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나무 앞에서

 

사람이란 존재만으로 만족하지 못하는 동물 같다. 줄기차게 소유와 성취를 향해 내달리는 걸 보면, 그것도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은 것을 성취하고 소유해야만 비로소 웃는 걸 보면, 사람은 나무처럼 존재에 충실하지 못하는 것 같다. 나무는 존재와 삶이 하나다. 사는 것이 곧 존재하는 것이요, 존재하는 것이 곧 사는 것이다. 나무는 여기저기를 들쑤시며 다니지 않는다. 그저 묵묵히 자기 자리에 뿌리를 내리며 일평생을 산다. 바람이 불면 바람을 맞고, 비가 내리면 비에 젖어 산다. 시샘하는 것도 없고 불평하는 법도 없다. 한국의 봄을 수놓는 진달래는 소나무나 플라타너스처럼 키가 크지 않다고 불평하지 않는다. 키 큰 나무들 속에 난장이처럼, 못난이처럼 숨어 있지만 한 번도 소나무가 되겠다며 몸부림치지 않는다. 그저 이른 봄 산을 붉게 물들이는 것으로 만족해한다. 진달래는 목련처럼 꽃잎이 크지도 않고 화려하지도 않지만 진달래만의 멋과 향이 있다. 키 큰 나무들 속에서 피어나기에 오히려 더 아름답다. 모든 나무는 존재에 충실하다. 그러면서도 때가 되면 맛과 향기 가득한 열매를 풍성히 맺는다.

나무를 바라보고 있으면 참 부끄럽기도 하고 부럽기도 하다. 나로서 올곧게 살지 못하는 자신이 부끄럽고, 존재에 충실하면서도 열매까지 풍성한 나무가 참 부럽다. 나도 내 자리를 지키며 곳곳하게 살아야겠다는 나무의 삶을 꿈꾸기도 한다. 그러나 또 다른 마음이 나무의 삶을 살고자 하는 마음을 어지럽힌다. 욕망에 주린 마음이 나무처럼 살고자 하는 마음을 짓밟고, 허기를 채우기 위해 여기저기를 기웃거린다. 하여, 존재가 흔들린다. 필자뿐 아니다. 대부분이 그런다. 존재를 풍성케 할 무언가를 찾아 존재를 끌고 다니기에 바쁘다. 몸은 현재에 있는데 마음과 정신은 과거와 미래를 쏘다닌다. 교실에 앉아 있지만 친구하고 영화 본 생각하고 있는 학생. 밥을 먹고 있지만 눈과 마음은 온통 텔레비전 연속극에 빠져 있는 가족. 산책을 하면서 사업 구상을 하고 있는 사람. 바닷가를 거닐면서 옛 애인을 생각하는 여자. 다들 몸과 마음이 제각각이다. 마음엔 언제나 내일에 대한 염려가 가득하다. 건강을 잃으면 어떡하나, 경제가 어려워지면 어떡하나, 지금 아껴가면서 열심히 저축을 하고 있는데 아파트 값이 오르면 어떡하나, 정말 끝이 없다. 현재 속에 미래가 들어와 있고, 현재 속에 과거가 숨 쉬고 있다.

대학생활도 요즘에는 졸업 후 취업이 어렵다보니, 입학하자말자 취업 때문에 고민하며 취업 준비에 매달리고 있다. 20년 전만 해도 대학생활은 오늘에 충실했었다. 대학생활 자체를 즐겼고, 당시의 사회 문제를 놓고 고민도 하고 데모도 하면서 대학생활에 충실했었다. 그런데 지금의 대학생활은 졸업 후 취업에 붙잡혀 있다. 오늘이 없다. 사실 대학시절은 생각하고, 배우고, 경험해야 할 것들이 정말 많은 때이다. 자아발견, 세상의 평화와 빈부 문제, 신앙의 재정립, 사회의 다양한 이슈들, 새로운 도전과 경험, 깊이 공부해야 할 전공, 젊어서 꼭 읽어야 할 수많은 책들, 홀로 서는 연습, 정말 할 일이 많다. 대학시절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일들, 취업 준비보다 훨씬 중요하고 가치 있는 일들이 많다. 그런데 졸업 후 취업 준비 때문에 대학시절에 해야 할 소중한 일들을 놓치고 있다.

