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문호 왕멍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 중에 하나는 생존이고, 다른 하나는 배움이라고 했다.

그가 말하는 배움은 그 폭이 매우 넓다.  <나는 학생이다>는 책에서

“비록 나의 학력은 고등학교 1학년에 그쳤지만, 그 이후 나는 조금도 배움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나는 끊임없이 읽었으며, 각 분야의 지식들을 쌓아나갔을 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에서도 모든 사람들을 스승으로 모셨고, 곳곳에 나의 교실이 있었고, 시시각각 언제나 학기 중이었다.”고 했다. 그는 늙어서도 “학생”을 자칭하며 살았다. “나는 이미 고희의 나이를 넘긴 사람이다. 그러나 지금도 ‘나는 학생이다’라고 스스로를 칭하고 있다. …… 그러나 오직 독서만이 아니다. 가장 좋은 스승은 생활이며, 가장 좋은 교실은 실천이기 때문이다. 배움이란 모든 것을 망라할 수 있다. 생활이 바로 배움이며, 배움이 바로 생활이며, 배움이 바로 성격이다. 배움은 사람의 첫 번째 특징이며, 첫 번째 장점이며, 첫 번째 지혜이며, 첫 번째 근원이다. 배움은 일종의 건설이며, 지조이며, 면역기능이다. 배움은 인생을 밝히는 지혜의 등불이다.”

그렇다. 진정한 배움은 삶이며, 진정한 삶은 또한 배움이다. 삶과 배움은 언제나 하나이어야 한다.

그런데 오늘날 학교 교육은 이러한 배움과는 거리가 멀다. 오늘날 학교 교육은 읽고, 쓰고, 셈하고, 잡다한 쪼가리 지식을 머릿속에 넣는 데는 성공했지만 배움이 삶이 되는 교육, 삶이 배움이 되는 교육을 하는 데는 완전히 실패했다. 배움과 삶, 배움과 행복을 분리시키는 데는 성공했으나 통합시키는 데는 실패했다.

 

삶과 배움의 통합

 

우리는 다시금 진정한 배움의 길로 돌아가야 한다. 삶과 통합된 배움의 길로 돌아가야 한다. 우리의 행복을 위해서라도 배움의 길로 돌아가야 한다. 행복은 물론 누구나의 일상 속에 깃들어 있다. 하지만 지혜와 내면의 세계가 열려있고, 삶의 진실을 읽어내는 눈을 떠야 일상 속에 깃들어 있는 행복을 볼 수 있다. 또 단순하고 소박하게 살 수 있는 내면의 넉넉함이 있어야 하고, 정직하고 깨끗한 생활태도를 잃지 않아야 하고, 모든 생명의 존귀함을 깨닫고 존중할 줄 알아야 하고, 자신의 위대함과 비참함을 알아야 한다. 조건이 너무 까다로운가? 그렇다. 우리가 진정으로 행복하기 위해서는 많은 배움이 필요하다. 인문학 전반에 걸친 공부가 필요하다.

 

책 세상을 열라

 

사람이 배움의 세계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책의 세계로 들어가야 한다. 책은 사람의 경험이고 생각이며 지혜요 이야기 묶음이다. 사람이 살아온 흔적이고, 그 흔적들이 쌓인 역사이며 유산이다. 그러기 때문에 자연과학과 사회과학, 인간의 심리, 경험, 역사적 논쟁과 사건들, 종교적 경험과 사색들, 철학, 의학, 법과 경제, 경영, 취미, 우주와 지리, 고고학, 예술, 기술의 발달 등등 인간의 모든 관심사를 알려면 책을 펼치기만 하면 된다. 책을 펼쳐 그 속으로 들어가기만 하면 그 속에 나의 고민이 있고, 풀어야 할 문제가 있고, 들어야 할 지혜가 있고, 찾아야 할 길이 있다. 가장 진솔하고 깊이 있는 삶의 대화를 끝없이 펼칠 수 있는 것이 바로 책이다. 책 세상은 특별한 사람에게만 주어진 세계가 아니다. 누구든지 언제든지 호기심과 관심만 있으면 들어가 놀 수 있는 만인의 세계이다. 책 세상에는 삶의 모든 관심사를 놓고 끝없이 대화할 수 있는 최고의 상담자들이 상시 거주하고 있기 때문에 누구나 최소의 비용으로, 그것도 밤이건 낮이건 시간 제약 없이 최고의 상담자들을 만나 대화할 수 있다. 특히 책 세상에 들어가면 부모, 선생님, 매스컴이 말해주지 않는 삶의 진실을 들을 수 있다. 배움을 위해서는 책 세상에 들어가는 것이 단연 최고다.

