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는 지금 세상의 걸림돌입니다. 물론 교회다운 교회는 세상의 걸림돌이어야 하고, 걸림돌일 수밖에 없습니다. 교회와 세상은 삶을 바라보는 관점과 추구하는 목표가 근본적으로 다르기 때문에 갈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어둠과 빛이 공존하기 어렵듯 교회와 세상 또한 공존하기 어렵습니다. 세상이 교회를 배척하고 부담스러워하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교회가 세상의 걸림돌이 안 되는 게 문제지 걸림돌이 되는 건 하등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지금 한국교회가 세상의 걸림돌이 되는 게 문제가 되는 이유는 교회가 교회다워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지나치게 세상을 부러워하고 세상을 닮으려고 하기 때문에, 아니 어쩌면 세상보다 한술 더 뜨기 때문에 걸림돌이 되고 있습니다.

여러분, 지금 세상 사람들이 교회를 향해서 뭐라고 하는지 아십니까? 제발 교회가 되라고 말합니다. 세상 따라오지 말고 좀 교회답게 처신하라고 훈계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교회 안에서 목사님 설교가 어떠니, 재정 사용이 어떠니, 모 장로의 기도가 어떠니, 예배 출석이 어떠니, 모 집사가 싸가지가 있니 없니 하면서 온갖 시시콜콜한 걸 가지고 좌충우돌하고 있는데 비해 세상 사람들은 교회가 되라고, 제발 교회답게 처신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교회되는 문제를 외면하고 있는데, 세상은 ‘제발 교회가 되라’고 소리치고 있습니다.

 

교회의 존재 이유

 

우리는 흔히 교회가 세상을 위해 존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옳습니다. 교회는 교회를 위해 존재하지 않습니다. 교회는 세상을 위해 존재합니다. 하지만 교회가 세상을 위해 존재한다는 말 속에는 오해의 소지가 있습니다. 교회란 일차적으로 하나님나라를 위해 존재하지 세상을 위해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세상을 위해 오직 한 가지 책무를 부여받았습니다. 하나님나라의 복음을 증언하고, 온 세상이 하나님나라를 볼 수 있는 하나의 창이 되는 것입니다. 교회는 오직 이 일을 위해서만 부름을 받았고, 오직 이 일을 통해서만 세상을 섬길 수 있습니다. 시민 교육이나 국가 행정, 국가 방위를 위해 교회가 할 일은 거의 없습니다. 사회복지를 위해 할 일도 거의 없습니다. 약간의 도움이 안 되는 건 아니지만 그리 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 개개인의 세상살이에도 별 도움이 안 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재산을 늘리거나 성공하는데 도움이 됩니까? 건강에 도움이 됩니까? 인간관계에 도움이 됩니까? 하기야 요즘 교회들이 하는 말을 들어보면 대부분 그런데 도움이 된다고 합니다. 또 교회가 그런 쓸모를 개발하기 위해서 많이 노력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깊이 따져보면 사실은 별 쓸모가 없습니다. 큰 교회에 나가면 장사하는 데는 도움이 될지 모르나 세상살이에 별 도움이 안 됩니다. 걸림돌 되는 건 많아도 도움 되는 건 거의 없습니다.