우리의 이런 인생 현실을 꿰뚫어보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 날에 족하니라.”(마6:34). 내일 일을 염려하느라 오늘을 살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피하라고 한다. 내일 염려할 일이 생기겠지만 그렇다고 오늘 당겨서 염려할 것까지는 없다고 한다. 그렇다. 예수님은 내일에 대한 염려에 묶인 오늘을 구원하고자 하셨다. 내일에 대한 염려에서 오늘을 구원하는 것이 삶을 구원하는 첩경임을 아시고 오늘을 구원코자 하셨다. 그런데 우리는 아직도 내일을 염려하느라, 또 내일을 꿈꾸느라 오늘을 살지 못한다. 오늘 만족스럽지 못한 것을 내일은 채우고야 말겠다는 야망으로 부푼 내일이 오늘을 점령하고 있다. 내일을 향해 달리느라 오늘을 놓친다. 몸은 현재에 있는데, 마음은 온통 과거와 미래로 꽉 차있다. 현재가 머물 자리가 없다. 우리의 오늘엔 오늘이 없다.

예수님은 내일 일을 염려하지 말아야 할 배경에 대해서도 말씀하셨다.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다고 말이다(마6:29). 아! 솔로몬! 그는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최대의 호사와 영광을 누린 사람이다. 그런데 그런 솔로몬이 누린 영광도 길가에 피어 있는 꽃 한 송이의 영광에 미치지 못한단다. 정말 대단한 역설이다. 도무지 현실적으로 들리지 않을 만큼 충격적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놀라운 진실이 깃들어 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충분한 세상, 이미 영광으로 가득한 세상, 뭔가를 덧붙이거나 첨가할 필요가 없는 이미 충만한 세상을 주셨다는 진실 말이다. 물론 한없이 부족하고 연약한 것이 많고, 허물투성이인 세상이지만 예수님은 그런 세상 속에서도 이미 충분한 더 큰 세상의 진실, 이미 영광으로 가득한 더 깊은 세상의 진실을 들여다보셨다. 깨어진 영광 가운데에서도 충만한 영광을 보셨다. 솔로몬이 입은 영광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셨다. 하여, 내일 일을 염려하지 말고 오늘에 거하라고, 성취에 목매달지 말고 존재에 충실하라고 말씀하실 수 있었다.

나무 앞에서, 나는 예수님의 음성을 들었다. 오늘을 살라는, 존재와 삶을 통합하라는…

 

2. 삶의 꽃봉오리

 

존재와 삶의 통합은 몸과 마음이 현재에 머물 때에만 가능하다. 그런데 사람은 결정적으로 현재에 머물지를 못한다. 파스칼은 말했다. “우리는 결코 현재에 살고 있지 않다. 우리는 너무 더디게 온다며, 마치 그 속도를 앞당기려는 듯 미래를 갈망한다. 또한 너무 빠르게 지나갔다면서 과거를 되새기기도 한다. 얼마나 진중하지 못하면 이미 우리 손아귀에서 벗어난 시간들 속을 아직도 헤매 다니고, 얼마나 허황하면 있지도 않은 걸 골똘히 생각하고, 존재하는 유일한 것을 아무 생각 없이 회피해버리는지 모른다. 각자 자신의 생각을 정밀하게 들여다보라. 틈만 나면 과거나 미래의 일로 골몰하는 자신을 발견할 것이다. 우린 현재에 대해 거의 아무 생각도 하지 않는다. 과거와 현재를 우리는 대개 수단으로 생각한다. 오로지 미래만이 우리의 목표가 되는 셈이다. 따라서 우리는 결코 살아 있다고 할 수 없으며, 오직 살기를 희망한다고 볼 수밖에 없다.” 그렇다. 사람이 현재에 머물지 못하는 건 동서고금의 보편적인 현상이라고 생각된다.

필자도 몇 년 전부터 현재의 중요성을 깨닫고 현재를 살아보려 했다. 산책 할 때에는 산책하는 것에만 집중하고, 밥 먹을 때에는 먹는 일에만 집중하려 해봤다. 반찬 하나하나에 스며있는 짠맛 매운맛 신맛 단맛을 음미하고, 나물의 향기도 맡고, 밥알 하나 속에 얼마나 많은 수고와 햇빛과 비가 깃들어 있는지를 생각하면서 밥을 먹으려 해봤다. 그런데 그게 생각처럼 되지 않았다. 밥을 씹으면서도 마음은 엉뚱하게 이 일 저 일에 끌려 다니기 일쑤였고, 마음을 단단히 먹고 현재에 집중하다가도 어느 사이 과거와 미래를 쏘다니고 있는 마음을 보곤 했다.

