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현재의 삶의 방식을 행복모드로 전환해야 하는 이유는 단지 국가경제규모에 비해 국민행복지수가 낮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사회적이고 정서적인 문제 때문만은 아닙니다. 이보다 훨씬 중요하고 본질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눈에 잘 보이지는 않지만 삶과 행복을 이야기하지 않으면 안 되는 절박한 이유가 있습니다. 어떤 분들께서는 먹고 살기도 힘든 판에 웬 행복 타령이냐고 하실지 모르겠으나, 행복을 이야기하지 않으면 안 되는 절대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창조한 시원(始原)의 세계

삶에서 왜 행복을 들먹여야 하는지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시원(始原)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삶의 원형이 무엇이었는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러면 창조의 시원으로 돌아가 볼까요? 성경을 보면 다짜고짜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고 선언합니다. 그리고 세계를 창조하실 때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다’는 말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좋았다’는 말은 히브리어로 ‘토브’인데 기쁨 ․ 질 좋음 ․ 탁월함 ․ 행복이라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성경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계가 매우 탁월하고 훌륭했다고 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뜻하신 바와 일치하는 세계였다고 보았습니다. 더욱이 성경은 최초의 삶의 자리를 가리켜 ‘에덴’이라고 했습니다(창2:7-8). ‘에덴’은 ‘기쁨’, ‘즐거움’이라는 뜻을 가진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사람에게 허락하신 최초의 삶의 자리를 가리켜 ‘에덴’이라고 했다는 것은, 아름답고 조화로운 생명의 세계에서 기쁨과 감사로 충만한 삶을 사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이 뜻하신 ‘본래적 삶’이라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야 할 ‘삶의 원형’이 바로 ‘에덴’ - ‘행복의 동산’이라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최초의 인간관계도 볼까요? 여자가 존재하기 전에 아담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세계와 동물을 다 둘러보았습니다. 하지만 함께 교제할 동류(同類)를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마음과 마음을 나눌 파트너가 없어 허전했습니다. 이를 지켜 본 하나님께서는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고, 그의 갈비뼈를 취하여 여자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아담에게 데리고 왔습니다. 아담은 하와를 보자말자 자기와 인격적으로 소통할 수 있는 동류인 것을 알고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며 기뻐했습니다. 마음껏 사랑과 마음을 주고받을 수 있는 상대가 있다는 것이 감격스러웠습니다. 둘은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신뢰와 연합이 두터웠습니다. 어떠한 불신이나 미움, 갈등 같은 것이 전혀 없었습니다. ‘에덴’이라는 말 그대로 두 사람은 정말 기쁨으로 충만했습니다. 서로 사랑하고 신뢰하는데서 우러나오는 행복으로 충만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어떠했습니까? 예수님이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을 때에 하늘이 열리더니 성령이 비둘기처럼 임하며 음성이 들렸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마3:17). 이 말씀에서 보는 것처럼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는 사랑과 순종, 신뢰와 기쁨이 충만했습니다.

 

이처럼 모든 존재의 근원이시고 관계의 원형이신 삼위 하나님 자신이 사랑으로 하나 된 기쁨의 관계였고, 인간관계의 원형인 아담과 하와도 사랑으로 하나 된 기쁨의 관계였습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모든 세계와 사람에게 허락하신 삶의 자리도 사랑으로 하나 된 기쁨의 세계였습니다. 세계의 시원을 보면 모든 것이 사랑으로 하나 된 기쁨의 세계였습니다. 창조자와 피조물이 함께 기쁨의 노래를 부르는 행복의 세계였습니다. 행복의 노래가 삼라만상의 운율이었습니다. 행복이 삶이었고, 삶의 노래가 행복이었습니다. 프랑스의 철학자 베르트랑 베르줄리는 삶과 행복에 대하여 기막힌 말을 했습니다. “행복은 삶의 폭발이다. 우리의 삶이 삶 속으로, 삶이 우리의 삶 속으로 범람하는 현상이다.” 그렇습니다. 삶과 삶이 조우하는 세계, 삶과 삶이 폭발하는 행복의 세계가 바로 하나님이 창조한 시원의 세계였습니다.

