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이라는 가면을 쓰고 우리의 삶을 농락하는 것들은 또 있다. 문명의 옷을 입은 가면이다. 인간은 동물과 달리 단순 반복을 몹시 싫어하고 경멸한다. 끊임없이 질문하고 해결 방법을 찾으며 단순 반복이 아닌 새로움을 추구하는 존재가 인간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21세기의 찬란한 문명도 따지고 보면 인간의 그런 천성-호기심과 상상력이 일구어낸 결과물이라 할 수 있다. 수많은 역경과 실패, 존재의 위기를 몰고 온 역병과 전쟁과 자연재해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문명이 발전에 발전을 거듭해 온 것 또한 단순 반복을 싫어하는 인간의 천성 덕분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일까? 우리 안에는 발전은 유익하다는 믿음, 새로운 것은 좋은 것이라는 믿음, 문명은 야만보다 인간적이라는 믿음, 과학기술은 결국 유토피아를 가능케 할 것이라는 믿음이 강하게 자리를 잡고 있다. 무궁한 발전을 의심하거나 발전의 미덕을 의심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우리는 오늘도 발전이라는 믿음과 희망을 실현하기 위해 과학기술에 매달리고 있다. 과학기술은 인류의 오랜 믿음과 희망을 실현할 최고의 구세주, 세상을 구원할 메시아로 대접받아 온지 이미 오래다.

 

1. 포악한 문명의 실패한 승리

 

그런데 문명의 정점에 선 오늘 이러한 믿음은 흔들리고 있다. 발전은 정말 유익한 것인지, 문명이 야만보다 인간적인 것인지에 대해 심각한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1841년에 고래를 잡는 포경선에 올라 타히티를 향해 출발했다가 여러 상황을 만나 18개월 동안 남태평양 섬사람들의 야만적인 삶을 목도했던 [백경]의 소설가 하먼 멜빌은 19세기 중반에 이미 “문명은 한 가지 편의를 알려 줄 때마다 백 가지의 악을 감춘다.”며 문명의 그림자를 날카롭게 비판한 적이 있다. 20세기 영국의 여류 소설가 아이리스 머독은 “문명과 진리를 다 가질 수는 없다.”는 짧은 말로 문명의 비진리성을 폭로했다. 미국의 매칼래스터 대학교의 인류학과 교수인 잭 웨더포드는 [야만과 문명, 누가 살아남을 것인가?]라는 도전적인 책에서 야만과 문명을 새롭게 조명하고 있다. 그는 세계적인 도시 문명의 한 복판에 야만이 득실거리고 있는 현실을 열거하면서 “문명(civilization)이라는 낱말이 도시(city)에서 유래했고 또 야만(savage)라는 낱말은 ‘숲’을 나타내는 라틴어에서 유래했지만, 가장 야만적인 생활방식은 이제 우리의 가장 현대적인 도시 한 가운데에서 발견된다. 문명은 우리가 한 때 원시 부족에게 뒤집어씌웠던 것보다 훨씬 더 나쁜 야만을 만들어냈다. 문명은 문명이 품고 있던 최악의 두려움을 현실로 만들어냈다. 문명 스스로 수천 년 동안 두려워하며 남에게 투사시켰던 바로 그 야만을 만들어내 버린 것이다. 야만은 문명 내부에 자리 잡았다. 문명은 야만을 만들고 북돋아 준다. 도시의 중심부는 새로운 변방 지대가 되었다.”(468쪽)고 문명의 아픈 곳을 찔렀다. 동시에 잭 웨더포드는 야만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이 달라지고 있음을 포착해냈다. “빅토리아 시대와 현대의 초기에 머나먼 섬의 이국적인 사람들은 서양에서 찾아볼 수 없었던 여가와 성의 자유를 상징했다.…… 최근 들어 서양인들은 노스다코타 주나 남부 브라질의 부족민이 정신적인 측면을 더 많이 지니고 있고 또 주위의 물리적인 세계와 주파수가 좀 더 잘 맞는 것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성적·예술적 자유를 나타내기보다는 환경주의와 정신세계를 나타내게 된 것이다.”라고(349쪽). 사실이다. 영화 ‘늑대의 후예들’이나 ‘아바타’에서도 지금까지 야만인으로 취급받아왔던 인디언을 자연과의 깊은 교감을 하는 최고의 영성가요 지혜자로 그리고 있는 걸 보면 야만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엿볼 수 있다.

