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 만든 세상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다양하고 광대하다. 하나님은 붙박인 세상이 아니라 변화의 리듬이 있는 동적인 세계, 생육하며 번성하는 생명의 세계, 다양성 속에 일치가 있는 통일의 세계, 다름 속에 같음이 있고 같음 속에 다름이 있는 오묘한 질서의 세계를 창조하셨다. 그런데 한 가지 파격이 있었다. 일반적인 창조질서에 부합하지 않는 예외적인 사건이 있었다. 그것은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부여한 사건이었다.

 

자유세계의 출현을 위해

 

자유는 하나님의 절대적 속성이다. 하나님은 ‘나는 곧 나’(출3:14)이신 분이다. 자유하신 분이다. 그분의 모든 말씀은 자유로운 창조의 말씀이요 해방의 말씀이며, 그분의 영은 자유의 영이다. 예수님은 자유의 인간이고, 하나님나라는 자유의 나라이다. 자유 없는 세계는 자유이신 분과 어울릴 수 없다. 하여, 그분께서는 당신의 자유의지를 한갓 피조물인 인간에게 쏟아 붓는 파격을 행하셨다. 그것도 약간의 자유가 아니라 당신의 의지까지도 거스를 수 있는 완전한 자유를 쏟아 부으셨다. 창조자의 자유의지가 피조세계 안으로 들어온 것이다. 이것은 실로 특기할 만한 사건이다. 하나님께서는 피조세계의 운명이 인간의 자유의지에 의해 짓밟힐 수도 있다는 것을 충분히 아셨음에도 불구하고 자유의지가 없는 안정된 세계보다는 자유의지가 있는 위험한 세계를 만드는 모험을 감행하셨다. 피조물을 창조주에 버금가는 존재로 만드셨다. 파격이었다. 피조물에게 창조자와 같은 자유가 주어졌다는 것은 정말 상상할 수 없는 창조의 이변이었다.

 

자유의지의 대가

 

하나님에게 자유는 세상의 운명을 거는 모험을 감행하게 할 만큼 중요한 것이었다. 반드시 있어야 할 세상의 필수 요소요 삶의 본질이었다. 하여, 하나님은 자신의 자유의지를 내어주는 모험을 감행하였고, 결국은 그 자유의지로 인해 자유의 세계가 파괴되는 슬픈 일이 벌어지고야 말았다. 자유의지로 인해 자유가 짓밟히는 어처구니없는 사태가 벌어지고야 말았다.

아담이 자유의지를 가지고 선악을 아는 나무 열매를 먹고 에덴에서 쫓겨난 이후, 인간의 자유의지와 자유 사이에는 모순과 틈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자유를 원하면서도 자유를 회피하는 심각한 모순이 발생했다. 자유로 충만했던 세계가 자유하지도 못하고, 자유할 수도 없는 세계로 탈바꿈해버렸다. 위대하고도 파격적인 선물인 자유의지가 사람의 영혼과 삶을 짓누르는 무거운 짐이 되어버렸다. 자유를 원하면서도 자유에 따르는 책임이 두려워 자유를 유보하고, 자유 자체가 두려워 권위에 기생하면서도 자유를 목말라하는 기구함에 빠져버렸다. 자유를 희구함과 자유를 회피함 사이의 틈바구니에서 꼼짝 못하는 불쌍한 인생이 되어버렸다. 심지어는 자유에의 깊은 갈망을 아예 잠재워버린 채 살기도 한다. 권위에 복종하는 것을 모범적인 시민의 덕목이라고 합리화하면서, 권위가 정해놓은 몇 가지 자유에 만족한 채 권위에 굴종하는 삶을 살기도 한다.

동시에 집단적으로는 무언의 합의 하에 자유를 위험시해 왔다. 자유에의 갈망과 추구를 탈사회적인 것이요 반사회적인 것이라고 규정하면서 변방으로 내몰았다. 사회적인 권위와 지배 원리를 제정하고, 그 권위에 순종적인 사람으로 길들이는데 힘써 왔다. 권위가 지배하는 사회를 안정된 사회라고 합리화하면서 창조주가 내어 준 자유를 외면해 왔다. 사회 속에는 자유를 위험시하고 억압하는 보이지 않는 손들이 무수히 작동하고 있다. 그리고 자유를 원하면서도 자유를 부담스러워하는, 그래서 자유를 회피하고 싶어 하는 내적인 모순과 자유를 억압하는 보이지 않는 손들이 내통하면서 인간의 자유는 은밀하게 짓밟혀 왔다.

