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행인지 불행인지 나는 지금껏 살아오면서 생존의 위협을 느끼거나,
생존을 위해 몸부림쳐야만 하는 절박한 상황에 처해 본 경험이 없다.
물론 넉넉하게 살아 본 적도 없지만 생존을 걱정해야 하는 지경으로까지 내몰린 적도 없다.
그래서일까. 생존을 위해 온 삶을 투신하는 사람을 보면
미안하고 송구스러운 마음이 들면서도 은근히 홀대하는 마음이 있었다.
생존을 위해 땀을 흘리는 것을 훌륭한 태도라고 여기면서도
단지 생존하는 것에 대해서는 호의적이지 않았다. 생활과 삶을 엄격하게 구별했다.
생활이 단지 생존을 위한 것이라면 삶은 생존을 넘어 문화적 차원 ∙ 사회적 차원 ∙ 영적 차원으로까지 확대된 것이고, 자신이 누구인지를 고민하며 자기로 존재하기를 힘쓰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이런 구별이 틀린 것은 아니다.

 

하지만 중국의 소설가 왕멍의 자전적 에세이 [나는 학생이다]를 읽으면서
나는 ‘생존’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하게 되었다.
그는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뭔가?’라는 질문에 이렇게 대답한다.
“하나는 ‘생존’이요, 다른 하나는 ‘배움’이다.”
나는 이 짤막한 한 토막의 문장을 읽고 큰 충격을 받았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 그것도 첫 번째로 꼽히는 것이 ‘생존’이라니?
반백년을 살아오면서 단 한 번도 그렇게 생각해 본 적이 없던 나는
마치 해머로 머리통을 두들겨 맞은 것 같은 충격에 휩싸였다.
왕멍은 계속 말했다.
“사람들의 생존 조건과 그 가치에 대해 무관심한 이론들은
모두 구름 한 귀퉁이처럼 비어있는 것이다.
무릇 생존을 위해, 삶을 영위하기 위해 종사하는 사업, 노동, 사유,
그리고 이에 바친 매일매일, 한 달 한 달, 일 년 일 년은 모두 값지고 달콤하며 건강한 것이다.
적어도 당신의 인생은 정당하고 정상적이며 올바른 것이다.
비록 기쁨이 생존 자체에 국한된 것은 아니지만,
삶의 기쁨은 생존에 속하는 것이지 결코 생존 밖에서 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왕멍은 지금껏 내가 보지 못하고 외면해왔던 소중한 진실 - 생명의 일차적인 본능과 책임은 생존하는 것이며, 생존보다 더 위대하고 엄중한 책임이 없다는 진실을 보게 해주었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하고 첫째가는 의무는 생존에의 의무라는 명백한 진실을 보게 해주었다.
그렇다. 생존에의 책임을 방기하면서 삶 운운하고,
철학과 문화를 논한다는 것은 허망한 사상누각이며 책임유기다.
더욱이 생명은 내가 창조한 것도 아니요 선택한 것도 아니지 않은가.
생명은 조물주로부터 받은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그 생명을 사는 것은 선택이 아니라 의무다.

물론 생명을 산다는 것은 단지 생존하는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생명을 제대로 살기 위해서는 다차원적인 여러 요소들(문화적 차원 ∙ 사회적 차원 ∙ 영적 차원)이 함께 어우러져야한다.
하지만 생존의 터가 없이는 삶의 그 무엇도 건설할 수 없기에 산다는 것의 첫째 요소는 생존임이 분명하다. 생명이 생존을 위해 분투하는 것은 정말 아름답고 장엄한 일이다.
구걸하는 것조차도 어쩌면 생명의 권리일 수 있고, 생존을 위한 마지막 몸부림일 수 있다.
위대한 생명의 행위일 수 있다.
물론 경우에 따라 다르겠지만 암튼, 구걸하는 것까지도 위대한 생명의 행위임을 부정해서는 안 된다.

 

노인, 부랑자, 알코올 중독자들을 돌보는 ‘꽃동네’의 주역인 최귀동 할아버지는
걸인으로 살면서 다른 걸인들을 돌보신 분으로 유명하다.
자기보다 몸이 약하고 나이 많은 걸인들을 돌보기 위해
매일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음식과 필요한 것들을 구해 보살피기를 무려 30여년.
할아버지는 구걸하면서도
“먹다 남은 음식이나 쓰다 남은 물건은 고맙게 받겠지만, 그 외에는 받지 않겠다.”는
원칙을 지킨 것으로도 유명하다.
언젠가 오웅진 신부가 할아버지를 만나 물었다고 한다.
“할아버지, 자기 몸 하나 제대로 가누기 힘든 판에 어찌 그 많은 사람들을 돌보십니까?”
그러자 할아버지는 “사람은 남을 도우며 살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그 도움은 여유가 있어야 할 수 있는 것이겠지만, 여유는 빌어먹을 수만 있어도 생기는 법입니다.”라고 말씀하더란다.
할아버지의 말씀을 듣고 오웅진 신부는 ‘얻어먹을 수 있는 힘만 있어도 주님의 은총’이라고 말했다. 깊이 생각해 보면 진실로 그렇다. 얻어먹을 수 있는 힘만 있어도 주님의 은총이다.
주께서 ‘하나의 생명이 온 세상보다 귀하다’고 했듯이 숨을 쉬는 것 보다 더 큰 은총은 없다.
살아있는 것보다 더 큰 축복은 없다.