 

문명과 야만, 과연 어떤 차이가 있을까? 야만은 미개이고 문명은 발전일까? 우리가 지금껏 추측한대로 야만은 불행이고 문명은 행복일까? 스웨덴 출신의 언어학자 헬레나 노르베리-호지가 오래 전에 쓴 [오래된 미래]를 보면 발전과 문명에 대한 우리의 굳센 믿음이 사실은 지나친 편견에 불과한 것일 수도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그녀가 라타크를 처음 방문하게 된 것은 동양언어학과의 학위 논문을 준비하던 1975년이었다. 서부 히말라야 고원에 자리 잡은 티베트의 작은 도시 라다크는 빈약한 자원과 혹심한 기후에도 불구하고 웃음과 배려가 넘쳐나는 아름다운 공동체, 검소하면서도 서로 돕는 생활태도와 유머가 그치지 않는 곳, 티베트 불교문화에 기초한 생태적 지혜로 천년 넘게 평화로운 공동체를 유지해온 곳이었다. 그들은 물질적으로 풍족하지 않았지만 아무도 가난하다고 느끼지 않았다. 긴밀한 가족적·공동체적 삶 속에서 사람들이 정서적 심리적으로 안정을 누리고 있었다. 낭비도 오염도 없는 사회, 범죄는 사실상 존재하지 않고, 공동체는 건강하고 튼튼하며, 십대 소년이 극히 자연스럽게 어머니나 할머니에게 유순하고 다정스럽게 대하는 사회, 여성들과 아이들과 노인들이 존경받는 사회였다. 라다크 사람들에게 가장 심한 모욕이 “화를 잘 내는 사람”이라고 할 만큼 그들의 생활 어디에서도 공격적인 언사를 찾아보기 어려운 사회였다.

 

그런데 그녀가 라다크에 머문 16년 동안 서구식 개발의 기운이 밀어닥쳤다. 여기저기에 건설 붐이 일었고, 돈벌이를 위해 고향을 떠나는 젊은이들이 늘어났다. 자급자족하던 사람들도 점차 물건을 사기 위해 돈의 필요를 느끼게 되었고, 거짓말을 하는 일과 사회적 분열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환경이 훼손되고, 난데없는 인플레이션과 실업이 등장하고, 서구 문화에 대한 맹목적인 선망의 기운이 사람들의 마음을 휩쓸었다. 호지는 오랜 세월동안 유지되어온 생태적 균형과 사회적 조화가 산업주의의 압력을 견디지 못하고 붕괴되는 것을 지켜보면서 이렇게 탄식한다. “테베트 고원의 ‘원시적인 문화’가 우리의 산업사회에 가르쳐줄 것이 있다는 것은 터무니없는 일로 보일지 모른다. 그렇지만 우리에게는 우리 자신의 복잡한 문화를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기준선이 필요하다. 라다크에서 나는 진보로 인하여 사람이 땅에서, 서로서로에게서 그리고 궁극적으로 자기 자신에게서 분리되는 것을 보았다. 나는 원래 행복했던 사람들이 서구적 규범에 따라 살기 시작하면서 그들의 평온함을 잃어버리는 것을 보았다.”(오래된 미래. 10). 그랬다. 노르베리-호지는 라다크의 어제와 오늘을 보면서 문명의 허상을 보았고, 발전이라는 믿음이 환상에 불과한 것일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오래된 과거가 오히려 진정한 미래가 될 수 있다는 놀라운 역설을 발견했다.

 

미국의 사회학자요 문명 비평가였던 스코트 니어링은 문명에 대한 우리의 믿음과 문명의 실제가 얼마나 다른지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비판했다. “문명사회 초기 체제가 문명의 자연스러운 발달로 경제, 정치, 군사 제도를 발달시킬 때 사람들은 꿈을 이루었다고 굳게 믿었다. 부를 쌓고 권력을 얻는 극심한 투쟁이 인류를 약속의 땅으로, 조화로운 삶으로 이끌 것이라고 또한 믿었다. 그러나 세계 곳곳에서 몇천 년에 걸쳐 수없이 많은 이들이 시간과 힘을 바쳐 문명사회를 일구었지만 그 결과는 오로지 갈등, 좌절, 재앙, 파괴뿐이었다. 그밖에 어떤 결과가 있을 수 있단 말인가? 문명은 팽창하는 본성을 가지고 있다. 팽창은 호전성을 가지고 있어 경제, 군사 면에서 충돌을 일으킨다. 이어지는 전쟁들이 전쟁 제조기가 되어 정부를 마음대로 주무르고 정부를 앞세워 군사 긴장을 불러일으킨다. 경쟁하는 군국주의는 끝내 스스로 멸망하고 만다. 따라서 결론은 이렇다. 문명은 사회의 자살 행위이다.”(그대로 갈 것인가 되돌아갈 것인가. 128쪽).

