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에 이야기한 것처럼 나는 간 이식을 결정하고 수술에 들어가기까지 많은 의문과 싸워야 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기 위해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바친데 비해 나는 내가 살기 위해 아들을 잡는, 참으로 비정하고 어처구니없는 애비로서의 연민과 고민을 끌어안고 씨름해야 했다. 왜 살기 위해 몸부림치는지, 사랑하는 아들의 간을 이식받으면서까지 살아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묻지 않으면 안 됐다. 간이식을 통해 생명을 연장하려는 것이 단순히 ‘생의 의지’이기만 한 것인지? 혹 ‘생명에의 집착’은 아닌지? 현재를 넘어서지 못한 채 눈앞의 삶에 전전긍긍하는 속물근성은 아닌지? 허락되지 않은 생명을 탐하는 것이 아닌지? 죽음이 가까이 온 것을 환영하고 의연하게 맞는 것이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과 피조물다움에 부합되는 것일 터인데, 나는 왜 죽음을 의연하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인지? 아들의 몸에 위해(危害)를 가하면서까지 인위적으로 죽음의 시간을 늦추려 하는 것은 정말 비겁하고 이기적인 것 아닌지? 질문들이 수도 없이 밀려왔다. 그리고 그런 질문들 앞에서 나는 당당할 수 없었다. 사실 내 안에서조차 서로 다른 소리가 들렸다. 양심은 이성을 향해 ‘그건 비겁한 짓이요 생명에의 과도한 집착’이라고 아우성쳤고, 이성은 양심을 향해 ‘이건 생명에의 집착이기도 하지만 생의 의지이기도 하고, 또 생의 의지는 단순히 사람만의 의지를 넘어 생명의 수여자이신 하나님의 의지이기도 하다’고 변명했다. 이성은 한 걸음 더 나아가 ‘모든 생명은 생명이 다하는 날까지 생의 의지를 가지고 최선을 다해야 하며, 살기 위해 발버둥치는 것은 결코 비겁한 것이 아닐 뿐만 아니라 생명에 대한 거룩한 의무요 책임’이라고 소리쳤다.

 

사실 이 싸움은 다른 게 아니었다. ‘존재의 이유’에 대한 싸움이었다. 모든 존재의 이유가 아니라 내가 이렇게까지 하면서 존재해야 할 이유 말이다. 존재의 이유도 묻지 않은 채 생명을 연장하려 드는 것은 참으로 무모하고 억지스런 짓이라는 생각에 나는 ‘내 존재의 이유’를 묻지 않으면 안 됐다.

 

그러면 ‘내 존재의 이유’를 발견했는가? 아니다. 나는 비싼 대가를 지불하면서까지 생존해야 할 뚜렷한 이유를 알지 못한 채로 수술에 임했고, 수술 이후에는 살아난 것을 기뻐했고, 또 생명의 동산을 거닐고 있음을 확인하며 황홀해했다. 그랬다. 내 존재의 이유를 알지 못한다고 해서 사는데 그리 큰 걸림돌이 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계속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아들을 잡으면서까지 살아난 이유가 무엇인지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복음을 더 순수하게 전파하는 것? 아들의 멘토(Mentor)가 되는 것? 교회를 개혁하는데 이바지하는 것? 존재의 변화를 이루어 성화하는 것? 그렇게 거창할 것 없이 단지 행복하게 사는 것? 작은 텃밭을 일구며 소리 없이 사는 것? 나름대로 열심히 묻고 찾았다. 하지만 이것이 내 존재의 이유라고 확정적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그러다가 어느 때부터인지 새로운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존재의 이유’, 그것은 애당초 물어도 물어봐도 찾을 수 없는 것인지 모르겠다는 생각, 마치 물 위에 떠 있는 부평초처럼 존재의 뿌리를 내리지 못하는 것이 존재의 운명인지도 모르겠다는 엉뚱한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과연 존재의 이유란 것이 있는 것일까? 아니면 존재의 이유가 분명히 있는데 내가 모르는 것일까? 개인적인 차원의 존재의 이유란 애당초 없는 게 아닐까? 이런 생각들이 떠오르면서 점차 존재의 이유가 반드시 있어야 하는 것인지에 대한 의문이 일기 시작했다. 또 존재의 이유란 것이 없지는 않지만 부활의 그날까지는 어둠에 싸여 있어서 분명하게 알 수 없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때로는 존재의 이유 같은 건 애당초 없는 것이라는 단호한 생각이 고개를 드밀기도 했다. 하지만 나뿐 아니라 거의 모든 사람이 존재의 이유를 묻고, 또 알고 싶어 하는 걸 보면 존재의 이유가 없다고 할 수도 없을 것 같고, 그렇다고 해서 꼭 있다고 하기에는 자기 확신에 불과한 것 같고, 정말이지 여간 고민스러운 게 아니었다. 성경을 보아도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다. 사람이 해 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자기에게 무엇이 유익한고”(전1:2-3)라고 말하면서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사람의 본분이니라”(전12:13)고 한 것을 보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 외에 다른 구체적인 존재의 이유란 없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모든 사람은 나름 존재의 이유를 찾기 위해 묻는다. 또 존재의 이유를 발견해야 살아갈 수 있다고 말하기도 한다. 맞다. 사실이다. 하지만 어쩌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 외에는 개별적인 존재의 이유란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생각해보자. 길이 남을 업적? 세상을 바꾸는 위대한 혁명? 헌신적인 봉사? 복음 전도? 세계 선교? 위대한 발명? 경제 부흥? 자녀 생산? 과연 이런 것들이 개별적인 존재의 이유가 될 수 있을까? 그럴 수도 있지만 아닐 수도 있다. 많은 사람들이, 특별히 믿음 좋은 사람들이 ‘이것이 내 사명이요 존재의 이유’라고 말하지만, 사람이란 어쩌면 존재하기에 그저 존재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나님이 존재케 허셨음을 감사하며 존재에 충실하면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단지 살아있음을 기뻐하고 감사하며 경축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존재의 태도일지도 모른다. 존재는 살아야 할 책임일 뿐 이유를 물어야 하는 것이 아닐지도 모르고, 다만 존재에 충실하면 그것으로 족할지도 모른다. 물론 존재에 충실하다는 게 어려운 일이기도 하고, 또 손에 잡히지 않는 뜬구름 같기도 하지만, 하여튼 존재에 충실하면 그것으로 족할지도 모른다. 인간은 이미 놓인 레일 위를 달리는 기차가 아니라, 자기 길을 찾아가는 탐구적 존재일 테니까.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 외에는 모든 것이 열려있는 자유의 존재가 바로 사람일 테니까.