사실입니다. 교회는 세상에 기여하는 바가 거의 없고, 세상살이에도 별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교회가 세상을 위해 마치 대단한 일이라도 하고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전적인 착각입니다. 교회는 세상에 기여할만한 것이 별로 없습니다. 교회는 처음부터 세상이 필요로 하는 뭔가에 기여하도록 기획되지 않았습니다. 실용적인 목적을 위해 기획되지 않았습니다. 교회는 오직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기획된 하나님의 공동체일 뿐입니다. 물론 오해는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교회가 개인의 권리를 신장시키고, 가난한 자의 배고픔을 해결하고, 문맹을 퇴치하고, 의료혜택의 범위를 넓히고, 빈부 격차와 각종 차별을 완화시키는 일을 해서는 안 된다거나, 할 필요가 없다고 말하는 게 아닙니다. 교회는 마땅히 그런 일을 해야 합니다. 하지만 그런 일들이 교회의 일차적인 책무가 아니라는 것은 분명합니다. 교회의 일차적인 책무는 하나님나라의 복음을 정직하게 증언하고, 복음이 가르치는 삶을 배우고 연습하는데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책무도 세상 사람들보다 더 부자가 되고, 더 높은 지위에 오르는 것이 아니라 세상 사람들이 사는 방식과 다르게 사는데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는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데 있습니다. 성경은 그런 삶의 방식을 가리켜 ‘하나님의 나라’라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개인의 권리를 신장시키고, 넘치는 생산력과 열린 시장을 통해 배고픔을 해결하고, 무상 교육을 통해 문맹을 퇴치하고, 의료보험으로 가난한 자들의 의료혜택을 확대하고, 빈부 격차와 각종 차별을 완화시키는 것이 하나님이 뜻이 아니라는 게 아니라 그 이상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지금보다 나은 삶이 아니라 지금과는 차원이 다른 삶, 죄와 죽음의 지배력을 약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죄와 죽음의 지배에서 완전히 해방된 삶에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오직 하나님나라를 위해서 예수를 이 땅에 보내셨고, 세상 죄를 짊어지게 하셨고, 부활하게 하셨습니다. 이 땅에 당신의 백성들을 불러 교회라는 공동체로 모이게 하신 것도 교회를 통해 세상의 현실과는 전적으로 다른 하나님나라의 현실을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세상 속에 하나님나라의 식민지가 되라고, 그래서 하나님나라를 가리키는 하나의 손가락이 되라고 교회를 세우신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는 하나님의 뜻과는 다른 방향으로 달려가고 있습니다. 세상을 지금보다 좀 나은 세상으로 만드는데 공헌하고 싶어서, 사람들이 원하는 것을 채워주고 싶어서 안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세상의 필요를 채워주어야 한다고 강변하면서 세상의 필요를 채워주는 일에 열심을 내고 있습니다. 사실 교회가 맡은 역할은 그게 아닌데, 교회가 맡은 역할은 하나님나라를 가리키는 하나의 손가락이 되는 것인데, 교회는 하나님나라를 가리키는 쪽보다는 세상에 유용함을 제공하는 쪽으로 달려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참으로 역설적인 사실은, 교회가 세상을 위해 쓸모 있는 존재가 되려고 하면 할수록 교회됨에서 멀어진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교회가 세상에 유용함을 제공하면 세상을 얻을 수는 있습니다. 교회가 성장할 수는 있습니다. 훌륭한 종교기관이 될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나라를 가리키는 손가락이 될 수는 없습니다. 반대로 교회가 하나님나라의 식민지이기에만 집중하면 이상하게도 쓸모가 있어집니다. 어둡고 부패한 세상에 빛이 되고 소금이 되어 하나님나라를 가리키는 손가락이 됩니다. 어둠과 죄악으로 소망 없는 세상에 한 가닥 희망이 되고, 세상을 변혁시키는 동인이 됩니다. 세상을 하나님나라로 초청하는 구원의 통로가 됩니다. 그렇습니다. 교회가 세상에 참된 기여를 할 수 있는 길은 오직 하나입니다. 교회가 되면 됩니다. 하나님나라의 삶을 배우고 살아가는 그 나라의 식민지가 되면 됩니다. 오직 이것만이 교회가 세상을 섬길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하나님나라의 식민지가 되기 위하여

 

그러면 교회가 하나님나라의 식민지가 되기 위해 배우고 살아야 할 하나님나라의 삶은 어떤 것일까요? 바울은 오늘 말씀에서 교회를 하나님의 집이요 진리의 기둥과 터라고 했습니다. 표준새번역 성경은 ‘하나님의 집’을 좀 더 직접적인 표현으로 ‘하나님의 가족’이라고 번역했습니다. 성경에서 ‘집’이라는 말과 ‘가족’이라는 말은 서로 바꾸어 써도 무관할 정도로 같은 의미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암튼, 오늘 말씀에 의하면 교회의 조건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가족이 되는 것이고, 또 하나는 진리의 기둥과 터가 되는 것입니다.