 

잭 웨더포드는 한 때는 문명의 중심지였지만 지금은 사라져버린 캄보디아의 앙코르와트, 볼리비아의 티아우아나코, 영국의 스톤헨지, 아프리카의 짐바브웨 유적지, 멕시코의 약스칠란을 거명하면서 문명의 취약함을 상기시키고 있다. “현재로서는 문명이 다른 모든 생활방식을 제치고 승리자로 떠오른 것 같다. 문명인은 전 세계의 부족민을 죽이거나 흩어지게 만듦으로써 그들을 쳐부수었다. 그러나 문명이 승리감에 도취된 듯이 보이는 바로 이 순간, 문명이 외적을 모두 쳐부수고 스스로 세계의 주인이 된 이 순간, 문명과 맞설 경쟁 체제가 남지 않은 바로 이 순간, 문명은 이제까지 그 어느 시기보다도 더 중대한 위험에 처하게 된 것 같다. 문명은 외적에 대한 두려움이 모두 사라진 지금, 내부의 적에 더욱 취약해 보인다. 자기 자신의 성공에 의한 희생자가 되는 것이다.”(야만과 문명, 누가 살아남을 것인가. 478쪽). 그는 문명의 취약함뿐 아니라 문명의 포악함에 대해서도 말한다. “문명은 주도권을 확립하기 위해 숲을 한 입씩 베어 먹고, 토양을 착취하고, 평원을 벗겨버리고, 강을 막고, 산을 파내고, 바다를 오염시키고, 공기를 더럽혔다. 발전을 위한 과정에서 문명은 동물과 식물 종을 하나씩 하나씩 멸종시켜 버렸다.”(야만과 문명, 누가 살아남을 것인가. 478쪽). 그렇다. 지금까지 문명은 승리의 가도를 달려왔다. 문명의 포악함이 야만의 무력함을 짓밟고 승리를 구가해왔다. 하지만 문명이 과연 최종 승자가 될 수 있을 것인지는 좀 더 지켜보아야 한다. 문명의 포악함은 결국 문명 자체를 파괴하는 데까지 나아갈 테니까 말이다.

 

2. 발전의 필연과 미덕, 그리고 함정

 

물론 발전은 인간에게 있어 필연이다. 인간은 다른 피조물과 달리 묻고 탐구하고 창조하는 이성적 존재로 지음 받았다. 쉼 없이 묻고 탐구하며 새로움을 상상하는 존재는 본능을 따라 살 수 없다. 어제를 단순 반복하면서 살 수 없다. 묻고 생각하며 진실을 알고자 하는 호기심으로 가득한 존재는 어제와 다른 오늘을 살아야만, 모든 것을 알아야만, 자기 존재의 의미와 가치를 발견해야만 살 수 있다. 그렇다. 인간은 발전을 도모해야만 살 수 있는 존재다. 발전은 인간에게 선택이 아니라 필연이다. 발전은 인간에게만 주어진 특권이면서 동시에 결코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이다. 뿐만 아니라 발전은 갖가지 묶임과 두려움으로부터 인간을 해방시켜주었다. 육체노동의 고역으로부터, 생존의 위협에 대한 두려움으로부터, 질병과 자연재해에 대한 공포로부터, 굶주림의 고통으로부터 인간을 해방시켜주었다. 문명의 발전이 인간의 삶을 고양시켜온 것은 부인할 수 없는 객관적 사실이다. 하여, 발전은 생활의 향상과 같은 뜻으로 이해되었다. 아름다운 미덕으로 칭송되었다.

