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는 교회를 위해 존재하지 않습니다. 교회는 세상을 위해 존재합니다. 이건 모든 교회가 동의하는 문제입니다. 세상을 위하는 방식에 있어서는 진보적인 교회와 보수적인 교회 사이에 차이가 좀 있습니다만, 세상을 위해 존재해야 한다는 원칙에 있어서는 차이가 없습니다.

 

사실 세상은 몰라보게 좋아졌습니다. 우리는 지금 우리 스스로도 꿈꾸지 못했던 찬란한 기술사회를 살고 있습니다. 개인의 권리는 하늘을 찌르고, 넘치는 시장은 지구촌을 뒤덮고 있습니다. 기근과 문맹은 줄어들고, 각종 차별도 점차 완화되고 있습니다. 지구촌의 절대 다수가 충분한 혜택을 누리는 것은 아니지만 역사는 긍정적인 방향으로 발전해왔습니다. 하지만 세상은 여전히 죽음이라는 절대한계 안에 갇혀 있습니다. 세상의 겉모습, 생활의 겉모습은 달라졌지만 사회의 기본 속성은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사악한 죄성을 포장하는 기술이 세련되었을 뿐이지 먹고 먹히는 정글의 법칙은 여전합니다. 부자와 가난한 자 사이의 골은 깊어만 가고 있고, 사회적인 신분의 계층화는 심화되거나 고착되고 있습니다. 예전에는 개천에서도 용이 났지만, 지금은 개천에서 용이 나오기 어려운 세상이 되었습니다. 사적인 폭력과 공적인 폭력도 여전합니다. 세상은 정녕 좋아졌는데 본질적으로는 변한 것은 없습니다.

 