 

우리는 흔히 내일에 대한 꿈이 있어야 현재를 잘 살 수 있다고 말한다. 내일을 위해 오늘을 살아야 내일 발전할 수 있다고 말이다. 옳다. 내일에 대한 꿈이 있어야 현재를 열심히 살 수 있다. 내일을 위해 오늘 준비해야만 내일의 발전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분명히 해야 할 게 있다. 오늘이 내일을 위해 있는 건 아니라는 것이다. 오늘은 오늘을 위해 있을 뿐이다. 오늘이 쌓여서 내일이 되는 것이지 내일을 위해 오늘이 있는 건 아니다. 물론 찰나에 충실하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내일은 잊고 오늘에 파묻혀 살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내일의 꿈을 갖지 말자는 이야기도 아니다. 오늘을 내일의 발판으로 삼지 말자는 이야기이다. 내일을 위해 오늘을 동원하지 말자는 이야기이다. 생각해보라. 내일의 꿈에 집중하고 몰두해서 내일의 꿈을 이룬다 한들, 그 때문에 오늘 경험하고 배우고 누렸어야 할 삶의 선물들을 놓친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우리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이유는 우리의 꿈을 이루기 위함이 아니지 않은가? 성취의 결과물을 내놓고 자랑하기 위함도 아니지 않은가? 창고가 가득한 것을 보고 즐거워하는 부자를 향해 예수님이 뭐라 했는가? ‘어리석은 자’라 하지 않았는가? 물론 꿈을 이루는 것이 무가치하다고 말하는 게 아니다. 꿈을 이루는 것이 소중하고 가치 있는 일이긴 하나 감사하고, 자유하고, 당당하고, 평화롭고, 행복하게 현재를 사는 것만큼 소중하거나 가치 있는 일은 아니라는 이야기이다.

톨스토이는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 세 가지를 다음과 같이 말했다. “기억하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때는 바로 지금 이 순간이란다. 가장 중요한 사람은 지금 너와 함께 있는 사람이고, 가장 중요한 일은 지금 네 곁에 있는 사람을 위해 좋은 일을 하는 거야. 니콜라이야, 바로 이 세 가지가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들이란다. 그게 우리가 이 세상에 있는 이유야.” 정말 빛나는 통찰이다. 톨스토이가 발견한 이 통찰은 사실 예수님이 갈릴리 바닷가 언덕 위에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바와 같다. 하나님 안에서 지금 이 순간을 사는 것, 지금 내 곁에 있는 소중한 사람을 위해 좋은 일을 하며 사는 것, 그것이 정말 사는 것이고 우리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이유라는 것이다.

 

시인 정현종은 [모든 순간이 꽃봉오리인 것을]에서 노래했다.

 

나는 가끔 후회한다.

그 때 그 일이

노다지였는지도 모르는데…

그 때 그 사람이

그 때 그 물건이

노다지였는지도 모르는데…

더 열심히 파고들고,

더 열심히 말을 걸고,

더 열심히 귀 기울이고,

더 열심히 사랑할 걸…

반벙어리처럼,

귀머거리처럼,

보내지 않았는가,

우두커니처럼…

더 열심히 그 순간을 사랑할 것을…

모든 순간이 다아 꽃봉오리인 것을

내 열심에 따라 피어날 꽃봉오리인 것을!

 

 

아! 정녕 그러하다! 모든 순간이 다 꽃봉오리이다! 우리가 지금 이 순간에 충실할 수만 있다면 모든 순간은 다 꽃봉오리이다.

