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랫동안 만성 간염을 앓아오던 나는

2004년 간경변 판정을 받은 후부터 매년 빼놓지 않고 식도 정맥류 출혈로 인해 병원을 드나들었다.

식도정맥류는 간경변 환자의 전형적인 합병증 가운데 하나이다.

식도 쪽으로 흐르는 정맥의 혈관이 압력을 견디지 못해 부풀면서 터지는 병증인데,

일단 혈관이 터져 출혈이 일어나면 목에 내시경을 쑤셔 넣고 터진 혈관을 찾아 묶는 시술을 해야 한다.

 

2009년도 예외가 아니었다.

3월까지는 비교적 건강하게 생활해왔는데 3월 마지막 날 주일 아침에 또다시 식도 정맥류 출혈 증상이 나타났다.

몸에 기운이 빠지면서 속이 매스꺼운 게 전형적인 출혈 증상이 분명했다.

순간 두려움이 엄습했다. 또다시 겪어야 할 일들이 영화 필름처럼 지나갔다.

끔찍하고 무서운 생각이 나를 집어삼켰다.

그렇지만 도망칠 수도 없고, 도망쳐서도 안 되는 일인지라 아침 첫술을 뜨려던 숟가락을 내려놓고

아내와 함께 황급히 병원 응급실로 향했다. 아니나 다를까 식도 정맥류 출혈이었다.

다행히 심하진 않았다.

하지만 목에 내시경을 쑤셔 넣고 터진 혈관을 묶는 시술을 피할 수는 없었다.

시술을 마치고 언제나처럼 금식하며 회복하고 있을 때 큰 형님께서 이식할 것을 권고하셨다.

향상교회 정주채 목사님께서도 이식을 하는 것 외에는 길이 없을 것 같다며 이식을 권유하셨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정목사님의 말씀이 하나님의 음성처럼 들렸다.

 

사실 그동안 간이식을 생각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2년 전 의사로부터 이식을 권유받으면서부터 고민을 했었다.

아들 다운이도 자기가 간을 기증할테니 이식하라고 기회 있을 때마다 치근댔다.

하지만 쉽게 결정할 수가 없었다.

아무래도 남의 간보다는 자기 간으로 마지막까지 버티는 것이 최선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여, 버틸 때까지 버텨보기로 하고 이식에 대한 생각은 접어두고 있었다.

그런데 큰 형님의 권유와 정주채 목사님의 말씀에 생각이 바뀌었다.

특히 정주채 목사님의 말씀이 하나님의 음성처럼 들리고 나서부터는 더 이상의 고민이 사라졌다.

 

이식을 하기로 마음의 결정을 내렸다.

하지만 이식을 결정하고부터 마음속에 수많은 생각과 질문이 생기기 시작했다.

기도가 나오기 시작했다. 그건 수술이 잘되는 게 아니었다.

이식을 결정하고 수술을 하기까지는 한 달여 시간이 있었는데,

그동안 끊임없이 질문하며 기도한 것은 ‘왜 이식까지 해가며 생명을 연장하려고 하는가?’ 하는 거였다.

‘나는 왜 더 살기 위해 몸부림치는가? 사랑하는 아들의 간을 이식받으면서까지 살려고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아들의 몸에 칼을 대는 것뿐만 아니라 자칫 잘못하면 생명에 위협을 가할 수도 있는데,

그렇게 하면서까지 살아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

이건 정말이지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물음이었다.

반드시 물어야 할 질문이었고, 들어야 할 대답이었다.

 

하나님의 사람 다윗은

"주님께서 나에게 한 뼘 길이밖에 안 되는 날을 주셨으니, 내 인생이 주님 앞에서는 없는 것이나 같습니다.

진실로 모든 것은 헛되고, 인생의 전성기조차도 한낱 입김에 지나지 않습니다.

걸어다닌다고는 하지만 그 한 평생이 실로 한 오라기 그림자일 뿐,

재산을 늘리는 일조차도 다 허사입니다.”(시39:5-6)라고

고백했다. 그렇다. 인생이란 입김처럼 가벼운 것이다.

잠시 있다가 사라지는 아침 안개와 같다.

그런데 그처럼 가벼운 인생을 위해 장기 이식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

정말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 것일까?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생명이 소중해서일까? 삶이 소중해서일까?

죽음이 두려워서일까? 생에의 본능적인 의지 때문일까?