 

그리고 그것이 사실이라면, 내 존재의 이유가 복음을 순수하게 전파하는 것이나, 아들의 멘토(Mentor)가 되는 것이나, 교회를 개혁하는데 이바지하는 것이나, 존재의 변화를 이루어 성화하는 것이나, 단지 행복하게 사는 것에서 어느 하나여야 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든다. 존재의 이유란 열린 길이지 닫힌 길이 아닐테니까 말이다. 물론 전도서가 말한 것처럼 사람의 본분(존재의 이유)이 있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개별적인 존재의 이유, 즉 영원 전부터 정해진 나만의 존재의 이유 같은 건 없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성경을 보면 바울이나 예레미야는 태어나기 전부터 하나님의 특별한 뜻을 위해 부름을 받았다고 고백한다. 모세나 기도온도 그들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하나님의 일방적인 부름을 받았다고 되어 있다. 수많은 사역자들 또한 목사로서의 소명을 받아 목회를 하고 있다고 말한다. 나 또한 그렇게 이해하고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사람의 길이 결정되어 있다고, 사람마다 특별한 존재의 이유가 있다고 말하는 것은 지나친 비약이 아닐까, 무한히 지혜로우신 하나님,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부여하신 하나님의 본성과는 어울리지 않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면? 이미 예상했겠지만,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 외에는 딱히 ‘이것이다’ 할 존재의 이유란 없다는 쪽으로 정리가 된다. 어거스틴도 일찍이 이 진실을 간파했던 것 같다. 그가 “하나님을 사랑하라. 그리고 네 마음대로 하라”고 말한 것을 보면 그렇다. 진정으로 여호와를 사랑한다면 그 이후의 문제는 더 이상 문제될 것이 없단다. 와! 얼마나 놀라운 선언인가! 1500년 전에 이렇게 파격적인 선언을 했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다. 전도서의 말씀도 마찬가지다. ‘여호와를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키는 것이 인간의 본분’이라는 말씀은, 여호와를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키는 것 외에는 딱히 이것이 인간의 본분이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는 말이다. 일차적인 존재의 이유에 충실한 사람이 이차적인 존재의 이유를 벗어나지는 않을 테니까 말이다. 더욱이 ‘여호와 경외’와 ‘여호와 사랑’이 한 묶음이라는 사실, 즉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반드시 경외이어야 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반드시 사랑이어야 한다는 사실을 상기한다면, 결국 전도서와 어거스틴의 말은 같은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생각이 여기에 이르자 비로소 내적 갈등과 물음이 잦아들기 시작했다. 그동안 나를 옥죄었던 물음으로부터 해방된 듯 마음이 가볍고, 물음의 여행이 종착지에 들어선 듯 마음이 편안했다. 결국 ‘있음’을 찾다가 ‘없음’을 발견한 여행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없음’의 발견, 그것은 허망함이 아니라 해방이었다. 하나님을 사랑하면 그것으로 충분한 자유, 이차적인 존재의 이유에 매이지 않을 수 있는 자유,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에만 집중하면 되는 자유를 향한 해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