우선 하나님의 가족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바울은 교회를 여러 가지로 비유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신부, 그리스도의 몸, 하나님의 집(가족) 등으로 비유했는데 참 기가 막힌 비유라고 생각됩니다. ‘그리스도의 신부’라는 비유 속에는 교회가 주님의 사랑의 대상이라는 비밀이 담겨 있고,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비유 속에는 모든 교회가 하나라는 진실이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의 가족’이라는 비유 속에는 교회의 본질이 무엇인지, 교회의 존재 양식이 어떠해야 하는 것인지가 담겨 있습니다.

 

가족이라는 것

 

저는 죽음 같은 위기를 겪으면서 가족에 대한 특별한 경험을 했습니다. 저는 오랜 시간 간질환으로 고생했습니다. 담임 목회를 사임하고 투병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과정을 지켜 본 아들은 누구도 이야기하지 않았는데 본인 스스로 간을 기증하겠다고 나섰습니다. 정말 한 마디도 말한 적이 없었습니다. 이식을 해야 할지 어떨지, 누가 간을 기증해야 할지 고민하며 상의한 적이 한 번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아들 녀석은 처음부터 자기가 기증하겠다고 나섰습니다. 자기 간을 기증할 테니 더 나빠지기 전에 이식수술을 하라며 몇 차례 종용을 했습니다. 암튼, 우여곡절 끝에 이식을 하기로 결정을 했고, 아들은 간 기증 가능여부 판정을 위해 정밀 검진을 받았습니다. 검진하고 1주일이 지나면 검진 결과가 나오는데, 검진 결과는 본인에게만 통보합니다. 1주일 후 아들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전화 목소리가 매우 밝았습니다. 아들은 대뜸 말했습니다. “아빠, 수술 할 수 있대. 병원에서 연락이 왔는데 오케이 사인이 났어. 혹시 안 좋으면 어떡하나 조마조마 했는데…… 잘 됐다.” 수술을 할 수 있게 되었다는 소식을 전하는 아들의 목소리는 정말 밝았습니다. 그 후 아들은 수술대에 서기까지 한 달여 동안 자기 걱정을 하지 않았습니다. 단 한 번도 망설이거나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속으로 망설여지지 않느냐?’고 물으면 ‘전혀 그렇지 않다’고 대답했습니다. ‘우리 아들 참 대단하다’고 하면, ‘아들이 아빠에게 간을 주는 게 뭐가 대단한 일이냐?’며 ‘앞으로는 절대 그런 말 하지 말라’고 손사래를 쳤습니다. 아들의 일념은 오직 아빠에게 좋은 간을 주어야 한다는 것과 반드시 수술대에 서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자기 몸 관리에 매우 신경을 썼습니다. 잠을 일찍 자고 잘 먹으려 했습니다. 사람들은 보통 자기 질병 때문에 수술대에 서는 것마저도 두려워하고 망설이며 도망치기 일쑤인데, 아들은 자기 때문이 아니라 아버지 때문에, 질병 때문이 아니라 건강하기 때문에 수술대에 오르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기뻐했습니다.

