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다차원의 세계가 복잡하게 얽혀 있는 복잡계이다. 수천, 수만, 수억 가지 것들이 우리의 존재와 삶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마음을 다잡고 삶을 읽어보려 덤벼보지만 이것이 저것 같고, 저것이 이것 같아서 읽기조차 힘이 들만큼 삶은 참으로 현묘하다. 하여, 많은 이들이 삶 읽기를 포기하고 산다. 대신에 생활의 비법을 찾는데 목을 맨다. 여유돈이 있는 자들은 부동산 투자나 주식 투자의 비법을 알고 싶어 하고, 성공하고 싶은 자들은 인간관계의 비법을 알고 싶어 한다. 아이를 키우는 엄마들은 아이 잘 키우는 비법을 알고 싶어 한다. 하지만 삶의 비법 같은 건 없다. 비법이 있다면 나도 좋겠는데 삶에는 비법이 따로 없다.

 

1. 양자택이(兩者擇二)의 삶

 

이어령 교수가 2008년, 젊은이들에게 헌정한 책 [젊음의 탄생]에서 재미있는 이야기를 했다. □ilk의 네모 안에 글자를 넣어 낱말을 만드는 문제를 제시하면서 M자를 넣으면 Milk가 되고 S자를 넣으면 Silk가 되는 것처럼, 삶이란 것도 결국은 이런 빈칸 메우기와 같다고 했다. 운명처럼 주어진 문자가 있는가 하면, 그 옆에 내 마음대로 써넣을 수 있는 자유로운 여백이 있다는 것이다. 또 재미있는 ‘오리-토끼’ 그림을 통해 삶은 ‘오리냐 토끼냐’의 양자택일(either-or, 냐냐)이 아니라, ‘오리이기도 하고 토끼이기도 하다’의 양자택이(both-and, 도도)의 세계라고도 했다. 그렇다. 삶이란 흑백논리나 양자택일이 아니다. 흑백논리가 비록 명쾌하고 선명하긴 하나 삶은 그렇게 명쾌하거나 선명하지 않다. 삶은 사지선다형 문제지보다 훨씬 복잡하고 다층적이며 미묘하다.

한 사람은 실로 하나의 세계다. 사람마다 기호가 다르고 재미를 느끼는 게 다르다. 사람마다 관심사가 다르고 문제가 다르다. 같은 문제라도 사람마다 접근하는 방식이 다르고 해결책이 다르다. 그런데 만일, 나는 수박이 좋은데 너는 왜 수박을 싫어하느냐고 통박하면 어떻게 되겠는가? 나는 날씬한 사람이 좋은데 너는 왜 통통한 사람을 좋아하느냐고 다투면 어떻게 되겠는가? 사람들이 다들 이런 식이라면 사는 게 얼마나 팍팍하고 힘들겠는가? 한 사람은 하나의 세계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삶은 사람의 숫자만큼이나 복잡하고 다양하다는 것을 인식하고, 삶의 다양성에 눈 떠야 한다. 삶의 지평을 넓혀서 기호의 다양성, 관심사의 다양성, 문제의 다양성, 해결책의 다양성을 인정하고 목소리를 낮춰야 한다. 그래야 모든 사람들이 함께 공존 공영하는 사회를 이룰 수 있다.

 

2. 삶과 생활의 역설

 

옳다. 삶의 지평을 넓히는 일은 평화의 씨앗을 심는 일이다. 사람들의 삶의 지평이 넓어지고 깊어질수록 다양성을 포용하는 역량이 커지고, 다양성을 포용하는 역량이 커질수록 사회의 평화 가능성도 커지기 때문에 삶의 지평은 아무리 넓어도 문제될 것이 없다. 삶의 지평은 넓고 깊을수록 좋다. 하지만 생활은 그렇지 않다. 생활의 폭은 단순하고 소박할수록 좋다. ‘생활’과 ‘삶’은 같지 않다. ‘생활’(生活)은 말뜻 그대로 ‘살아서 활동하는 것’을 의미한다. 먹고 살기 위해 일하는 것에서부터 일상적인 몸의 활동을 총칭한다. 반면에 ‘삶’은 몸의 활동이 아니라 살아가는 일 자체를 뜻한다. 생명의 근원을 호흡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생활이 물리적인 몸(뇌의 신경정신 활동도 포함)의 활동이라면, 삶은 전인적인 존재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생활과 삶이 완전히 다른 것이라고 할 수는 없다. 생활과 삶은 서로 긍정적인 상호작용을 하는 것이 사실이고, 중첩되는 부분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생활과 삶이 이율배반적인 것 또한 사실이다. 생활이 복잡해지고 바빠지면 이상하게도 삶이 뒤틀리고 왜소해지는 반면, 생활이 소박하고 단순해지면 신기하게도 삶이 살아나고 풍성해진다. 사실이다.