 

인간의 역사는 자유를 향한 투쟁의 역사이기도 했지만, 자유를 외면하는 회피의 역사이기도 했다. 하나님께서 친히 ‘하나님 앞에서 다른 신들을 섬기지 못한다’(출20:3)고 말씀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그 무엇보다 더 큰 존재이니 하나님 외의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스스로 우상을 만들고 우상의 종이 됨으로써 자유를 회피해 왔다. 그랬다. 인간에게 자유란 주어져도 힘들고, 안 주어져도 힘든 뜨거운 감자와 같았다.

 

문명의 현실

 

문명의 현실을 보아도 상황은 다르지 않다. 문명의 발전은 한 마디로 자유의 확장이면서 자유의 억압이었다. 자동차를 생각해 보자. 자동차가 없을 때는 걷는 자가 자기 걸음을 제어할 수 있었다. 길을 걷다가도 길가에 꽃이 있으면 잠시 앉아 꽃과 대화를 주고받을 수 있었고, 사람을 만나면 걸음을 멈추고 얘기를 나눌 수 있었다. 걸음을 재촉할 수도 있었고, 천천히 생각하면서 걸을 수도 있었다. 걸음걸이는 전적으로 내 마음에 달려 있었다. 내가 걸음걸이의 주체가 될 수 있었다. 하지만 자동차에 몸을 맡기면서부터는 모든 것이 달라졌다. 자동차로 인해 우리는 느림과 걷는 수고로부터 해방되었고, 장소 이동의 제한으로부터 해방되기는 했지만 내가 원하는 속도로 달리 수는 없게 되었다. 앞뒤 차와 같은 속도로 달려야 하기 때문에 아름다운 경치를 보아도 멈출 수가 없다. 달리고 싶어도 길이 막히면 달릴 수 없고, 천천히 가고 싶어도 바짝 뒤쫓아 오는 차들 때문에 마음대로 속도를 조절할 수가 없다. 교통신호와 교통상황의 지배를 받아야 한다. 이처럼 사람은 자동차로 인해 걸음걸이의 자유를 잃어버렸다. 사람이 자동차의 주인이 아니라 자동차의 부품처럼 되어버렸고, 자동차도 길이라는 기계의 톱니바퀴처럼 되어버렸다. 사람들이 자동차 안에서 스트레스를 받는 것도 다 그 때문이다.

 

병원의 현실도 다르지 않다. 의학기술이 발달하기 전에는 의사가 사람의 몸을 진단했다. 손으로 만지고, 두드리고, 몸을 살피고, 대화를 하면서 환자의 병을 진단했다. 하지만 지금은 모든 진단을 기계가 한다. 의사는 기계로 확인된 것을 판독하고 정보에 따라 처방할 뿐 환자의 몸을 살피지도, 손을 대지도 않는다. 인격적인 대화도 거의 없다. 오직 기계가 의사와 환자 사이를 매개할 뿐. 기계의 매개가 없이는 의사와 환자는 만날 수조차 없는 지경이 되었다. 의사와 대면하는 시간보다 기계와 대면하는 횟수와 시간이 더 많다. 그래서일까. 사람들이 병원에만 갔다 오면 답답해하며 스트레스를 받는다.

 

예전에는 인간의 생존이 하늘과 땅에 달려 있었다. 때를 따라 비가 내려주고 일조량이 충분하면 풍년이 들었고, 가뭄이나 홍수가 들면 농사를 망쳐 굶주림에 허덕여야 했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인간의 생존이 직장에 달려 있다. 직장이 우리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다. 하여, 직장에 모든 걸 맡기고 살아야 한다. 출퇴근 시간은 말할 것도 없고, 일의 선택권이나 동료의 선택권도 없이 회사가 결정하는 대로 따라야 한다.