결국 책을 읽는다는 것은 글자를 읽는 것이 아니라 삶을 읽는 것이다. 그리고 책을 통해 삶을 읽는 사람이야말로 삶에 충실한 사람이요, 삶에 가까이 갈 가능성이 많은 사람이요, 행복할 가능성이 많은 사람이다. 행복은 언제나 소유보다는 봄에 있으니까. 좋은 주택이 아니라 가족을 사랑스럽게 바라보는 눈에 행복이 있고, 고급 승용차보다는 운전하는 매너에 행복이 있으니까.

 

삶을 관찰하라

 

배움은 책 세상에서만 얻는 게 아니다. 세상과 삶을 관찰하는 것 또한 중요한 배움의 길이다. 사람의 눈은 이상해서 눈에 보인다고 보는 건 아니다. 관심과 흥미가 없으면 눈에 보여도 보지 못한다. 사람은 마음이 가는 것만 볼 수 있는 이상한 눈을 가진 동물이다. 꽤 오래 전 일이다. 아내가 아이를 임신했을 때였는데, 거리에 배부른 여자들이 왜 그리도 많던지 깜짝 놀란 적이 있다. 아들이 어렸을 때는 아들 또래의 아이들이 그렇게 눈에 들어왔었다. 세상이 온통 아이들뿐이었다. 그런데 아들이 청년이 되자 이번에는 청년들이 눈에 들어왔다. 지금 내 눈에 보이는 청년은 예전에 보던 청년들이 아니다. 그들의 몸짓 하나, 입고 있는 옷, 얼굴 표정 하나하나까지 눈에 쏙쏙 들어온다.

삶도 그렇다. 삶에 관심이 없으면 삶은 그저 살아가는 것일 뿐 삶의 속살을 보지는 못한다. 호기심 가득한 어린 아이의 눈과 귀로 보고 듣지 않으면 삶의 많은 표정들을 읽을 수 없고, 삶이 들려주는 작은 이야기들을 들을 수 없다. 예민한 감각과 번득이는 통찰력으로 삶을 관찰하지 않으면 삶은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삶이 보이지 않으면 행복할 수 없다. 행복은 삶을 보는 깊이의 눈만큼 볼 수 있다. 나는 젊었을 때 아내에게 불만이 많았다. 생활하는 게 왜 그리도 나와 다른지. 앞뒤를 계산하지 않는 무모함에다가, 상황에 따라 민첩하게 대응하지 못하는 비합리성, 그리고 주도적이지 못한 성격, 발뒤꿈치를 강하게 딛는 걸음걸이와 중간을 푹 눌러 짜는 치약 등등 모든 게 불만이었다. 그런 것 때문에 부아가 치밀기도 하고 싸우기도 했다. 하지만 세월과 함께 삶을 보는 눈이 열리고 사람의 다양성에 눈떠가면서 달라졌다. 평생 끌어안고 살아야 될 것 같던 원망이 어디로 숨었는지 요즘에는 잘 나타나지 않는다. 부아가 치밀어 오르다가도 금방 꼬리를 감춘다. 이제는 아내를 볼 때마다 감사하고 행복하다는 느낌이 밀려온다. 물론 아직은 완전하지 않다. 하지만 언젠가 때가 되면, 하나님이 말씀해 주신 삶의 지혜가 더 깊어지는 그 날이 오면, 불만과 불평 같은 건 흔적도 찾아볼 수 없는 날이 반드시 올 것이다.

삶이 배움의 과정이 되기 위해서는 모든 생명과 생활에 깨어 있어야 한다. 모든 것을 예민하게 살피고 느껴야 한다. 생활을 관찰해야 현재의 방식으로 일하는 것이 유일한 방법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새로운 대안을 찾을 수 있고, 어제까지 보지 못했던 새로운 진실을 발견하고 즐거워할 수 있고, 내 행동 양식의 문제를 발견하고 수정할 수 있다. 모든 생명에게 열려 있어야 내 존재와 얽힌 수많은 그물망을 발견하고 감사할 수 있다. 하늘의 음성과 땅의 외침을 들을 수 있다. 그리고 그러는 가운데 변화하고 성장할 수 있다.

