을 경험하고 나서부터 모든 것들이 하찮아졌고, 그 하찮은 것들을 감히 버릴 수 있었다. 이현주 목사는 그런 바울을 가리켜 사람이면서 사람 세상을 벗어난 사람, 죽음이 더 이상 겁줄 수 없고 삶이 더 이상 초조하게 만들 수 없는 사람, 이 땅에 머물면서 하늘 백성으로 사는 사람, 그리스도와 함께 자기 몸을 십자가에 못박은 사람, 그리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난 사람이라 했는데(장자산책. 108쪽), 이미 사람 세상을 벗어난 사람을 인생이 어찌하겠는가? 이미 항상 기뻐하고 모든 일에 감사하는 사람을 세상이 어찌하겠는가? 이미 하찮은 것들을 내버린 사람을 무슨 수로 불행의 늪에 빠뜨릴 수 있겠는가? 아니 그런가?

 

1. 천차만별인 신앙

 

신앙의 사람 바울은 진실로 세상이 흔들 수 없는 행복자였다. 모든 것을 가진 행복자가 아니라 그리스도에게 붙잡힌 텅빈 행복자였다. 바울에게 신앙은 존재의 혁명이요 삶의 혁명이었다. 그것도 바울 자신의 판단과 의지로 결행한 내부로부터의 혁명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와 은총에 붙잡힌 위로부터의 혁명이었다. 동시에 존재와 삶의 변화로 나타난 내적인 혁명이었다. 바울은 위로부터의 은총으로 하나님의 세계를 보았고, 하나님의 창조와 죄로 말미암은 존재와 삶의 왜곡을 보았고,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의 비밀을 보았고,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왜곡된 존재와 삶의 회복을 경험했다. 지고한 행복-구원을 경험했다. 그랬다. 바울에게 신앙은 창조주 하나님과 하나님의 창조세계에 눈 뜨는 것이었고, 창조주 하나님과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아우르는 것이었다. 그리고 하나님과 창조세계에 눈뜸으로써 어떤 형편에서든지 자족할 수 있었고, 모든 일에 감사할 수 있었고, 항상 기뻐할 수 있었다. 하나님나라를 봄으로써 사람 세상을 넘어설 수 있었다.

 

하지만 사태가 그리 단순하지는 않다.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가 신묘한 존재이듯 인간의 신앙 양태 또한 묘사할 수 없을 만큼 다양하다. 사람마다 얼굴 모양이 다르고 개성이 다르듯 신앙도 비슷한 것 같지만 천태만상이다. 종교에 따른 신앙의 깊이와 양태도 제각각이지만 같은 기독교 신앙 안에서도 천차만별이기는 마찬가지이고, 그 다름의 정도 또한 같은 신앙이라고 말할 수 없을 만큼 크다. 신앙의 모양과 칼라와 향기도 제각각 다르다. 하여, 모든 신앙이 바울이 경험한 축복의 세계-어떤 형편에서든지 자족하고 모든 일에 감사하고 항상 기뻐하는 삶을 열어준다고 할 수는 없다.

신앙은 은총이요 신비이다. 인간의 지각으로 포착되지 않는 하나님의 앎에 눈을 뜨는 것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의 앎, 그 앎 중에서도 지극히 작은 일부분에 눈을 뜨는 것, 이것이 신앙이다. 때문에 신앙의 건강성 여부를 객관적인 잣대로 판단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하게 말할 수 있다. 건강한 신앙보다는 건강하지 못한 신앙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건 사실이다.

 

2. 구멍 뚫린 신앙의 세계

 

