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과연 자유할 수 있을까? 어느 것에도 매이지 않는 자유가 정말 가능할까? 아니다. 사람은 어떤 경우에도 자유할 수 없다. 자기 홀로 외딴 섬에서 살지 않는 한 완전한 자유란 불가능하다. 사실 한 사람만 옆에 있어도 불편한 게 한 둘이 아니지 않은가. 애완용 개만 있어도 마찬가지다. 하물며 가정과 사회에서의 삶이야 말할 나위가 없다. 그렇다. 자유만으로는 어떤 가정도, 어떤 사회도, 어떤 공동체도 존립할 수 없다. 함께 산다는 것은 자유의 제한을 필연적으로 동반한다.

 

자유와 자유의지

 

자유와 자유의지는 구별되어야 한다. 자유가 외부적인 구속이나 무엇에 얽매이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대로 행동하는 것에 대한 객관적인 사태 진술이라면, 자유의지는 스스로 판단하고 선택할 수 있는 능력과 권리를 뜻한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자유에의 역량 뿐 아니라 자유를 억제하고 유보할 수 있는 능력까지도 포함하는 것이 자유의지다.

자유는 자유를 통해 얻을 수 없다. 자유를 목표로 해서는 자유를 얻을 수 없다. 자유는 투쟁과 무질서를 낳을 뿐 자유를 잉태하지는 못한다. 자유는 오직 자유의지를 통해서만 얻을 수 있다. 하나님께 복종할 수 있는 자유, 너를 사랑하고 용납할 수 있는 자유, 자유가 제한된 공동체 안에서도 구가할 수 있는 자유, 자유를 내려놓을 수 있는 자유, 이런 자유는 자유의지를 통해서만 얻을 수 있지 자유를 통해서는 얻을 수 없다. 하여,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자유를 위해 자유를 주지 않았다. 오직 자유의지를 주셨다.

 

자유의지는 본래 자유만을 목표하지 않는다. 자유만을 희구하지 않는다. 자유만을 외치는 것은 자유의지의 타락이며 왜곡이지 건강한 자유의지는 아니다. 건강한 자유의지는 하나님의 자유와 너의 자유를 위해 내 자유를 절제할 줄 알고, 관계의 덕을 고려하여 내 자유를 제한할 줄 알며, 자유할 수 없는 삶의 현실을 직시하고 견뎌낼 수 있게 한다. 너의 자유는 최대한 존중하면서도 자신의 자유는 억제할 줄 아는 것이야말로 자유의지의 참 능력이다. 그리고 이런 자유의지가 작동할 때라야 비로소 자유할 수 있다. 그렇지 않고 자유만을 지상목표로 추구하게 되면 자유하기는커녕 자유의 종이 되는 우스꽝스런 결과를 피할 수 없고, 다른 사람의 자유를 억압하고 사회적인 불평등을 낳는 죄악 또한 피할 수 없다.

 

자유의 포악함

 

그런데 지금 우리의 삶이 그렇다. 우리는 지금 자유 지상주의 하에서 자유가 짓밟히는 불가사의한 시대, 지구촌이 하나의 거대한 시장이 되어버린 시대. 포악한 자유의 시대를 살고 있다. 애덤 스미스가 시장의 자유를 말할 때만 해도 오늘날과는 달랐다. 스미스는 [국부론]에서 인간이 생존하기 위해 필요로 하는 협력은 선의가 아니라 각자의 이기심에 의해 이뤄진다고 보았다. 자신의 이익만을 생각하는 소비자와 생산자가 시장에서 만날 때 가장 합리적인 가격이 형성될 수 있다고 보았다. 하여, 시장의 수요와 공급에 맡기는 것이 최선이라고 보았다. 개개인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 행동할 때 오히려 전체 이익이 증대되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자유롭게 자신의 이익을 추구할 수 있도록 시장의 자유를 규제하거나 통제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나는 경제 전문가가 아니기 때문에 깊이 이해하지는 못하지만, 스미스의 이런 주장이 매우 냉철하고 정직한 인간 이해와 현실 인식에 기초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수요와 공급이 자연스럽게 균형을 이루면서 형성되는 가격의 합리성에 근거해서 시장의 자유를 말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사실 그때만 해도 시장이 주체가 되어 자유를 주창한 건 아니었다. 고전적 자유주의(신자유주의와 구별하기 위해 이렇게 부름)가 의도했던 것은 소상품생산자들이 시장을 무대로 하여 자유로운 경쟁을 전개하는 근대 시민사회의 실현이었다. 때문에 당시의 시장원리는 근대 민주주의를 고양하는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그런데 오늘의 신자유주의는 다르다. 지금의 신자유주의가 옹호하는 시장 원리는 시민사회의 실현과는 거리가 멀다. 오직 자본과 시장을 독점하려는데 의도가 있다. 또 강한 국가의 힘을 이용해서 시장 질서를 권력의 힘으로 강화하려는데 있다. 자유 시장과 규제의 완화를 외치면서 세계 시장에 탐욕의 빨대를 꽂고 있다. 심지어 복지와 평등의 이름으로 제기되는 국가의 간섭까지도 반대할 만큼 그들의 탐욕은 끝이 없다. 그 결과 지구촌은 지금 강자의 독점이 강화되고 있고, 중소기업이나 소시민은 점차 설 땅을 잃어가고 있다.