나는 산책하기를 좋아한다. 보통은 평탄한 들길을 걷지만, 가끔씩은 야트막한 산에도 오른다. 내가 살고 있는 집은 해발 348미터 높이의 산자락에 자리를 잡고 있어서 30분 정도만 걸으면 정상에 오를 수 있다. 하여, 자주 산에 오른다. 지난 겨울은 유난히 추웠다. 영하 20도까지 내려가는 날이 많아서 산에 가지 못했다. 늦겨울이 되어서야 눈 쌓인 산길을 두세 번 오른 게 고작이었다. 날이 풀리기 시작한 3월부터는 일주일에 한두 번 정도, 5월부터는 두세 번 정도씩 올랐다. 그러던 5월 하순이었다. 그날도 산길을 오르는데, 오르다 보니 어느덧 하늘이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4월 초순까지만 해도 하늘이 훤했었는데, 나뭇잎들이 차오르면서 온통 하늘을 뒤덮고 있는 것이었다. 잎들 사이의 작은 틈으로 하늘이 보이기는 했지만 사람 하나 지나갈 수 있는 작고 침침한 동굴 같은 산길로 변해있었다. 순간 겨울 산길이 생각났다. 비록 앙상하고 추웠지만 하늘이 훤해서 좋았던 겨울 산길. 그리고 스치는 생각 하나가 나를 사로잡았다. ‘아하, 잎을 떨구어야 하늘을 볼 수 있는 거구나. 그래, 잎이 무성하면 하늘을 볼 수 없어.’ 나는 얼른 의식을 일깨웠다. 생각이 그냥 스쳐지나가지 않도록 의식을 일깨우고 마음 판에 새겼다. 그리고 산길을 걸으면서 계속 되뇌었다. 생활의 잎을 더 떨구어야 한다고. 생활이 더 단순해져야 한다고. 그래야 하늘을 볼 수 있다고. 생활에 삶이 밟히지 않을 수 있다고.

 

3. 예수의 생활에 나타나는 놀라운 특징

 

십여 년 전 일이다. 예수님의 삶을 묵상하다가 놀라운 특징 하나를 발견했다. 예수님의 시선(생각)은 우주를 아우르는 데까지 나아갔던데 비해, 예수님의 행동은 지극히 작더라는 것이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그분은 하늘과 땅에 있는 것들을 다 품고 살았다. 시간적으로는 태초부터 세말까지 역사 전체가 그분 안에 있었다. 그러니까 그분의 시선은 언제나 세계적이었고 역사적이었다. 하지만 그분의 생활은 나사렛과 가버나움을 중심으로 한 갈릴리가 고작이었다. 물론 교통수단이 발달하지 못한 탓도 있었겠지만 예수님의 생활반경은 지극히 좁았다. 생활양식 또한 지극히 단순하고 소박했다. 매우 놀라운 발견이었다. 커다란 깨우침이었다. 그 후 몇 년 동안 나는 교회 주보 상단에 표어처럼 새겨놓았다. “시선은 넓게, 생활은 작게, 예수님처럼”

그때의 발견을 나의 졸저 [어느 목회자의 고백]에서 이렇게 정리했다. “예수님은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경외의 대상입니다. 그분의 인격과 삶은 하늘처럼 높고 높아 감히 흉내조차 낼 수 없는 분이십니다. 우리로서는 그저 마음 다해 경외하고 찬양하는 것 외에는 딱히 할 것이 없을 정도로 크신 분이십니다. 나도 예수님을 볼 때면 그분의 탁월한 능력, 허를 찌르는 탁견, 십자가의 수우고한 희생, 하늘 아버지에 대한 절대 순종의 모습을 주로 보아왔습니다. 그런데 나이 40을 넘어선 어느 때 예수님의 삶을 묵상하다가 예수님의 삶 속에 나타난 놀라운 특징 하나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시선은 우주를 아우르는 데까지 나아갔던데 비해 예수님의 행동은 갈릴리를 크게 넘나들지 않을 만큼 작더라는 사실입니다.