왜일까요? 왜 세상은 좋아졌는데 사는 건 여전히 힘들고 피폐한 것일까요? 세상이 돌아가는 본성과 구조에 변화가 없기 때문입니다. 여전히 죄에 오염되어 있고, 헛된 우상을 따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한쪽에서는 열심히 땜질을 하고 있지만 다른 쪽에서는 더 큰 구멍이 뚫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땜질이 필요합니다. 삶의 질을 좀 더 인간적으로 개선하기 위해 자유와 인권을 향상시키고, 폭력을 추방하고, 기근과 문병을 퇴치하고, 각종 차별을 철폐하고, 사악한 공권력을 근절시킬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은 모든 인간의 도덕적 의무요 책임입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세상의 본성은 건드리지 않은 채 부분적인 것들을 개선하는 것 가지고는 부족합니다. 여기저기 땜질하는 것으로는 세상을 치유할 수 없습니다. 땜질을 하면 할수록 땜질 자국만 커질 뿐이란 걸 우리는 그동안의 역사적 경험을 통해서 알고 있습니다. 땜질은 세상의 대안이 될 수 없고, 희망이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구멍 난 세상을 땜질하는 것으로는 만족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개선하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새롭게 재창조하기를 원하십니다. 현재의 세계와 연속성이 있으면서도 불연속성이 있는 세계, 하나님의 의로운 통치가 현실화되는 세계를 만드시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바로 그 일을 성취하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세상보다 좀 더 나은 삶이 아니라 세상과는 차원이 다른 삶, 우상숭배로부터 해방된 삶을 살게 하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세상 죄를 짊어지셨습니다. 부활하셨습니다. 그리고 죄인을 불러 당신의 백성 삼으셨습니다. 그 백성을 통해 세상의 현실과는 다른 현실을 보여주기 위해서 말입니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요, 교회를 향한 뜻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교회는 세상을 땜질하는 곳이어서는 안 됩니다. 교회는 세상 속에 있는 하나님나라의 식민지이어야지 세상을 개량하는 일에 만족해서는 안 됩니다. 교회는 세상을 위해 정말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사실 교회가 된다고 하는 것이 매우 진부해보이고 미미해보일 수 있습니다. 교회가 되는 것으로 어떻게 세상을 바꿀 수 있겠는가 하는 회의적인 생각이 들 수도 있습니다. 세상이 얼마나 독하고 무서운지를 모르는 못한 순진한 생각이라고 무시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지혜는 다릅니다. 하나님은 오직 교회를 통해서만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다. 하나님에게는 교회만이 유일한 대안입니다. 물론 구약시대의 이스라엘도 실패했고, 신약시대의 교회도 실패의 길을 걸어왔습니다. 또 하나님은 교회 안에서만 일하시거나, 교회를 통해서만 일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교회 밖에서도 일하십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여전히 교회 외의 다른 대안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왜일까요? 왜 교회만이 대안인 걸까요? 교회라는 게 그럴만한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보통 교회를 그렇고 그런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람들 모여서 예배드리고 착한 일 좀 하면 교회 아니냐고 생각합니다. 아닙니다. 바울은 교회를 가리켜 그리스도의 몸이라 했습니다. 하나님의 가족이라 했습니다. ‘몸’, ‘가족’, 정말 대단한 표현입니다. 이 표현 속에는 정말 엄청난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세상의 그 어떤 혁명보다도-프랑스혁명이나 러시아혁명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근원적이고도 위대한 혁명 프로그램 즉, 생활 방식의 혁명, 관계의 혁명 프로그램이 들어 있습니다. 지난번에 말씀드렸다시피 ‘가족’이라는 것은 모든 것을 다 주어도 아깝지 않고, 모든 다 받아도 부담스럽지 않은 관계입니다. 네 것, 내 것의 경계가 없는 관계입니다. 본래 남남이었던 사람들이 다 주어도 아깝지 않고, 다 받아도 부담스럽지 않은 가족이 된다는 것, 이 얼마나 엄청난 사건입니까? 이 사건이야말로 진짜 급진적이고 철저한 최상의 혁명 아닙니까? 프랑스혁명이나 러시아혁명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진짜 혁명 아닙니까? 그렇습니다. 교회가 된다는 것 속에는 이런 엄청난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요 하나님의 가족이라는 표현은 단지 미사여구가 아닙니다. 그 속에는 가장 급진적이고 철저한 사회혁명 프로그램, 관계혁명 프로그램, 생활방식혁명 프로그램이 들어 있습니다. 세상에서 교회가 되는 것보다 더 위대하고, 더 급진적이고, 더 철저한 혁명은 없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가족이 된다고 하는 것은 사람의 의지나 교육으로 되는 일이 아닙니다. 법이나 제도를 정비한다고 해서 가능한 일도 아닙니다. 온 세계가 하나님의 가족이 되는 일은 이 땅에서는 영원히 실현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나 교회는 실현 불가능한 바로 이 일을 위해 부름 받았습니다. 그리고 실현 불가능한 이 일을 할 수 있도록 하나님은 교회에 진리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하여, 바울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교회를 가리켜 진리의 기둥과 터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잠시 ‘진리’에 대해 생각해봅시다. 성경이 말하는 ‘진리’는 이미 결정되어 있는, 절대로 변할 수 없는 어떤 원리가 아닙니다. “만고불변의 진리”, 그것은 성경이 말하는 진리가 아닙니다. 성경이 말하는 진리는 오직 하나님 자신일 뿐입니다. 하나님은 원리가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만고불변의 원리에 붙잡혀 있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자유의지를 행사하시는 자유의 영이십니다. 그리고 자유의 영이신 하나님만이 진리이십니다. 진리가 하나님은 아니지만 하나님은 진리이십니다. 그리고 교회는 바로 이 진리의 기둥과 터로 부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진리를 외면하고 거역하는 세상 속에 하나님이 진리이심을 선포하고, 하나님의 진리를 증언하도록 부름 받았습니다. 기둥과 터는 집이 서는 토대요 뼈대입니다. 기둥과 터가 없이는 집이 설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집인 교회도 진리라는 터 위에만, 그리고 진리라는 기둥으로만 세워질 수 있습니다. 진리가 아닌 것으로는 절대 교회를 세울 수 없습니다. 진리의 터가 아닌 곳에 세워진 교회, 진리의 기둥이 아닌 다른 기둥으로 세워진 교회는 교회일 수 없습니다. 오직 진리의 터 위에 서고, 진리의 기둥으로 세워진 교회만이 주님의 교회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 한국교회는 어떻습니까? 진리의 기둥과 터라 할 만합니까? 다 아는 것처럼 교회를 통해 진리를 듣는다는 게 거의 불가능한 상황입니다. 사람들이 교회를 통해 진리를 들을 수 있을 거라는 기대조차 거의 하지 않고 있습니다. 교회는 지금 전대미문의 경쟁 시대를 맞아 목회자 간에, 또 교회 간에 제로섬 게임을 하느라 정신이 없습니다. 기업들이 세계 시장을 놓고 죽음 같은 경쟁을 벌이듯이, 교회도 종교 시장에서 불꽃 튀는 경쟁을 하고 있습니다. 목사들도 죽을 맛입니다. 경쟁력이 없으면 낙오하니까, 사람들의 구미에 맞는 종교 상품을 내놓지 않으면 교회 문을 닫아야 하니까, 또 교회를 효율적으로 운영하는 경영 기법을 배워야 하니까, 이런저런 세미나를 찾아다니면서 경쟁력을 높이느라 쉴 틈이 없습니다. 자연히 믿음은 부와 성공을 쟁취하는 도깨비 방망이가 되어버렸고, 믿음으로 부와 성공을 거머쥔 자들은 하나님의 축복을 증언하는 홍보 대사로서 뜨거운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습니다. 여기저기 간증하러 다니느라 바쁩니다. 성도들은 자유의 영인 성령의 사람으로 세워지기보다는 축복으로 도색된 복음 증거의 전사로 동원되거나 영적인 소비자만 되어도 충분한 이중 구조에 빠져 버렸습니다.