 

몇 가지 확인한 것처럼 오늘의 삶의 환경은 인간의 자유를 심각하게 위협하고 있다. 사회의 도시화와 조직화로 인해 개인의 자유영역이 좁아지고 있고, 기술의 발달로 인해 기계의 지배 영역이 확대되고 있다. 요즘은 기술의 발달 속도가 워낙 빨라 나이를 조금만 먹어도 따라잡기가 어렵다. 첨단 기술이 탑재된 전자 제품들은 사용하는 방법을 몰라 불편을 겪는 자들이 많다. 그렇다. 우리 사회는 실로 위험하고 비인간적인 사회, 자유가 숨쉬기 어려운 사회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현실을 바라보면서 나는 생각한다. 오늘의 발전된 문명은 자유를 구가하는 시스템인가 자유를 폐기하는 시스템인가? 자유를 위한 행보를 한다고 하는데 왜 이리도 자유를 억압하는 모순의 재생산만 반복하는 것인가?

 

다시 자유세계를 향하여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과학기술의 발달, 사회제도와 정치제도의 선진화로는 참 자유를 얻을 수 없을 것 같아 보인다. 자유에 관한 한 우리는 지금까지 하나를 얻고 열을 빼앗기는 마이너스의 길을 걸어왔으니까. 그렇다면 자유의 길은 정녕 없는 것일까? 그렇다. 매우 절망스럽게 생각되겠지만 이 세상에 자유의 길은 없다. 자유는 오직 하늘로부터 주어지는 은총일 뿐이다. 자유는 오직 태초에 자유의지를 주셨던 분으로부터만 올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자유는 구원을 통해서만 온다. 아니, 자유가 곧 구원의 실재이다. 성경은 구원을 해방을 통한 자유로 설명한다. 구원의 원초적 모형인 이집트로부터의 해방이 바로 그걸 암시하고 있다. 성경에서 구원은 언제나 자유의 세계를 향한 해방이며, 종말론적 실재인 하나님나라는 하나님의 자유와 인간의 자유가 더 이상 충돌하지 않는 참 자유의 세계이다. 그리고 태초에 피조세계의 현실성을 위해 당신의 자유의지를 피조세계에 쏟아 부으신 하나님께서는 또다시 수많은 것들에 붙들려 종살이하는 피조세계를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의 세계로 이끌어가고 계신다. 왜냐하면 그분은 사랑이시고 자유이시며, 피조세계는 자유 안에 있을 때만 참된 하나님의 피조물이 되고, 자유 안에서만 행복할 수 있으니까.

 

우리에게 필요한 지혜와 용기

 

다시 말하거니와 사람은 자유 안에서만, 오직 자유를 숨 쉴 때만 행복할 수 있다. 자유와 행복은 결코 분리될 수 없는 인간의 존재론적 필연이다. 사람이 불행한 것은 얇은 지갑 때문이 아니다. 얼굴이 못나서가 아니다. 공부를 못해서가 아니다. 높은 자리에 오르지 못해서가 아니다. 사람이 불행한 것은 자유를 호흡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자유에의 갈망이 채워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진정으로 행복하기를 원한다면 다른 무엇보다도 자유를 선택할 수 있는 안목과 주체적인 삶을 선택할 수 있는 용기가 있어야 한다. 물론 구조적으로 쉽지 않은 일이다. 우리는 지금 자유를 저당해야만 돈을 벌 수 있는 사회구조 속에 살고 있기 때문에 자유를 선택한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많은 것을 잃어버리지 않고서는 자유를 얻을 수 없는 것이 사실이다. 많은 사람들이 가슴을 쥐어짜면서도 자유를 포기하거나 유보한 채 사는 것은 자유를 위한 대가를 지불할 용기가 부족하기 때문이거나 자유를 감당할 내적인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하여, 나는 감히 희망한다. 자유의 가치를 알고, 어떤 일을 결정하든지 최우선적으로 자유를 고려하는 법을 배우고 연습하기를. 바울처럼 자유하지 못한 환경 속에서도 자유(자족)할 수 있는 역량을 기르기를. 하나님나라의 백성이란 창조주께서 베풀어준 자유를 최고의 은총이요 자산으로 여기는 자임을 기억하고 세상의 우상과 대세에 휘둘리지 않기를. 날마다 자유를 확대하며 살기를. 아이들에게도 자유의 가치를 가르치고, 성공이나 돈도 중요한 고려 사항이지만 자유는 그것보다 더 중요한 고려 사항이라는 진실을 꼭 심어주기를 나는 희망한다. 그렇지 않으면 눈에 보이지 않는 지배의 손길에 휘둘려 구원의 실재인 자유의 삶을 살기 어려울 테니까. 행복하기 어려울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