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영점(零點)에 서서 생각해보자. 교회란 어떤 곳인가? 어떤 일을 하기 위해서 이 땅에 존재하는가? 십자가 걸고 예배드리면 교회인가? 하나님 부르고, 예수 십자가 말하면 교회인가? 성경을 이야기하면 교회인가? 칼빈의 말을 들어보자. “하나님의 말씀을 순수하게 전파하며 또 듣고,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 대로 성례를 지킬 때에 거기 하나님의 교회가 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옳다. 말씀이 선포되고 성례를 지키면 주님의 교회로서 손색이 없다. 하지만 나는 칼빈의 말을 좀 더 풀어서 말해보려 한다. 성례 문제는 빼놓고 하나님의 말씀을 순수하게 전파하는 것에 대해서만 이야기해보려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순수하게 전파한다는 것이 무엇일까? 교회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순수하게 선포하며 가르치고 있다고 예외 없이 주장하는데 과연 그럴까? 하나님의 말씀을 순수하게 전파하는지 여부를 정확하게 판단하기 위해서는 우선 하나님의 말씀이 무얼 말하느냐,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것이 도대체 무엇이냐 하는 것을 생각해 보아야 한다. 성경이 다른 종교 경전이나 훌륭한 인간들의 말과 다른 점이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모두 인간의 언어로 가득 차 있고, 인간의 실존적 삶을 향해 말하고 있는데 성경은 도대체 뭐가 다를까? 신(神)을 이야기한다는 점이 다를까? 아니다. 다른 종교도 신을 말하고 있고, 신을 논하는 책은 무수히 많다. 그러면 하나님이 직접 말씀했다는 것이 다를까? 물론 그것도 중요한 차이임에는 틀림없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형식의 차이이지 내용적인 차이라고 할 수는 없다.

 

성경이 다른 모든 책들과 내용적으로 다른 점은 딱 하나다. 그것은 처음부터 끝까지 세계를 바라보는 관점과 지향점이 다르다는 점이다. 만물과 만사를 이해하는 해석의 지평과 토대가 다르다는 점이다. 즉, 만물과 만사를 눈에 보이는 현실 그 너머에서 본다는 점, 피조세계 전체와 역사를 창조하신 분과의 관계 속에서 본다는 점, 죽음 너머의 세계까지를 포함한 하나님의 세계에서 삶의 실존을 통전적으로 본다는 점 등이 내용적으로 다른 점이라고 할 수 있다. 구체적으로 몇 가지만 살펴보자. 세상은 인간의 가능성과 역사의 진보를 꿈꾸고 말한다. 하지만 성경은 인간의 불가능성과 비참함, 역사적 진보의 한계와 심판, 그리고 종말론적 희망을 증언한다. 세상은 인간의 의를 말하나 성경은 하나님의 의를 말하고, 세상은 인간의 도덕적 개선을 말하나 성경은 새로운 피조물 됨을 말하고, 세상은 유토피아를 꿈꾸나 성경은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기다리고, 세상은 소유와 영광과 지배를 추구하나 성경은 존재와 고난과 섬김을 추구한다. 세상은 하늘과 땅을 이분법적으로 구분하나 성경은 땅과 하늘을 따로 말하는 법이 없다. 하늘과 땅이 구분되어 있지만 서로 유기적으로 연관돼 있다는 하나의 관점에서 하늘을 이야기하고 땅을 이야기한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 말씀의 고유한 특징이요 여타 모든 것과의 차이점이다.

 

그렇다면 또 다시 묻자. 하나님의 말씀을 순수하게 전파한다는 것이 무엇일까? 어떻게 전할 때 순수하게 전한다고 할 수 있을까? 어떤 설명도 덧붙이지 않고 성경을 그대로 읽으면 될까? 아니다. 그건 현실성도 없거니와 성경을 읽는다고 할 수도 없다. 성경을 제대로 읽기 위해서는 먼저 성경 안에 담겨 있는 관점과 지향점에 눈을 떠야 한다. 만물과 만사를 바라보는 관점과 지향점이 하나님의 것으로 바뀌어야 한다. 바울이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은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신령한 일은 신령한 것으로 분변한다.’(고전2:12-3)고 말한 것처럼 하나님의 일과 뜻을 분변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눈을 가져야 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하지 않고 순수하게 전파하기 위한 최소한의 조건이요 원칙이다. 그러므로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을 순수하게 전파하는지 여부를 분변하기 위해서는, 교회가 하는 이야기가 하나님이 하신 이야기와 맥락이 같은지를 보아야 한다. 예를 들어 세상이 온통 인간의 가능성과 역사의 진보를 꿈꾸고 말할 때 인간의 불가능성과 비참함, 역사적 진보의 한계와 심판, 그리고 종말론적 희망을 증언하는지를 보아야 한다. 세상이 인간의 의를 말할 때 하나님의 의를 말하고, 세상이 인간의 도덕적 개선을 말할 때 새로운 피조물 됨을 말하고, 세상이 유토피아를 꿈꿀 때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기다리고, 세상이 소유와 영광과 지배를 추구할 때 존재와 고난과 섬김을 추구하는지를 보아야 한다.