신앙의 세계를 깊이 들여다보면 인간의 치명적인 약점들이 수없이 작용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합리적인 것 같으면서도 매우 비합리적이고 맹목적인 허점, 포기할 수 없는 탐욕과 허약한 자존심, 생각하기 싫어하는 게으름, 현실을 도피하려는 유약함, 책임을 떠넘기려는 유치함, 무조건 믿고 싶어 하는 의존성 등 헤아릴 수 없는 약점들이 신앙의 세계를 미혹하며 비틀고 있다. 그 실상을 몇 가지만 꼽아보자. 첨단과학기술 시대를 살아가는 오늘날에도 운명을 예언하는 점집이 전국적으로 성업을 하고 있다. 신문이나 인터넷에서 ‘오늘의 운세’를 알려주는 코너가 질긴 생명력을 유지하면서 지속되고 있다. 그것도 띠로 본 오늘의 운세, 별자리로 본 오늘의 운세, 주역으로 본 오늘의 운세 등 콘텐츠도 다양하다. 13일의 금요일에는 불운이 찾아온다는 서양의 속설도 그렇다. 이날에 대한 막연한 공포심 때문에 나폴레옹, 처질, 프랭클린D, 루스벨트 등 쟁쟁한 영웅들이 이날 잡힌 약속들을 취소했다는 말이 들린다. 미국의 MIT에서는 학생들에게 초빙된 강사의 이력을 미리 말해주는 실험을 했다고 한다. 한 집단에게는 강사의 냉정한 면을 묘사하고, 다른 집단에게는 강사의 따뜻함을 칭찬하고 나서 강의가 끝난 후 강사를 평가하게 했더니, 평가 결과가 그들에게 미리 제시한 이력의 범위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고 한다. 많은 여성들이 자신을 실제보다 더 뚱뚱하다고 믿고 무리한 다이어트를 하다가 거식증에 걸린다. 최면을 통해 전생과 접촉할 수 있다고 믿기도 한다. 우리의 일상에 영향을 미치는 통념들도 많다. 시작이 좋으면 하루가 좋다든지, 아침에 까마귀가 날아오면 불길하다든지, 돼지꿈을 꾸면 돈이 들어온다든지, 간밤의 꿈을 지나치게 의식한다든지, 병원에 4층이 있으면 안 된다든지, 결혼을 앞둔 사람이 장례식이나 제사에 참여하면 안 된다든지, 하여튼 부지기수다. 17세기의 유럽을 휩쓸었던 마녀사냥, 2차세계대전 중 나치스 독일에 의해 자행된 유대인 대학살 홀로코스트, 종교가 다르다는 이유 하나로 하루아침에 이웃과 동족을 죽인 보스니아 내전 등의 집단 광기는 어떤가? 이게 다 왜곡된 믿음 때문에 빚어지는 일들이다.

 

바울은 아테네 사람들을 보고서 그들에게 종교성이 많다고 했지만(행17:22) 그들뿐 아니다. 모든 사람에게는 종교성 즉, 믿음의 경향성이 있다. 그렇다면 믿음의 경향성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왜 사람들은 미신을 믿고, 속설을 믿고, 말도 안 되는 것을 믿는 것일까? 왜 사이비 신앙이 사라지지 않는 것일까? 회의주의자인 마이클 셔머는 심령술사, UFO추종자, 외계인에게 납치된 사람, 냉동 보존학자, 영생주의자, 객관주의자, 홀로코스트 부정론자, 극단적 아프리카 중심주의자, 인종 이론가, 과학이 신을 증명한다고 믿는 우주론자 등 별의별 이상한 것들을 믿는 사람들을 많이 만나보고 나서, 사람들이 쉽게 믿는 이유를 5가지로 정리했다. 믿고 싶어 하기 때문에, 믿음은 즉석 만족을 주기 때문에, 복잡하고 예측하기 힘든 세상살이를 단순하게 설명해주기 때문에, 보다 높은 존재에 대한 믿음이 없다면 도덕적이어야 할 이유가 없기 때문에, 더 나은 수준의 행복과 만족을 찾는 영원히 마르지 않는 희망 때문이라고(왜 사람들은 이상한 것을 믿는가. 17장). 일리가 있다. 의혹에 휩싸여 사는 것보다는 믿고 사는 것이 느낌이 좋고 편안하고 위로가 되며, 복잡하고 예측하기 힘든 세상살이를 단순하게 설명해주고 긍정적으로 말해주면 기분이 상쾌해지고 희망이 솟구치는 게 사실이니까 말이다.

 

하지만 나는 마이클 셔머가 말한 것보다 더 근원적인 이유가 있다고 생각한다.