도대체 삶이 무엇이고 생명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값비싼 대가를 지불하면서까지 살기 위해 발버둥을 치는 걸까?

삶은 무엇이며 죽음은 무엇인가?

끝도 없는 물음들이 나를 사로잡았다.

하지만 묻고 또 물어봐도 알 수가 없었다.

묻고 있는 나를 납득시킬 만한 대답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렇다고 물러설 수도 없었다.

아들의 간을 이식하기로 결정한 이상 나를 납득시킬만한 논리를 생각해내야 했다.

간 이식을 하면서까지 구차하게 생명을 연장하려는 나의 처연함을 포장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서든지 이식의 정당성을 찾아내야 했다.

이식의 정당성을 찾아내지 못하면 내 알량한 자존심이 무너져 내릴 테니까.

 

다행히 궁여지책을 찾아낼 수 있었다.

그것은 ‘생의 의지’였다.

니체는 인간의 원초적 본능을 일컬어 ‘권력 의지’라고 했다.

하지만 ‘권력 의지’보다는 ‘생의 의지’가 더 강하고 본질적인 인간의 의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생의 의지’는 인간 뿐 아니라 모든 생명에게 내재되어 있는 최고의 본능이라고.

또 ‘생의 의지’가 있기 때문에 지구는 오늘까지도 수많은 위협과 짓밟힘 속에서도 생명을 이어올 수 있었고,

생명으로 충만할 수 있는 것이라고.

아니 어쩌면 ‘생의 의지’는 이 세상을 생명으로 가득 채우기 위한 하나님의 의지일 수도 있다고.

‘생의 의지’는 생명의 이기적 욕망이나 자기보호 본능이기 이전에

생명을 낳고 번성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의지’라고.

그러기 때문에 ‘생의 의지’를 이기적인 욕망이라고 쉽게 정죄할 수는 없다고.

 

이렇게 정리를 하고 보니 왠지 그럴듯해 보였다.

억지 주장은 아니라는 생각, 성경에 빗대어 보아도 어느 정도 일리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여, 나는 ‘내가 죽음의 위기 앞에서 ‘생의 의지’를 불태우는 것이

그리 억지스러운 짓은 아니다’고 스스로를 변명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또 다른 의문이 나를 공격하는 것이었다.

간이식을 통해 생명을 연장하려는 것이 단순히 ‘생의 의지’이기만 한 것일까?

혹 ‘생명에의 집착’이 아닐까?

아들의 소중한 간을 취하면서까지 살기 위해 몸부림치는 것은 ‘생의 의지’를 넘어 ‘생명에의 집착’이 아닐까?

현재를 넘어서지 못하고 눈앞의 삶에 전전긍긍하는 속물근성이 아닐까?

허락되지 않은 생명을 탐하는 것이 아닐까?

허락되지 않은 생명을 살아보겠다는 헛된 욕망이 아닐까?

나는 왜 죽음을 회피하기 위해 발버둥을 치는가?

왜 생명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의 손에 겸손히 맡기지 못하고 죽음의 시간을 늦추려고 하는가?

죽음이 가까이 온 것을 환영하고, 죽음을 의연하게 맞이하는 것이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과 피조물다움에 부합되는 것 아닐까?

나는 왜 죽음을 의연하게 받아들이지 못하고 구차하게 장기 이식을 하려 하는가?

 

솔직히 나는 이런 질문들 앞에서 당당할 수 없었다.

‘그건 생명에의 집착’이라고 아우성치는 비난의 소리에 대해 ‘그렇지 않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없었다.

하지만 내 마음 한 편에서는 또 다른 주장이 소리를 내고 있었다.

생의 의지는 단순히 사람의 의지가 아니라 생명의 창조자이신 하나님의 의지라고.

때문에 모든 생명은 생명이 다하는 날까지 생명의 의지를 가지고 최선을 다해 살아야 한다고.

살기 위해 발버둥치는 것은 결코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고.

살기 위해 발버둥치는 것은 생명의 거룩한 의무요 물러설 수 없는 책임이라고.

 

 

암튼, 나는 죽음의 현실 앞에서 생의 의지를 더 또렷이 인식할 수 있었다.

몸의 모든 세포들이 죽지 않기 위해 일제히 긴장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왜 살기위해 버둥대는지를 충분하게 설명하지 못한 채 살겠다고 버둥대며 수술대에 올랐다.