수술 후 회복하는 과정에서 아들은 많은 고통을 당했습니다. 2주일여 동안 정말 형언키 어려운 고초를 겪었습니다. 수술 후 3주쯤 지나 고통이 잦아들 즈음에 아들은 처음으로 제 병실을 찾아왔습니다. 와서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아빠, 생체 이식은 가족만이 할 수 있는 것 같아. 가족이 아니면 할 수도 없겠지만, 만일 가족이 아닌 사람에게 간을 기증받으면 받은 사람이 일평생 그 부담을 안고 어떻게 살 수 있겠어? 가족이 아닌 사람에게 생체 간을 기증받는다는 건 정말 생각할 수 없는 일 같아.” 그렇습니다. 저도 그런 생각을 했었습니다. 제가 아들에게 간을 빌리지 않았다면 그처럼 편안한 마음으로 받지 못했을 것이라고. 같은 가족이라도 조카나 형제들에게 받아야 하는 상황이었다면 아마도 선뜻 받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아들에게 받는 것만큼 흔쾌하거나 편안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물론 자식이라고 해서 왜 미안한 마음이 없었겠습니까? 미안한 마음, 안타까운 마음이야 형언할 수 없었지만 이상하리만큼 마음이 편안했습니다. 부담스럽기보다는 행복하고 감격스러웠습니다. 정녕 그랬습니다. ‘이건 너무 뻔뻔한 것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마음이 편안했습니다. 세상에는 60억이나 되는 사람들이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값없이 편안한 마음으로 살아있는 간의 절반을 떼어 올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아내와 자식밖에 없었습니다. 생명을 위해 생명을 내미는 손을 편안하고 뿌듯한 마음으로 붙잡을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아내와 자식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이 사실을 인지하는 순간 눈이 번쩍 뜨였습니다. 가족이 무엇인지가 보였습니다. 생명을 위해 생명을 주는 관계, 생명을 주어도 아깝지 않고 생명을 받아도 부담스럽지 않은 관계, 다 주어도 아깝지 않고 다 받아도 부담스럽지 않은 관계, 그것이 바로 가족이라는 놀라운 진실이 보였습니다. 네 것, 내 것의 경계를 초월하는 것이 가족이라는 놀라운 진실이 보였습니다.

 

하나님의 가족

 

그런데 바울은 놀랍게도 교회가 바로 하나님의 가족이라고 말합니다. 목회자와 성도, 성도와 성도는 한 가족이라고 말합니다. 바울이 교회를 이렇게 설명하는 것은 결코 과장이 아닙니다. 처음 교회를 보십시오. 그들은 모두가 무엇이든 공유했습니다. 가진 것은 무엇이든 팔아 공동자원으로 이용하면서, 각 사람의 필요를 채웠습니다. 함께 예배하고 식사하며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식사 때마다 즐거움이 넘쳐흘렀습니다(행2:44-45, 4:32-35). 성령의 강림으로 말미암아 태동된 처음 교회의 존재양식은 그러했습니다. 내 것, 네 것의 경계가 허물어졌습니다. 존재 양식의 혁명이 일어난 것입니다. 다 주어도 아깝지 않고, 다 받아도 부담스럽지 않은 관계의 혁명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들은 본래 남남이었습니다. 부자는 부유한 대로 살았고, 가난한 자들은 가난한 대로 살았습니다. 남의 슬픔은 남의 슬픔일 뿐이었고, 남의 배고픔은 남의 배고픔일 뿐이었습니다. 동정하는 마음이야 있었겠지만 그뿐이었습니다. 남과 나의 경계는 결코 침범해서는 안 되는 절대 영역이었습니다. 그런데 처음 교회 안에서 그게 무너졌습니다. 남과 나를 가로막고 있던 담이 무너졌습니다. 예수로 말미암아, 예수 안에서, 예수 때문에 중간에 막힌 담이 무너졌습니다. ‘남’이 ‘님’으로, ‘그것’이 ‘너’로 바뀌는 관계의 혁명이 일어났습니다. 예수 안에서 모두가 가족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신 한 가족이 된 것입니다.

물론 가족도 싸웁니다. 가족도 환난을 겪고 고통도 당합니다. 가족이라고 해서 어려움과 미움과 싸움과 아픔이 없는 것 아닙니다. 어떤 면에서는 가족이기 때문에 더 치열하게 싸우기도 하고, 또 가장 많은 상처를 받기도 합니다. 그리고 가족도 다 독립된 개체들이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어머니도 한 사람의 독립된 개인이고, 아버지도 한 사람의 독립된 개인이고, 자녀들도 다 독립된 개인입니다. 자녀라고 해서 부모 마음대로 자라주지 않습니다. 부모의 희망과는 상관없이 독립적인 존재로 자랍니다. 또 가족이라도 개성이 다르고, 기호가 다르고, 취미가 다르고, 삶의 문법도 다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들 독립된 개체들이고 때로는 싸우고 미워함에도 불구하고 가족은 여전히 다 주어도 아깝지 않고, 다 받아도 부담스럽지 않습니다. 네 것, 내 것의 경계가 없습니다. 바로 이것이 가족 공동체만의 독특한 특성입니다. 가족 외에는 절대 모방할 수 없는 가족만의 특성입니다.

