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퇴원 후 최소한의 운동이라도 해야겠기에 집밖에 나가 걷기를 했다.

있는 힘을 다 해야 겨우 한 걸음씩 떼는 걸음이었지만 그래도 아파트 단지 안에 있는 초등학교로 나가 10여분씩 걸었다.

그러던 어느 날 눈에 익은 숲과 하늘이 눈에 들어왔다.

6월의 푸르름이 그렇게 싱싱할 수가 없었다. 시끄럽게 떠들며 뛰노는 아이들의 얼굴과 눈망울이 참 예쁘고 사랑스러웠다.

씩씩하게 발걸음을 떼는 사람들의 움직임도 경쾌해 보였다.

그리고 순간 그 모든 것이 생명이라는 진실을 인식했다.

그랬다. 모두가 생명이었다. 펄펄 뛰는 생명이었다. 아니, 생명 아닌 것이 없었다.

하늘, 땅, 들, 산, 길에 있는 것들이 온통 생명이었다. 생명, 생명, 생명이었다.

정말 아름답고 찬란한 생명의 향연이 눈앞에 펼쳐지고 있었다.

하나님이 펼치신 생명. 하나님이 지키시는 생명. 하나님이 사랑하는 생명.

65억의 사람을 비롯해 헤아릴 수조차 없는 온갖 생명들이 펄떡이는 지구촌은 정말 생명 덩어리다.

지구를 넘어 온 우주까지도 온갖 생명들을 품고 자라게 하는 생명의 어머니요 생명의 자궁이다.

특히 지구는 너무도 풍성하고 다채롭고 아름답고 운율이 넘치는 생명의 동산이다.

그리고 그 다채롭고 운율이 넘치는 생명의 동산에서 나도 함께 숨 쉬고 있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놀랍고 감사했다.

나도 생명 가운데 생명의 일환으로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이 정말 기적처럼 반갑고 행복했다.

 

법정 스님이 말했다던가. 살아있는 것은 다 행복하라고.

맞다. 살아있는 것은 다 행복해야 한다. 살아있는 것은 다 존중받아야 한다.

살아있다는 건 은총이고 위대한 일이며 온 천하와도 바꿀 수 없는 최고의 환희요 축제요 축복이다.

산다는 것이 비록 힘들고 고달프기 그지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있다는 건 경축해야 할 일이다.

그런데 문제가 있다. 행복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인생살이가 얼마나 힘들고 고달픈 것이면 석가가 고해(苦海)라 했겠는가?

인생살이가 얼마나 아픈 상처투성이면 목숨을 끊는 사람들이 그렇게 많겠는가?

그렇다. 고통이 없는 인생은 없다. 눈물이 없는 인생은 없다.

하지만 ‘살아있음’을 행복해할 수는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살아있음’을 행복해할 수 있는 경지에 이른 ‘살아있음’을 나는 ‘삶’이라 부르고 싶다.

‘삶’은 ‘살아있음’의 완성이요 ‘살아있음’의 참이기에 모든 ‘살아있음’은 ‘삶’을 꿈꾸고 지향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살아있음’을 행복해할 수 있는 경지란 쉽게 오를 수 있는 게 아니다.

쉬지 않고 자기를 비워내야만, 하나님의 자유 앞에 엎드릴 수 있어야만 겨우 오를 수 있고,

또 올랐다 하더라도 언제 떨어질지 모르는 게 그 경지다.

더욱이 사람에게 가장 힘든 것이 바로 자기 비움이고 하나님의 무한하신 자유 앞에 엎드리는 것이 아니던가.

사람들이 끊임없이 비움 대신 채움을,

하나님의 자유 앞에 서는 대신 하나님을 규정하고 조종하려는 종교적 자기중심성을 발동하는 것도

그게 어렵기 때문 아닌가.

성공과 소유와 자기중심적 종교심을 통해 행복을 얻으려고 헛된 몸짓을 하는 것도 자기 비움과 하나님의 자유 앞에 엎드리는 게 힘들기 때문 아닌가.

그래서 다들 간절히 ‘삶’을 꿈꾸면서도 ‘삶’을 놓치는 것 아닌가.

 

이 글을 쓰고 있는 나도 마찬가지다. 나는 지금 누군가를 향해 이 글을 쓰는 게 아니다. 나를 돌아보며 나를 향해 쓰고 있다.

수술 후 처음에는 ‘살아있음’이 감격이었던 나,

혼자 힘으로 일어설 수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해했던 나,

수술한지 6개월이 지난 지금 신비스러울 만큼 회복된 몸을 느끼며 한없이 감사하고 있는 나,

하지만 처음의 감격이 많이 잠잠해진 나,

새로운 생명의 기회를 어떻게 살아야할지 모든 게 불확실한 미래를 고민하는 나,

채움에 대한 욕구가 스멀스멀 솟아오르는 나,

‘살아있음’을 행복해하는 경지에서 저만큼 내려와 있는 나를 보며 이 글을 쓰고 있다.

물론 어리석음의 단계까지 내려오지는 않았지만 누가 알겠는가?

언제 어리석음의 단계로 추락할지.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없다 하지 않던가.

한 순간에도 천길 아래로 추락할 수 있는 것이 사람 아니던가.

 

하여, 나는 추락하지 않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본다.

예수님은 우리의 ‘살아있음’을 위해, 아니 ‘살아있음’이 곧 행복이 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우리의 밥이 되셨으니까.

‘살아있음’이 곧 행복이 될 수 있는 나라, 곧 하나님나라를 이루기 위해 구원의 사건이 되셨으니까.

그 밥을 먹음으로 ‘살아있음’을 경축할 수 있는 경지, 즉 ‘삶’이라는 은총의 자리에 참여할 수 있게 될 테니까.

그러므로 나는 꿈꾼다. ‘살아있음’을 행복해 할 수 있기를.

내 비록 수술 후 처음의 감격이 많이 잠잠해졌지만, 불투명한 미래 때문에 고민하고 있지만,

채움에 대한 욕구가 스멀스멀 솟아오르는 나를 불안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포기하지 않고 꿈꾼다.

‘살아있음’이 어찌할 수 없는 아픔이고 상처인 것을 알고,

또 ‘살아있음’이 행복인 것은 행복이 아니라는 것도 알지만,

누에가 자기 몸에서 실을 뽑아내듯 인생의 상처와 눈물 속에서 뽑아내는 행복을 감히 꿈꾼다.

 

무릇 인생이란 ‘살아있음’에서 ‘삶’으로 나아가는 과정이어야 하지 않을까?

‘살아있음’에서 ‘살아있음’이 고통인 단계를 지나 ‘살아있음’을 행복해하는 단계로 나아가는 과정,

그 지난한 과정이 바로 인생이요 신앙이어야 하지 않을까?

하여, 아직은 내가 저만치에 있지만,

죽는 날까지도 저만치에 머물러 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있음'을 행복해할 수 있는 은총과 능력을 꿈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