 

왜 일까요? 진리의 기둥과 터이어야 할 교회가 왜 종교 시장으로 변해버린 것일까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가 왜 제로섬 게임을 해야 하는 경쟁체제로 전락한 것일까요? 두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진리를 잃었기 때문입니다. 교회에만 허락하신 특별한 은총인 말씀을 잃었기 때문입니다.

교회와 목사의 일차적인 사명은 하나님의 말씀을 정직하게 듣는 것이고, 그 말씀을 정직하게 선포하는 것입니다. 교회와 목사는 하나님의 진리를 말하는 입으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교회와 목사는 말씀을 정직하게 듣고, 그 말씀을 정직하게 증언하는데 목숨을 걸어야 합니다. 칼이 위협해도 진리를 왜곡하거나 허투루 이야기해서는 안 됩니다. 교회와 목사의 유익을 위해 말씀을 왜곡하거나 호도하면 안 됩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와 목사들은 이 일을 가볍게 생각하고 심히 게을리 하고 있습니다. 물론 종교적인 업무에는 매우 열심입니다. 새벽기도부터 주일 예배, 수요예배, 금요기도회, 각종 심방과 상담, 이러저런 회의 참석등 목회적인 일들을 하느라 정말 눈코 뜰 새가 없습니다. 새벽기도도 목사에게는 업무일 뿐이지 조용히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시간이 아닙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목사가 새벽기도 인도하는 것을 별로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또 목사가 새벽기도 시간까지도 설교해야 하는지, 성도들도 새벽기도까지 나와서 설교를 들어야 하는지, 저로서는 의문입니다. 기도하고 싶은 성도들은 자발적으로 나와서 기도하고, 목사도 조용히 기도에 전념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목사에게 가장 큰 죄는 바쁘게 사는 것입니다. 목사는 바쁘면 안 됩니다. 이런저런 일로 바빠지기 시작하면 진리에서 멀어지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일을 하지 않고 목사의 일을 하게 되기 때문에, 하나님나라의 복음 증언하는 일을 하지 않고 교회 부흥시키는 종교 사업을 하게 되기 때문에, 고요히 구도의 길을 가지 않고 교회 정치에 맛들이게 되기 때문에, 목사가 바쁘게 사는 것은 가장 큰 죄입니다. 그렇습니다. 목사가 진리의 말씀에서 멀어지면 종교의 길을 가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이 아니라 목사의 일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지금 제가 하나님의 일과 목사의 일을 구분했습니다만, 하나님의 일과 목사의 일은 엄연히 다릅니다. 설교와 관련해서만 보겠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나라의 복음을 증언하는 것입니다. 반면에 목사의 일은 교회를 부흥시키기 위해 말씀을 요리하는 것입니다. ‘말씀 증언’과 ‘말씀 요리’, 이 둘이 비슷한 것 같지만 사실은 전혀 다릅니다. 말씀을 증언하는 것은 말씀이 나를 붙잡아 나를 사용하는 것이고, 말씀을 요리하는 것은 내 필요에 따라 내가 말씀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보기에는, 많은 목사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증언한다고 하고 있습니다만 깊이 들여다보면, 교회 성장을 위해 말씀을 요리하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기보다는 목사의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목회의 개념도 많이 변질되었습니다. 목회란 본래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에 붙잡혀 증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에는 성도를 관리하고 교회를 부흥시키는 것이 목회가 되었습니다. 성도들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고, 목회자들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종교 시장의 경쟁체제에서 살아남는 것이 일차적인 목회적 과제가 되어버린 상황에서 대부분의 목회자들이 성장하지 않으면 도태된다는 위기의식에 붙잡혀 있다 보니, 골방에 들어앉아 있을 심리적인 여유도 없고, 말씀을 듣는 일보다는 성도를 돌보고 교회를 성장시키는 일에 달려들게 되었습니다. 세상을 얻기 위해 골몰하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목회는 심리학에 물들고, 긍정의 힘에 물들고, 마케팅에 물들고, 엔터테인먼트에 물들고, 성공과 돈에 물들게 되었습니다. 말씀이 부실해지는 것도 당연한 결과였습니다. 하여, 예배와 설교는 넘치는데, 들을 말씀을 찾지 못해 방황하는 영적 노숙자들은 많아지고 있습니다.

