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엘 오스틴의 [긍정의 힘], 가히 폭발적이다. 젊고 밝은 그의 모습처럼 그의 이야기도 상큼하고 발랄하다. 희망과 긍정에 대한 지칠 줄 모르는 힘이 느껴진다. 그의 이야기는 정녕 삶에 지친 자들, 상처로 인해 내적 음울함에 빠진 자들에게 치유와 회복의 메시지가 될 것이다. 내일을 새롭게 꿈꾸는 자들에게 새로운 도전의 에너지원이 될 것이다. 현재에 안주하는 자들에게 채찍이 될 것이다. [긍정의 힘]에는 분명 많은 미덕이 있다. 그러나 진실을 호도하는 심각한 문제가 있다.

 

1. 부정 대 긍정

 

그는 말한다. 생각을 바꾸지 않는 한 인생은 절대 바뀌지 않는다고. 인생을 바꾸고 싶으면 먼저 생각을 바꾸라고. 부정적인 생각은 지워버리고 긍정적인 생각으로 내면을 꽉 채우라고. 옳다. 생각을 바꾸지 않으면 인생은 바뀌지 않는다. 사람은 생각의 지배를 받는다. 그 사람의 생각이 곧 그 사람이다. 생각이 중요하다. 월트 디즈니가 디즈니랜드를 하게 된 것도 하나의 생각 씨앗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내 딸들이 어렸을 때, 일요일이면 종종 유원지에 데려 가곤 했다. 아이들이 노는 동안 벤치에서 무료하게 땅콩을 까먹으며 생각했다. ‘어른들도 함께 즐길 수 있을만한 장소는 없을까?’ 그 생각을 실현시키는데 약 15년 정도가 소요되었다. …… 디즈니랜드는 아이들만을 위해 짓지 않았다. 사람들은 언제부터 아이가 아닌걸까? 어른에게서는 동심이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고 단정해서 말할 수 있을까? 좋은 오락거리가 있다면 젊은이와 노인, 그 누구라도 흥미를 느낄 수 있다고 믿는다. 부모와 아이들이 함께 즐겁게 지낼 수 있는 곳, 어른들끼리만 와도 신나게 지낼 수 있는 곳, 나는 디즈니랜드를 그런 장소로 만들고 싶었다.”(꿈을 이루는 성공 메시지. 15쪽).

그렇다. 생각 하나가 디즈니랜드를 만들었다. 생각이 중요하다. 조엘 오스틴이 강조하는 것처럼 내면의 힘, 생각의 힘, 비전의 힘이 굉장한 게 사실이다. 하지만 생각과 믿음의 힘에는 한계가 있다. 내면의 힘이나 생각의 힘만으로는 극복되지 않는 문제가 있다. 그런데 그는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의 비전에는 한계가 있을 수 없다.”고 강변할 뿐 한계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겸허함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

 

더 이해하기 어려운 게 있다. 그는 부정적인 생각과 긍정적인 생각을 지나칠 정도로 대립시킨다. 부정과 긍정은 정말 대립적인 것일까? 삶이 그렇게 단순할까? 삶이란 한없이 복잡하다. 삶은 언제나 변증법적으로 존재하지 대립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물론 부정과 긍정은 일차적으로 대립한다. 그러나 대립으로 끝나지는 않는다. 부정과 긍정의 대립은 새로운 합일로 나아간다. 밤과 낮을 보라. 빛은 어둠을 몰아내고 어둠은 빛을 삼킨다. 둘은 대립한다. 하지만 어둠이 빛을 삼키지 않으면 새로운 아침은 오지 않는다. 또 빛이 어둠을 몰아내지 않으면 새로운 밤은 찾아오지 않는다. 부정적인 생각과 긍정적인 생각도 마찬가지다. 부정적인 생각은 긍정적인 생각을 통해서 교정되고, 긍정적인 생각은 부정적인 생각을 통해서 심화된다. 만사가 그렇다. 모든 긍정은 부정을 통해서만 새로운 긍정으로 나아가고, 모든 부정은 긍정을 통해서만 새로운 부정으로 나아간다. 부정이 없는 긍정, 긍정이 없는 부정은 새로운 미래를 열어가지 못한다. 이내 곧 고착화되어 죽고 만다.