첫째, 주변에서 일어나는 사건이나 현상들을 어떻게든 설명하고자 하는 강한 의지 때문이다. 인간이란 동물은 이해되지 않거나 모호한 것을 도무지 견디지 못한다. 밤에 지진이 발생한 지역 주민들에게 지진이 일어난 것을 알아차렸을 때 제일 먼저 한 행동이 무엇이냐고 묻자, 거의 모든 사람들이 뭘 해야 할지를 이야기하기 전에 무슨 일이 벌어진 건가 하는 의문부터 들었다고 대답했을 정도로 사건을 이해하고 설명하려는 의지는 매우 뿌리가 깊다. 때문에 사람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해석의 틀과 원리를 찾아내려고 애를 쓴다. 예를 들어 기도한대로 몇몇 일이 이루어졌다고 해보자. 그러면 즉각 ‘기도는 반드시 응답된다’는 강한 확신을 갖게 되고, 기도 만능주의자가 되어버린다. 깊이 따지고 보면 기도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일들이 더 많은데 말이다. 아침 출근길에 기분 나쁜 일을 만났는데 그날따라 일이 잘 풀리지 않았다고 해보자. 그러면 이 사람은 즉각 아침의 그일 때문에 하루가 엉망진창이 되었다는 믿음의 가설을 세우고, 그런 일이 몇 번 반복되면 그 믿음은 확고해진다. 정직하게 살펴보면 아침에 기분이 나빴어도 일이 잘 풀리는 날이 더 많은데 말이다. 그렇다. 인간에게는 몇몇 특이한 사례들을 너무 쉽게 일반화해버리는 성향이 아주 강하다.

 

둘째, 모든 결과에는 반드시 원인이 있다는 강한 믿음 때문이다.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나랴’는 속담에서 확인하듯 원인 없는 결과란 있을 수 없다는 생각은 아주 오랜 뿌리를 갖고 있다. 유리 한 장이 깨져도 사람들은 왜 창문이 깨졌는지, 누가 깼는지부터 따지는 습성이 있다. 이처럼 모든 일의 원인을 찾다보니, 구체적인 원인을 찾을 수 없는 일을 만날 때에는 매우 불안해하고, 그런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 점쟁이를 찾는다. 그리고 점쟁이가 설명해주는대로 믿어버린다. 교회 안에서도 같은 일이 벌어진다. 기독교인의 경우엔 점쟁이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섭리)에 모든 원인을 돌린다. 물론 인간사의 대부분은 원인이 있기 마련이다. 투입(input) 없는 산출(output)이란 있을 수 없다. 그런데 문제는 모든 인간사의 원인이 한두 가지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쌀 한 톨에도 우주가 담겨 있고, 일파가 만파인 법인데 어떻게 ‘이것이 원인’이라고 딱 부러지게 말할 수 있겠는가? 어떻게 B라는 원인 때문에 B'가 발생했다고 단정할 수 있겠는가? 인간사를 조금만 성실하게 관찰해도 그렇게 말할 수는 없다. 또 모든 일에 원인이 있어야 하는 건 아니다. 인과관계의 틀을 벗어난 일들도 얼마든지 있다. 삶에는 그 무엇으로도 설명할 수 없는 우연이라는 것이 있다. 그런데 사람들은 여전히 모든 일에는 반드시 원인이 있다고, 한두 가지 원인 때문에 일이 벌어진 것이라고, 그 원인만 바꾸면 결과도 바꿀 수 있다고 쉽게 믿는다.

 

셋째, 매사에 의미를 부여하려는 강한 의지 때문이다. 사람은 기본적으로 의미를 추구하는 존재다. 의미를 발견해야 의욕이 생기고, 행동력이 발동한다. 또 어떤 사건에서든 그 사건 속에 담겨있는 의미를 발견해야 마음이 놓인다. 예를 들어 아이가 심하게 아팠다고 해보자. 그러면 부모는 대뜸 아이의 영양과 위생 관리에 어떤 허점이 있었는지를 살펴본다. 일차적인 원인을 찾는 것이다. 또 지난날 잘못 살아온 것이 없는가를 묻기도 한다. 도덕적 차원의 원인을 찾는 것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이 일이 발생한데에는 뭔가 의미가 있다, 우리가 들어야 할 어떤 메시지가 담겨 있다고 생각하고 의미와 메시지를 찾기도 한다. 의미를 찾고,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다. 특히 하나님의 섭리를 믿는 그리스도인에게는 거의 예외 없이 이것이 내면화·습성화되어 있다. 그래서 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회개할 거리를 찾거나 하나님의 메시지를 들으려 한다. 그리고 이렇게 사는 것을 믿음으로 사는 것이라 생각한다.