 

때문에 삶의 관건, 삶의 중심축, 삶의 본질, 삶의 목표, 삶의 이유, 삶의 영혼은 바로 삶이어야 하고, 삶의 폭발인 행복이어야 합니다. 진실로 삶은 행복이어야 하고, 행복한 것이야말로 삶일 수 있습니다. 삶에서 삶보다 더 위대하고 값진 것은 없으니까요. 삶과 삶이 조우하고 범람하는 것보다 더 소중하고 본질적은 없으니까요.

 

형편없이 으깨어진 삶

 

그런데 삶의 본질이요 중심축이요 목표요 영혼인 삶이 으깨어지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신 삶의 원형이 산산조각 나버리고 말았습니다. 죄가 침투해 들어와 축복받은 삶을 갉아먹었기 때문에, 죄가 삶과 삶을 소외시켰기 때문에, 삶과 삶은 더 이상 조우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삶 대신 죽임과 죽음이 범람하게 되었습니다. 싸움, 갈등, 반목, 질시, 분노, 짓이김이 일상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삶의 실상을 몇 장면만 볼까요? 남의 딸이 애인이 많으면 행실이 가벼워서라고 말하고, 내 딸이 애인이 많으면 인기가 좋아서라고 말합니다. 남이 학교를 자주 찾는 것은 치맛바람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내가 학교를 자주 찾는 것은 높은 교육열 때문이라고 주장합니다. 며느리가 친정 부모한테 용돈 주는 것은 남편 몰래 돈을 빼돌리는 것이라고 험담하고, 딸이 친정 부모한테 용돈 주는 것은 효성이 지극해서라고 자랑합니다. 어떻습니까? 매우 익숙한 장면이지요? 별 것 아닌 것처럼 지나칠 수도 있는 장면입니다만, 바로 이런 모습이야말로 삶이 얼마나 처참하게 무너졌는지를 보여주는 명장면이 아닐 수 없습니다. 너는 누르고, 나는 감쌉니다. 현상은 같은데 나냐, 너냐에 따라 전혀 다른 해석을 합니다. 그러니 여러분, 어떻게 삶이 폭발할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삶이 행복할 수 있겠습니까?

 

너희의 행복을 위하여

 

하나님이 허락하신 삶의 원형이 이처럼 산산조각 났습니다. 에덴의 세계, 사랑으로 하나 된 기쁨의 세계, 삶이 폭발하고 삶이 범람하는 행복의 세계가 완전히 무법천지가 되었습니다. 심히 일그러지고 썩었습니다. 그러니 시원의 세계를 창조하신 분께서 얼마나 마음이 아프셨겠습니까? 불행의 늪에 빠져 허덕이는 생명과 세계를 어떻게 보고만 있을 수 있겠습니까? 행복의 노래 대신 한숨과 신음이 가득한 생명들을 어떻게 외면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으깨어진 삶, 신음하는 세계를 향해 발 벗고 나서야 했습니다. 입을 열어야 했습니다. 입에 단내가 나도록 말씀해야 했습니다.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이냐? 곧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그 모든 도를 행하고, 그를 사랑하며,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고, 내가 오늘날 네 행복을 위하여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킬 것이 아니냐?”(신10:12-13). 자, 이 말씀을 유심히 살펴봅시다. 하나님은 지금 이스라엘 백성에게 당신의 명령과 규례를 지키라고 요구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하나님의 명령만 들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명령과 규례를 지키겠다고 믿음으로 달려들기만 해서는 안 됩니다. 그보다 먼저 살펴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과 규례가 어떤 명령이며 어떤 규례냐 하는 것입니다. 모세는 분명하게 말했습니다. “너희의 행복을 위한 명령과 규례”라고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지키라고 요구하는 명령과 규례가 실은 “그들의 행복”을 위한 것이라는 겁니다. 당신의 명령과 규례는 전적으로 그들의 행복을 위한 “행복 안내서”라는 겁니다. 그러니 거북스럽게 생각하지 말고 지키라는 겁니다. 그렇습니다. 이스라엘의 행복이 하나님의 모든 행위와 말씀의 궁극적인 이유였습니다.