 

하나님의 가족인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 구성원들의 생각이 피차 다르고, 개성이 다르고, 삶의 문법이 다르고, 경제적인 환경이 다르고, 사회적인 위치도 다르고, 정말 모든 것이 다릅니다. 그래서 때로는 피터지게 싸우기도 하고,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받기도 하고, 관계에 틈이 벌어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절대 변할 수 없는 진실이 있습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가족이라는 사실입니다. 비록 우리 모두가 죄인이고 연약하기 그지없기 때문에 가족이라는 특성을 제대로 살려내지는 못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가 하나님의 가족이라는 사실은 변할 수 없습니다. 교회는 언제든지 다 주어도 아깝지 않고, 다 받아도 부담스럽지 않은 하나님의 가족이고, 하나님의 가족이어야 합니다. 성도들 간에, 목회자와 성도들 간에, 교회와 교회 간에 때로는 싸우기도 하고, 토라지기도 하고, 어느 때는 미워하기도 하지만 필요한 상황이 벌어지면 다 줄 수 있어야 하고, 다 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 간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있으면 간을 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교회입니다. 하나님의 가족입니다.

밉다고 등 돌리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한 번 싸웠다고 찢어지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미워도 다시 한 번 참고 안아주는 것이 가족 아닙니까? 또 한 번 용서하고 받아주는 것이 가족 아닙니까? 용서와 용납이 없이는 절대 가족 됨을 이룰 수 없습니다. 더욱이 교회는 그냥 가족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가족,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신 한 가족입니다. 아버지이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야 하는 아주 특별한 가족입니다. 이런 가족은 세상 어디에서도 볼 수 없습니다. 오직 교회 안에서만 볼 수 있고, 교회 안에서만 가능한 아주 특별한 가족입니다. 그리고 교회가 하나님의 가족됨을 이룰 때 교회는 비로소 교회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나라의 지상 식민지일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교회의 교회됨은 하나님의 가족됨에 있습니다.

 

사람이 사람으로 태어나서 한 평생 사는 동안 가장 위대한 도전은 사람이 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람이 되는 것보다 더 멋진 일, 더 위대한 도전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사람이 성공하는 것도 중요하고, 부자 되는 것도 중요하고, 교양과 지식을 많이 쌓는 것도 중요하고, 행복하게 사는 것도 중요하지만 사람이 되는 것이 가장 중요하고 근본적인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교회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교회가 해야 할 일이 참 많지만 교회 되는 일보다 더 중요하고 근본적인 일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젖 먹던 힘까지 동원해도 사람 되는 게 어렵듯이, 교회가 된다고 하는 것은 정말 어렵고도 힘든 도전입니다. 내 간을 떼어서 형제에게 줄 각오가 없이는 할 수 없는 도전입니다. 더욱이 교회가 되는 일은 그리스도인의 의지와 훈련으로 실현할 수 없습니다. 신앙교육으로 실현할 수 없습니다. 그런 것들이 필요 없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그런 것만으로는 안 된다 그 말입니다. 네 것, 내 것의 경계가 없는 하나님의 가족이 되는 일은 성령의 은혜가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정말입니다. 교회가 된다고 하는 일은 교회가 아무리 노력한다 해도 턱없이 부족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교회는 교회 되는 일에 도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가족 되는 일에 최우선순위를 두어야 합니다. 그리고 정말 그런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이 교회 되는 일에 조금이라도 방해되는 것이 있는지를 예민하게 살피고 삼가는 자기 훈련을 해야지요. 서로의 연약함을 품어주고, 서로의 다름을 인정해주고, 서로의 죄를 용서하기 위해 자기 혀를 깨물어야 합니다. 또 필요하면 네 것, 내 것의 경계를 뛰어넘어 나눌 수 있어야 합니다. 편안하게 주고, 편안하게 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나라가 어떤 나라인지를 알지 못하는 이 세상에 ‘이것이 하나님나라’라고 보여줄 수 있어야 합니다. 비록 실현 불가능한 일이긴 하나, 그것만이 세상을 위한 교회의 책무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