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술 이후의 과정을 한 마디로 요약한다면 ‘몸의 시간’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수술 전에도 간 때문에 항상 조심하고 몸의 변화에 민감했었지만 수술 이후의 과정은 또 달랐다. 오직 몸을 돌아보고, 몸의 변화에만 촉수를 집중할 뿐 다른 것은 다 뒷전이었으니까. 몸 외에는 세상의 어떤 일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으니까. 병원에 있는 동안 노무현 전 대통령의 충격적인 사망 사고가 있었지만, 그 일조차도 크게 다가오지 않았으니까. 그리고 그렇게 몸 하나가 전부인 특별한 시간을 보내면서 새롭게 발견한 것이 있다. 바로 몸이다. 몸의 물성(物性)이다.

 

내가 몸의 물성을 발견하게 된 것은 많은 사례들을 겪고 나서인데, 몸과 사람의 존재 양식에 대한 기존의 인식에 균열을 가한 첫 번째 경험은 수술 직후였다. 수술이 끝난 후에 보니, 내 몸에 연결되어 있는 주사 바늘이 대략 스무 가지는 되어보였다. 나는 무슨 주사약이 그렇게 많은지, 무엇 때문에 투약하는 것인지도 알지 못한 채 외부에서 공급되는 주사약에 의지해 며칠을 지냈다. 음식은 말할 것도 없고, 약조차 먹을 수 없는 상황에서 모든 걸 주사약으로 해결하고 있는 나를 보고 있자니, 이건 사람이 아니라 꼭 기계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의지나 판단과는 상관없이 의사의 일방적 처방에 따른 주사약에 의존해 살고 있는 나, 평상시의 생존 방식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현존하고 있는 나를 보면서 나라는 존재가 매우 낯설게 느껴졌다. 또한 내 몸이 망가진 간을 적출하고 건강한 간을 이식한 몸이라는 것도 생경한 느낌이었다. 마치 영화 속 기계 인간이 된 것 같은 느낌이었다. 묘했다.

 

병원에 있으면 거의 날마다 혈액 검사를 한다. 몸의 상태를 놓치지 않고 제 때 체크해야 하기 때문에 날마다 혈액 검사를 한다. 이상 징후가 있을 때는 하루에 두 번을 하기도 한다. 혈액 검사뿐 아니다. 갖가지 검사가 쉬지 않고 진행된다. 병원생활은 그야말로 검사의 연속이다. 그리고 검사 결과에 따라 각종 처방을 하는데, 통증이 있으면 진통제를, 피가 부족하면 수혈을, 피 중에서도 혈소판이 부족하면 혈장 수혈을, 잠을 못자면 수면제를, 장운동이 느리면 장운동 촉진제를, 알부민이 부족하면 알부민을, 설사를 하면 음식을 끊고 지사제를 공급한다.

수술 후 2주쯤 지나서 일이다. 밤에 갑자기 위장이 쓰리고 아팠다. 그 전까지는 아무런 증상이 없었는데 갑자기 견딜 수 없을 만큼 쓰리고 아픈 것이었다. 아침 일찍 서둘러 약을 처방해 먹었는데도 증세가 호전되지 않았다. 이번에는 한 단계 더 높은 수준의 약을 처방해 먹었다. 그러자 거짓말처럼 통증이 사라졌다. 그 후로도 며칠 동안 새벽이면 위장이 쓰리고 아팠는데 그 약만 먹으면 신기하게도 1분이 안 돼 아픔이 사라졌다. 정말 놀라웠다.