모세는 이렇게 직설적으로 말하기도 했습니다.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명하신 모든 도를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삶을 얻고, 복을 얻어서 너희의 얻은 땅에서 너희의 날이 장구하리라.”(신5:33).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이 모든 규례를 지키라 명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항상 복을 누리게 하기 위함이며”(신6:24). 예레미야 선지자도 말했습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 내가 아나니 재앙이 아니라 곧 평안이요, 너희 장래에 소망을 주려 하는 생각이라.”(렘29:11). 예수님께서도 이 땅에 오신 목적을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10:10).

 

심지어 성경은 이렇게 선언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아! 너는 행복자로다. 여호와의 구원을 너같이 얻은 백성이 누구뇨?”(신33:29). 열방 가운데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구별된 이스라엘을 가리켜 한 마디로 ‘행복자’라고 불렀습니다. 바울도 값없이 의롭다 함을 받은 자를 가리켜서 ‘행복자’라고 했습니다(롬4:6-8). 성경은 이처럼 하나님의 모든 말씀과 행위의 근본 의도가 인간의 기쁨과 행복에 있다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창조의 순간부터 주님 오시는 그날까지 하나님의 불변하시는 뜻은 오직 피조물이 행복하게 사는 것입니다. 사람을 포함해 온 피조물이 존재의 본성을 억압당하거나 조종당하는 일 없이 존재 자체를 충분히 드러내며 사는 것입니다. 이것은 의심할 수 없는 성경적 진실입니다.

 

행복은 의무이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계는 한 마디로 말해서 ‘에덴’입니다. 사랑으로 하나 된 기쁨의 세계, 삶과 삶이 조우하고 범람하는 행복의 세계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창조세계가 행복의 동산이 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모든 피조물의 유전자 속에 ‘행복 의지’를 넣어주셨을 것입니다. 비록 성경에 이런 진술이 문자적으로 나오지 않지만, 에덴의 세계를 허락하신 하나님께서 피조물 안에 ‘행복 유전자’를 빼놓았을 리가 없을 것이라는 건 충분히 상상할 수 있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사람 파스칼은 말했습니다. “모든 사람은 행복을 추구하며 여기에 예외는 없다. 행복을 추구하는 수단은 다를지라도 그 모든 것은 한 지점을 향하고 있다. … 행복은 모든 이들의 모든 행동의 동기이며, 심지어 스스로 목을 매달아 죽는 사람도 이 점은 같다.” 영국의 철학자 데이비드 흄도 “사람이 하는 모든 노력의 궁극적인 목적은 행복의 달성이다. 행복을 위해 기술을 발명하고, 학문을 육성하고, 법을 만들고, 사회를 형성한다.”고 말했습니다. 옳습니다. 모든 사람의 행동에는 근본적으로 행복의지가 작동하고 있습니다. 행복의지가 없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아니, 사람뿐 아닙니다. 가까이 다가가 보면 개미와 달팽이에게도 행복의지가 있고, 나팔꽃과 해바라기에게도 행복의지가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식물도 사랑한다고 말하면 잘 자라고, 미워하고 욕하면 죽는다는 실험 결과가 보고되고 있고, 심지어 물도 미워하고 욕을 하면 물의 형태가 일그러진다는 사진자료도 유포되고 있습니다. 정녕 그럴 것입니다. 사람이 지각하지 못해서 그렇지 모든 피조물 안에는 행복유전자, 행복의지가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피조물 안에 있는 행복 의지는 곧 하나님의 의지라고 믿습니다.