 

뒤집어서 말하면, 성경을 말한다고 해서 반드시 성경을 이야기하는 건 아니라는 것이다. 아무리 성경 내용을 말한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관점과 지향점으로 읽어내지 않으면, 그건 하나님의 말씀을 말하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본래 언어란 진리를 담아내기에는 한계가 있다. 언어가 진리를 표현할 수 있는 최상의 수단임에는 틀림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마음과 경험을 표현하기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일찍이 노자가 진리(道)를 말하면서 서두에 “도(道)를 도라고 말하면 그 도는 본래의 도가 아니다”(道可道非常道), “이름을 붙이면 그 이름이 이름 본래의 이름이 아니다”(名可名非常名라)고 한 것도, 언어라는 게 진리의 세계를 담기에는 절대적 한계가 있다는 걸 절감했기 때문 아니겠는가. 그렇다. 인간의 마음이나 경험조차 제대로 표현하기 어려운 것이 언어다. 하물며 언어 이전의 세계, 역사 너머의 세계, 하나님의 구원의 세계, 죽음을 뛰어넘는 부활의 세계를 어떻게 언어로 담아낼 수 있겠는가. 때문에 하나님의 관점에 눈이 열리지 않으면 성경을 제대로 읽거나 말할 수 없다. 설사 읽는다 하더라도 피상적인 종교적 차원 이상을 읽어내기란 어렵다. 하여, 성경을 말하면서도 얼마든지 성경을 말하지 않을 수 있고, 하나님의 구원을 말하면서도 하나님의 구원이 아닌 이야기를 할 수 있다.

 

결국 하나님의 말씀을 순수하게 전하느냐 전하지 않느냐의 여부는 성경에 있는 이야기를 하느냐 하지 않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성경적인 사고의 관점(세계관)으로 성경과 만사와 만물을 해석하느냐, 아니면 세상적인 사고의 관점(세계관)으로 해석하느냐에 달려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앞에서 말한 것처럼 하나님의 관점과 세상의 관점은 완전히 다르다. 이야기의 차원과 관점과 지향점 모든 것이 다르다. 만사와 만물을 바라보는 틀이 전적으로 다르다. 그러므로 세상이 보는 것처럼 보지 않고, 세상이 지향하는 것과 다른 것을 지향해야만 비로소 하나님의 말씀을 순수하게 전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면 눈을 돌려 오늘의 교회를 보자. 오늘 교회는 하나님의 관점에서 만사와 만물을 보고 이야기하고 있을까? 세상과 다르게 보고, 세상과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을까? 아니다. 오늘날 많은 교회는 세상과 다르게 볼 줄 모르고, 세상과 다른 이야기를 할 줄 모르는 교회가 되었다. 세상이 하는 이야기를 예수 이름으로 반복하는 정말 이상한 교회가 되고 말았다. 예수 이야기, 성경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는 게 아니다. 사실 예수 이야기, 성경 이야기는 교회 안에 넘치고도 넘친다. 그런데 참으로 기이한 것은 이야기는 분명 하나님 이야기인데 그 내용을 들어보면 세상과 똑같은 소리를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성경이 하지 않는 이야기를 성경을 통해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주님을 잘 믿으라고 하는 것까지는 좋다. 그런데 주님을 잘 믿고 따르면 더 많은 소유와 더 큰 영광과 더 강한 힘과 지배력을 얻는다고 말해버린다. 세상이 추구하는 온갖 좋은 것들을 주님의 이름으로 약속해버린다. 주님 잘 믿으면 하는 일마다 형통하고, 더 많은 것을 성취할 수 있고, 영광의 자리에 오를 수 있고, 가문이 번성하고, 건강하게 살 수 있고, 자녀가 잘 되고 복을 받는다고 말해버린다. 마치 대통령 선거 때 후보자들이 그럴듯한 공약(空約) - 거짓 약속을 남발하듯이 목사들은 예수 믿으면 만사가 형통한다는 장밋빛 공약(空約)을 남발한다. 예수님이 약속하지 않은 것들을 예수 이름으로 약속한다.

 

교회의 주인이요 머리이신 예수님은 세상의 경쟁에서 승리하는 법이나 삶의 안전을 보장하는 지혜를 말하지 않았다. 그분은 오직 하나님나라의 복음을 전했다. 생명과 죽음이라는 삶의 궁극적 질문에 대해, 역사의 시작과 끝에 대해, 존재의 신비에 대해, 역사를 넘어서는 종말론적 희망에 대해 말했다. 그는 영광이 아니라 섬김을 친히 보여주었고, 승리를 통해서가 아니라 십자가의 패배를 통해 승리했으며, 나를 믿고 따르는 것은 쉽지 않다고 말했고, 세상의 그 어떤 것도 보장해 줄 수 없다고 말했다. 아니, 세상에서는 주님 때문에 오히려 많은 것을 잃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오늘의 교회는 예수님과는 반대로 말한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오늘 교회의 가장 심각한 위기이다. 교회란 본시 세상과는 바라보는 관점과 지향점이 다르고 하는 이야기가 달라야 하는데, 하나님 외에는 그 누구도 할 수 없는 이야기를 해야 하는데, 그래서 세상에서는 그 유(類)를 찾아볼 수 없는 매우 독특한 곳이어야 하는데, 그래야 교회가 교회일 수 있는데, 오늘의 교회는 세상이 보는 것밖에 못보고, 세상이 하는 이야기밖에 할 줄을 모르는 정말 이상한 교회가 되고 말았다.