장기를 이식한 사람은 예외 없이 면역억제제를 복용한다. 내 몸의 세포가 새롭게 들어온 간을 적으로 인식하고 공격을 하기 때문에 공격력을 낮추기 위해 면역억제제를 복용한다. 처음에는 세 가지 종류의 약을 복용하는데, 이 약들은 약성이 독해서 여러 가지 부작용이 나타난다. 이십 여일쯤 지나자 양다리의 무릎 아래쪽에 이상이 오기 시작했다. 마치 전기가 흐르는 듯 찌릿찌릿하고, 발가락을 움직이면 무릎 위까지 찌릿한 아픔이 느껴졌다. 다리의 피부를 스치기만 해도 온 몸이 움찔할 정도로 아팠다. 또 혈당이 높아졌다. 단 것을 좋아해서 평소 빵이나 과일을 즐겨 먹었어도 혈당이 높지 않았는데 혈당이 굉장히 높았다. 백 이하가 정상인데 사백에서 육백을 오르내렸다. 또 두 달 후쯤부터는 머리가 빠지기 시작했다. 하루에 족히 수백 개의 머리가 빠졌다. 머리를 만지기만 해도 한 웅큼씩 빠져나갔다. 또 몸의 각 마디와 관절이 아팠다.

 

전신마취도 그랬다. 수술하는 동안 나는 난생 처음 깊은 잠을 잔 것 같았다. 정말 죽음 같은 잠을 자고 난 느낌이었다. 열 한 시간의 전신 마취. 지금 생각해도 참 신기하다. 복부를 가르고 간을 통째로 드러냈을 뿐 아니라, 새로운 간에 혈관과 담도관 등을 연결하는 엄청난 수술을 하는데도 아무런 통증이나 감각을 전혀 느끼지 못한다는 게 너무 신기했다. 더욱이 통증만 못 느끼는 게 아니라 심장 외의 장기들까지도 거의 활동을 멈추었다가 다시 깨어난다니 얼마나 놀라운 가! 마취제라는 특정한 물질을 흡입했다고 해서 몸이 그렇게도 빨리 그 물질에 반응하여, 죽지 않았으면서도 죽음에 들어간 것 같은 상태가 될 수 있다는 게 얼마나 놀라운가!

 

긍정적인 변화도 있었다. 수술 후 5-6일쯤 되었을까. 우연히 손바닥을 보게 되었는데 손바닥 색깔이 달라져 있는 것이었다. 누렇고 창백했던 손바닥은 어디 가고, 맑고 깨끗하면서도 선홍색의 손바닥이 눈앞에 있었다. 평소에 많이 보았던 아들의 손바닥 색깔 그대로였다. 아들의 손바닥이 그대로 내 손바닥에 있었다. 정말 놀라웠다. 보통 큰 수술을 하고 나면 손과 얼굴이 창백해지는 법인데, 나는 반대로 수술 후 더 좋아졌다. 또 평상시에는 눈을 뜨고 있으면 눈이 피곤하고 아팠었는데 눈의 피곤함이 느껴지지 않았다. 수술 후 불과 5-6일만의 일이었다.

 

놀라웠다. 특정 물질의 약성에 따라 아픈 것이 사라지기도 하고, 안 아프던 것이 아프기도 하고, 혈당이 높아지기도 하고, 머리가 빠지기도 하다니! 간을 교체했다고 해서 그렇게 빨리 몸의 혈색이 달라지다니! 그것도 내 의지나 감정과는 전혀 상관없이 말이다! 정말이다. 몸에서 일어나는 모든 반응은 내 이성이나 의지로 통제할 수가 없었다. 머리가 빠지는 걸 의지로 막을 수 없었고, 관절이 아픈 것을 감정으로 안 아프게 할 수 없었다. 몸이 저 스스로 물질에 반응하고 있었다. 내 의지나 이성과 상관없이 몸이 물질에 반응하고 있었다. 몸은 물리적 시스템이었다. 놀라웠다. 충격이었다. 지금껏 한 번도 생각지 못한 새로운 경험이었다. 새로운 발견이었다.