 

신영복 교수는 감옥을 일컬어 ‘인생 대학’이라고 했다. 옳은 말이다. 감옥 밖에서는 사람들이 대부분 끼리끼리 만난다. 피차 사회적인 거리와 체면 때문에 적당히 가리고 포장한다. 하지만 감옥은 인생의 막장으로 가릴 것이 없다. 다양한 인간 군상들이 한정된 공간 안에서 하루 24시간을 부비다 보면 원초적인 욕망과 적나라한 인생살이가 그대로 드러나기 마련이다. 그러나 감옥뿐 아니라 삶 자체가 인생 대학이다. 삶을 사는 것보다 더 위대한 배움은 없다. 문제는 삶 속에서 얼마나 많은 것을 배우느냐 배우지 못하느냐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 삶은 그 자체로서 위대한 배움의 장이다. 그래서 삶을 열심히 산 사람, 삶을 깊이 관찰하고 읽으며 살아온 사람은 학교를 다니지 않았어도, 책을 많이 읽지 않았어도 지혜가 번득인다.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어떤 여유로움과 행복이 묻어난다.

소설가 이외수씨는 “참으로 위대한 사람은 이 세상에 위대하지 않은 것이 단 한 가지도 없다는 사실을 스스로 깨달은 사람이다.”고 했다. 이 말은 세상을 깊이 관찰한 자만이 할 수 있는 말이다. 인도의 시성 타고르는 많은 나라를 여행하는 행운을 누렸는데, 그런 그가 많은 나라를 여행하고 나서 최후에 남긴 한 마디가 있다. “수년 동안 비싼 값을 치르면서 나는 수많은 나라를 여행했다. 높은 산과 대양을 보았다. 그러나 내가 보지 못한 것은 내 집 문 앞 잔디에 맺혀있는 반짝이는 이슬방울이었다.”

그렇다. 행복은 수많은 나라를 여행해야만 얻을 수 있는 게 아니다. 내 집 문 앞 잔디에 맺혀 있는 반짝이는 이슬방울 속에 행복은 숨 쉬고 있다. 행복은 내 눈길이 머무는 곳 어디에나, 내 발길이 닿는 곳 어디에나 비밀스럽게 숨어 있다. 나에게 발견되기를 기다리면서… 때문에 무심코 지나치지만 않는다면 누구나 이 보석 같은 행복을 내 것으로 만들 수 있다.

 

질문하라

 

배움에도 첩경이 있다. 바로 질문이다. 배움의 세계는 물음이 없이는 한 발자국도 들어갈 수 없다. 법정 스님은 말했다. “자신이 누구이며 어디로 가고 있는지 늘 물으라. 때로는 전화도 내려놓고, 신문도 보지 말고, 단 10분이든 30분이든 허리를 바짝 펴고 벽을 보고 앉아서 나는 누구인가 물어보라. 이렇게 스스로 묻는 물음 속에서 근원적인 삶의 뿌리 같은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항상 자신의 삶이 어디로 가고 있는가를 물을 수 있어야 한다. 인간은 늘 근원적인 물음 앞에 마주서야 한다. 나는 어디서 왔는가. 나는 어디로 가는가. 그리고 나는 누구인가. 그런 물음과 대면하지 않는다면 진정한 인간의 삶이라고 할 수 없다. 항상 자신이 어디로 가고 있고 무엇을 향해 가고 있는가 물을 수 있어야 한다.” 그렇다. 물음이 배움의 시작이고 배움의 근본이다. 사실 인간이란 물음의 존재이다. 호기심이 없는 사람, 사심 없이 관심을 기울일 줄 모르는 사람의 삶을 생각해 보라. 얼마나 삭막할까? 얼마나 끔찍할까? 경이를 모르고 감탄할 줄도 모르는 삶, 인간의 공포와 편견이 정해놓은 굴레를 당연한 듯 끌어안고 사는 삶, 세상에 이보다 더 비인간적인 삶이 어디 있을까? 끝없는 호기심과 상상력, 끝없는 물음이야말로 배움의 첩경이며 삶으로 안내하는 인생의 지팡이다.

 

인생은 은총이다. 인생은 배움과 행복의 기회다. 그러기 때문에 사람은 마땅히 살면서 공부하고, 공부하며 살아야 한다. 사는 것이 공부가 되는 인생을 살아야 한다. 그래야 삶으로 나아갈 수 있도, 행복의 지평을 열 수 있고, 세월만큼 성장할 수 있다. 삶과 배움과 행복은 본래 하나다. 진정한 삶은 배움이고, 진정한 배움이야말로 삶이며, 삶과 배움이 곧 행복이다. 그러므로 삶과 배움과 행복을 원한다면 책을 읽으라. 삶을 관찰하라. 끝없이 질문하라.

정말 사는 것처럼 살고자 한다면 죽는 날까지 이 세 가지를 쉬지 말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