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아이든 노인이든 스스로 생각하고 결정하고 선택하고 통제할 수 있을 때 자기 존재감을 느끼고 편안해하며 즐거워한다. 하는 일이 비록 힘들고 고단할지라도 스스로 결정하고 선택한 일을 할 때에는 활기를 느끼고 힘든 줄을 모른다. 하지만 스스로 선택하지 않은 일을 할 때에는 아무리 쉬운 일이라도 힘들어 한다. 일을 해도 즐겁지가 않다. 성취감을 느끼지 못하는 것은 물론이고, 이내 곧 삶의 활기를 잃고 우울하게 된다.

하버드 대학 심리학 교수인 대니얼 길버트는 재미있는 실험을 했다. 요양원에 거주하는 노인들에게 화초를 주고, 50%의 노인들에게는 화초를 돌보고 영양을 공급하는 일을 스스로 하도록 했고, 나머지 50%의 노인들에게는 직원 한 명을 투입해 직원이 화초 돌보는 일을 결정하도록 했다. 그리고는 6개월 후에 두 집단을 비교해 보니, 통제권을 가진 집단은 15%가 사망했고, 통제권을 갖지 않은 집단은 30%가 사망했다. 또 학생 자원봉사자들로 하여금 그 노인들을 정기적으로 방문하게 하면서, 한 집단에게는 학생들의 방문 시간과 요양원에 머무는 시간을 노인들이 스스로 결정하게 했고, 한 집단에게는 그런 결정권을 주지 않았다. 2개월 후 두 집단을 비교해보니, 시간 결정권을 가진 집단이 갖지 않은 집단보다 더 행복하고 건강하고 활동적이었다. 약도 더 적은 양을 복용한 것으로 나타났다(행복에 걸려 비틀거리다).

독일의 저널리스트인 슈테판 클라인은 1만 명이 넘는 영국 공무원들을 대상으로 건강과 서열 사이의 관계를 추적하는 연구를 했다. 조사 결과 낮은 지위에 있는 공무원들이 총책임자들보다 3배 이상 자주 병에 걸리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들이 죽음을 맞이할 확률 역시 3배 이상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슈테판 클라인은 수입에 그리 큰 차이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낮은 지위에 있는 자들이 건강하지 못한 이유를, 서열 체계가 가져오는 일의 결정권 때문이라고 해석했다. 즉 낮은 지위에 있는 자들일수록 자기들이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없는데서 오는 스트레스 때문에 병에 많이 노출된 것이라고 말이다(행복의 공식).

나는 이런 연구 결과를 보고 적이 놀랐다. 두 집단의 차이라고 해봐야 결정권을 주고 안 주고의 차이밖에 없는데, 그 작은 차이가 두 집단의 생활과 생명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이 정말 놀라웠다.

 

신성불가침의 성역

 

인간에게 자유란 무엇일까? 자유가 무엇이기에 자유의 여부에 따라 생활과 생명이 달라지고, 미국의 독립운동가 중 한 사람인 패트릭 헨리는 “나에게 자유를 달라. 그렇지 않으면 죽음을 달라”고 절규했을까?

답을 찾기 전에 좀 엉뚱한 문제부터 생각해보자.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왜 일거에 인류를 구원하지 않는 걸까? 왜 이다지도 구원이 느리고 지지부진한 걸까? 이유는 하나다. 사람의 자유의지를 꺾으면서까지 당신의 능력을 사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의 자유의지를 침해하는 것은 사람에게 자유의지를 부여하신 당신의 뜻(에덴에 있는 모든 나무의 열매를 맘대로 먹을 수 있다든지, 선악과를 먹어서는 안 된다는 금령을 내린 걸 보면 알 수 있다 - 창2:16-17)을 스스로 저버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하나님은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당신의 몸을 십자가에 던질 정도로 구원의지가 크셨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자유의지를 짓밟으면서까지 행동하지는 않는다. 사람이 마지막까지 회개하기를 거부하며 멸망의 구렁텅이로 갈지라도 인간의 자유의지를 꺾으면서까지 구원하지는 않는다. 하나님은 정말 어떤 경우에도 인간의 자유의지 영역을 침해하지 않는다. 마치 인간의 자유의지를 존중하는 것을 죄와 죽음의 저주 가운데서 구원하는 일보다 더 본질적이고 중요한 일로 여기고 계시다는 생각이 들만큼 하나님은 인간의 자유의지 앞에서 꼼짝을 못하신다. 인간의 자유의지 앞에만 서면 한없이 작아지신다. 참 신기하다. 하나님께서 친히 인간을 만드셨음에도 불구하고, 또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부여하셨음에도 불구하고, 당신이 허락한 자유의지 앞에서 하나님은 꼼짝을 못하신다.

왜일까? 하나님은 왜 창조자이시면서도 인간의 자유의지 앞에서 꼼짝을 못하시는 걸까? 인간의 자유의지는 인간됨을 지킬 수 있는 최후의 보루요, 인간의 존엄성과 행복권을 담보할 수 있는 최고의 조건이기 때문이다. 자유의지가 없이는 진정한 의미의 인간일 수 없기 때문이다. 진실로 그렇다. 사람은 자유의지의 존재다. 이것은 하나님도 인정하고 존중하는 절대 사실이다. 때문에 사람은 스스로 생각하고 결정하고 선택하고 통제할 수 있을 때 자기 존재감을 느끼고 편안해하며 즐거워하는 게 당연하다.