사실 목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당회장실이 아니라 골방입니다. 목사는 혼자 조용히 골방에 앉아서 기도하며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그래야 교회가 진리의 기둥과 터가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집으로 건강하게 서 갈 수 있기 때문에, 목사는 골방 생활을 즐겨해야 합니다. 하지만 목사들은 지나치게 바쁘고 분주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교회 성장에 대한 욕심이 지나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일보다는 목사의 일에 관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한국교회는 어서 빨리 목회의 본질로 돌아가야 합니다. 말씀을 정직하게 듣고, 말씀을 정직하게 증언하는 목회의 본질로 돌아가야 합니다. 말씀의 세계로 들어가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경쟁에서의 승리와 종교적인 일들에 열심인 현재의 목회적 관성에 제동을 걸어야 합니다. 부수적인 일들을 과감하게 줄여야 합니다. 목회를 최대한 단순화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말씀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성경공부 열심히 하자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말씀을 깊이 읽어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성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말씀의 세계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생활을 최대한 단순화해야 합니다. 요즘 사람들은 바쁘게 사는 사람을 능력 많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은근히 부러워합니다. 인사할 때도 ‘요즘 바쁘시지요?’, ‘바쁘신데 죄송합니다.’라는 말을 즐겨 합니다. 그리고 그런 인사를 받는 사람도 은근히 좋아합니다. 목사들도 바쁜 목사가 능력 있는 목사로 대접을 받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은 바쁜 것이 자랑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바쁘게 산다는 것은 세상 욕심이 많다는 이야기이고, 하나님에게 관심이 없다는 이야기이기 때문에, 바쁜 것은 회개해야 할 일이지 자랑이 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작고 소박할수록 좋습니다. 생각은 우주적으로 해야 하지만 생활은 작고 소박할수록 좋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많은 것을 추구하고 높은 것을 지향하지만, 그리스도인은 깊이를 추구하고 낮음에 머무르는 게 좋습니다. 바쁘고 분주하게 사는 것보다 한 템포 느리게 사는 게, 깊이를 추구하며 낮음에 머무르는 게 훨씬 지혜롭게 사는 길입니다. 그리고 깊이를 추구하고 낮음에 머물면 바쁠 이유가 없습니다. 아니요. 바빠지는 걸 스스로 경계하게 됩니다.

물론 먹고 산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닌 줄 압니다. 죽을 시간이 없을 정도로 열심히 살아도 앞서기가 어렵지요. 하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삶의 중심에 들어가면 그런 것들이 부질없다는 걸 알게 됩니다. 승리하는 것보다는 더불어 사는 게 훨씬 아름다운 삶이라는 걸 알게 됩니다. 그래서 성실하게는 살겠지만 치열하게 사는 것은 피하게 됩니다. 치열하게 살다보면 결국은 나도 해치고 너도 해치기 쉬우니까, 치열하게 살다보면 말씀의 세계로 들어가기 어려우니까, 치열하게 사는 것을 피하게 됩니다.

 

정리하겠습니다. 교회가 되는 일은 가장 급진적이고, 가장 근원적인 혁명입니다. 비록 사람의 눈으로 볼 때는 미미해 보이고 도대체 혁명 같아 보이지 않겠지만, 교회가 되는 일은 가장 위대한 사회혁명입니다. 생활방식혁명입니다. 관계혁명입니다. 그리고 이 혁명은 사람의 의지나 구호나 조직적인 힘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교회의 기획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진리와 그 진리에 붙잡힌 자들을 통해서만 이루어집니다. 그러기 때문에 교회는 말씀을 정직하게 듣고, 말씀을 정직하게 증언하는 일에 목숨을 걸어야 합니다. 목회의 최우선순위를 두어야 합니다. 사실 교회가 이 일에 충실하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할 수 있습니다. 다른 것은 할 수 있으면 해야겠지만, 할 수 없으면 안 해도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정직하게 듣고, 정직하게 말하는 것은 목숨 걸고 해야 합니다. 진실로 그렇습니다. 교회와 그리스도인에게 말씀을 정직하게 듣는 일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