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전에 양면이 있듯 세상의 모든 일에는 양면이 있습니다. 사람과 사회에도 두 얼굴이 있습니다. 우리가 몸담고 사는 한국사회도 예외가 아닙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매우 열정적이고 진취적입니다. 예술적 감성과 인간적인 정이 넘칩니다. 의지와 도전정신이 뛰어납니다. 위기와 영경을 돌파하는 능력이 강합니다. 하여, 세계 역사상 가장 짧은 시간에 정치적 민주화와 경제적 선진화를 이루어냈습니다. 지난 40년간 눈부신 경제발전을 거듭한 결과 국가경제규모(GDP-Gross Domestic Product) 세계 12위 국가가 되었습니다. 삼성전자는 세계 TV 시장의 20%를 점유했고, LG도 3위 자리를 굳게 지키고 있습니다. 조선업체들은 세계 선박 수주량의 1~5위를 싹쓸이하고 있습니다. 반도체, 휴대전화, 자동차도 세계적인 경쟁력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문화적으로도 한류 열풍이 아시아를 휩쓸고 있습니다. 이것은 유럽의 여러 나라들이 150년에 걸쳐 성장한 것보다 더 많은 발전을 한 것입니다. 불과 40년 전만 해도 상상하지 못했던 일들이 우리의 현실이 되었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성취가 아닐 수 없습니다.

 

오늘의 대한민국을 보는 긍지와 자부심, 그리고 슬픔과 안타까움

 

나는 이처럼 놀랍게 변화한 한국의 현실을 보면서 무한한 긍지와 자부심을 느낍니다. 뜨거운 열정으로 일구어낸 그동안의 성취에 박수를 보냅니다. 하지만 오늘의 대한민국을 바라보면서 슬픔과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압축 성장이라는 지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지나치게 빨리 앞만 보고 달려온 결과라고 생각됩니다만, 우리 사회가 매우 거칠고 공격적이며, 눈에 보이는 성과중심의 사회, 생각하는 것을 싫어하고 기피하는 사회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생활에 영혼이 깃들 여지가 없고, 삶의 여백이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GDP는 세계 12위이지만 국민들이 느끼는 행복지수는 경제규모에 걸맞지 않게 102위로 바닥권이라는 사실이 말해주고 있듯, 비록 많은 것을 성취하기는 했지만 그리 행복한 사회, 사람이 살만한 사회를 이루는 데는 적잖이 실패했다는 것입니다. 외적인 성취는 화려한데 삶의 내실은 심히 빈곤하다는 것입니다.

 

나는 이처럼 상반된 우리사회의 두 얼굴을 보면서 백범 김구 선생님 말씀을 생각합니다. “나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가장 부강한 나라가 되기를 원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남의 침략에 가슴이 아팠으니 내 나라가 남을 침략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 우리의 경제력은 우리의 생활을 풍족히 할 만하고, 우리의 강력은 남의 침략을 막을 만하면 족하다. 오직 한없이 갖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그렇습니다. 김구 선생님의 갈망처럼 우리나라가 부강한 나라보다는 높은 문화의 힘을 가진 나라가 되면 좋겠습니다. 그 문화의 힘으로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나라, 자유와 평화가 가득한 나라가 되면 정말 좋겠습니다. 우리의 사랑이고 미래인 자녀들이 부족할 것 없이 부유한 나라에서 사는 것보다는 자유와 평화의 웃음꽃이 활짝 피어나는 나라에서 살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지식 경쟁에 휘둘리기보다는 다양한 꿈을 꾸고, 깊이 있는 사유를 하며, 사랑하는 법을 배우고 경험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물론 성공하는 것도 중요하고, 잘 사는 것도 중요합니다. 우리 젊은이들이 세계 젊은이들과의 경쟁에서 당당하게 승리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이보다 더 내 가슴을 설레게 하는 것은 우리 모두가 온 인격으로 행복을 느끼며 자유와 평화 가운데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지난 반세기동안 세계 여느 국민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치열하게 일했지 않습니까. ‘빨리 성공하자’, ‘남보다 더 크게 성공하자’, ‘나도 하면 된다’고 스스로를 다그치면서 누구랄 것도 없이 모두가 숨 가쁘게 달려왔지 않습니까. 그러다보니 행복을 가꾸고 돌볼 여유가 없었습니다. ‘행복’을 말하는 것조차 사치라고 생각할 정도였지요.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경제 사정이 기적처럼 좋아진 지금도 상황이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입니다. 아직도 우리는 더 많은 파이를 차지하기 위해 삶을 탕진하고 있고, 더 많은 소유를 위해 삶을 저당잡고 있습니다. 파이는 커졌지만 커진 파이를 차지하기 위한 경쟁은 더 치열해지고 있습니다.