 

미국의 사회학자요 사회주의자였던 스콧 니어링은 내가 만난 소중한 사람 중에 한 사람이다.
100년이라는 짧지 않은 생을 완전하고 조화롭게 살기 위해 배우고, 가르치고, 노동하며 성실하게 산 그는 주어진 삶을 책임 있게 산 대표적인 사람이다.
위대한 인간의 전형이라고 말해도 부족함이 없을 만큼 훌륭한 사람이다.
그런 그가 100세 되던 해에 자신의 생이 다한 걸 알고 스스로 곡기를 끊어 죽음으로 나아갔다.
그는 스스로의 힘으로 생존할 수 없는 삶,
더 이상 아무 일도 할 수 없는 ‘단순한 생존’을 용납할 수 없었다.
아무 것도 생산할 수 없는 ‘소비적 생존’을 견딜 수 없었다.
‘소비적 생존’에 매달리기보다는 차라리 인간으로서의 자존심과 품격을 잃지 않고 죽기를 원했다. 그리하여 아무 일도 할 수 없게 된 생명을 스스로 끊었다.

하지만 그것만이 최선일까?
스콧의 태도가 생명과 생존의 위엄을 짓밟은 건 아닐까?
오늘 우리는 생명을 하찮게 여기는 시대를 살고 있다.
주님은 하나의 생명이 온 천하보다 귀하다고 했는데,
우리는 ‘소비적 생존’을 견디지 못하고 존중하지 못한다.
함께 부대끼며 살던 이웃이 갑자기 생명을 끊었다는 소식을 종종 듣는다.
경제적인 어려움을 견디지 못하고 자살하는 가장, 우울증에 시달리다가 자살하는 사람,
지극한 소외를 견디지 못해 자살하는 노인, 성적을 비관해 자살하는 학생, 등등 많은 이웃들이 목숨을 끊고 있다. 왜 그럴까? 과도한 성과주의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다.
과도한 성과주의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생산성이 없는 ‘소비적 생존’을 무시하고 혐오하며 짐스러워하는 것이다.

물론 소비적 생존은 본인이나 가족뿐 아니라 국가에도 무거운 짐이다.
하지만 짐이 된다고 해서 그 생명의 가치가 가벼워지는 것일까?
생존하는 것 외에는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할지라도
생명은 여전히 위대하고 가치 있어야 하는 것 아닐까?
그것이 진정으로 생명을 경외하는 태도 아닐까?
그렇다. 단순한 생존 ∙ 소비적 생존이라고 해서 그 생명을 혐오해서는 안 된다.
전신이 마비되어 스스로의 힘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지만 한 가닥 생존의 끝을 붙잡고 시름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TV로 볼 때가 있다. 그럴 때면 말로 다할 수 없는 감동을 받는다.
그들의 이야기처럼 감동적인 휴먼드라마가 없다.
굴곡진 인생길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달려오신 노인들을 볼 때도,
그분들의 인생이 너무 위대해 보여
가슴에 빛나는 훈장이라고 달아드리고 싶은 충동을 느낄 때가 있다.
생명이 소중한 만큼 생존도 소중하기에. 살아있다는 것 자체가 위대한 은총이요 축복이기에.
그 생존이 비록 소비적 생존에 그친다 할지라도, 고통에 몸서리쳐야 하는 생존일지라도, 살아있는 것은 여전히 축복이고 은총이기에.

그러므로 어떤 상황에서라도 살기를 멈추어서는 안 된다.
먹고 살기가 어려울지라도, 모든 사람으로부터 짓이김을 당할지라도,
능력이 부족할지라도, 배신을 당했을지라도, 살아갈 희망의 등대가 꺼졌다고 생각될지라도,
고통에 몸서리쳐야 하는 생존일지라도, 살기를 멈추어서는 안 된다.
살아야 한다. 최후의 순간까지 살아야 한다. 죽을 힘을 다해 살아야 한다.
살기를 멈추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비겁하고, 가장 반생명적이고, 가장 생명 모독적인 행위다.

물론 사람은 생존 이상의 존재다. 하지만 생존보다 더 중요하고 위대한 일이 어디 또 있겠는가?
무릇 생존은 생명의 의무요 특권이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살아있음을 노래하자.
살아있음이 지극한 은총임을 알고 경축하자.
창조주께서는 세상의 아름다움을 위해 ‘살아있음’으로 가득 채우셨음을 기억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