 

하지만 인간의 필연인 발전이 오늘에 와서는 생명과 삶을 위협하는 심각한 문제를 야기하고 있다. 네 가지 정도만 이야기하려 한다. 첫째, 발전의 속도가 지나치게 빨라졌다. 새로운 과학기술의 융합이 일어나면서 발전에 가속도가 붙었고, 발전의 가속도가 워낙 빠르다 보니 생활이 발전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과거에는 인간이 과학기술의 발전을 끌고 갔는데 지금은 과학기술이 인간과 생활을 끌어가고 있다. 아니다. 인간과 생활이 발전을 따라가지 못해 소외당하고 있다. 발전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해 심리적인 소외와 경제적인 소외를 겪는 사람들이 한 둘이 아니다. 나만 해도 그렇다. 기계도 따라가지 못하는 나를 보고 있노라면 인간 퇴물이 된 것 같은 처연한 심정이 들 때가 있어서 하는 말이다. 둘째,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인해 우리 사회는 이미 첨단과학기술 지식으로 무장한 전문 지식인이 주도하는 사회, 전문 분야별로 생활이 분절되는 전문화 사회가 되었다. 우리의 생활을 돌아보라. 모든 분야에서 전문가의 도움 없이는 생활 자체가 불가능해졌다. 현대인은 모두 생활 불구자들이 되었다. 셋째, 생태계가 공급할 수 있는 능력 이상의 에너지를 사용할 수밖에 없는 에너지 과용사회, 자연이 해독할 수 있는 자정능력을 넘어서는 유해물 과다사회가 되었다. 오늘의 문명은 모든 생명을 공격하는 죽임의 문화다. 넷째, 인간을 해방시킨 과학기술이 지금은 인간의 자유를 구속하고 있다. 누구나 들고 다니는 전화만 생각해보자. 핸드폰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울려댄다. 대화를 나눌 때에도, 공부할 때에도, 기도할 때에도, 산책할 때에도, 여행할 때에도, 밥 먹을 때에도, 예배할 때에도 쉬지 않고 울려댄다. 핸드폰을 챙기지 못하고 외출하게 되면 사색이 될 정도다. 핸드폰은 이제 해방이 아니라 끔찍한 구속이 되어버렸다. 그렇다고 핸드폰 없이 사는 것도 쉽지 않다. 인간은 이제 문명의 이기에 갇혀 사는 신세가 되어버렸다. 특히 컴퓨터의 노예가 되어버린 젊은이, 기계와 함께 사는 사람들, 기계와 기술에 적응하기 위해 애쓰는 자들을 보노라면 푸념과 탄식이 절로 나온다.

 

앞서 말한 것처럼 발전은 인간에게 허락된 특권이요 필연이다. 하지만 특권이요 필연인 발전이 이제는 점차 인간과 생태계 전체를 위협하는 폭력으로 돌변하고 있다. 존재와 삶을 소외시키고 있다. 인간됨의 본질인 자유를 끔찍할 정도로 위협하고 있다. 그렇다. 발전의 폭력성은 이미 눈앞의 현실이 되었다.

3. 과학기술사회

누군가는 내가 지나치게 비관적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지나온 역사에서처럼 인간은 오늘의 비관적인 상황도 능히 극복해낼 것이라고, 누구도 꿈꾸지 못했던 새로운 해답을 찾아내고야 말 것이라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물론 그럴지도 모른다. 그럴 가능성이 전혀 없다고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나는 문명의 발전을 신뢰하지 않는다. 과학기술의 발전이 삶의 근원적인 문제와 현실적인 문제를 해결해낼 것이라고 믿지 않는다. 자크 엘룰은 매우 비관적으로 오늘의 문명사회를 바라보았다. 그는 [기술의 역사]에서 오늘의 문명을 가능케 한 과학기술의 성격이 과거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말한다. 18세기 후반과 19세기를 기점으로 전혀 새로운 기술이 출현했다는 것이다. 이전의 전통적인 기술은 제한된 분야에 한정되어 있었고, 특정한 지역의 경계를 넘지 않았고, 섬광처럼 잠간 발전하다가 잊히는 경우가 많았고, 개인의 선택에 의해 제한되었었는데 새로운 기술은 이러한 모든 제한성을 벗어버렸다는 것이다. 다양한 영역에서의 기술들이 서로 연결되기 시작했고, 국경을 넘어 전 세계가 하나의 기술로 통일되었으며, 세대의 단절 없이 계속되고 있고, 기술에 대한 개인의 선택이 점점 불가능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하여, 엘룰은 기술 메커니즘이 점차 인간의 개성이나 의지, 기호, 취향 등을 배제하고 순수 기술적인 방식을 통해서만 수단이 결정되는 기술의 자율성을 문제 삼고 있다. 기술이 우리를 자유롭게 하리라는 희망과는 반대로 인간의 모든 개성과 선택의 자유를 억압하는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고 비판한다. 사람들이 점점 기계의 부속품으로 전락하고 있으며, 기술이 지배하는 체계의 노예로 살고 있다고 비판한다. 그리고 모두가 과학기술을 낙관하는 이 시대에 그는 예언자적 통찰력을 가지고 도전한다. 기술을 택할 것인가? 자유를 택할 것인가?