 

외화내빈(外華內貧)의 사회가 된 까닭

 

나는 우리의 이런 현실 - 국가경제규모로는 세계 12위이면서도 국민행복지수로는 세계 102위인 우리의 현실을 바라보면서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과연 이렇게 계속 살아도 좋은 것인지, 지난날 압축 성장을 위해 악착같이 살았던 것처럼 계속 살아도 좋은 것인지, 이제는 삶의 모드를 전환해야 할 때가 아닌지, 이제는 달리던 걸음을 잠시 멈추고 우리네 삶의 정황을 직시하고 성찰해야 하는 게 아닌지, 인간이 수고하는 모든 이유가 단지 경제규모를 크게 하는 것이거나 기술의 발달이 아니라 진정한 삶을 위한 것이라고 한다면 지금쯤에 와서는 성장 지상주의를 검토해야 하는 게 아닌지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지난날 살림은 비록 가난했지만 빈곤함 속에서도 나눔과 웃음을 잃지 않았었습니다. 극심한 환란과 궁핍을 해학으로 승화하고 정(情)으로 이겨냈었습니다. 한(恨)을 흥(興)으로 풀어냈었습니다. 그런데 반만년의 오랜 가난을 극복하고 민주화를 실현한 오늘에 와서는 오히려 우리 민족 특유의 해학과 정이 메말라가고 있습니다. ‘한강의 기적’이라는 소리를 들을 만큼 대단한 경제 부흥을 이루었는데도 사는 것은 더 팍팍하고 피폐해지고 있습니다. 툭하면 욕이고 큰소리입니다. 거칠고 공격적입니다. 왜 일까요? 왜 최빈국에서 세계 12위의 경제규모를 자랑하는 부자 나라가 되었는데도 행복지수는 바닥을 맴돌고 있을까요? 왜 과거보다 더 거칠고 공격적인 사회가 된 것일까요?

 

가장 핵심적인 원인 하나를 꼽는다면, 달리던 걸음을 멈추고 성찰해야 할 때 성찰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검토해야 할 때 검토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1960년대와 70년의 경제개발시대를 호령했던 ‘잘 살아보세’라는 구호는 1980년대 초반이나 후반에는 막을 내렸어야 했습니다. ‘우리도 한 번 잘 살아보자’는 가치가 1970년대까지는 한국사회에 유익한 처방이었지만, 1980년대 중반부터는 새로운 처방전을 제시했어야 했습니다. 하나의 처방이 언제까지나 유익한 것은 아니기 때문에 1980년데 중반부터는 국가의 미래를 향한 전반적인 재검토가 있었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개발독재와 군부독재에는 항거하여 정치적인 민주화를 이루어내는데 성공했지만, 안타깝게도 개발독재와 군부독재시대의 구호였던 ‘우리도 한 번 잘 살아보자’는 가치관에 대해서는 재검토가 없었습니다. 수평적인 정권교체를 통해 개발독재시대의 가치관을 극복할 수 있는 기회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개발독재시대의 구호와 가치관을 극복하지는 못했습니다. 몇 해 전부터 새해가 되면 “부자 되세요”라는 덕담을 주고받는 것을 보아도, ‘잘 살아보자’는 개발독재시대의 가치관은 여전히 우리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최고의 가치관임이 분명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사회가 위대한 성취에도 불구하고 국민행복지수가 바닥을 맴돌고 있는 것은 마땅히 성찰하고 검토해야 할 때 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살림살이가 편리해지고 윤택해졌음에도 불구하고 삶이 피폐하고 빈곤한 것은 앞을 향해 달리던 속도를 조절하고 숨고르기를 해야 할 때 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우리사회가 젊고 탄력이 있으면서도 내부 갈등과 상처를 치유하지 못하는 것은 새로운 처방전을 내놓아야 할 때 내놓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제라도 해야 합니다. 비록 늦었지만 이제라도 개발독재시대의 생활방식과 가치관을 재검토하고, 오늘 우리의 삶을 위협하는 문제들을 극복할 수 있는 새로운 가치관을 찾아야 합니다. 그리고 새로운 가치관에 걸맞은 생활방식으로 전환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한국사회가 위험한 사회에서 안정된 사회로, 방향감각을 잃고 방황하는 생활문화가 조화로운 생활문화로 회복될 수 있습니다. 국민의 행복지수가 향상될 수 있습니다.

 

새로운 전환을 위해

 

그렇다면 오늘 우리의 피폐한 삶, 경제규모 12위이면서도 국민행복지수는 바닥을 맴도는 외화내빈(外華內貧)의 삶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과연 어떤 처방이 필요한 걸까요? 어떤 가치관으로 무장을 해야 하는 걸까요? 21세기 한국사회를 주도할 새로운 처방전은 과연 무엇이어야 할까요? 물론 쉽지 않은 일입니다. 많은 논의와 지혜가 필요한 일입니다. 사람마다 견해가 다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어렵고 복잡한 일일수록 본질을 생각하면 의외로 쉽게 답을 찾을 수도 있습니다. 무엇이 삶이냐 하는 삶의 본질 말입니다.

