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과 함께 2년 가까이 살아오면서 마지막으로 두 가지를 정리하고 싶다.

첫째, 로마 사람 백부장이 십자가에 죽어가는 예수님을 지켜보며 내뱉었던 고백이다.
백부장은 예수님의 마지막 삶의 과정을 지켜보며 “저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라고 감동적인 고백을 했다. 예수님을 바라보면 바라볼수록, 그분의 삶을 이해하면 이해할수록, 그분의 존재를 묵상하면 묵상할수록 “저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라는 백부장의 고백이 깊은 울림이 되어 새롭게 들린다.
사실 인류의 역사 속에는 훌륭한 분들이 많이 있었다.
석가, 노자, 장자, 공자, 소크라테스 … . 하지만 그 누구도 예수님과 비슷한 분은 없었다. 예수님만큼 창조주 하나님께 집중한 분은 없었다. 아버지의 뜻을 유일한 뜻으로 삼고 사신 분은 없었다. 사람들의 평가나 역사적인 평가로부터 완전히 자유하신 분도 없었다. 오직 그분만이 사람들의 종교적 ∙ 영적 필요를 채워주는 것보다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나라에 집중하셨다. 예수님이 많은 이적과 기사를 행하신 것도 하나님나라의 임재를 알리는 표적으로 삼기 위해서였지 사람들의 필요를 채워주기 위함이 아니었다. 사람들의 필요를 채워주는 것은 어디까지나 두 번째였다. 첫 번째 관심사는 언제든지 하나님나라였다. 오직 하나님나라의 복음을 가르치고 전파하기 위해 이것도 하고 저것도 했을 뿐, 세상에서 뭔가를 도모하기 위해 하신 일은 하나도 없었다.

그런 면에서 예수님은 참으로 독보적인 분이시다.
역사 속의 그 누구도 예수님처럼 사신 분이 없다.
오직 그분만이 하나님의 아들로서 부족함이 없는 유일한 분이시다.
사람은 누구나 하나의 강점이 있으면 하나의 약점이 있는 법이다. 덕이 높으면 흠 또한 깊은 법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빛으로만 충만하시다. 도무지 모방할 수 없는 완전함에 계신다.
그분의 능력은 휘두르는 능력이 아니라 오직 섬기는 능력이었고 겸손한 능력이었다.
그분의 실패와 죽음 또한 무능력의 결과가 아니었다.
그분은 죽음을 통해 죽음을 정복하셨고, 실패를 통해 승리자들을 심판하셨다.
그분의 논리와 행위는 참으로 묘하기 그지없었다. 누구도 모방할 수 없는 차원의 다름 속에 계셨다. 그분은 나를 짓밟음으로써 나를 일으키신다. 나를 정죄함으로써 나를 용서하신다.
나를 심판함으로써 나를 구원하신다. 나를 광야에 내던짐으로써 나를 품에 안으신다.
그분이 하는 모든 일은 사랑 아닌 것이 없다. 구원 아닌 것이 없다.
무너지게 하고, 넘어지게 하고, 때로 정죄하는 것까지도 나를 사랑하기에 하는 것들이고,
나를 구원하기 위해 하는 일들이다.
그러기 때문에 그분 안에 있는 자에게는 염려할 것이 하나도 없다.
욥처럼 일순간에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황당무계한 재앙을 만나더라도 염려할 필요가 없는 것은, 모든 일을 통해서 나를 일으키시고, 온전케 하시고, 깨우치시고, 자유케 하시고, 넉넉히 구원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그분은 참으로 멋진 분이시다. 놀라운 자유인이시다.
흠 없이 완전하면서도 인간적인 면모를 하나도 잃지 않으신 분이시다.
그분은 진실로 인간의 영원한 모델이고, 목자이고, 꿈이고,
노래이고, 사랑이기에 부족함이 없는 분이시다.
그러니 세상에서 예수님을 만난 것보다 더 행복하고 감사한 일이 어디 또 있겠는가.
이보다 더 영광스럽고, 유익하고, 큰 도전을 주는 만남이 어디 또 있겠는가.
그분을 만나 함께 사는 것은 진정 행운이다. 더할 수 없는 은총이다.

 

둘째, 마가복음을 살펴보면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일관되게 흐르고 있는 하나의 흐름을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제자들의 실패다.
제자들이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 나섰고, 예수님의 가르침과 권능 행하심을 목도하고, 예수님의 보내심을 받아 여러 마을에서 병자들을 고치고, 귀신을 쫒아내는 능력을 행하기도 했지만, 제자들은 결정적인 상황을 맞을 때마다 넘어지기 일쑤였다. 제자들이 받은 가르침과 예수님 경험이 남다르게 놀라운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의 세계는 유대인들의 일반적인 종교적 세계관을 넘어서지 못했다. 십자가의 죽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예수님이 세 번씩이나 반복해서 말씀했지만 그 말씀을 제대로 알아들은 제자는 한 사람도 없었다. 심지어 예수님이 부활하신 이후에도 여전히 그 말씀을 깨닫지 못했을 정도로 제자들의 마음은 어둠에 잠겨 있었다. 제자들은 최후의 순간까지 스승을 알지 못했다. 스승의 마음과 뜻을 알지 못했고, 스승의 세계를 알지 못했다. 스승께서 전파하고 가르치신 하나님나라의 복음을 알지 못했다. 예수님과 제자들 사이에는 도저히 건널 수 없는 깊고 넓은 강이 가로놓여 있었다.
바로 이것이 마가가 전하는 예수님과 제자들에 대한 놀라운 진실이다.