 

교회가 과학, 종교, 정치, 경제, 교육, 문화 등과 담을 쌓아야 한다고 말하는 게 아니다. 세상과 대화를 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게 아니다. 교회는 끊임없이 세상과 대화를 해야 한다. 과학, 종교, 정치, 경제, 교육, 문화 등과 마음을 열고 깊이있는 대화를 해야 하고, 또 그들이 발견한 합리적 진실에 대해서는 기꺼이 수용할 줄 아는 열린 자세를 가져야 한다. 태양이 지구를 도는 게 아니라 지구가 태양을 중심으로 돈다고 말한 갈릴레오를 감금했던 중세 교회처럼 교회 안에 갇혀서는 안 된다. 하지만 대화하는 것에 머물러서도 안 된다. 왜냐하면 교회는 과학, 종교, 정치, 경제 너머의 세계, 즉 하늘을 가리키는 지상의 이정표로서 존재해야 할 뿐 아니라 하늘과 땅을 통전적으로 보고 말해야 하니까 말이다.

 

사실 세상이 교회보다 훨씬 지혜롭고 효율적인 처방을 제시할 수 있는 것들은 많이 있다. 어떻게 하면 경제를 발전시킬 수 있는가? 경제적 양극화를 극복할 수 있는가? 공권력의 사용을 민주적이고 정의롭게 만들 수 있는가? 자녀 교육을 잘할 수 있는가? 이런 문제는 각각의 전문가들이 교회보다 훨씬 지혜롭고 탁월하게 해법을 제시한다. 그런 문제에 대해서는 교회가 그들에게 들어야지 말하려 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교회가 말해야 할 것이 있다. 교회는 세상의 전문가들이 통전적으로 보지 못하는 한계가 있음을 말해주어야 한다. 또 그들이 말하지 못하는 것 - 즉 죄의 종노릇하는 것에 대해, 그 무엇으로도 삶의 허무를 극복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 생명과 죽음이라는 삶의 궁극적 질문에 대해, 역사의 시작과 끝에 대해, 존재의 신비에 대해, 역사를 넘어서는 종말론적 희망에 대해 말해 주어야 한다. 이런 문제에 대해서는 정부, 학교, 가정, 법원, 과학, 병원 그 어디에서도 말해 주지 않을 뿐 아니라 또 말해 줄 수도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교회를 통해 말하기를 원하신다. 그러므로 교회는 원하든 원치 않든 세상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게 해야 한다. 세상이 말해 줄 수 없는 것을 말해야 한다. 그것은 교회가 감당해야 할 최고의 책무요 최고의 봉사일 뿐 아니라 교회의 영광이요 특권이기도 하다. 그렇다. 교회가 해야 할 일 중에 이보다 더 중요하고 본질적이고 영광스러운 일은 없다.

 

다시 말하거니와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을 순수하게 전파하도록 부름받은 하나님의 기관이다. 때문에 교회는 세상이 볼 수 없는 것을 보고, 세상이 할 수 없는 이야기를 해야 한다. 만물과 만사를 바라보는 관점이 세상과 다른 곳, 추구하는 것이나 하는 이야기가 세상과 다른 곳이어야 한다. 이렇게 말하면, 이게 무슨 뜬구름 잡는 이야기냐고 혀를 찰지 모르겠으나 그렇지 않다. 이것은 매우 시급하고 중요한, 그러면서도 매우 현실적인 이야기이다. 생각해보라. 만일 삶을 바라보는 관점이나 지향점, 또 하는 이야기가 세상과 다르지 않다면, 그래서 세상과 똑같은 이야기를 한다면 그것이 어떻게 교회일 수 있겠는가? 아무리 종교적 위용이 대단하고, 거룩하고 대단한 일을 성취하고, 기적을 행하고, 사회적으로 훌륭한 평판을 얻었다 할지라도, 그 교회가 세상이 하는 이야기와 똑같은 이야기를 한다면 어떻게 교회일 수 있겠는가? 교회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 즉 세상이 들을 수 없는 것을 듣고, 세상이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할 수 있을 때 비로소 교회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도적같이 열리는 말씀의 세계로 들어가야 한다. 잃어버린 하나님의 세계에 눈을 떠야 한다. 그래서 세상이 들을 수 없는 것을 듣고, 세상이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럴 때 교회는 진정으로 세상을 섬길 수 있다. 세상을 파괴하지 않으면서도 변혁시킬 수 있다. 거짓 희망을 넘어 참된 희망이 될 수 있다. 그리스도의 교회가 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