여러분, 무엇 때문에 열심히 일하십니까? 애쓰고 수고하는 근본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소유를 눈덩이처럼 키우기 위해서입니까? 높은 자리에서 사람을 호령하고 부리기 위해서입니까? 사람들과 사회로부터 인정받기 위해서입니까? 큰 업적을 남기기 위해서입니까? 아마 아닐 겁니다. 이런 것들이 이차적인 이유는 될지 몰라도 근본 이유는 아닐 겁니다. 근본 이유는 말하지 않아도 마음이 압니다. 마음은 진실을 압니다. 우리가 애쓰고 수고하는 이유가 행복하기 위해서라는 진실을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다시금 삶의 본질로 돌아가야 합니다. 사람이 이 땅에서 애쓰고 수고하며 최선을 다하는 것은 행복하기 위해서라는 평범한 진실로 돌아가야 합니다. 생활을 넉넉하게 하는 일에서 삶을 풍성하게 일로 전환해야 합니다. 사람이 사는 것을 가리켜 ‘삶’이라고 특별하게 일컫는 것은, 사는 것이 생활 이상이어야 하기 때문이라는 진실을 기억하고 생활에서 삶으로 전환해야 합니다. ‘성공모드’(Success Mode)에 맞춰졌던 삶의 모드를 ‘행복모드’(Happy Mode)로 전환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그동안 애써서 쌓아올린 압축성장의 열매들이 헛되지 않을 수 있고, 그동안 성취한 눈부신 발전의 열매들이 생활만이 아니라 삶으로까지 침투해 들어갈 수 있으며, 그동안 인고하며 달려온 진정한 이유인 행복한 삶에 가까이 갈 수 있을 테니까요.

 

배워야 할 행복

 

사회 심리학자인 에리히 프롬은 <사랑의 기술>에서 사람들이 다들 사랑을 갈망하면서도 정작 사랑에 대해 배우려고 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지적했습니다. 그러면서 사람들이 사랑에 대해 배울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이유를 세 가지로 설명했습니다. 첫째,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랑의 문제를 ‘사랑하는’ 문제, 곧 사랑할 줄 아는 능력의 문제가 아니라 오히려 ‘사랑받는’ 문제로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둘째, 사랑의 문제는 ‘능력’의 문제가 아니라 ‘대상’의 문제라고 가정한다는 것입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쉬운 일인데, 단지 사랑할 사람 또는 사랑받을 올바른 대상을 발견하기가 어려울 뿐이라고 생각한다는 거지요. 셋째, 사랑을 하게 되는 최초의 경험과 사랑에 머물러 있는 상태를 혼동한다는 것입니다. 강렬하고 짜릿하고 열정적이었던 최초의 경험을 사랑의 전형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사랑에 대해 배울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는 겁니다. 매우 정확하고 깊이 있는 분석이라고 생각합니다.

 

행복에 대해서도 그런 것 같습니다. 다들 행복을 갈망하면서도 정작 행복의 길을 배우려고 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인생 최고의 법인 사랑에 대해 배울 필요를 느끼지 않는 것처럼 행복에 대해서도 배울 필요를 느끼지 않습니다. 인생의 현실을 보세요. 다들 행복을 원하면서도 정작 사는 걸 보면 원하는바 행복은 추구하지 않고 행복과는 거리가 먼 것들만 좇고 있지 않습니까. 무조건적인 승리, 좀 더 높은 명예, 좀 더 많은 돈, 좀 더 많은 권력을 손에 넣기 위해 모든 정력을 쏟고 있지 않습니까. 정말 집중해야 할 삶에는 집중하지 않고 생활에만 넋이 빠져 있지 않습니까. 사실입니다. 대부분 행복의 길을 배워야 할 필요를 느끼지 않습니다. 배운다고 해도 그저 단방 약을 처방받는 것처럼 여기저기 떠도는 쉽고 간단한 비방(祕方)에만 귀를 기울입니다. 삶이란 비방이 없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어딘가에 비방이 숨어 있기라도 한 것처럼 비책(祕策)을 찾습니다. 그러나 비책이라고 말하는 것들은 대부분 거짓일 가능성이 많습니다.

 

여러분, 인생에서 꼭 배워야 할 가장 중요한 배움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사랑하는 법’과 ‘행복하게 사는 법’ 아니겠습니까? 사실 이 두 가지보다 더 중요한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없습니다. 생각하고 또 생각해보아도 인생에서 이 두 가지를 배우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고 생각됩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법’과 ‘행복하게 사는 법’을 배우기 위해서는 세계의 중심이시고 근원이신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품에서 나온 생명을 알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약속된 하나님나라를 알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과 하나님이 펼치신 생명과 하나님나라의 약속에 귀 기울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무릇 배움은 들음이니까요. 생활은 가르침을 통해서도 배울 수 있지만, 삶은 오직 들음으로만 배울 수 있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