 

자기부인과 자유의지의 대립

 

한편 성경에는 또 다른 이야기가 나온다. 성경은 자기를 부인하라고(막8:34), 자기 지혜와 지식을 의지하지 말라고(시146:3, 잠3:5) 권고한다. 자기 주체적으로 살지 말라고 말한다. 주체적으로 사는 것을 죄라고 말한다. 하나님은 분명히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셨고, 또 자유의지를 절대 침범하지 않을 만큼 존중하시는데, 성경을 보면 영 딴판이다. 자유의지를 가지고 주체적으로 살라는 언급이 거의 없다. 왜 그럴까? 어떻게 된 것일까? 인간의 죄악으로 인해 자유의지도 부패하여 더 이상 존중할 가치가 없어서일까? 아니면 심히 변질되고 왜곡되어 용도 폐기되어서일까? 아니다. 아담 이후로 인간의 자유의지가 심히 변질되고 왜곡되어 자유의지 무용론을 반박할 여지가 없을 정도로 사람과 삶을 파괴하고 짓밟는 방종의 도구로 전락한 것이 사실이긴 하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창조주께서는 여전히 불법을 일삼는 인간의 자유의지를 존중하신다. 그리고 문제만 일으키는 자유의지임에도 불구하고 그 자유의지가 없이는 결코 인간다운 삶, 활기 넘치는 삶, 행복한 삶을 살 수 없다는 것 또한 사실이다.

때문에 사람의 자유의지를 부정하거나 무용론을 주창하는 것은 매우 조심해야 한다. 아니, 마땅히 삼가야 한다. 심지어 옆에 있는 사람의 지능이 낮거나 경험이 미숙해서 바른 판단을 하지 못할 것이 염려된다 할지라도 그 사람의 결정권을 박탈해서는 안 된다. 바른 판단을 할 수 있도록 설명하고 이해시킬 필요는 있겠지만 결정권을 행사하는 데까지 나가서는 안 된다. 부모로서 자녀를 양육할 때도 최대한 자주적으로 생각하고 판단하고 선택할 수 있도록 배려해야 한다. 부부간에도 서로의 주체성을 인정하고 존중해 주어야 한다. 하나님이 창조자요 주권자이심에도 불구하고 사람의 자유의지를 침해해가면서까지 당신의 권능과 주권을 행사하지 않으신 것을 깊이 유념해야 한다.

 

피조성의 한계 안에서의 자유

 

인간의 자유의지는 어떤 경우에도, 어떤 이유로도 침해당하거나 박탈당해서는 안 되는 절대 성역이다. 인간의 자유의지를 침해하고 박탈하는 것은 인간에 대한 최고의 죄악이요 무례이며, 하나님도 침범하지 않는 절대 성역을 유린하는 죄악이다. 하지만 인간의 자유는 인간의 본질적 한계인 피조성의 한계를 넘어설 수는 없는 것 또한 사실이다. 피조물의 자유는 완전한 자유일 수 없다. 피조물의 자유는 창조주의 자유를 넘어설 수 없고, 너의 자유를 침해해서도 안 된다. 나의 자유는 창조주의 자유와 너의 자유에 묶여야 한다. 창조주의 자유와 너의 자유에 묶인 자유만이 진정한 의미의 자유일 수 있다. 예수님께서도 말씀했다. 진리를 알라고, 그러면 그 진리가 너희를 자유하게 할 것이라고(요8:32). 그렇다. 진리만이 우리를 자유하게 할 수 있다. 진리에 묶이지 않은 자유는 헛된 것에 묶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사람에게는 모든 묶임을 해체하고 모든 것을 내 뜻대로 통제하고자 하는 비뚤어진 욕망이 있다. 자유의 한계를 거부하고자 하는 못된 근성이 있다. 그래서 끊임없이 묶임을 해체하려 하고, 묶임으로부터 탈출하려 한다. 하지만 묶임으로부터 탈출해서는 결코 자유할 수 없다. 참된 자유는 묶임을 해체하지 않는다. 참된 자유의 세계는 창조주의 자유와 너의 자유에 묶이는 것을 기뻐할 때 열리고, 그 묶임을 묶임으로 여기지 않을 때 열린다.