 

3. 오늘을 살지 못하는 이유

 

사람이 현재를 살지 못하는 건 정말 고치기 어려운 고질병이라고 생각된다. 모든 순간이 삶의 꽃봉오리인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매 순간을 과거와 미래의 포로가 되어 살고 있다. 미국의 사상가 에머슨이 “인간은 바로 지금 이 순간을 살지 않고, 회상의 눈으로 지난 일을 한탄하거나 자신을 둘러싼 풍요로움에 무관심한 채 발끝으로 서서 미래를 내다본다.”고 말한 그대로이다. 왜일까? 도대체 무엇 때문에 현재를 살지 못하는 고질병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것일까? 첫째, 예수님의 눈을 가지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솔로몬이 입은 모든 영광도 길가에 핀 꽃 한 송이의 영광에 미치지 못한다는 그 기막힌 진실, 상식을 뛰어넘는 진실을 보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무언가를 찾아 뛰어다닐 필요가 없을 만큼 이미 모든 것이 충만한데도 불구하고 그 충만함의 실체를 보지 못하기 때문에 내일을 염려하며 불안해하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둘째, 공간중심적인 삶의 방식에 익숙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우리는 그동안 공간 중심적인 삶 즉, 누가 더 넓은 공간을 차지하느냐 하는 싸움에 골몰하는 인생을 살아왔다. 시간은 금이라고 말하면서도 시간 중심적인 삶보다는 공간 중심적인 삶에 집중해왔다. 성경은 ‘땅과 거기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중에 거하는 자가 다 여호와의 것’(시24:1)이라고 명백히 선언했다. 공간은 사적 소유의 대상이 될 수 없으며, 공간을 차지하기 위한 싸움은 근본적으로 헛된 일임을 밝혔다. 그렇다. 공간(땅)은 모든 생명에게 허락된 공적 자산이다. 모든 생명의 터전이다. 더욱이 삶이란 근본적으로 공간적이지 않다. 삶은 시간적인 것이다. 삶은 시간을 살아가는 과정이다. 공간을 많이 차지하는 것으로는 삶을 풍성하게 할 수 없다. 시간을 창조적으로 살아갈 때에만 삶이 살아나며 풍성해진다. 물론 시간도 신(神)의 선물이다. 누구에게나 동일하게 주어진 선물이다. 하지만 시간은 공적 자산이 아니다. 시간은 사적 자산이다. 시간을 개인적으로 쌓아두거나 소유할 수는 없지만 개인에게 주어진 시간은 누구도 침범할 수 없고, 시간 속에서 경험한 것은 그 사람만이 경험할 수 있는 독특한 것이라는 면에서 시간은 전적으로 사적 자산이다.

그래서일까? 사람들은 사적 자산인 오늘이라는 시간은 탐내지 않으면서 공적 자산인 공간은 탐낸다. 공간을 차지하기 위한 싸움에 시간을 쏟는다. 공간에 대한 욕망에 시간이 끌려간다.

 

4. 오늘과 내일의 딜레마를 너머서

 

하지만 문제가 그리 간단치만은 않다. 인간은 미래를 생각할 수 있는 유일한 동물이다. 뭔가를 상상하고 꿈꾸는 것, 오늘만이 아니라 과거와 미래를 넘나들며 생각하는 것이야말로 인간이 가진 독특한 능력이다. 실험 관찰에 의하면, 전두엽의 일부가 손상되면 사람이 침착해지는 반면, 계획하는 능력은 상실된다고 한다. 다시 말하면, 미래를 생각하는 능력이 손상된다는 것이다. 그렇다. 내일을 생각하며 계획할 수 있다는 것은 정말 은총이요 축복이다. 인간에게만 주어진 특권이다. 정말 감사하고 황송해야 할 일이다. 그런데, 바로 그 놀라운 능력 때문에 우리는 정작 쓸데없는 걱정과 근심에 휩싸여 살고 있다. 과거와 미래를 생각할 수 있는 신묘한 능력 때문에 어제와 내일을 배회하면서 오늘을 살지 못하고 있다. 삶이란 정말 기막힌 아이러니요 피할 수 없는 딜레마가 아닐 수 없다.

딜레마는 또 있다. 내일 때문에 오늘을 살지 못하는 것도 문제이지만, 내일을 생각지 않고 오늘에만 코 박고 사는 것도 문제이다. 순간의 불빛에 자기를 불태우는 불나방처럼 사는 것, 이 순간을 맘껏 즐기기만 하려는 ‘찰나주의’도 심각한 문제이다. 사람은 마땅히 내일을 생각하며 살아야 한다. 내일이 없으면 오늘에 충실하기가 어렵다. 내일의 희망이 있기에 오늘 절망하지 않고 최선을 다하며 사는 것이다. 사실이다. 사람은 마땅히 내일을 생각해야 하고, 또 내일의 꿈이 있어야 오늘을 살 수 있는 법이다. 그런데 또 내일을 생각하다 보면 자연스레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게 된다. 내일이 없으면 살 수 없으면서도 내일 때문에 오늘을 앗기는 모순, 바로 이것이 인생의 딜레마이다.

