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신비와 경이로 가득하다. 특히 생명의 신비는 영원히 풀 수 없는 베일에 싸여 있다. 사람 또한 한없이 복잡하고 오묘하며 신비롭다. 20세기 프랑스의 시인이요 비평가요 사상가인 폴 발레리는 “인간은 스스로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복잡한 존재다.”고 말했고, 지혜의 교사로 한 세대를 풍미했던 크리슈나무르티는 “자신에 대한 앎에는 끝이 없다. 당신은 끝에 도달할 수 없으며 결론에 도달할 수도 없다. 그것은 끝이 없는 강이다.”고 말했다. 옳다. 내가 누구인지를 아는 일은 평생을 궁구해도 다 알 수 없는 요원한 숙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은 내가 누구인지를 알아야 한다. 내가 누구인지를 알아야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고, 행복의 세계로 진입해 들어갈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자신을 안다는 것

 

사람이 자신에 대해 알아야 할 가장 근본적인 앎은 무엇일까? 사람을 일컬어 생각하는 갈대, 직립하는 동물, 도구를 사용하는 존재, 사회적 동물, 문화적 존재, 미완성 교향곡, 역사적 존재, 종교적 존재, 자기 자신과 관계하는 유일한 존재, 성적인 존재라고들 말한다. 일리가 있다. 사람이란 본래 한 마디로 규정할 수 없는 존재 아닌가. 때문에 여러 측면에서 접근하고 이해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사람이 자기를 안다는 것은 이 모든 것 이상을 의미한다. 적어도 두 가지 근원적 사실을 알아야 한다. 첫째, 하나님을 알아야 한다. 둘째, 피조물임을 알아야 한다. 성경은 하나의 선포로 시작한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창1:1)는 위대한 선포로 말이다. 사실 이 짧은 한 마디는 모든 성경 이야기의 시작이며 근본이고, 온 세상과 온 생명의 시작과 근본을 이해할 수 있는 전거요 창이다. 세상과 생명의 신비를 이만큼이라도 엿보고 해석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한 마디가 있기 때문이다. 사람에 대해서는 더더욱 그렇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만들어졌기 때문에 마땅히 하나님을 알아야 하고, 하나님에 의해 만들어진 피조물이라는 근원적 진실을 알아야 한다.

 

선악과를 두신 이유

 

하나님이 사람에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고, 먹는 날에는 정녕 죽는다고 금령을 내리신 것도 다른 뜻이 있어서가 아니다. 피조물이라는 근원적 진실을 기억시키려고 그런 것이다. 하나님은 창조자이시고 사람은 그의 피조물이라는 사실이야말로 사람이 기억해야 할 근본 인식이기 때문에, 그 인식을 망각하는 것은 곧 죽음을 부르는 것이 될 만큼 중대한 인식이기 때문에 그걸 잊지 말라고 선악을 아는 나무를 에덴에 두신 것이다.

그런데 아담은 하나님이 금하신 열매를 먹음으로써 피조물 됨의 운명과 한계를 벗어던져버렸다. 하나님은 창조자이시고 사람은 그의 피조물이라는 근본 진실을 폐기처분해버렸다. 스스로 자신의 피조성을 짓밟아버렸다. 이것이 죄다. 아더 홈즈(Arthur F. Holmes)는 죄의 핵심을 “피조성을 거부하는 것”이라고 했다. 신학자 김세윤은 “자기를 주장하려는 의지로 하나님에 대한 독립을 선언하고 자기의 지혜, 자기의 힘, 자기의 시간 등, 자기의 제한된 자원으로 자기의 생명과 행복을 추구할 수 있다고 생각하며 하나님의 무한한 자원에 의지하지 않고 그의 완전한 사랑과 의지에 순종하지 않는 것”이라고 했다. 그렇다. 피조물 됨을 망각하는 것이 죄의 본질이요 핵심이다.

 

피조성 위에 세운 삶의 축복

 

오늘도 마찬가지다. 사람이 삶의 첫 걸음을 떼기 위해서는 삶을 무너뜨린 죄악을 넘어서야 한다. 창조주를 알고, 자신의 피조물 됨을 깊이 인식함으로써 피조물 됨의 운명과 한계를 받아들여야 한다. 사실 피조성을 인식하고, 피조물 됨의 운명과 한계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축복중의 축복이고, 은총중의 은총이다. 피조성을 깊이 인식하며 사는 것이야말로 가장 든든한 삶의 반석이다.

정말 그럴까? 자신의 피조성을 아는 것이 정말 삶의 든든한 반석일까? 간략하게 살펴보자.