 

이것은 단지 경제나 기업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네 일상과 직결된 문제다. 시장이 자유를 외치고, 자유의 주체가 되면서부터 지구인의 삶은 무한경쟁에 내몰리게 되었다. 무한경쟁 사회의 실상은 이렇다. 1등만 알아주는 더러운 세상, 능력이 없으면 도태되는 게 당연한 세상, 자본의 이익에 반하는 사람은 언제라도 퇴출시킬 수 있는 돈 우위의 세상, 사람이 꽃보다 아름답고 사람이 돈보다 소중하다는 상식이 비웃음거리기 되는 세상, 태어나는 순간부터 경쟁의 하수인이 되어야 하는 세상, 행복하게 살아가는 법을 차분하게 배우기보다는 악착같이 살아남는 법을 배워야만 하는 세상, 바로 이런 야만적인 세상이 무한경쟁에 내몰리고 있는 세상이다. 그리고 그런 세상을 살아가자니 삶이 팍팍하다. 씁쓸하기 이를 데 없다. 한없이 고독하고 쓸쓸하다. 우울증 환자만 늘어나고 있다.

물론 우리는 오늘 ‘자유’ 홍수 시대를 살고 있다. 그 어느 시대보다 ‘자유’라는 말이 많이 회자되는 시대를 살고 있다. 하지만 그 자유의 외침을 조금만 깊이 들여다보면 자유를 위한 외침이 아니라 탐욕을 위한 외침이라는 걸 쉽게 알 수 있다. 매우 씁쓸한 일이지만 진실로 그렇다. 지금 이 시대가 외치는 자유는 오직 시장의 자유와 자본의 자유뿐이다. 탐욕의 자유만이 활보할 뿐 여타의 자유 - 인간의 자유는 외면당하고 있다. 아니다. 외면당하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탐욕의 제단에 희생 제물이 되어 활활 불타고 있다.

 

그렇다. 지금 이 시대는 자유의 시대가 아니다. 시장과 자본의 자유가 인간의 자유를 짓밟는 역리의 시대, 인간의 자유가 형해(形骸)된 탐욕의 시대이지 자유의 시대가 아니다. 물론 언뜻 보면 시장 안에서 맘껏 자유를 구가하는 것 같아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한 꺼풀만 벗겨보면 진실이 드러난다. 우리가 시장 안에서 소비의 자유를 구가하는 게 아니라 사실은 시장에 끌려가고 있다는 진실 말이다.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서 소비의 노예가 되고 있다는 진실 말이다. 아닌가? 그건 진실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은가? 나는 시장에 끌려가고 있지 않다고 말하고 싶은가? 정말 그렇다면 천만 다행이다. 하지만 시장과 자본의 자유 앞에 굴복한 우리 자신의 나약하고 추한 모습을 감추기 위한 자기 속임수일 가능성이 훨씬 많다.