 

물론 몸은 물질만은 아니다. 의지와 감정에 따라 몸의 반응이 달라진다는 건 많은 실험을 통해 이미 확인된 바다. 바흐의 음악을 들려주면 식물도 잘 자란다고 하는데 하물며 사람이야 말해 무엇 하겠는가? 정신적인 스트레스가 만병의 원인이라는 건 누구나 아는 상식이다. 몸뿐 아니다. 이 세상은 물리적인 법칙만 작용하는 닫힌 세계가 아니다. 하나님은 시계공이 시계를 만들어 놓고 태엽을 감아 놓으면 시계가 절로 돌아가는 것처럼, 세상을 물리적인 법칙을 따라 절로 돌아가도록 만들지 않았다. 하나님은 물리적인 세계를 물리적인 법칙에 갇힌 체계로가 아니라 하나님을 향해 열린 체계로 만드셨다. 때문에 물리적인 세계를 영적 세계의 종속 변수로만 보아서도 안 되고, 영적 세계와 관계없는 독립변수로만 보아서도 안 된다. 물리적인 세계와 영적 세계는 차원을 달리하면서도 서로에게 침투하고 서로에게 열려 있는, 그래서 둘이면서 하나요 하나이면서 둘인 참으로 기묘한 세계이다. 특히 사람의 몸은 물성과 영성의 신묘한 통로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몸은 여전히 물성(物性)을 가진 물(物) 자체이다. 누구든지 마취제를 흡입하면 아무리 기를 쓰고 정신을 차려도 1분 이내에 마취에 들어가게 되어 있고, 특정 물질의 약성이 들어가면 몸이 생리적으로 반응하게 되어 있다. 육체적인 감각뿐 아니다. 정신세계까지도 물질에 따라 요동을 치는 것이 사실이다. 현실과 비현실의 벽이 무너지는 건 적은 물질로도 충분하다. 그렇다. 몸을 포함해 모든 피조세계는 영적인 세계를 향해 열려있으면서도 철저하게 물리적 시스템의 지배를 받는 물(物) 자체이다. 예수님의 몸도 예외일 수는 없다. 예수님의 몸도 물성을 지닌 몸, 물리적인 반응체계를 거스를 수 없는 몸, 그래서 마취제를 흡입하면 즉시 마취가 되고, 혈액이 부족하면 생명이 위험에 빠지며, 늙으면 얼굴에 주름이 지는 그런 몸이었을 것이라는 건 의심의 여지가 없는 진실이다. 나는 이번에 몸의 물성, 즉 물리적 성질을 갖고 있는 일종의 물리적 시스템임이라는 사실을 생생하게 경험했다.

 

그동안 나는 몸의 물성(物性)을 과소평가했다. 사람의 몸이 정신과 감성과 영적인 세계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는 사실만 중시했지, 물성 자체에 대해서는 깊은 이해가 없었다. 몸이 물질임을 지식으로는 알고 있었지만 인식하지는 못했다. 아니 물성(物性)에 의해 정신과 감성, 어쩌면 영적인 세계까지도 영향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애써 인식하지 않으려 했다고 하는 것이 더 정직할지 모르겠다. 그래서였을까? 나는 값진 대가를 지불하고서야 몸이 물성을 가진 물리적 시스템이라는 지극히 평범한 사실에 눈을 떴다.

 

몸의 물성(物性). 이것은 새로운 통찰이었다. 감각이 깨어있는 사람이라면 굳이 수술의 과정을 겪지 않아도 발견할 수 있는 지극히 평범한 사실을, 나는 온 몸으로 아픔의 과정을 겪어 내고서야 힘겹게 눈을 떴다. 그리고 몸의 물성에 눈을 뜨자, 피조세계와 생명의 현실이 새롭게 읽혔다. 예수님의 존재와 삶이 매우 친숙하면서도 구체적으로 다가왔다. 또 부활의 세계가 물성이 없는 영적인 세계가 아니라 물성을 가진 창조세계의 완성이라는 사실이 좀 더 실체적으로 이해되었다. 마치 진실을 가로막고 있는 장막 하나가 걷힌 것 같은 느낌이었다. 어떤 분들은 속으로 이렇게 말할지도 모르겠다. 몸의 물성을 발견한 것이 뭐 그리 대단한 것이라고 호들갑이냐? 하지만 나에게는 새로운 발견이었다. 호들갑을 떨만한 일이었다. 아르키메데스의 “유레카”(Eureka) 경험 같은 것이었으니까. 누군가에게는 평범한 것이 누군가에게는 특별할 수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