18세기 영국의 시인 알렉산더 포프는 삶의 이런 모순을 매우 쓸쓸하게 진술했다. “사람의 가슴에선 쉼 없이 희망이 솟는구나. 현재는 축복받지 못했으나, 항상 기다리는 미래의 축복. 집에 들어가지 못하는 불안한 영혼은 다가올 삶을 기대하며 쉬기도 하고 걷기도 하노라.” 그렇다. 현재의 불완전함과 행복하지 못함을 미래의 희망에라도 투사해야 하는 인간의 심리적인 고뇌, 현재의 고통을 미래의 희망으로나마 극복해보겠다는 인간의 애달픈 의지가 아프게 다가온다. 미국의 반문화 운동의 기수였던 앨런 왓츠도 “언제까지 걱정하고 있을 것인가. 이미 일어났으니 결코 바꿀 수 없는 일들을 가지고. 아직 때가 이르지 않아 어찌 손을 쓸 수 없는 일들을 가지고.”(당신은 지금 행복하십니까. 117쪽)라며 인간의 어리석음을 질타했다. 옳다. 그가 말한 대로 과거는 바꿀 수 없고, 미래는 손 쓸 수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은 과거와 미래 없이 오늘을 살 수 없다. 과거와 미래는 오늘을 가동시키는 중요한 에너지원이니까 말이다. 진실로 그렇다. 과거와 미래는 매우 훌륭한 오늘의 양식이다. 과거와 미래라고 하는 에너지 없이 오늘을 살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하지만 과거와 미래가 진리의 빛이 흘러들어오는 창문을 덮는 덧문이라는 것 또한 부정할 수 없다.

참 쉽지 않은 딜레마이다. 내일을 생각하지 않으면 오늘을 살 수 없고, 내일을 생각하다 보면 오늘을 앗기게 되는 이 모순과 어리석음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 프랑스 철학자 베르트랑 베르줄리에게 귀기울여보자. “순간을 산다는 것이 인생을 모아두기 위해 전전긍긍할게 아니라 현재를 충실히 살자는 뜻이라면, ‘카르페 디엠’ 좋다! 기꺼이 순간을 붙잡자! 삶을 향한 조건 없는 긍정을 통해서 얻어진 해방감을 얼마든지 만끽하는 거다. 그러나 ‘카르페 디엠’이 어린 시절이나 사춘기적 열기 속에 멋모르고 뛰어드는 위험천만한 혼돈을 의미한다면, 미안하지만 아니올시다이다! 퇴행은 아니라는 얘기, 설탕처럼 달콤한 세계로의 회귀는 아니라는 얘기다.”(행복생각. 15쪽). 매우 정확한 이야기이다.

 

 

잠언은 행복에 대해서 거창하게 말하지 않는다. 행복은 단순히 먹고 마시는 일을 잘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잠언의 인생론을 깊이 연구한 자크 엘룰은 잠언의 행복론을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행복한 날 동안에 갑자기 찾아와 당신에게서 행복을 거두어 갈지도 모르는 것 때문에, 이 행복을 완전하지 않게 하는 것 때문에 괴로워하지 말며, 행복이 헛되다는 사실 때문에 낙담하지 말라. 당신이 행복할 때 주저 없이 행복하여 이 단순한 행복에 빠져라. 우울한 생각은 갖지 말라. 환상이나 궤변으로 도피함 없이, 내일이면 훨씬 나아지리라는 희망 없이, 어떤 희생을 감수하고라도 기대하지 않은 뜻밖의 완벽한 행복을 만들어내려는 추구 없이 행복해야 한다. 이 순간을 절정으로 살아라. 내일 불행이 찾아 올 것이다. 내일을 염려하지 말라(마6:34)”(존재의 이유. 77-78쪽). 그렇다. 이것이 이 땅에서 행복하게 사는 최상의 길이다. 예수님께서도 삶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오늘’이 구원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말씀하셨다. 옳다. 당신이 만일 지금(Now), 여기에(Here) 충실하다면 당신은 가장 행복한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