조엘 오스틴은 변증법적인 삶의 현실을 외면했다. 아니, 외면했다기보다는 아예 보지 못했다고 하는 것이 옳겠다. 하여, 그는 지나칠 정도로 긍정과 부정을 대립시키고 있다. 그는 말한다. 긍정적인 생각을 품은 인생은 긍정적인 방향으로 흘러가고, 부정적인 생각에 사로잡혀 있는 인생은 꼬이게 마련이라고. 일리가 있다. 삶에는 그런 경향성이 분명히 있다. 하지만 앞에서 말한 대로 부정을 거부하는 그의 긍정은 매우 위태로워 보인다.

 

2. 믿음대로 된다?

 

그는 생각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에서 한 걸음 더 나간다. 믿음대로 된다고. 생각대로 된다고. 그러니 더 큰 꿈, 더 큰 비전을 품으라고. 불가능한 일을 가능케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바라보라고.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믿기만 하면 하나님은 알아서 돌보고 해결해 주신다고. 우리는 단지 인생의 큰 비전을 품고 믿음과 기대로 살면 된다고. 그는 쉬지 않고 말한다. 하나님은 기대한 만큼 복을 주신다고, 현재를 불평하지 말고 믿음의 눈으로 내일을 꿈꾸라고. 하나님의 창고는 보화로 가득하니 기대 수준을 높이라고. 제발 “메뚜기 정신”을 버리고 “할 수 있다”는 마음을 품으라고. 약점을 보지 말고 하나님을 바라보라고. 위대한 생각은 위대한 현실을 낳는다고. 긍정적으로 생각하라고. 우리가 마음을 바꾸면 하나님은 우리 삶을 바꿔 주신다고.

그의 이야기를 듣다보면 참 믿음이 대단하다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그런데 나는 전혀 그런 생각이 들지 않는다. 그가 하는 모든 이야기를 들어보면, 이건 믿음이 아니라 ‘믿음 중독증’ 내지 ‘믿음 강박증’에 걸린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믿음이 무엇인가?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다. 그 신뢰 속에서 삶의 중심에 들어가는 것이다. 믿음은 하나님을 닦달하는 것도 아니고, 하나님의 약속 몇 가지를 붙잡고 자가발전하는 것도 아니다. 성경이 말하는 믿음에는 엔진이 없다. 그런데 우리들은 자꾸만 믿음에 엔진을 장착하고 싶어 한다. 그것도 성능이 좋은 엔진을 달고 싶어 안달한다. 성능이 좋은 엔진을 달아야 믿음으로 더 위대한 성공 가도를 달릴 수 있다고 믿기에 말이다. 그러나 꼭 기억하자. 엔진이 장착된 믿음은 다 가짜다. 참 믿음엔 엔진이 없다. 조엘 오스틴이 최고 성능의 믿음 엔진을 장착한 것처럼 보이는 것에 현혹되어서는 안 된다.

또한 그는 하나님을 왜곡하고 있다. 하나님은 기대한 만큼의 복을 주시는 분이라고. 우리의 믿음대로 행하시는 분이라고. 전혀 아니다. 하나님은 절대 그런 분이 아니시다. 하나님은 준비된 만큼 주실지 모르나 기대한 만큼 주지는 않는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그건 하나님의 자유다. 하나님은 그 무엇에도 종속당하지 않으신다. 우리의 믿음에도.

 

3. 더, 더, 더(More)

 