자유의 세계를 한 번 상상해 보라. 진리에 묶일 때 열리는 자유의 세계, 너의 자유를 존중할 때 열리는 자유의 세계를 상상해 보라. 얼마나 멋지겠는가? 얼마나 평화롭겠는가? 얼마나 행복하겠는가? 이런 자유의 삶보다 더 완전한 삶, 더 행복한 삶이 어디 있겠는가? 그리고 그 무엇이 이런 자유를 무너뜨릴 수 있겠는가? 그 무엇이 이런 자유인을 지배할 수 있겠는가? 창조주의 자유와 너의 자유 외에는 그 무엇에도 매이지 않는 자유인을 그 무엇이 어찌할 수 있겠는가? 바로 이런 자야말로 피조세계에 우뚝 선 참 인간이 아니겠는가? 하나님이 빚은 본래의 참 인간이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이런 자유인이 될 수 있을까? 모든 묶임을 해체하고 싶은 어리석은 욕망과 모든 것을 내 뜻대로 통제하고 싶은 헛된 욕망을 내려놓을 줄 알아야 한다.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일들이 수도 없이 발생하는 것이 인생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부모나 자식을 원하는 대로 선택할 수 없고, 내 얼굴이나 신체의 특징을 원하는 대로 선택할 수 없고, 자연의 대재앙을 조절하거나 통제할 수 없고, 우연을 통제할 수 없고, 머리털 하나도 희거나 검게 할 수 없고, 키를 한 치도 늘리거나 줄일 수 없듯이 인생에는 통제할 수 없는 일들이 부지기수라는 걸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나무를 보라. 나무는 뜨거운 햇살이 작열하면 햇살을 빨아들이고, 비가 오면 비에 젖고, 태풍이 몰아치면 끊어질듯 흔들리고, 한파가 몰아닥치면 맨몸으로 견뎌낸다. 인생도 나무와 같다. 나무가 온갖 풍상을 묵묵히 받아들이면서 꿋꿋하게 자리를 지키고 자라듯이, 내 의지와 상관없이 벌어지는 온갖 크고 작은 일들을 겪어내면서 인생도 자란다. 예수님도 말씀했다. 인생이란 사람의 통제력을 벗어나는 일이 많은 법이니 그런 일을 가지고 쓸데없이 걱정하지 말라고(마6:27). 그렇다. 인생은 내 계획과 시간표대로 진행되지 않는다. 하나님은 내가 서두르고 불평한다고 해서 섭리의 손길을 바꾸거나, 내 입맛에 맞게 삶의 현실을 개선하지 않는다.

 

한계의 미덕과 역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이 땅에서 행복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한계를 바라보는 시선을 바꾸어야 한다. 짐 머켈은 인간의 한계를 매우 긍정적으로 바라볼 것을 권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어떻게 보면 한계가 있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한계를 사랑함으로써 우리가 지향하는 삶을 위한 발판을 마련할 수 있다. 지구는 하나뿐이라는 사실, 지구가 생명을 키워내는 능력이 유한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편안하게 받아들일 때 욕구를 제한하는 일에 생각과 마음을 열어 놓을 수 있을 것이다.”(단순하게 살기). 그렇다. 인간이 가진 한계가 때로 인간의 삶을 제한하고 억압하기도 하며, 그 한계 때문에 때로 불편하고 억울하며 안타까운 일들을 겪을 수밖에 없기도 하다. 하지만 그 한계가 오히려 삶을 추동하고, 흩어진 삶을 본질의 차원으로 복구시키고, 삶에 충실할 수 있게 하는 발판이 되기도 한다. 우리가 처한 상황에서 오는 불편함이나 고통, 자기 통제의 범위를 넘어서는 일들로부터 도망치지 않고 그 안에서 성장을 이루어내는 지혜를 발견할 수만 있다면, 피조성의 한계는 인간의 걸림돌이 아니라 오히려 징검다리가 될 수 있다. 바로 이것이 인간을 둘러싸고 있는 한계의 미덕이요 한계의 역설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선하심과 이끄심을 신뢰하고, 그분이 주신 한계를 선물로 받아들일 줄 아는 것이야말로 참 지혜이다. 신학자 라인홀드 니이버는 이렇게 기도했다. “주여! 내가 변화시킬 수 없는 것들을 받아들일 수 있는 침착함을 주옵시고,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을 변화시킬 수 있는 용기를 주옵소서. 또한 이 둘 사이의 차이를 분별할 수 있는 지혜를 주시옵소서.”

정리해 보자. 사람은 자유를 숨 쉴 때만 행복할 수 있다. 자유 없는 삶은 굴욕이요 치욕일 뿐 삶일 수 없다. 아무리 먹고 입고 마실 것이 충분하다 하더라도 자유 없는 삶은 인간적인 삶, 행복한 삶일 수 없다. 다만 한 가지, 내 자유는 창조주의 자유와 너의 자유에 묶여야 한다. 진리에 묶여야 한다. 그런 자유라야 그 무엇에도 매이지 않는 참 자유, 삶을 일구어내는 자유, 행복을 노래하는 자유일 수 있다. 그리고 그 자유에는 내가 변화시킬 수 없는 것들과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을 분별하는 지혜가 동반되어야 하고, 변화시킬 수 없는 것들을 받아들이는 겸허함과 할 수 있는 것들을 변화시킬 수 있는 용기가 뒤따라야 한다. 물론 쉽지 않은 일이다. 참 자유인으로 산다는 것은 정말 어렵고도 힘든 일이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거기에만 행복이 오롯이 숨어 있는 것을. 어렵고 힘들어도 한 걸음씩 떼어보는 수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