 

자유의지가 죽은 자유로는

 

이 우울한 시대에 나는 묻지 않을 수 없다. 길거리의 네온사인처럼 화려한 자유의 시대에 우리는 왜 자유의 주인이 되지 못하고 자유의 종이 된 것일까? 시장과 자본은 자유의 행진을 하고 있는데, 정작 인간은 시장과 자본의 자유 행진에 짓밟혀 신음하고 있는 것일까? 근본 이유는 앞서 말한 대로 건강한 자유의지가 빠진 자유 때문이다. 자유의지가 동반된 자유라야 인간이 자유의 주체가 될 수 있는데, 자유의지가 작동하지 않는 자유가 판을 치다보니 이렇게 된 것이다. 사실 자유에서 자유의지가 사라지면 돈이나 명예나 시장이나 성공이 자유의 주체로 자리를 잡게 되어 있다. 그래서 약자 위에 군림하여 폭력을 행사하고, 부익부빈익빈이라는 구조적인 불평등을 낳게 되어 있다. 마치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이리저리 날뛰며 인간을 짓밟게 되어 있다. 그것이 자유의지 없는 자유의 한계요 비극이다.

 

우리가 지금 자유의 포악함과 자유가 낳은 세계적인 재앙을 목도하고 있는 것은, 사회적인 빈자와 약자의 목을 졸라 부를 창출하는 사악한 자본 권력의 지배를 받고 있는 것은, 소수의 사악한 자유 때문에 다수의 자유가 죽어가는 자유의 패륜시대를 살고 있는 것은 다른 것 때문이 아니다. 자유의지가 작동하지 않는 자유 때문이다. 자유의 패륜을 방지할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건강한 자유의지 밖에 없는데, 자유의지가 건강하게 작동되어야만 자유의 방임을 막을 수 있는데, 그 자유의지가 작동하지 않기 때문에 시장의 자유와 자본의 자유가 활개를 치며 패악을 저지르고 있는 것이다.

 

진실로 그렇다. 오직 자유만이 행복의 문이요, 행복의 길이요, 행복의 최종 목적지이지만 자유만으로는 행복의 문을 열 수 없다. 자유의지가 건강하게 작동하지 않는 자유로는 절대로 행복의 문을 열 수 없다. 지혜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자유를 주지 않고 자유의지를 주신 것도 자유의지가 작동해야만 참으로 자유할 수 있기 때문이었으리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잘 아는 것처럼 인간은 자유의지로 인해 죄를 지었고, 죄로 말미암아 자유의지가 왜곡되고 마비되었다. 우리 안에는 자유의지를 건강하게 사용할 능력이 없다. 이성도 어두워졌지만 의지도 부패했다. 하여, 위대한 유산인 자유의지는 외면해 채 자유만 찾는 고질적인 어리석음을 반복하고 있고, 자유의지 안에 깃들어 있는 자유와 행복도 맛보지 못하고 있다. 부에도 처할 줄 알고 가난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잃어버렸다. 자본과 시장에 자유를 빼앗긴 채 화려한 조화(造花) 같은 생명 없는 삶을 살고 있다.

 

우리의 행복한 삶을 위해 자유가 필요하다. 시장과 자본에게 빼앗긴 자유를 되찾아야만 우리는 행복할 수 있다. 하지만 자유에 초점을 맞춰서는 자유를 찾을 수 없다. 자유를 찾기 위해서는 반드시 자유의지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자유의지는 자유보다 크고, 자유의지는 자유의 어머니이니까. 행복의 어머니는 자유이지만, 자유의 어머니는 자유의지이니까. 그렇다면 내친 김에 하나만 더 나가보자. 자유의지의 어머니는 무엇일까? 자유의지의 어머니는 자유의 영이신 성령이시다.

 

결국 우리가 행복하기 위해서는 자유의 영을 통해서 자본과 시장의 포악한 자유에 대항할 수 있는 힘, 건강한 자유의지의 힘을 키워야 한다. 날마다 자유의 영과 함께 사는 연습과 자유의지를 사용하며 사는 연습을 통해 자유의지의 역량을 키워야 한다. 그래야만 자유의 삶을 살 수 있고, 자유의 삶을 살 수 있을 때 행복할 수 있다. 화려한 조화(造花)의 죽음이 아니라 풋풋한 들꽃의 삶을 살 수 있다. 그렇다. 행복의 관건은 행복에 있지 않다. 자유에 있다. 자유의 관건은 자유에 있지 않다. 자유의지에 있다. 자유의지의 관건은 자유의지에 있지 않다. 자유의 영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