 

첫째, 창조주 하나님을 내 필요에 따라 수단화하거나 동원하는 짓을 하지 않을 수 있다. 아니, 창조주를 자기 뜻대로 부리는 오만한 짓을 할 수가 없다. 나를 만드신 분을 아는데, 그리고 내가 그분의 피조물임을 아는데 어떻게 그분 앞에 엎드리지 않을 수 있겠는가? 어떻게 그분의 은총에 기대지 않을 수 있겠는가? 창조주의 품안을 거닐고 있는데 무엇을 두려워하며 염려하겠는가? 세상의 그 무엇이 창조주의 품을 대신할 수 있겠는가? 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그분의 선물로 인식하며 사는데 어떻게 감사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어떻게 그분을 기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만물을 선물로 받은 자가 어떻게 부요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아니 그런가? 진실로 창조주 하나님을 알고, 또 자신의 피조성이 깊이 인식하며 사는 자는 세상에서 가장 따스한 품에 안겨 사는 자, 세상에서 가장 든든한 반석 위에 인생의 집을 세운 자, 세상에서 가장 부요한 자,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자일 수밖에 없다.

 

둘째, 선악을 판단하는 재판관 노릇을 하지 않을 수 있다. 자신의 피조성을 깊이 인식하는 자는 선악을 판단하실 이가 오직 여호와 하나님 밖에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스스로 재판관이 되는 오만한 짓을 할 수가 없다. 성경은 인류의 죄악이 선악을 아는 열매를 먹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말한다. 다시 말해 선악을 아는 것이 곧 죄라는 것이다. 아니, 왜 ? 왜 선과 악을 아는 것이 죄란 말인가? 선과 악을 아는 것이야 마땅한 알아야 하는 것 아니냐고 반문하고 싶은 분이 계실 것이다.

하지만 선과 악을 아는 것은 분명히 죄다. 왜냐하면 사람에게는 선과 악을 판단할 수 있는 지혜와 지식이 없기 때문이다. 사람이 비록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이성적 존재라고는 하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악을 판단할 능력은 없다고 보아야 한다. 본래 선악의 문제는 윤리적 차원을 넘어서는 일이요,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복잡하고 미묘한 문제이니까 말이다. 선악은 만물 위에서 만사를 다스리시는 여호와 하나님만이 판단할 수 있는 문제이지 만물 중에 하나이고, 만물 안에 있는 사람이 판단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다. 인간의 지식이나 지혜로는 절대 포착할 수 없는 것이 선악이다. 물론 윤리적인 차원에서 선악을 분별하는 것이야 마땅히 해야 할 일이긴 하나, 사실은 그것조차도 제대로 판단하기가 어렵다. 하물며 선악에 대한 판단이야 말해 뭐하겠는가. 마땅히 유보해야 한다. 여호와 하나님께 위임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결코 죄악을 피할 수 없다.

인간의 불행은 어디에서 연유할까? 당신의 마음을 불편하게 만드는 주범은 무엇일까? 당신이 경험하는 모든 불행과 아픔을 곰곰이 생각해보라. 아마 선악을 판단하거나 판단받는 데에서 온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혹여 납득이 잘 안 된다면 한 번 실험해보라. 당신이 재판관이 되어 주변의 사람들과 일상의 많은 일들을 선악 간에 판단해 보라. 그리고 옆에 있는 사람에게 매사를 판단받아 보라. 당신은 틀림없이 불행해지고야 말 것이다. 이것은 확률 100%다. 하지만 자신의 피조성을 아는 자는 이런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는다. 그래서 자신의 행복을 보존하게 된다.

 

셋째, 독립된 개체로 살지 않을 수 있다. 자신의 피조성을 깊이 인식하며 사는 자는 자기를 중심으로 세상이 돌아가야 한다는 엉뚱한 오해를 할 수가 없다. 창조자와 수많은 피조세계의 그물망을 인식하는 자, 창조주와 만물의 도움이 없이는 한 순간도 살 수 없다는 근원적 진실을 아는 자는 그 관계의 그물망에 자신의 삶을 사뿐히 내려놓을 줄 안다. 창조자가 들려주시는 말씀에 귀 기울일 줄 알고, 그분께 기도할 줄 알며, 만인과 만물에게 감사할 줄을 안다. 쌀 한 톨의 위대함을 알고, 모래알 하나의 소중함을 안다. 풀 한 포기가 있음으로 내가 있음을 안다.

그렇다. 피조물이 창조자의 영광과 권위를 인정하고, 그 앞에 굴복하며, 그분의 말씀에 귀 기울이는 것은 결코 미덕일 수 없다. 종교적인 경건은 더더욱 아니다. 그것은 자신이 피조물임을 아는데서 나오는 마땅하고도 자연스러운 태도일 뿐이다. 그리고 그런 태도로 사는 것이야말로 성경이 말하는 신앙의 본질이라 할 수 있다. 성경적인 신앙은 종교적인 영역이나 영적인 세계에 제한되는 것이 아니라 삶의 모든 영역, 즉 세속의 모든 일이 주님과 연결되고, 주님 안에 들어오는 삶의 체계이다. 좀 소박하게 말하면 쌀 한 톨 속에서 하나님을 보고, 봄을 알리는 진달래 꽃망울 속에서 하나님의 손길을 느끼고, 오늘 내 앞에 벌어지는 크고 작은 일들 속에서 하나님의 임재와 사랑을 느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 신앙은 일상 속으로 침투해 들어가야 한다. 아니, 철저하게 세속화되어야 한다. 신앙이 세속화되지 않으면 종교의 껍데기를 쓰게 되고, 영적 환원주의에 빠지게 되고, 종교의 노예로 살아가게 되니까 말이다. 하지만 자신의 피조성을 아는 자는 창조자 앞에서 알몸으로 산다. 감출 것도 없고, 숨길 것도 없고, 꾸밀 것도 없다. 흠투성이 그대로, 연약함 그대로, 한계성을 안고 사는 존재 그대로 하나님 앞에 살면 된다. 불완전함을 부끄러워 할 것도 없고, 절대적인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헛된 노력을 할 필요도 없다. 자신의 존재와 일상의 모든 것을 하나님 앞에 드러내놓고 살면 된다. 그럴 때 마음에 평강과 자족하는 행복이 하늘로부터 임한다. 바로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신앙의 정수다.