볼까요?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실 때 온 세상을 위한 화목제물이 되심으로써 세상을 송두리째 품으셨습니다. 자기 세대만 아니라 오고 오는 세대까지 껴안으셨습니다. 아니, 한 몸으로 창세로부터 종말까지를 끌어안고 사셨습니다. 그분에게는 내가 없었습니다. 가족이 없었습니다. 민족이 없었습니다. 국가가 없었습니다. 종교의 경계가 없었습니다(타종교인을 위해서도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하늘과 땅의 경계가 없었습니다.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이 예수 안에서는 하나였습니다(엡1:10). 제자들에게도 땅 끝까지 가서 증인의 삶을 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진실로 가없는 세계를 한 몸으로 끌어안고 사신 분입니다. 예수님의 눈에 들어오지 않은 세계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행하신 것을 보세요. 회당장 야이로가 병든 딸을 고쳐달라고 간청하는 손길을 내밀 때 마다하지 않으셨습니다(막5:22-23). 죽은 야이로의 딸을 소생시키고서도 그 일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고 엄히 명하셨습니다(막5:43). 물론 사전에 나팔을 분 적도 없으시지요. 자기 존재와 사역을 효과적으로 알리기 위해선 예루살렘 행차라도 하면 좋으련만 부러 오르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의 행동반경을 보면 일상의 테두리를 크게 벗어나지 않으셨습니다. 언제나 소박하고 작았습니다. 예수님의 삶을 보면 사고는 세계적이었지만 행동은 지역적이었습니다. 시선은 넓었지만 생활은 작았습니다. 머리는 하늘을 향했지만 발은 땅을 딛고 사셨습니다. 아마 이 시대에 사신다 할지라도 전용 비행기를 타고 세계를 누비고 다니지는 않으실 것입니다. 전용 비행기를 타고 세계를 누비고 다니며 하나님나라 사역에 바쁜 예수님을 나는 상상할 수 없습니다. 마음과 시선이야 지구촌뿐 아니라 우주촌을 배회하시겠지만 생활은 여전히 지구촌 한 구석에서 이름도 없는 사람들과 함께 이천년 전 갈릴리에서 하셨던 일을 조용히 하시고 계실 것입니다. 나는 그런 예수님의 삶의 특징을 발견하고 마음에 큰 울림이 있었습니다. 그리곤 마음에 깊이 새겼습니다. 나도 예수님처럼 살아야 하겠다고. “시선은 넓게, 생활은 작게, 예수님처럼” 그때 이후로 난 예수님의 삶의 비밀이 능력의 남다름이나 지혜의 비범함에 있지 않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오히려 작은 생활 속에 예수님의 삶의 비밀이 있다는 새로운 진실에 눈을 뜰 수 있었습니다.”(어느 목회자의 고백. 71-72쪽)

그렇다. 예수님은 세상을 위해 세상을 뛰어다니지 않았다. 세상을 위해 세상을 흔들지 않았다. 오직 자기 한 몸을 십자가에 내주었을 뿐이다. 테레사 수녀는 어찌했는가? 세상의 모든 가난한 자들을 품고 살았지만 언제나 정성껏 한 사람을 돌보았을 뿐이다. 오직 한 사람을 돌보는 것, 그것이 온 세상을 품는 가장 확실한 길이었다.

 

4. 단순한 삶

 

일본의 다치바나 다카시는 우주를 여행한 우주 비행사들의 특별한 경험, 지구 밖에서 지구를 바라본 우주 비행사들의 충격적인 경험을 모아 [우주로부터의 귀환]이라는 책을 냈다. 그는 아폴로 7호 비행을 한 우주 비행사 아이즐리의 이야기를 다음과 같이 전한다. “눈 아래로 지구를 보고 있으면 지금 현재 어딘가에서 인간과 인간이 영토와 이데올로기를 위해 피를 흘리고 있다는 사실이 거의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바보 같은 짓처럼 생각된다. 아니, 정말 바보다. 소리를 내서 웃고 싶을 정도로 그것은 바보짓이다...... 차이점으로 보이는 모든 것이 우주에서 보면 아예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다. 그것은 중요하지 않은 차이이다. 우주에서는 중요하지 않은 것은 보이지 않고 본질만 보인다. 표면적인 차이는 모두 날아가 버리고 다 같은 것으로 보인다. 차이는 현상이고 본질은 동일성이다.”(239쪽). 그렇다. 차이인 현상보다 동일성인 본질을 보면 삶은 훨씬 단순해질 수 있다.