 

물론 사태를 이해하고 설명하고자 하는 욕구, 원인을 찾고자 하는 욕구, 의미를 부여하고자 하는 욕구는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인간의 본성이다. 모든 피조물 중에 오직 인간만이 그런 걸 욕망하고, 또 그런 욕망이 있었기에 문명이 태동할 수 있었고 발전할 수 있었다. 사실이다. 그런 욕망이야말로 인간의 삶을 추동하는 원동력이고, 앞으로도 그 사실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때문에 그런 욕망 자체를 문제시해서는 안 된다. 진짜 문제는 욕망 자체가 아니라 욕망의 과도함에 있고, 지나치게 쉬운 방법으로 재빨리 욕망을 채우려 하는 성급함에 있다. 과도하고도 성급하게 사태를 설명하려 하고, 원인을 찾으려 하고, 의미를 발견하려 하기 때문에 단순하고도 쉬운 해답, 그러나 사실은 거짓 해답에 걸려 넘어지는 것이다. 무릇 수요가 있으면 공급이 따르는 법. 과도하고도 성급하게 사태의 원인과 의미를 알고자 하는 수요에 거짓 해답들이 공급되는 건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리고 거짓 해답들을 뒷받침하는 믿음 체계가 개발되는 것 또한 막을 수 없다. 지식사회요 과학기술사회인 오늘도 근거 없는 통념들과 속설들, 희한한 사이비 종교 집단들이 끊이지 않는 것은 다 그런 수요 때문이다. 수요자들이 있기 때문에 공급 체계가 사라지지 않는 것이다. 더욱이 사람은 한 번 믿음 체계에 발을 들여놓으면 여간해서는 그 체계를 빠져나오지 못하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다. 한 번 들여놓은 믿음 체계로 세계관이 형성되고 나면 그 믿음 체계를 빠져 나온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바로 이것이 믿음의 맹점이고 함정이다.

 

3. 욕망을 정당화해주는 임무를 맡은 종교

 

사실 ‘믿음’이라는 행위 안에는 우매에 빠질 위험성이 내재되어 있는 게 사실이다. 믿음은 경험적 이성으로 포착하기 어려운 생명과 죽음, 죽음 이후, 삶의 근본적인 의미와 영적인 권세와 관련된 것들이 대부분이기 때문에 이성의 기능이 무력할 수밖에 없고, 이성의 판단 능력이 무력한 만큼 우매에 빠질 가능성은 항상 열려있다고 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십계명을 말씀하시면서 가장 먼저 우상을 섬기지 말라고 금하신 것도, 인간의 믿음 행위에는 우상을 섬길 가능성이 많다는 것을 아셨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실제로 거의 모든 종교 안에는 진지하게 삶과 죽음을 묻고 진리를 알고자 하는 구도(求道)의 일면이 있다. 하지만 동시에 모든 종교 안에는 우상을 섬기는 일면이 있다. 물론 기독교 안에도 우상숭배의 일면이 있다.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 그대로.