그의 책을 읽다보면 빈번하게 등장하는 용어들이 금방 눈에 띈다. ‘더 큰’, ‘더 많은’, ‘더 대단한’, ‘더 높은’, ‘더 위대한’, ‘더 멋진’, ‘더 큰 꿈’, ‘더 큰 비전’, ‘승자’, ‘세계 최고’, ‘현재에 만족하지 말라’, ‘현재에 안주하지 말라’, ‘바꾸라’ 등등이다. 나는 이런 언어들을 보면서 예수님의 언어가 생각났다. ‘마음을 비우라’, ‘낮아지라’, ‘꼴찌가 되라’, ‘죽어라’, ‘주어라’, ‘소유의 넉넉함에 생명이 있지 않다’,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 어렵다’ 등등. 확인한 것처럼 조엘 오스틴의 언어와 예수님의 언어가 달라도 너무 다르다. 주님은 단 한 번도 더 크고, 더 많고, 더 위대하고, 더 높은 것을 꿈꾸라고 말씀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런 것들을 경계하라고 했다. 그런데 조엘 오스틴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예수님이 하지 않은 말들을 쏟아내고 있다. 예수님뿐 아니라 동서양의 모든 지혜자들도 ‘더, 더, 더’가 모든 불행의 원인이요 삶을 해치는 원흉이라 했는데 조엘 오스틴은 시종일관 ‘더, 더, 더’를 외친다. 바울은 현재에 자족한다고 했는데 조엘 오스틴은 현재에 만족하지 말라고 다그친다. 그리고 이처럼 다름에도 불구하고 예수를 안다고 하는 그리스도인들조차 조엘 오스틴의 말에 열광한다. 왜일까? 왜 이런 말도 안 되는 일들이 벌어지는 것일까? 그것은 그의 메시지가 사람들의 마음속에 들끓고 있는 욕망-남보다 더 크고, 더 높고, 더 많은 것을 차지하고자 하는 욕망을 세련되고 멋지게 자극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의 불타는 욕망을 믿음의 엔진에 연결시켜주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메시지를 정직하게 말하지 않기 때문이다.

 

4. 세계, 하나님의 긍정과 부정

 

앞에서도 말했지만 [긍정의 힘]에는 많은 미덕이 있다. 긍정의 눈을 가지고 인생을 살아가는 것은 매우 훌륭한 태도다. 사실 세상은 긍정의 힘에 휩싸여 있다. 아니, 세상이 바로 하나님의 긍정의 산물이다. 아무 것도 없지 않고 무엇인가가 있는 것은 ‘하늘과 땅이여! 있으라!’ 하신 하나님의 긍정 명령이 있었기 때문이다. 또 그 모든 것들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는 것 역시 하나님의 긍정의 힘이 붙들고 계시기 때문이다. 내가 세상을 긍정하게 된 것도 하나님의 창조를 알고 나서였다. 하나님과 그분의 창조를 알기 전까지 세상은 나에게 전적 타자였다. 나도 세상에 말을 걸 수 없었고, 세상도 나에게 말을 건넬 수 없었다. 나는 나, 세상은 세상일 뿐이었다. 하지만 하나님을 알고 난 후 달라졌다. 모든 것이 그분의 피조물로 다가오면서 나와 세상의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온 세상과 삶이 하나님의 선물이었다. 그 무엇도 선물 아닌 게 없었다. 세계와 삶을 긍정하게 되었다. 감사하게 되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나의 긍정은 흔들린 적이 없다. 단 한 번도 세상을 원망하거나 적대시한 적이 없다. 비록 어둠과 죄악이 관영한 세상이요 부족한 것투성이인 세상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의 아름다움을 외면한 적이 없고, 세상을 향한 감사와 애정을 잊어본 적이 없다.

하나님의 창조와 사랑은 세상에 대한 위대한 긍정이다. 진실로 온 세계는 하나님의 긍정인 사랑에 휩싸여 있다. 그분의 손길이 미치지 않는 곳 없고, 그분의 눈길을 받지 않는 것 없다. 그분은 주무시지도 않으시고 졸지도 않으시며 온 세계를 돌보신다. 어디 그뿐인가. 그분은 마침내 죄인의 몸을 입으시고 피조 세계 속으로 들어오셨다. 죄 많은 세상을 차마 부정할 수 없어서, 세상을 향한 긍정을 결코 포기할 수 없어서 세상을 만드신 분께서 친히 세상이 되셨다. 하나님의 성육신은 세상에 대한 최고의 긍정이다. 하나님의 성육신과 십자가의 죽음, 그리고 부활보다 더한 긍정은 없다.