 

마가는 예수님이 뽑아 세운 열 두 제자들의 처절한 실패를 매우 정직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렇다면 마가는 왜 이 사실을 부각시킨 것일까? 뭘 말하기 위해서였을까?
아마도 예수님을 안다고 하는 것이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라는 걸 밝히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사실 예수님을 안다는 것, 예수님의 세계를 안다는 것,
예수님이 증거한 하나님나라의 복음을 안다는 것은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예수님의 세계는 인간적으로 수많은 가르침을 듣고, 수많은 사건을 목격했다고 해서 깨닫고 이해할 수 있는 세계가 아니니까. 종교적 차원의 교육으로 파악할 수 있는 세계가 아니니까.
교육으로는 다가갈 수 없는 세계니까.
하나님의 영으로가 아니면 도저히 알 수 없는 세계가 바로 예수님의 세계요 말씀의 세계이니까.
그렇다. 하나님나라의 세계는 성령을 받기 전까지 제자들에게 닫힌 세계였다.
안 것 같아 보이지만 사실은 한없이 낯선 세게였다.
들어도 듣지 못하고, 보아도 보지 못하는 세계였다.

이 사실을 통해서 우리는 또 다른 사실을 예감할 수 있다.
우리들도 그때의 제자들처럼 들어도 듣지 못하고, 보아도 보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제자들이 비록 몸으로는 예수님을 따르고 동고동락했지만 마음으로는 전혀 다른 세계를 살았던 것처럼, 우리들도 여전히 몸으로는 교회 안에 있지만 마음으로는 예수와 전혀 다른 세계를 살 수 있다는 것을 충분히 예상할 수 있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과 교회들을 보라.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진심으로 예수님의 세계를 꿈꾸며 달려가고 있다.
하지만 그것이 진정 예수님의 세계일까?
어쩌면 예수님과 전혀 다른 세계를 예수님의 세계라고 착각하고 있는 건 아닐까?
제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아마도 그럴 것이다.
교회는 그리스도인들을 가르치고 훈련하기 위해 열과 성을 다하고 있다.
참된 그리스도의 군사로 세우기 위해 분투하고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여전히 예수님의 세계에 눈 뜬 것 같지가 않다.
성령보다는 교회 제도와 관습이 교회를 지배하고 있고, 사람의 의지와 종교적 동기가 교회 안에 더 많이 작용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교회가 진정으로 예수님의 세계를 알고, 하나님나라를 향해 달려가고 있다고 신뢰하고 싶지만 주님 앞에 선 양심이 그렇지 않다고 소리를 지른다. 최후의 순간까지 실패의 길을 갔던 제자들처럼 교회와 많은 그리스도인들도 실패의 길을 가고 있다고 생각된다.
아니, 실패의 길을 갈 수밖에 없다고 말하는 것이 옳을지도 모른다.
예수님 당시의 유대교가 하나님의 율법을 훼손하고,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을 가로막고, 하나님이 보내신 분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십자가에 못 박은 것처럼 오늘의 교회도 역시 예수님의 가르침을 훼손하고,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나라를 향해 가는 것을 가로막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진정으로 예수님의 세계를 알고 싶어 하고, 하나님나라의 삶을 살고자 하는 자들에게는 교회가 걸림돌이 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교회 안에 오래 머물수록 오히려 진리의 생수를 먹지 못해 영적인 갈급함이 깊어지는지도 모른다.

아니다. 그것은 이미 현실이 되었다.
교회는 이미 어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걸림돌이 되었다. 영적인 가시가 되었다.
교회 안에는 예수님의 세계에 속하지 않은 것을 강요하고 주입시키는 것 때문에 슬퍼하고 아파하는 자들이 많다. 교회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구원의 해방을 기뻐하고, 하나님나라의 삶을 경축하며 배우기보다는 견뎌내고 있는 자들이 많다.
물론 낑낑대면서도 마지막 힘을 쏟아 충성하는 자들도 있다.
종교적인 열심에 뒤처지는 게 싫어 교회 일에 앞장서는 자들도 있고,
구원의 해방을 기뻐하고 자유의 삶을 노래하기보다는 차라리 교회의 인정을 받는 길을 선택하는 자들도 많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예수님의 세계와는 상관이 없는 일들이다.