 

본래 성경이 말하는 ‘믿음’은 종교와 정반대의 개념을 갖고 있다. 종교란 인간이 신(神)을 더듬어 찾는 것이고, 신(神)에 대한 정보를 통해 자신의 안위를 구하려는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하나님은 정반대의 길을 가셨다. 인간이 하나님을 더듬어 찾을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자신을 알리셔야만 했고, 인간은 위로부터의 은총을 통해 하나님의 알리심(계시)을 깨닫게 하는 길을 가셨다. 그리고 성경은 은총으로 말미암은 이 깨달음을 가리켜 ‘믿음’이라고 했다. 달리는 그 사실을 표현할 언어가 없기 때문에 가장 적절한 언어를 선택한 것이 바로 ‘믿음’인 것이다. 그러니까 ‘믿음’은 종교적인 믿음 체계를 파괴하기 위한 하나님의 고육지책이었다. 우상숭배의 믿음체계를 파괴하기 위해 새로운 길을 여신 것이 ‘믿음’이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의 믿음조차도 종교적인 믿음체계를 부수기는커녕 우상숭배의 믿음체계로 떨어져버렸다.

왜 그랬을까? 왜 모세가 자리를 잠시 비운 사이에 금송아지를 만들었을까? 왜 바알신앙의 유혹을 물리치지 못했을까? 이스라엘의 종교지도자들이 인간의 과도한 욕망 즉, 과도하고도 성급하게 사태를 설명하려 하고, 원인을 찾으려 하고, 의미를 발견하려 하는 인간의 성급한 욕망을 채워주고자 하는 유혹을 뿌리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인간의 이 뿌리 깊은 욕망을 뿌리치지 못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가졌다는 기독교도 어쩔 수 없이 인간의 욕망을 채워주고 정당화해주는 창녀 노릇, 우상숭배의 통로 역할을 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행복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돈과 성공이 삶과 행복으로 연결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돈과 성공은 삶과 행복을 좀먹을 가능성이 더 많은 게 사실이다. 사람들도 대부분 머리로는 그 사실을 인정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돈과 성공을 통해 행복한 삶을 얻겠다는 환상을 마음 깊이 간직하고 있다. 그리고 그 환상을 지지하고 정당화해주는 권위와 믿음체계를 갖고 싶어 한다. 종교적 권위를 가진 믿음의 체계가 돈과 성공을 인정해주고 격려해주면 돈과 성공의 이면(어두운 면)과 자신의 탐심을 감출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하여, 모든 종교는 지금까지 그런 일을 충실히 담당해왔다. 교회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도 돈과 성공이야말로 가장 빠른 행복의 길이라는 보통 사람들의 행복관과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에 교회는 하나님이 축복하시는 분이라는 사실, 하나님이 돈과 성공의 공급자이시며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에게 돈과 성공을 주시는 분이시라는 사실을 반복해서 이야기해주었다. 돈과 성공은 하나님의 축복이라는 믿음 체계를 제공해주었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교회를 통해 확인받고 싶어 하는 것이 바로 돈과 성공의 정당성이었기 때문에 목회자들은 기꺼이 돈과 성공에 하나님의 세례를 베풀어주었다. 그리하여 성도들은 교회가 제공해준 믿음 체계 안에서 마음껏 돈과 성공을 찾아 나설 수 있었고, 돈과 성공을 하나님의 축복이라 여기며 감사할 수 있었고, 하나님의 축복을 계속 담보하기 위해 돈과 성공의 일부를 기꺼이 하나님께 바칠 수 있었다. 결국 그리스도인들의 성공으로 교회도 성공할 수 있었고, 하나님의 선하심과 축복을 맘껏 찬양할 수 있었다. 하지만 역사는 진실을 폭로하는 법. 교회가 비록 성도들의 욕망을 채워주는 창녀 역할을 잘 해냄으로써 부와 성공을 거머쥐기는 했으나 교회가 그동안 하나님의 이름으로 인간의 욕망을 정당화해주는 창녀 역할을 해왔고, 하나님을 인간의 욕망을 채워주는 신으로 전락시켰으며, 교회가 외쳐왔던 믿음의 체계가 바울이 경험한 믿음의 세계 즉, 존재와 삶의 혁명과는 무관한 믿음 체계였다는 진실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깨어있는 그리스도인에 의해 교회가 외면당하는 사태까지도 벌어지고 있다.