 

그렇다면 행복에 대한 우리의 상식은 뒤집어져야 합니다. 지금까지는 행복을 인간의 권리라고 이해했습니다. 물론 인간적이고 사회적인 차원에서 보면 행복은 인간의 권리입니다. 인간에게는 행복추구권이 있습니다. 하지만 창조의 관점에서 보면 좀 다릅니다. 행복은 인간의 권리이기 이전에 의무이자 책임입니다. 그것도 으뜸 되는 의무요 책임입니다. 왜냐고요? 왜 행복이 의무냐고요? 행복한 삶이야말로 하나님이 뜻하신 삶의 원형이니까요. 행복에 겨운 피조물들의 경배를 받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는 일이니까요. 사랑으로 하나 된 기쁨의 세계야말로 하나님의 창조의지에 가장 부합하는 세계이니까요.

 

행복을 의심치 말라

 

더욱이 행복은 삶 자체입니다. 행복한 것만이 삶이요, 삶의 본질이 또한 행복입니다. 행복이 빠진 삶은 형벌이요 저주요 죽임이지 삶이 아닙니다. 우리가 행복을 추구하는 것은 행복이 우리에게 뭔가를 가져다주기 때문이 아닙니다. 행복은 인생의 수단이 아닙니다. 행복은 그 자체가 목적이요, 삶에서 경험할 수 있는 최상의 것이기 때문에 추구하는 것이지 다른 무엇을 위해 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2세기의 성인인 이레네오스는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충만되게 살고 있는 인간으로 재현된다.” 심리학자인 리처드 스티븐스는 삶의 좌우명으로 “살고 싶으면 행복하라.”고 되뇌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행복과 삶은 본질상 하나입니다. 삶은 행복하라고 주신 선물입니다. 사람과 세상은 본래 행복을 지향하도록 창조되었습니다.

 

물론 삶의 원형인 ‘에덴’이 깨어진 후 삶의 현실은 달라졌습니다. 행복만이 존재하는 현실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습니다. 행복만이 행복일 수는 없습니다. 때로는 고통이 행복이 되기도 하고, 아픔을 통해 행복을 발견하기도 하는 삶의 역설, 삶의 유쾌한 장난을 피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행복을 위해 애를 쓴다 해도 생의 고단함을 피할 수 없습니다. 슬픔과 고통을 완전히 떨쳐낼 수 없습니다. 행복을 짓밟는 요소들이 삶 전체를 둘러싸고 있습니다. 이것은 어느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에덴’ 이후의 운명적 현실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행복을 이야기할 때에는 반드시 이 진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 진실을 외면한 채 행복을 이야기하는 것은 행복을 환상으로 만드는 것이고, 비현실적인 이상으로 왜곡하는 것이기 때문에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변할 수 없는 진실은 이것입니다. 삶은 행복하라고 주어진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것입니다. 행복을 추구하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의지에 부합하는 일이며, 가장 정직한 인간적 의지이고, 가장 위대한 인생의 선택임에 틀림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늘이 무너져도 흔들릴 수 없는 인생 최고의 진실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행복한 삶을 가장 위대한 가치와 목표로 삼는 것을 의심할 이유가 없습니다. 행복한 삶을 추구하는 것을 주저할 이유가 없습니다. 독일의 시인 헤르만 헤세는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인생에 주어진 의무는 다른 아무 것도 없다네. 그저 행복하라는 한 가지 의무뿐. 우리는 행복하기 위해 세상에 왔지.” 진실로 그렇습니다. 행복은 권리가 아닙니다. 행복은 하나님 앞에 선 인간의 신성한 의무입니다. 결코 회피할 수 없는 막중한 책임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행복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태초에 ‘에덴’을 삶의 원형으로 창설하신 하나님의 의지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아직도 유효하니까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