미국의 자연주의자 헨리 데이빗 소로우는 다음과 같이 호소했다. “간소하게, 간소하게, 간소하게 살라! 제발 바라건대, 여러분의 일을 두 가지나 세 가지로 줄일 것이며, 백 가지나 천 가지가 되도록 하지 말라.……간소화하고 간소화하라. 하루에 세 끼를 먹는 대신 필요하다면 한끼만 먹으라. 백 가지 요리를 다섯 가지로 줄여라. 그리고 다른 일들도 그런 비율로 줄이도록 하라”(월든. 108쪽).

그리스도의 사도인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권면했다. “친구 여러분, 나는 시간이 아주 중요하다는 점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낭비할 시간이 없으니, 여러분의 삶을 쓸데없이 복잡하게 만들지 마십시오. 결혼생활이든, 슬픈 일이나 기쁜 일을 만나든, 모슨 일을 하든지 단순하게 사십시오. 쇼핑 같은 평범한 일을 할 때에도 그렇게 하십시오. 세상이 여러분에게 억지로 떠맡기는 일은 가급적 삼가십시오.”(고전7:29-31. 유진 피터슨의 메시지).

미국의 레이건 정부 시절, 세계적으로 유명한 군사용 컴퓨터 프로그래머로서 첨단 무기 개발자로 승승장구하던 짐 머켈은 1989년 3월, 역사적으로 악명 높은 엑손 발데즈호 기름 유출 사고 현장을 목도한 뒤 회사를 그만 두고 환경 운동에 뛰어들었다. 그는 모든 생명들이 지속적으로 공존하는 지구촌을 위해 삶의 방식을 근본적으로 전환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의 외침은 이것이다. “Radical Simplicity” 낭만적인 단순함이 아니다. 급진적이고 근본적인 단순함이다. 한 마디로 당신의 생태 발자국을 줄이라는 것이다. 소비를 최소화하라는 것이다. 오직 이것만이 다른 생명에 대해 책임 있는 삶의 방식이라는 것이다. 전 생명이 사는 길이라는 것이다.

단순하고 소박한 삶, 그것은 단지 경제적으로 가난한 삶과는 다르다. 화가이자 작가인 존 레인은 소박함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자발적인 소박함이란 편안하지만 호사스럽지 않은 삶, 소박하지만 쪼들리지 않는 생활, 단아하지만 따분하지 않는 삶을 유지하기 위한 길이다. 그것은 삶과 일, 일상과 예술 사이의 전문가적인 분할을 버리는 것이다.”(언제나 소박하게. 23). 옳다. 단순하고 소박한 삶은 삶과 일의 경계, 일상과 예술의 경계, 생활과 삶의 경계를 넘어선 삶이다. 아니다. 생활보다는 삶에 무게 중심을 두는 것이다.

 

솔직히 한 번 생각해보자. 단순하고 소박한 생활, 우리 모두가 꿈꾸는 생활 아닌가? 때때로 그렇게 살아야 한다는, 그렇게 살고 싶다는 충동을 느끼지 않는가? 얽히고설킨 모든 것들을 훌훌 털어버리고 가볍게 살고 싶은 강한 열망을 느끼지 않는가? 아마도 그럴 것이다. 단순하고 소박한 생활처럼 아름답고 풍성한 삶이 없다는 것쯤은 다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정작 그런 생활을 살지는 못하고 있다. 우리는 바쁨이 자랑이 되어버린 참으로 이상한 세상에서, 참으로 이상한 생활을 하고 있다. 아이들이 드넓은 땅에서 해가 지도록 땅뺏기 놀이를 하듯 살고 있다. 무엇 때문일까? 한 마디로 말하자. 욕심 때문이다. 욕심을 내려놓지 못하기 때문에, 경쟁심으로부터 자유하지 못하기 때문에, 비교 우위에 서야만 직성이 풀리는 알량한 자존심 때문에 단순하고 소박한 생활을 하지 못한 채 종종걸음을 하고 있는 것이다. 땀을 흘리지 말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빌빌거리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가난하게 살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생활의 겉치레를 걷어내고 삶에 집중하자는 이야기다. ‘성공 모드’에서 ‘행복 모드’로, ‘빨리빨리’에서 조금 ‘천천히’로, ‘성급하게’에서 ‘신중하게’로, ‘돌진 앞으로’에서 ‘음미의 여백’으로, ‘살아내기’에서 ‘삶 읽기’로, ‘거대함의 미학’에서 ‘작음의 미학’으로, ‘화려함’에서 ‘소박함’으로 거대한 전환을 꾀하자는 이야기다. 그렇다. 모두가, 모든 생명이 행복하게 사는 길은 단순하게 사는 것이다. 소비를 최소화하면서 간소하게, 간소하게, 간소하게 사는 것이다. 다른 길은 없다. 다른 길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