 

회의주의자인 마이클 셔머는 중세 유럽의 마녀 광풍을 몰고 온 기초적인 메커니즘이 닫힌계를 통한 정보의 순환 즉, 되먹임 고리라고 말했다(왜 사람들은 이상한 것을 믿는가. 192쪽). 그렇다. 믿음의 치명적인 약점이 바로 되먹임의 고리에 쉽게 말려든다는 점이다. 헌신을 생각해보자. 교회라는 닫힌계 안에서 계속 하나님의 일에 대한 헌신을 강조하고, 헌신을 최고의 미덕이라 추켜세우고, 헌신한 자들을 칭찬해주는 되먹임 고리가 형성되면 공동체의 모든 구성원들은 누가 많이 헌신하는가를 경쟁하는 묘한 분위기에 휩쓸리게 된다. 헌신에 대한 모방 욕망이 자극되고, 서로 헌신하려는 자발적인 움직임이 일어나며, 헌신한 자들은 공동체 안에서 인정을 받고 위상이 올라가는 것을 확인하는 기쁨을 얻는다. 돈과 성공도 마판가지다. 교회 안에서 계속 돈과 성공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축복해주고, 그런 자들이야말로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자들이라는 되먹임의 고리가 형성되면 모든 성도들은 더 이상 부와 성공의 이면과 자신의 탐심을 보지 않게 된다. 오직 하나님의 이름으로 돈과 성공을 추구하는 묘한 분위기가 형성되고, 부자와 성공한 자들을 모방하려는 욕망이 분출하며, 부자와 성공한 자들이 당당하게 축복을 만끽하는 그들만의 잔치가 벌어진다. 이성과 상식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당연한 것이 되고 주류가 되는 것도 다 되먹임의 고리에 갇혀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 닫힌계 안에서 벌어지는 되먹임의 고리는 왜곡된 믿음을 낳고, 왜곡된 믿음은 치명적인 오류와 해악을 낳는다.

 

4. 신앙과 지식

 

믿음의 세계는 경험적 이성으로 포착하기 어려운 세계와 맞닿아 있기 때문에 이성이 제 기능을 하기가 어렵고, 이성이 제 기능을 하기가 어려운 만큼 되먹임의 고리에 갇히기가 쉽고, 되먹임의 고리에 갇히기가 쉬운 만큼 왜곡되기도 쉽다. 하지만 건강한 신앙, 하나님의 은총으로 밝혀진 신앙은 이성을 거부하거나 외면하지 않는다. 이성이 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깨우고 구원하지 절대 억압하지 않는다. 이성을 억압하는 것은 우상숭배를 획책하기 위한 술책일 뿐이지 진리의 작용은 아니다. 진리는 이성을 소외시키거나 길들이지 않는다. 진리는 언제나 이성과 동반하면서 이성을 일깨운다.

 

바울은 지식 없는 신앙이 얼마나 위험천만한지를 친히 경험한 사람이다. 유대인의 관습에 따라 이해한 율법으로 말씀의 화육이신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인들을 죽이는데 앞장섰던 자신의 과거를 통해 지식 없는 신앙의 열심이 얼마나 무서운 폭력이 될 수 있는지를 통절히 체험한 사람이다. 하여, 그는 올바른 지식이 없는 신앙의 열심을 경계했다(롬10:2). 사랑도 지식과 통찰력이 겸비되어야 풍성해질 수 있고, 분별 있는 사랑을 할 수 있다고 했다(빌1:9). 그리스도인은 지식에까지 새로워진 자라고 했다. 그렇다. 하나님의 구원은 전인적이요 총체적이다. 전인과 온 삶이 하나님의 구원에 참여하는 것이 기독교 신앙이다. 물론 우리의 구원이 ‘이미’와 ‘아직은 아님’(already-not yet) 사이에 놓여 있고, 이성 또한 온전한 구원에 참여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신앙과 이성이 일치할 수 없다. 이성으로 신앙을 충분히 포착할 수도 없다. 신앙과 이성 사이의 긴장은 주님 오시는 그날까지 계속될 것이다. 하지만 그런 긴장에도 불구하고 이성이 구원에 참여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기 때문에 신앙으로 이성을 억압하거나 배제해서는 안 된다. 신앙은 언제나 이성의 구원을 인도하고 환영해야 한다. 이성의 구원을 인도하거나 환영하지 않는 신앙은 되먹임의 고리에 가두기 위한 음험한 획책일 뿐이지 참된 신앙일 수는 없다.