 

기도도 마찬가지다. 기도는 피조성에서 터져 나오는 외침이다. 신앙이 있든 없든 모든 사람은 예외 없이 기도한다. 평상시 신을 부정하는 사람도 어떤 급박한 상황이나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지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기도하는 것을 볼 수 있다. 하늘을 향해 외치든, 땅을 향해 부르짖든, 허공에 중얼대든, 아테네 사람들처럼 알지 못하는 신에게 예배하며 기도하든, 형태와 형식은 다를지라도 근본을 따지면 그 모든 것이 다 기도다. 그 모든 기도가 다 하나님과의 만남도 아니고, 인격적인 대화도 아니지만, 인간보다 더 큰 무엇을 향한 인간의 외침이라는 차원에서 기도라 할 수 있다. 때문에 기도는 기독교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종교마다 기도가 있고, 사람마다 기도한다. 기도는 피조성에서 터져 나오는 피조물의 외침이지 종교적인 거룩한 행위가 아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 형제들에게 권면했다. “항상 기뻐하십시오. 끊임없이 기도하십시오. 모든 일에 감사하십시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여러분들에게 바라시는 하나님의 뜻입니다.”(살전5:16). 이 권면은 인간의 피조성을 아는 자가 아니면 할 수 없는 권면이다. 또 자신의 피조성을 알지 못하고서는 절대로 이렇게 살 수 없다. 항상 기뻐할 수 없고, 끊임없이 기도할 수 없고, 모든 일에 감사할 수 없다. 생각해보라. 자신이 피조물임을 알지 못하는 자가 어떻게 기도할 수 있겠는가? 눈앞에 펼쳐져 있는 모든 것들이 창조주께서 베푸신 선물임을 알지 못하는 자가 어떻게 감사하며 기뻐할 수 있겠는가?

 

시편 기자는 이렇게 노래했다.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어디서 올꼬.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여호와께서 너로 실족지 않게 하시며, 너를 지키시는 자가 졸지 아니하시리로다.

여호와는 너를 지키시는 자라.

여호와께서 네 우편에서 네 그늘이 되시나니,

낮의 해가 너를 상치 아니하며, 밤의 달도 너를 해치 아니하리로다.

여호와께서 너를 지켜 모든 환란을 면케 하시며 또 네 영혼을 지키시리로다.

여호와께서 너의 출입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지키시리로다.”(시편121)

이 노래도 역시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를 알지 못하는 자, 자신이 창조자의 보호를 받는 피조물임을 알지 못하는 자는 부를 수 없는 노래다.

 

영원한 진실 하나

 

인간이 피조물이라는 것은 영원히 변할 수 없는 근원적 진실이다. 예수님이 재림하시고 새 하늘과 새 땅이 도래한다고 해도 변할 수 없는 절대 진실이다. 우리는 분명히 새 하늘과 새 땅에서도 피조물 이상의 존재로 살지 않을 것이다. 그러기에 우리가 이 진실을 외면하고서는 인간을 이야기할 수 없다. 인간을 이해할 수 없다. 인간이 될 수 없다. 사람이 만들어진 존재라는 사실은 벗어던져야 할 무거운 짐이 아니다. 숨겨야 할 수치가 아니다. 사람이 만들어진 존재라는 사실은 수치가 아니라 자랑이고, 짐이 아니라 은총이요 축복이다. 삶의 든든한 반석이다.

사람들은 대부분 피조물 됨의 운명과 한계를 인식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를 모른다. 그것이 얼마나 든든한 삶의 밑동인지를 모른다. 그리스도인도 예외가 아닌 것 같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창조 신앙을 고백하긴 하나 무력한 구호에 불과할 뿐, 날마다, 아침마다, 순간마다 기억하고 되새기는 삶의 근원적 진실은 아니라고 생각된다. 그래서 피조물임을 아는 자만이 부를 수 있는 행복의 노래를 부르지 못하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삶의 노래, 행복의 노래는 누구나 부를 수 있는 게 아니다. 삶의 노래, 행복의 노래는 오직 자신의 피조성이 뼛속 깊이 인식하고 날마다, 아침마다, 순간마다 그분 앞에서 새김질하는 자만이 부를 수 있는 매우 특별한 노래다.

피조물임을 아는 자여! 그대는 진정 행복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