 

그렇다면 다시 한 번 물어보자.
무엇 때문에 교회가 이 지경이 됐을까?
신자의 어머니라는 교회가 왜 그리스도인에게마저 짐이 되어버렸을까?
그것은 교회가 지나치게 자기 목소리를 내기 때문이다.
예수님으로부터 하나님나라의 존재 양식을 배우기보다는 세상으로부터 생존 본능을 배우고, 교회 성장을 위해 세상으로부터 기업 확장의 지혜를 배우는데 혈안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교회는 예수님처럼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죽기 위해 존재해야 하는 유일한 기관이다.
그런데 교회는 항상 살겠다고 발버둥치고 있다.
교회가 부흥하고 성장하는 길이 예수님의 길이라고 강변하며 오로지 그 길만을 질주하고 있다.
세상을 내 품에 달라고 기도하는 소리가 교회 안에 진동한다.
그러나 그런 외침은 예수의 소리, 성령의 소리가 아니다.
그건 세상의 소리, 종교의 소리, 거짓의 소리지 하늘의 소리가 아니다.
그런 소리는 종교인들에게는 양식이 될는지 모르나 예수님의 세계와 예수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고 싶은 사람에게는 영혼의 양식이 되지 못한다.
예수님 당시의 제사장이나 율법학자들의 외침이 유대인들의 영적인 양식이 되지 못했던 것처럼 오늘날 교회의 외침 또한 참 예수의 사람들에게 영적인 양식이 되지 못한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
교회를 없애기라도 해야 할까? 그럴 수는 없다.
교회를 없애는 것은 주님이 기뻐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전혀 불가능한 일이다.
교회는 하나님나라를 위한 지상의 전초기지인데 어떻게 없앨 수 있겠는가.
교회는 폐기처분해야 할 대상이 아니다.
교회를 없애는 것은 길이 될 수 없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
교회가 교회로 회복될 수 있는 길은 없는 것일까?
길이 없는 건 아니지만 현실적으로는 길이 없다고 할 수밖에 없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교회는 죽기 위해 존재하는 기관이다.
교회의 존재 양식은 죽음 외에는 없다. 하나님나라를 위해 죽는 것만이 교회가 살 길이다.
십자가는 예수님에게만 해당되는 진리로 끝나서는 안 된다.
주님의 몸인 교회에도 똑같이 적용돼야 하는 진리이다.
그런데 교회는 살겠다고 발버둥치고 있다.
땅끝까지 복음을 전파해서 세계 위에 우뚝 서겠다고 기염을 토하고 있다.
끝없이 성장하겠다며 유전자 변형까지 불사하고 있다.
그래서 교회 안에는 예수의 유전자가 없다.
예수님과는 정반대되는 양식으로 존재하는 이상한 교회로 변질되고 말았다.
그러기 때문에 교회를 세우기 위해서는 먼저 교회 안에 유전자 변형을 일으키는 세포들을 제거해야 한다. 교회를 암 덩어리로 만드는 끝없는 성장 욕구, 무지, 사역 중독, 성도들의 성공 욕망을 채워주고자 종교적 기만, 목회 성공을 향한 인간적 욕망 등등을 제거해야 한다. 그래야만 예수의 유전자를 살려낼 수 있다.

그리고 동시에 좋은 먹거리를 먹어야 한다.
어떤 먹거리를 먹느냐에 따라 몸의 세포가 달라지듯이 교회도 어떤 먹거리를 먹느냐가 교회의 건강을 좌우한다. 교회는 마땅히 하나님의 말씀을 먹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먹어야 교회로서의 건강성을 유지할 수 있다.
그런데 세상의 가치관과 자본주의 사상에 물든 말씀을 먹고 있다.
이미 유전자 변형이 일어난 말씀을 먹고 있다.
그러니 어떻게 교회다운 교회로 설 수 있겠는가?
살겠다고 저렇게 발버둥을 쳐대고 있고, 유전자 변형이 일어난 말씀을 먹이고 있는데 무슨 수로 교회의 교회됨을 회복할 수 있겠는가? 어떻게 예수의 유전자를 살려낼 수 있겠는가?

당신은 주님의 제자들이 실패한 것을 보면서 어떤 생각을 하는가?
나는 넘어진 제자들을 보면서 교회의 실패를 예감한다.
물론 지금은 성령강림 이후 시대이기 때문에 성령 강림 이전의 제자들의 실패를 곧바로 그리스도인들에게 적용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교회의 실패를 예감한다.
마가가 제자들의 실패를 일관되게 기술한 것도 어쩌면 교회의 실패를 예감하라고 던진 메시지가 아닐까. 또한 복음의 세계 ∙ 예수의 세계는 교육이나 경험이나 권능의 체험이나 인간적 자질을 통해 파악할 수 있는 세계가 아니라는 것을 일깨워주기 위한 게 아닐까.

 

마가복음을 마치며
나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부족함이 없으셨던 예수님과,
예수님을 이해하지 못한 채 모든 것을 버리고 열심히 따랐던 제자들의 실패한 모습을 떠올린다.
그리고 그동안 예수님의 뜻이라며 휘둘렀던 모든 말들과 행동들이 정말 예수님의 세계에 부합하는 것이었을까를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자문해본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을 안다고 확신하고 있지만 사실은 그때의 제자들이나 유대인처럼 스스로의 착각 내지는 집단적인 착각에 빠져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의문과 함께.
동시에 예수님을 알아간다고 생각될수록 예수의 몸인 교회가 낯설어지는 것 때문에 마음이 무겁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