 

혹자는 하나님의 심판을 떠올릴지 모르겠다. 심판의 메시지야말로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부정이 아니냐고 말이다. 이스라엘과 열방을 심판하신 하나님은 온 세계를 심판하실 것이라고 말이다. 옳다. 하나님은 공의로운 재판장이시다. 하지만 나는 그분의 심판을 세상에 대한 부정으로 읽지 않는다. 하나님의 심판은 언제나 세상에 대한 긍정이었지 부정이었던 적이 없었으니까. 그분의 심판은 언제나 사랑의 행위였으니까. 물론 피상적으로 보면 파괴처럼 보일 수 있다. 바벨탑 사건, 노아 시대의 홍수 사건, 소돔과 고모라 사건에서처럼 부정과 저주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하나님의 심판은 단 한 번도 파괴나 저주였던 적이 없다. 하나님의 파괴는 언제나 새로운 창조의 전희였고, 치유와 구원의 전주였다. 남아 있는 심판 또한 창조의 현실을 새하늘과 새땅으로 재창조하는 것임이 분명하다(계21:1-5). 그렇다. 하나님의 심판은 언제나 부정을 통한 긍정이었고, 세상을 긍정하기 위한 사랑의 개입이요 위대한 봉사였다. 하나님에겐 긍정만 있지 부정은 없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하나님의 긍정은 인간의 긍정과 부정을 넘어선다고 해야겠다. 하나님의 모든 행위는 사랑 아닌 것이 없고, 부정을 통해서 긍정을 이끌어내시니 말이다. 하여, 나는 한 번도 하나님의 긍정을 의심한 적이 없다. 아니, 세상을 긍정하는 것 외에 달리 선택할 것이 없었다. 하나님의 긍정인 세상, 그분께서 창조하시고 사랑하시고 다스리시는 세상을 내가 무슨 권리로 부정한단 말인가? 어떻게 부정의 눈으로 볼 수 있단 말인가? 모든 것이 그분의 선물인데, 모든 것을 다 받았는데, 어떻게 긍정의 눈으로 보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피조물인 주제에 말이다.

세계는 “있으라”는 하나님의 긍정 명령의 산물이다. 그러나 세계의 현실을 향해서는 긍정 명령만 하지 않았다. “하지 말라”는 부정 명령도 하셨다. 부정 명령은 타락 이후에 등장한 게 아니다. 타락 이전에도 부정 명령이 있었다. 선악과를 먹지 말라는 부정 명령 말이다. 비록 세상이 존재하게 된 것은 긍정 명령을 통해서였지만, 부정 명령이 없이는 그 존재가 지속될 수 없기에 하나님은 부정 명령을 하셨다. 바로 이것이 세계의 현실이요 인간의 현실이다. 타락 이후는 말할 것도 없다. 하나님은 부정 명령을 하셔야만 했다.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 우상을 섬기지 말라.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남의 것을 탐내지 말라. 그렇다. 하나님은 긍정 명령과 부정 명령을 통해 세상을 다스리고 계신다.

 

한 걸음 더 들어가 보자. 하나님의 부정 명령은 과연 부정이기만 할까? 아니다. 하나님의 부정 명령은 결국 긍정을 위한 것이다. 피조물의 현실, 죄로 오염되어 있는 세상을 보호하고 구원하는 진정한 긍정을 위해 “하지 말라”는 부정 명령을 하신 것이다. 우리의 생명과 삶의 긍정을 위해 부정 명령을 하신 것이다. 예수님은 세상을 긍정하신 분이다. 몸을 입고 세상 속으로 오신 것보다 더한 긍정은 없다. 그분은 모든 사람을 품에 안으셨다. 그분이 품을 수 없는 사람이나 세상은 없었다. 그분은 목자 없는 양 같음을 인하여 아파하셨다. 예수님의 실로 위대한 긍정의 품을 가지신 분이었다. 그러나 그분만큼 냉엄하게 세상을 비판하고 꾸짖으신 분도 없다. 그분은 세상을 긍정하셨지만 긍정적으로 보지는 않으셨다. 그렇다고 부정적으로 보았다고 할 수도 없다. 그분은 긍정적이지도 부정적이지도 않았다. 그분은 언제나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았을 뿐이다. 이것이 진리의 인식이다. 세상을 긍정하면서도 긍정적으로 보지 않고, 세상을 비판하고 심판의 메시지를 선포하면서도 부정적으로 보지 않는 것, 이것이 예수님의 시선이었다. 예수님은 한 번도 삶을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바라보라고 말씀하지 않으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