 

우리는 그동안 행복은 문명의 옷을 입고 다가온다고 생각해왔다. 문명은 행복이고 야만은 불행이라고 생각해왔다. 그리고 문명의 옷을 입은 행복을 얻기 위해 발전에 발전을 거듭해왔다. 하지만 문명 발전의 정점에 선 오늘 우리는 새로운 진실을 발견하고 있다. 문명과 야만의 거리가 그리 크지 않다는 것을. 야만보다 더 참담한 야만이 문명 속에 깃들어 있다는 것을. 발전이라는 걸음을 멈추지 않으면 문명의 승리는 결국 실패한 승리가 될 가능성이 많다는 것을. 발전이 더 이상 행복의 밑거름이 되기 어렵다는 것을. 발전이 오히려 자유와 행복을 짓밟는 무서운 폭력이 될 수 있다는 것을.

하여, 이제는 지난 시절의 순진했던 믿음대로 살아서는 안 된다. 지금까지의 관성대로 살아서도 안 된다. 끝없는 발전과 진보에 대한 믿음과 희망을 근본에서부터 재검토해야 한다. 정직한 이성으로 자유와 행복을 위협하는 발전, 생태계 전체를 파멸에 이르게 할 수도 있는 발전의 실상을 포착하고, 끝없는 발전에의 믿음과 희망에 재갈을 먹일 수 있어야 한다. 생각해보라. 죽음으로 치닫는 발전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존재와 삶을 소외시키는 문명을 위해 헌신할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발전이 아무리 선하다 한들 무한한 발전이 과연 선이기만 할 수 있겠는가? 예부터 ‘지나친 것은 부족한 것보다 못하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렇다. 우리는 지금 인간의 본성에서 발현되는 발전의 필연에 항거하면서 발전의 가속도에 브레이크를 밟지 않으면 안 되는 운명적인 시점에 서있다. 비록 인간의 힘으로 발전의 속도를 제어하기 힘들 정도로 가속도가 붙어버렸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있는 힘껏 브레이크를 밟지 않으면 안 되는 벼랑 끝에 서있다. 이뿐 아니다. 지금은 발전의 방향을 전환해야 할 때다. 생활의 발전에서 삶의 발전으로. 과학기술의 발전에서 인간됨의 발전으로. 죽임의 문명에서 살림의 문명으로. 성공에서 행복으로.

 

삶이란 참 묘하다. 행복이란 참 묘하다. 국민의 소득 수준이 높아지면 처음에는 행복지수가 급속히 상승하다가도 소득 수준이 어느 정도를 넘어서면 그때부터는 소득이 증대되어도 행복지수가 별로 높아지지 않는 것처럼(잉글 하트의 경제효용체감 곡선), 문명의 발전도 어느 정도까지는 삶에 도움이 되지만 어느 정도를 넘어서면 그때부터는 삶을 소외시키고 존재와 삶의 토대인 생태계 자체를 갉아먹는 폭력이 되니 말이다. 찬란한 도시문명 속에 야만이 독버섯처럼 기생하듯 오늘의 과학기술 속에 존재 파멸의 기운이 기생하고 있으니 말이다. 문명의 옷이 정신을 잃어버리게 할 만큼 찬란하고 아름답지만 그 옷도 지나치게 많이 걸치면 삶과 행복이 그 안에서 질식하니 말이다.

생각해보라. 누구라서 삶과 행복을 질식시키고 싶겠는가? 비싼 대가를 지불하면서까지 문명의 옷을 입으려 하는 것은 삶과 행복을 양육하고 보듬기 위함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삶과 행복은 정작 문명의 옷에 짓눌려 질식해버린다니 이 얼마나 웃기는 일인가? 문명의 옷으로 삶과 행복을 질식시키지 않으려면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 문명의 옷을 입되 벌거벗음을 약간 면하는 정도의 얇은 옷을 입어야 한다. 그리고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발전이 인간의 필연임에도 불구하고 발전의 속도를 조절할 수 있는 지혜와 용기, 발전의 욕망을 억제할 수 있는 절제의 능력을 갖춰야 한다. 우리 각 사람이 인간성과 삶을 보호하고 관계를 살찌우는 것이 아닌 발전은 백해무익하다는 사실을 깊이 유념하고, 발전과 문명의 껍질을 벗겨내는 행동에 나서야 한다. 거꾸로 강을 거슬러 오르는 저 힘찬 연어들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