 

미국의 천체 물리학자 칼 세이건은 [회의주의자가 짊어진 부담]이라는 제목의 1987년 패서디나 강연에서 “상충하는 두 가지 욕구 사이에 절묘한 균형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 앞에 차려진 모든 가설들을 지극히 회의적으로 면밀히 검토하는 것과 아울러, 새로운 생각에도 크게 마음을 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만일 여러분이 회의에만 머문다면, 여러분은 어떤 새로운 생각도 보든지 못하게 됩니다. 새로운 것은 아무 것도 배우지 못한 채 이 세상을 비상식이 지배하고 있다고 호가신하는 괴팍한 노인네가 될 것입니다. 다른 한편으로, 귀가 가볍다 싶을 정도로 지나치게 마음을 열면, 그리고 회의적인 감각을 터럭만큼도 갖추지 못한다면, 여러분은 가치 있는 생각과 가치 없는 생각을 구분하지 못하게 됩니다. 모든 생각들이 똑같이 타당하다면 여러분은 길을 잃고 말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옳다. 우리가 길을 잃지 않고 진실과 진리에 나아가려면 회의와 열린 마음의 절묘한 균형이 필요하다. 참된 구원의 세계, 하나님나라의 세계에 나아가는 것도 마찬가지다. 열린 믿음과 냉철한 이성의 절묘한 균형이 없으면 안 된다. 교회가 아무리 하나님의 말씀의 빛을 소유했다 하더라도 열린 믿음과 냉철한 이성의 절묘한 균형을 잃으면 계시의 빛은 사라지고 종교의 권위만 덩그러니 남게 된다. 구원의 통로가 되기보다는 구원을 가로막는 걸림돌이 된다. 인간의 욕망을 정당화해주는 종교적인 창녀 노릇을 하게 된다. 거짓 행복을 파는 종교적인 장사꾼이 된다.

 

서두에서 말한 것처럼 신앙은 행복에의 첩경이요 가장 견고한 토대임이 틀림없다. 신앙이야말로 구원의 세계를 여는 문임이 분명하다. 하지만 동시에 맹목에 빠지기 쉽고, 되먹임의 고리에 갇히기 쉬운 치명적인 약점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모든 종교나 교회의 역사를 보아도 믿음이 정상적으로 작동하기보다는 치명적인 약점에 함몰된 적이 많았고, 행복의 진실을 정직하게 말하기보다는 거짓 행복에 신앙의 세례를 주기에 바빴다. 사실이다. 믿음이라고 하는 것이 우리의 맹목을 교묘하게 감추고 수탈의 수단으로 동원되곤 했던 게 사실이다. 인간의 욕망을 정당화하고 부채질했던 게 사실이다. 하지만 부끄러운 믿음의 역사에도 불구하고 변할 수 없는 진실이 있다. 믿음이 구원의 길이라는 사실이다. 믿음이 삶의 길이라는 사실이다. 그렇다. 참된 믿음처럼 아름답고 고상한 것이 없다. 참된 믿음처럼 행복을 지지해주는 것이 없다. 참된 믿음처럼 이성을 일깨우는 것이 없다. 참된 믿음처럼 존재와 삶의 변혁을 고취시키는 것이 없다. 참된 믿음처럼 큰 축복이 없다. 맹목의 함정에 빠지지 않고, 되먹임의 고리에 갇히지만 않는다면 믿음은 은총이다.

 

정리하자. 믿음에는 두 종류가 있다. 은총으로 말미암은 믿음과 인간의 과도하고도 성급한 욕망에 기생하는 믿음이 있다. 은총으로 말미암은 믿음은 삶의 진실을 보게 하고, 거짓의 정체를 보게 한다. 이성을 일깨운다. 인간의 과도하고도 성급한 욕망에 기생하는 믿음은 삶의 진실을 보지 못하게 감춘다. 이성을 어둠에 방치한다. 은총으로 말미암은 믿음은 드물고, 인간의 과도하고도 성급한 욕망에 기생하는 믿음은 넘쳐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